1. 우리는 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가? 늘 생각해야
한다. 신앙이 매너리즘에 빠지면 무기력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생활이 무미 건조해지고 만다. 밋밋하고
재미없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과 접촉이 없는 거다.
현재의 기독교가 이런 모습을 보이므로 각종 이단이
실상이란 구호를 걸고 판을 치고 있어도 힘을 못쓴다.
2. 인간은 항상 나태해지는 속성이 있다.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면 이와 같은 인간의 무기력
증세를 어떻게 치료하시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신앙은 곧 싸움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그래서 씨름이라고 말한다(엡6:12) 넘어지면 지게 된다.
지금 살지 못하면 죽은 믿음이 된다. 야고보서의 목적은
산 믿음이라면 행함으로 증명된다는 이야기이다(약2:17)
이신득의만 강조하다 지푸라기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명력은 현실을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다.
기독교인이라는 명분만 가지고 있는 신자들,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인식들은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로마 황제의 10대 박해가
기독교인들의 진정한 자부심을 일깨워줬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신사참배 같은 것이다. 그로 인해 한국
기독교의 자랑이 많다. 한국기독교의 자부심이 된다.
3. 지금 우리 한국의 기독교는 보편화 또는 조직화
되어져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이와 같은 것이
전혀 없다. 항상 긴장하여 불안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다이내믹하고 역동적이다. 항상 하나님께 붙들려 있다.
창12장에서 22장의 과정 곧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보면 꼭 부모처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간섭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섭리가 현재에 계속되고
있으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간섭은 그 분의 사랑이다. ‘너는 내 것’이라는 그 분의
의지를 나타내는 사인이다. 실존적인 믿음의 의식이다.
4. 성경에서 가장 무서운 단어는 ‘내어버려 두심’이다
심판, 저주, 멸망보다 더 무서운 말이다. 이를 상실한
마음대로 내 버려두신다(롬1:28)고 한다. 응급 자동차가
바쁘게 다녀도 그건 지금 나의 일이 아닌 것과 같다.
내가 안 다치면 그만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은 선택과 섭리의 하나님이시다. 그 섭리는
말씀으로 임하신다(롬10장) 말씀이 인생의 사건 속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이란 공통된 경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적용은 개인적이다. 여기에서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이 갈라진다. 산 믿음의 그리스도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없으면 불편하다. 말씀에 찔리고, 안타까워하고,
고통스러운 게 정상이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는 교리나
교훈으로 공통적인 신앙의 인식에 갇혀진 것 같다.
그 인식범위를 벗어나면 이단 운운하여 입을 봉한다.
5.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다(마22:32)
의학적으로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는 사지와
백체를 가지고 있으나 심장이 뛰느냐 멈추었느냐이다.
죽은 믿음은 신념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꼭 마르다의
믿음과 같다. 장차 될 일만 있고 현재가 없다. 이와 같은
인식이 만연되어 있다. 그러나 산 믿음은 현재 역사하고
있다. 현재 천국 곧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린다(롬14:17)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그의 자손을 말씀으로 약속하신다. 그 다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을 때에는 어떻게 했는가? 아브라함은 이미
말씀이 와서 그의 믿음이 되었으므로 당연히 되어진
것으로 무덤덤했다.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은 실제적인
믿음이 아니다. 확인 뿐이다. 말씀이 들어와 아브라함
처럼 그대로 될 것으로 보고 누려야 한다(히11:1-2절)
이건 말씀이 주는 비전이다. 이미 보이는 것을 누가
‘주여 제가 믿습니다 될 줄로 믿습니다’ 하겠는가?
6.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그 약속을 실현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이다. 창21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얻었다. 그런데 정작 아브라함은
무덤덤하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창21:3-4)
아브라함에게는 일상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사라만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6-7절) 산 믿음이란 보이는
것은 그림자요 말씀에 의한 비전을 실체로 보는 거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쳐라 해도
별로 충격이 없다. 주셨으니 알아서 하시겠지 이다.
7.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그 안에서 상황이
이루어지면 예언이 나온다. 이런 것이 있는 사람은
신앙의 회의에 빠져들 수 없다. 이사야는 주전 700년
전에 메시아에 대해 생생하게 예언하느라고 혼자
바쁘게 살았다. 건강한 사람은 아픈 사람을 보면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한다. 살아있는 믿음의 사람은 죽은
믿음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산 자의 하나님은 변함없이
생명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접촉할 수도 있고,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고전2장의 신령한 사람이며 곧 성령의 사람들이다.
성령의 사람만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산 그리스도인이다.
8.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에 대해서는
끝까지 간섭하신다.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영향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손오공이 뛰어도 삼장법사 손 위에 있다는 말이 있다.
창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나안에 이끌고
오신다. 그 다음에 기근이 온다. 왜 그럴까? 만약
풍년이 오면 아브라함은 신앙의 미로에 빠지고 만다.
현실에 안주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는 목적을 잃고
말았을 거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건을 일으키신다.
기근이 오므로 애굽으로 내려간다. 거기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체험한다. 그 당시 누구든지 바로의
아내가 되는 것은 영광이었다. 그 아내 사라는 예뻤다.
만약 바로의 아내가 되는 것을 방해하면 죽임당하고
만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키우신다.
첫째, 하나님은 애굽에서도 역사 하시는구나. 그 당시의
신 개념은 지역적이었다. 우주적이 아니었다. 가나안에는
가나안의 신이 있고 애굽에는 애굽의 신이 있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그 거대한 나라의 왕 바로
에게도 통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 다음부터 아브라함의
믿음의 통은 커지기 시작한다. 13장은 아브라함의
인간성을 보여 준다. 그는 양보자였다. 조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
사실 잘못하면 큰일 날 사건이다. 다행히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택했으니 망정이지 약속의 땅을 잃을 뻔했다.
9. 창14장에서는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에게서 조카 롯을
구출하는 사건이 나온다. 드디어 멜기세덱을 만난다.
떡과 포도주를 받고 십일조를 드린다. 창15장의 사건은
12장의 반복이지만 비로소 아브라함은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어 의를 얻는다. 지금도 성령 세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떡과 잔의 성찬에
참예하는 자에게만 말씀이 적응이 되어 ‘예’가 된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그의
신앙의 분수령이다. 주님도 그 사실을 증언하신다(요8:56)
10.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 생활 속에 개입하신다.
생활의 믿음을 강조하시며 구체적으로 간섭하신다.
동행하신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들의 간증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의 사랑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작품이 된 장인들이 모이는 곳이다.
살아있는 믿음은 반드시 일을 하고 행함을 남긴다.
그래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 얻는 것은 나의 기쁨, 바치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다. 신앙은 자기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그리스도를 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다. 모세의 40세 때와
80세 때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다. 힘을 완전히 뺐다.
이삭이라는 이름은 ‘웃다’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다.
창세기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비웃다, 조롱하다’는
뜻의 분위기이다. 소돔성의 사위도 소돔의 심판을
농담으로 알았다. 그리고 이스마엘도 이삭을 희롱했다.
사라가 천사의 말을 들을 때에도 웃었다. 이는 분명히
비웃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으면 이렇게
비웃음이 나오게 된다. 지금 교회 밖에서 빙빙 도는
이들이 얼마나 교회를 비웃고 있는지 그 수를 모른다.
그러나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면 아브라함에게 이삭처럼
실상이 되어 보고 즐거워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므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그
아브라함의 복을 주셨다(갈3:13-14) 살아 있는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아 아브라함의 복을 저와 여러분이
평생토록 누리다가 주 앞에 설수 있기를 바란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