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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고산악부 OB 산행은 이번이 3번째다. 2007년 10월에 인수봉 암벽등반을 했고 2년 행사가 중단되었다가, 2010년에 3기가 등장함으로써 다시 시작되어 2010년 경주 남산 황금종주, 그리고 이번에 경주 함월산 등반으로 이어진다. 2010년부터는 OB산행이 YB까지 포함시키자고 결의되어 2010년 경주 남산 황금종주에는 OB-YB합동산행으로 발전하였다. 경주고산악부는 매년 추석 전날 고향을 찾았을 때 경주에서 모임을 갖고 그 자리에서 그해 OB-YB합동산행에 대해서 의논하는 것으로 정했다. 그리고 2011년 11월에는 경주 함월산에서 합동산행을 시작한다.
2011.11.20일 경주고 주차장에 모인 경주고산악부 OB-YB들. OB회장인 2기 고현무(경주중앙종묘사 사장)가 YB회장인 14기 권기원(육사 진학 예정)에게 금일봉을 전달하고 있다.
함월산 성황재에 내리는 경주고산악부 OB-YB들.
함월산은 오래전에 경주의 강대춘, 박광태, 故 이종률씨가 일단의 멤버들을 이끌고 기림사 안의 깊숙한 도통골로 치고 올라가 탐색한 이래로 몇번의 개척을 더 거쳐 산의 면모를 파악한 산이다. 그 전에는 부산 국제신문사에서 탐사했으나 엉뚱한 곳에 정상표시를 하고 난 뒤에는 다시 관심이 멀어진 산이었으나 故 이종률씨가 개인적으로 몇번 왔다가 정상부 능선에 있는 삼각점(585m)을 정상이라고 판단했지만 그 뒤 우리들의 재 탐색에서 능선을 되돌아 내려오는 길에 주 능선에서 약간 뒤로 밀린 곳에 또 다른 봉우리를 발견하고 올랐습니다. 그 곳의 높이는 609m......우리들은, 주 능선에서 약간 비켜섰지만 이 곳도 함월산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그 곳을 정상으로 정하고 지금까지 연례행사로 가을에 함월산을 찾고 있다. 더우기 수년전에 운명을 달리한 산사나이 故 이종률씨의 추모비를 그가 생전에 무척 좋아했던 함월산 정상에 모셔놓아 우리들에게는 더더욱 의미있는 산이 되었다. 자! 함월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자.
성황재에서 함월산 오르는 길이다. 경주고산악부OB-YB라고 하지만 실제 OB는 2, 3기들이고 YB는 14, 15, 16기들이다. 함월산(609m)은 경주와 포항의 경계지가 되는 형남기맥(형산강 남쪽 산줄기: 일명 토함기맥, 호미기맥)의 산줄기가 명찰 기림사 뒤에 우뚝 세운 산이다. 형남기맥은 이 함월산에서 명찰 기림사를 우측에 두고 U자로 돌면서 기림사를 에워싸고 지나가다가 성황재에서 장기곶(호랑이꼬리)로 나아간다. 우리는 산행 들머리를 형남기맥 성황재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들머리는 철문과 장벽으로 막혀있어 우리는 간신히 옆으로 돌아 산으로 들어간다. 이 철 장벽을 설치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사유지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개인의 땅이니 들어가지 말라는 얘기같다. 허! 미친 놈이다. 입구가 자기 땅이라고 들어가지 말라면 산 속에는 어떻게 들어가라는 말인가? 조선 사람 고집스러운 사욕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예다. 실제로 조금 들어가다 보니 어느 노인이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여기를 어디로 들어왔느냐고 물었다. 담 넘어 왔다면 잔소리할 터여서 저 밑 휴게소에서 올라왔다고 했더니 시부렁 거리면서 고개를 돌린다. 딴 소리했다가는 내가 한바탕 퍼부을 참이었다. "이 씨부랄 놈의 영감탱이야! 이 산이 다 너 거냐? 입구에 자기 땅 좀 있다고 산에 들어가는 것을 막냐?" 고..................
제1헬기장에 도착.
제1헬기장에서는 동해바다가 보인다. 실제 신년 일출 구경 때 토함산이 워낙 복잡하여 여기에서 일출을 본 적이 있다.
함월산을 향하여 경주-포항 시경계를 오르는 팀.
우리가 좀 전에 출발한 성황재가 저 멀리 보인다.
제2헬기장에 도착한다. 빨간 옷은 이례적으로 육상부이면서 산악부에 가입한 1학년 이지한군이다. 200m 실력이 경북에서는 최고 수준이다. 당연히 산행도 늘 앞에 선다.
계속 오르는 산악부원들
시경계에서 포항 방면의 광경이다.
산이 홍수로 매몰되어 낭떠러지가 생긴 지대를 지나가고 있다.
함월산 오르면서 우측 포항 방면으로 보면 멀리 오어사 앞에 있는 오어지가 보인다. 그 왼편이 운제산 줄기이다. 그리고 뒤에 오천과 영일만이 보인다.
정상부 능선에 있는 삼각점. 높이가 585m로 처음에는 이곳을 모두가 함월의 정상이라고 했다. 故 이종률씨는 늘 이곳을 정상으로 고집하기도 했다. 주변에 있는 609봉을 정상으로 지명한 것은 나다.
지도상에 585m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곳을 지난 준, 희라는 호미기맥 종주자는 이곳을 591.4m라고 표기해 놓고 있다. 누가 맞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원칙대로 하면 호미기맥이 아니라 형남기맥이다. 산줄기 이름은 그 산줄기를 나누는 강 이름을 기준으로 정하기 때문이다. 한북정백, 한남정맥, 금남정맥, 금북정맥, 낙동정맥.....이런 식으로..................그러니 형산강 남쪽 산줄기이므로 형남기맥이 맞다. 호미기맥은 포항사람들이 지은 것이고, 토함기맥은 강대춘, 박광태, 이종률이가 지었다. 이 산줄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토함산이기에.............그러나 형남기맥이 맞다. 위의 지맥은 더더욱 틀린다. 대간-정맥-기맥-지맥....이기 때문이다. 갈라져 나온 산줄기를 이르는 것이다.
여기가 정상 609봉이다. 정상 양지 바른 곳에 잠시 쉰다. 저 뒤편이 요새 억새로 유명한 경주 암곡 무장산 지역이다.
故 이종률 추모비 터에서 바라다 보이는 경주 황룡곡. 보기처럼 골이 깊어 늘 수량이 풍부하고 인적이 드물어 물이 깨끗하기로 유명하다. 물론 까치독사도 여기저기 우글거리고 있어 사람들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아마 경주에서 가장 깨끗한 골짜기가 아닐까?
정상 609봉에 이르러 정상에서 황룡곡 방면으로 약간 내려서면 岳友인 故 이종률의 추모비가 있다. 경주고산악부 부지도교사를 했던 이종률씨를 아는 2기들이 술을 따르고 내가 간단하게 제를 지낸다.
내가 경주한뫼산악회 회장을 역임할 때 오대산 소금강계곡 산행 뒤 유명을 달리한 故 이종률씨의 추모비다. 경주 남산 이종률바위(이종률이 개척한 바위)에 부착했으나 어떤 이의 고발로 철거를 한 뒤에 한뫼산악회 사무실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한뫼산악회 은퇴 뒤 새로 만든 장년부 산악회였던 운암요산회의 2007년 11월 함월산행 시에 여기로 가져와 부착했다. 동판은 내가 직접 인천의 어느 공장에 주문 제작했는데 글도 내가 생전의 이종률씨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지었다. 그는 암벽에 남다른 소질을 보여 설악산 용아장성능에서 맹활약을 했는데 그 당시 모두들 그를 다람쥐라고 했다.
이제 하산이다. 하지만 이 도통골로의 하산길은 아무도 모른다. 생전에 이종률도, 또 전문가 박광태도 몰랐던 길이다. 나 만이 아는 나의 길이 이 도통골 하산로이다. 길은 보이지 않고 산세를 보고 더듬어 길을 만들어 나간다.
맨앞이 2기 이정진(경주고 근무), 그 뒤가 OB회장 2기 고현무(경주 중앙종묘사 대표)다.
길을 내니 한줄로 모두들 따라온다. 역시 예전에 내려왔던 흔적은 다 사라지고 없다. 특히 형남기맥 종주자들이 다른 길을 크게 내어 더더욱 헷갈린다. 몇번 수정을 한 끝에 드디어 길을 찾아 내려온다. 이미 길은 사라지고 옛 흔적들만 있다.
30분쯤 내려서니 드디어 도통골의 물이 보인다. 인적이 없어 까치독사가 많기로 유명한 지역이다.
이 물은 그냥 마셔도 된다. 오염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고기도 뽀글뽀글 모여있다. 중택이도 보인다.
내가 가는 길이 길이다. 모두들 부지런히들 따라 와라.
역시 강철사나이 이정진이가 앞에 서서 후배들을 이끈다. 이정진은 고2때 설악산 하계훈련 때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공룡능선을 주파했던 제자다. 경주고 행정실에 근무하지만 든든한 집안을 배경으로 여러가지 사업에 눈을 뜨고 있는 장래가 유망한 젊은이다.
여기가 해마다 우리들이 쉬고 갔던 곳이다. 이 산의 이 골짜기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여기를 '우리들의 장소(A Place in the Sun)'라고 부른다.
이제 먹자. 고기도 잡고..............이번에 졸업하는 14기들. 그들은 근래 열심히 했던 기수이다. 회장 권기원(육사 진학 예정)을 비롯하여 김영민(일본 공대 합격), 김수웅, 홍성권, 한성하, 한석주, 김한별 등이 그들이다.
가져온 음식을 먹는 15,16기들.
11월 함월산 산행의 하이라이트인 도통골 바베큐......우리는 늘 이 가을에 함월산을 하산하는 중 도통골에서 바베큐를 시작한다. 이번에 식재료는 조금만 준비했다. 목포에서 직접 공수해온 살아있는 대하, 굴비 그리고 생삼겹살을 준비했다. 예전에는 5, 6가지에 매운탕까지 준비했었는데 이번에는 조용히 한다. 먹는 것보다 이런 분위기가 좋다. 자연과 호흡하며 지내는 시간이 우리들에게는 늘 부족하다. 이럴 때라도 이 자연을 만끽해야지.
열심히 먹거리를 굽고 있는 OB들. 좌로 부터 유정재(동아제약 생산기획실 근무), 이번 산행의 주무를 맡은 김규환(삼성증권 근무), 이정진이다.
도통골의 늦가을은 이런 모습으로 깊어간다. 이 곳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주변에는 숨어있는 독사들과 물속의 중택이 고기들만 있을 뿐이다. 어느 여름날 첩첩산중에서 멱 감는 것을 욕했듯이 이 것 보고도 또 욕을 할란가? 욕 잘하는 사람들, 실제로는 자기들이 더 더럽게 살면서 남 욕하는 것을 밥 먹듯이 한다. 나는 그것을 잘 안다. 더러운 놈일 수록 남을 더 욕한다는 것을...........
이제 김현우(경주초교 교사), 고현무 회장도 가세했다.
먹으면서 굽자. 바사삭 바사삭! 대하가 맛이 있다.
고현무 회장은 거침없이 맥주를 들이키고...................
이제 주변을 깨긋이 정리하고 떠난다.
아무도 없는 도통골을 내려선다. 이 곳은 길도 없다. 다만 산 지형을 보고 내려올 뿐....함월의 묘미는 그것이다. 아무도 함월을 안다고 하여 따라가서는 안된다. 함월을 아는 사람들은 제가 갔던 길만 알 뿐이다. 나? 나는 함월을 안다. 나는 이곳을 오랫동안 다녔다.
도통마을이 보인다. 지금은 사람들이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몇채의 집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집터와 밭터 등이 보인다.
마을 바로 밑에 있는 도통골 물줄기 중 하나. 이 물이 아마 식수, 생활수였겠지?
도통골도 찬찬히 보면 아름답다.
질러가는 길인, 명찰 기림사 뒷문으로 들어가 함월을 빠져 나온다.
기림사는 경북 경주 양북면 호암리 함월산(含月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신라시대에는 불국사가 오히려 이 기림사의 말사였다지?
643년(선덕여왕 12) 천축국의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 부르던 것을, 뒤에 원효(元曉)가 중창하여 머물면서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기림사란 부처님 생존 때에 세워졌던 인도의 기원정사(祈園精舍)를 뜻한다.
신라 신문왕은 대왕암에 다녀오던 길에 이 절의 서쪽 계곡에서 점심을 들었으며, 고려 말의 각유(覺猷)는 이 절의 주지로 있었다. 그 뒤 1578년(선조 11)에 축선(竺禪)이 중건, 정조 때 경주부윤 김광묵(金光默)이 사재를 희사하여 크게 중수, 1862년(철종 13)에는 대화재, 이듬해 봄에 부윤 송우화 등의 시주로 복원, 1878년(고종 15)의 중수, 1905년에는 혜훈(慧訓)이 다시 중수, 31본산시대에는 월성군 일대를 관장하였으나, 현재는 불국사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415호로 지정된 건칠보살좌상과 목탑지(木塔址)·석조치미(石造치尾)·문적(文籍)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석조치미는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화문(花紋) 장식이 있으며, 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문적 중에는 <경상도영주제명기 慶尙道營主題名記><동도역세제자기 東都歷世諸子記><부호장생생가 府戶長生生家> 등이 있다. 이들은 경상도와 경주의 행정에 관한 것과 행정관에 대한 인적사항, 신라 이후의 지방제도의 변혁 등을 기록한 중요한 문헌들이다. 또, 이 절에는 조선 역대 왕들의 어필도 보관되어 있으며, 특이하게 석비 모양의 나무에 사적을 기록한 목비가 전한다.
이 절에는 원래 오정수(五井水)가 유명하였다고 한다. 그 중 장군수(將軍水)는 마시면 힘이 용솟음친다 하여 인근에 널리 알려졌는데, 조선시대 어떤 사람이 이곳에서 역적모의를 하다가 발각된 뒤 나라에서 샘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나한전 앞쪽 탑 자리에도 샘이 있었다고 하나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또 하나는 절 입구에 있었으나 최근 도로확장 때 매몰되었으며, 현재는 큰 방 옆과 아랫마을에만 보존되어 있다. 이 절에는 또한 천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 라는 한약초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한방서에도 그 기록이 있다.
일주문을 빠져 나오는 부원들.
경주고에서 해산하고 OB들은 알천강변의 초이스에서 뒷풀이를 한다.
그들의 시대는 이제부터이고 나는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뒤에서 지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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