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징주의(象徵主義)에 대한 이해
상징주의의 사적 전개
가. 상징주의 기간
귀스따브 랑송(Gustave Lanson)은 상징주의 기간을 대개 3단계로 구분하였다.
㉠ 전기 상징주의 (1850∼1880) : 보들레르, 베를레느, 랭보, 말라르메 등이 활약한 상징주의 선구자들의 세대
㉡ 제1기 상징주의 세대 (상징주의 전반기 1880∼1900) : 모레아스, 레니예, 베르아랭, 사맹 등 기타 군소 시인들이 활약했던 시기
㉢ 제2기 상징주의 세대(후기상징주의 1900∼) : 끌로델, 발레리로 대표되는 시기
나. 상징주의 계보
미쇼의 체계에 의한면 에드가 앨런 포우와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보들레르를 시작으로 하여, 그의 “감정적 시”가 베를렌느를 통해 데카당파 시인들을 거쳐 프루스트로 이어져 갔고, 말라르메를 통해 군소 상징주의 시인들을 거쳐서 한편으로는 끌로델에게로 이어졌으며, 그의 “환상적인 시”는 랭보를 통해 아폴리네르 등을 거쳐 초현실주의로 계승되었다.
다. 상징주의 성립 요인
상징주의 역시 전세대 문학운동에 대한 안티테제로 일어난 문예사조로 그것이 주의로서 형성된 정신적 사회적 여건은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참패당한 후 전세대에 성행했던 과학적 낙관론의 흔들림으로 정치,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서 정신적 공황을 맛보게 되고 이에 가치관의 검토가 뒤따르게 된다. 사실주의 자연주의 시대를 지배해 온 현대사상의 지주로서의 실증주의와 과학이 당초의 이념에도 불구하고 마침내는 인간의 영원한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는 이를테면 그것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곧 문화현상에 있어서 실증주의와 과학만능사상이 쌓아온 미래지향적 낙관론적 비전의 붕괴, 이와 동시에 문학에 있어서는 이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동경하는 정신이 반기를 들며 새로운 질서와 미적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정신적 공황 속에서 “세기말병”이 정신의 무정부상태를 이루어 놓았고, 정신 현상 속에 배태되어 형성된 바 “영혼의 장태”와 절대의 세계에 대한 초월적인 갈망을 이론으로 체계세운 것이 상징주의이다. 상징주의는 데카당띠즘의 정신 풍토를 계승하고 이룩된 주의임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에 있어서는 그것을 벗어나 독자적인 이론과 미학을 구축하고 있다.
19세기 중기의 프랑스를 풍미한 정신적.사상적 풍토를 전반적으로 박차고 이룩된 상징주의는 첫째로는 생 시몽등의 사회주의와, 둘째로는 꽁트가 확립한 사회현상에 관한 실증과학으로서의 실증주의와 셋째로는 과학만능사상에 대하여 전적인 불신을 표명했다. 또한 문학에 있어서도 상징주의는 첫째로 고답파와 둘째로는 사실주의, 셋째로는 자연주의에 대하여 전적인 반기를 들고 있는데 이러한 프랑스 상징주의는 “영혼의 상태”를 동경하는 현상주의와 예술의 순수성 혹은 음악성, 즉 절대적인 순수시의 실현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문예사조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자리잡게 된다.
라. 상징주의의 쇠퇴 요인
20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인간의 관심이 현실과 사회편으로 다시금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자 현상만을 추구하던 상징주의도 점차 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세기 전후의 이삼십년 간에는 상징주의에 대항하는 여러 주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상징주의가 종막을 고하게 되는데 그 결정적인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상징주의가 “영혼의 상태”와 순수한 미학 추구에만 전심한 나머지 격변하는 시대적.사회적 변수 및 요청을 수용하지 못한점에 있고, 다음으로는 상징 및 암시의 세계와 “언어의 연금술”과, 형태에 있어서든 내용에 있어서든 시의 음악화 등으로 인해서 순수성.모호성.난해성에 머물고 만다. 뿐만 아니라 상징주의가 쇠퇴하게 된 또 다른 요인은 명석성과 합리성으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전통정신을 포괄하지 못한 그 반전통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념 및 철학
가. 상징주의의 철학적 관심
낭만주의와 상징주의가 다같이 사실주의, 자연주의로 대표되는 현실 혹은 현상 집착의 현실주의를 탈피하여 영혼의 상태를 동경하는 이상주의에 잠입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두 주의가 근원에 있어 서로 다른 점은 문학적 표상 및 형상화에 있어서의 표현 기법의 두드러진 차이는 남겨두더라도 릴리슴인 한에서 낭만주의가 주로 감성체계에 바탕을 둔 서정적 산물인 데 반해서 상징주의는 주로 감각체계와 현성체계에 공히 근거를 둔 이념적 정화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낭만주의는 우주의 중심을 주관적· 개인적 자아에 두고서 그 자아의 본질을 감성과 심정을 통해 파악하고자 하고, 상징주의는 우주의 중심을 인간까지를 포괄하는 우주 자신에게로 환원시키고자 그 우주의 본질을 감각과 이념을 통해 파악하고자 한다.
상징주의는 다분히 모험적이고 그 시세계가 순수성에 맞닿아 있고, 시상이 명료하고 참인 어떤 본질을 들추어내려는데 바쳐져 있고, 사상이 이미 철학적.형이상학적 문제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상징주의의 특성은 감성계와 경험계를 모두 포괄하면서 동시에 뛰어넘어 이념 및 관념의 세계에 도달해 있다는 점에서 찾아질 것이다. 상징주의는 정서와 서정, 현상과 경험의 세계를 느끼고 투시하되 온전히 그것에만 연연해하지 않는다. 상징주의의 주요한 주장은 현상들의 참이고도 본질적인 실체를 밝혀내려는데 있다. 상징주의의 이념 및 철학은 이처럼 우주현상의 본질 혹은 실상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로부터 출발한다.
나. 현상의 가상성
상징주의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명제는 아마도 “현상적인 것은 가상적이다”라는 것일 것이다. 상징주의는 현상계 즉 감성적·감각적 인식의 대상이 되는 물질세계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의 존립성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상징주의는 모든 현상이 드러나 있는 그것 자체로서는 극복되어야 할 그것들의 허위성과 가멸성 때문에 존재의 진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본다. 상징주의 입장에서 보면 가시적, 불속적, 물질적인 세계를 구성하고 잇는 모든 현상 즉 모든 인식대상은 참이 현시되어 있지 못한 허상에 불과하다. 상징주의는 형상적 세계 즉 감상적.감각적 인식의 대상이 되는 물질세계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의 존립성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모든 현상은 일차적으로는 가상적인 현시체에 불과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순전한 현시체이면서 동시에 진실을 안으로 숨기고서 존재하는 의미체인 것이다.
다. 현상의 이중적인 구조
모든 현상은 본래 이중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사실 모든 현상은 원칙적으로는 인간의 인식 및 의미부여와는 무관하게 존재하고, 그리고 실제로는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존재 이유하 충분 확실한 자립체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의 인식이 투여되고 나면 현상은 이미 자족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의미가 실려 있는 가치로운 존재가 되고 만다. 이것이 이른바 현상의 의존적, 가치적 존재로서의 의미구조이다. 그러므로 제현상은 인식과 관계되어지지 않는 한은 스스로 충족되어 있음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인식의 편에서 보면 순수한 없음의 존재이고, 인식과 관계되어지는 한 그것들은 스스로 충족된 있음의 존재 구조와 동시에 의존적으로 가치를 부여받은 의미 구조를 이중적으로 지니는 존재가 된다.
라. 현상과 인식
모두 현상이 이중적인 구조를 지니는 데는 인식작용이 필수 조건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인식이 현상에 투여되지 않는다면 모든 현상은 '무화' 되거나 없음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인식작용이 가해질 때라야 비로소 현상은 그 존재가 확립되고 의미가 실려서 가치로와지는 것이다. 인식 작용은 그러므로 현상에 대한 가치부여작용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대상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 것은 우선 우리가 감각.지각.언어 기능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고, 더욱 근본적으로는 우리에게 사유능력과 상상력의 특권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각이 있기 때문에 대상을 인지할 수 있고 지각이 있기 때문에 대상을 판단할 수 있고, 언어가 있기 때문에 대상을 지시할 수 있고, 사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대상을 관념화시킬 수 있다. 모든 현상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은 우리의 감각 기능과 언어를 통해서이고 그것들의 의미본질이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사유와 상상력 및 언어활동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모든 현상은 우선은 우리의 감각 기능에 의해 그 존재가 인식 앞에 순수하게 드러나게 되고, 그런 다음 우리의 언어에 의해 그 존립성이 명명될 때 대상은 비로소 인식 앞에 드러난 순수한 객관적 존재이기를 멈추고 인식 속에 포착된 상관적 존재가 되며 그런 연후에라야 모든 현상은 인식 주체로부터 의미를 부여받을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상징주의와 관련시켜 문제삼아야 할 것은, 우리의 감각.지각.언어 기능이 대상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 존립성을 확립시킬 때 과연 그것이 거짓이 아니고 참인 것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일이다.
마. 인식과 언어
인식과 사유의 활동에 있어 언어가 지니는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다. 인식과 사유활동은 항상 언어와 긴밀한 관계 하에 있고, 언어에 거의 예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인식활동과 사유활동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언어활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감각 기능의 힘을 빌어 인식한 어떤 대상에게 약정된 언어로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것의 존립성이 확정되는 순간, 사실은 우리는 그 대상을 있는 그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제시어에 은밀하게 묻혀 버린 대상의 이를테면 관념 혹은 개념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상 그것에게 언어가 부여되자마자 우리의 인식 속에서 대상 그것의 본모습은 사라져 버리거나 언어 속에 묻혀 버리고 만다.
언어는 자신이 고유하게 지니는 관념으로 하여 대상 그것 자체의 본모습을 착란시키고 왜곡시키고 기만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언어가 인식에게 환기시키는 대상은 참이 아니고 거짓일 수밖에 없다. 언어는 대상을 있는 그것 자체로 우리의 인식에게 전달해 주지 못한다. 상징주의가 지시하고 명명하는 언어에 대하여 불신하는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때문에 상징주의는 제시어를 파기한다.
상징주의는 지시하고 명명하는 언어 자체를 방해물로 여긴다. 그러나 인식이나 사유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문학도 언어를 절대적이고도 숙명적인 매체로 사용해야 하므로 상징주의는 대상을 가능한 한 있는 그것자체의 참인 것으로 그리고 그것의 본질을 가능한 한 진실인 것으로 밝혀내기 위하여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시적 언어' 를 내세워 차선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바. 시간성과 가상성
상징주의는 우리가 인식하기 이전의 순수하고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존재로 거기에 있는 현상 자체도 참이 아니고 거짓이라 단정하다. 모든 현상적인 것은 시간성에서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고, 항상 반드시 시간성 속에 갇혀 있게 된다. 그리고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성.변전성.가멸성과 더불어 그 존재 가치의 상대성까지도 자신의 본질적인 속성이 되고 있다. 현상의 됨됨이와 그 본질이 이렇다 할 때 모든 현상은 그 존재 자체가 숙명적으로 참일 수 없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실체일 수 없다.
모든 현상적인 것은 그것 자체로서도 자신의 실체를 저버리거나 은폐시킨 채 가상적으로만 존재하고 있고 또 우리의 인식에 포착되는 셈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상 그것 자체에 있어서든, 현상과 언어적 인식과의 관계에 있어서든 모든 현상적인 것은 가상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현상적인 것은 가상적이다”일 뿐만 아니라 이중적으로 가상적인 셈이다. 이토록 상징주의는 자신의 철학적 이념을 구축함에 있어서 현상의 이중적인 가상성을 밝혀냄으로서 당초부터 중대한 허무 혹은 허무주의에 봉착되고 마는 것이다.
사. 가상성의 극복
모든 현상적인 것이 그 가상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거기 있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어떻게 있는가, 왜 있는가, 본질적으로 무엇의 표상물로 있는 것인가 하는 의미 혹은 가치를 부여받아야 한다. 이와 같이 모든 독립적이고도 자족적인 현상에게 가치부여작용을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인식기능이고 또 인식을 통한 사유와 상상력의 역동성이다.
문제는 그 인식이 무엇을 포착하고 또 무엇에 대한 인식인가와, 사유나 상상력이 대상에게 얼마나 바르고 참되게 의미를 부여해서 그것의 실체를 드러낼 수 있는가에 따라서 현상이 자신의 가상성을 벗어날 수도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데 있다.
모든 현상이 가상적이지 아니하고 현실적이기 위해서는 시간성을 초월한 의미구조로서의 현상의 실체가 밝혀져야 한다. 그 실체가 시간성과 상대성을 극복하여 영원 불변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밝혀질 때 비로소 현상은 가상이 아닌 실상이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변증법적 지양을 수행하는 가운데 상징주의는 존재구조로서의 현상으로부터 출발하여 의미 구조로서의 현상의 진실성에 도달하고자 했다. 요컨대 “현상적인 것은 가상적이다”라는 명제로부터 출발하여 가상성의 극복을 방법적으로 감행함으로써 “현상적인 것은 전적으로 가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상적이기도 하다”라는 반명제의 타당성을 확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 절대의 탐구
상징주의는 현상계를 가상적인 것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에 그것의 참모습이 드러나는 불가시 세계 즉 이념의 세계에 잠입하기 위하여 현상의 현실성을 모두 뛰어넘는다. 그런다음 현실 및 현상에 대치되는 이상 혹은 이념의 세계를 한결같이 사모하고 그것을 시로써 실현하고자 한다. 상징주의는 낭만주의의 시적 체험을 포괄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 주로 주지적·감각적·관념적 입장에서 가상적 형상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이상 혹은 이념을 추구하고 있다.
미쇼의 이론에 따르면, 지성 혹은 이성에 기초를 둔 고전주의가 완벽성을 갈망하고 예술과 미의 이상적인 형태를 발견하고자 함으로써 예술의 본질을 천착하였고, 감성과 정서에 기초를 둔 낭만주의가 무한과 이상을 동경함으로써 릴리슴의 본질을 추구했다면 감각 즉 교응의 기능과 직관에 기초를 둔 상징주의는 “완벽성도 무한도 아닌 절대”의 세계를 열망함으로써 우주의 실체적인 구조를 표상하는 “시의 본질”을 밝혀내고자 했다. 상징주의는 직관의 시를 빌어 영원불변하는 자주의 철리를 찾아내고자 했다. 상징주의는 시간성을 초월해 무시무종한 본질의 세계. 실상의 세계, 절대의 세계를 밝혀 내려는 철학적.형이상학적 작업에 자신의 전부를 바친 것이다.
자. 현상의 실상성
상징주의가 지양하는 궁극점은 모든 대상이 가상적이고 상징적인 대상으로부터 출발하여 몇 단계의 철학적, 형이상학적 지양을 거친 다음 다시금 그 대상에게로 돌아와 그것에게 영원 불변하고 시간성이 배제되어 바르고 참인 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모든 대상은 그 본질 및 실상이 절대적인 것으로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것의 겉껍데기인 현상과 속알맹이인 실체가 하나로 무수하게 합치되어서 그것들이 하나의 완전한 전일체를 이루게 된다. 이처럼 현상의 가변적이고 가멸적이고 따라서 가상적인 존재 구조와 불변적이고 불멸적이고 따라서 실상적인 의미 구조가 하나로 일치되어서 완전한 전일체를 이루게 될 때, 현상은 비로서 참인 것이 되고 온전히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상징주의는 이제 현상적인 것은 가상적이다라는 명제로부터 현상적인 것은 전적으로 가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상적이기도 하다라는 반명제를 거쳐 마침내는 현상적인 것은 실상적이다라고 하는 신테시스에 도달하게 된다.
차. 형이상학적 관념
이처럼 가변적·가멸적인 모든 현상의 불변적이고 항구적인 본질이 되는 또 시간성 속에 갇혀 있는 존재를 영원성 속에서 확립시키는, 이를테면 모든 현상의 진실이 되고 실체가 되는 근원을 상징주의는 '관념'이라고 했다. 모든 형상의 가시적·물질적·현실적인 존재의 세계는 그것이 시간성 속에 갇혀 잇는 한 가변성과 가멸성을 뿌리칠 수 없기 때문에 가상에 불과한 반면, 그것의 불가시적·정신적·이념적인 본질의 세계는 그것이 하나의 '관념'으로 표상되는 한 불변성과 불멸성에 기초되어 잇기 때문에 실상이 된다는 것이다.
상징주의가 철학이 아니고 문학인 소이는 이와 같은 관념의 세계를 시를 통해 체험했고 그리고 시로써 창출해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주의에 있어 시는 그것의 본질적인 리듬으로 환원된 인간의 언어에 의한 존재현상의 신비로운 의미의 표현이 되고, 또 시인은 불완전한 인생의 덧없는 현상속에 은폐되어 있는 미의 영원한 관념을 사람들에게 환기시켜 주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상징주의가 직관의 세계에서 체험하고 시로써 창출해낸 근원적 본질 또는 철리를 말라르메는 관념 혹은 절대 혹은 순수실재라 했고, 모레아스는 그의 상징주의 단언에서 원초적 관념이라고 했다.
상징주의 시에 이에 있어서는 자신의 본질과 진실을 끊임없이 사모하는 제현상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정립하게끔 해 주는 미학전 전형 혹은 원형이 된다.
카. 상징주의 철학의 근거
상징주의에 있어 ‘관념’이 가상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현상의 영원 불변하게 참인 본질·원리 ·전형이 되는 한, 상징주의의 ‘관념’의 개념은 플라톤 사상에 입각해 있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관념론의 요체인 ‘이데아’는 모든 개체 현상의 이념적 실체로서 보편자가 되며, 그것들의 변전 생멸하는 존재와는 아랑곳없이 그것들의 본질 속에 영원하고 참된 원형으로 항존한다. 이상으로 보아 상징주의의 관념이 플라톤의 이데아와 맞닿아 있음은 자명하다.
상징주의는 또한 헤겔 철학과도 무관하지 않다. 상징주의는 특히 절대적인 ‘관념’에 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 헤겔의 변증법적 지양에 연루되어 있다. 이른바 정반합의 방법적인 삼계기를 밟고 변증법적인 지양을 거쳐 ‘관념’이라고 하는 흔들릴 수 없이 영원하고 참인 실체를 보편성과 절대의 지평에 이룩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상징주의 철학의 위대한 점은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한 데에 있을 것이다. 이미 보아 온 대로, 상징주의는 철학의 기초를 이원론에 두고 있다. 그러나 ‘관념’이 온전히 형이상학적 실체로만 머물러 있게 되면 하나의 철학적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에, 뒤에 나오는바 상징과 교응의 이론 및 미학이 근간을 이루는 시적 창조행위를 통해 그 ‘관념’을 현상에 무루하게 실려 줌으로써 현상과 실체 및 존재와 본질 간의 ‘유암하고 심원한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한에서 상징주의의 궁극적인 관심은 『마사반야파라밀다필경』의 핵심 사상에 맞닿아 있다. 선불교 는 '色'이 허상이라고 해서 현상계를 버리지도 않고 또 '空'이 실상이라고 해서 실체계만을 고집하지도 않은 채 실상이 온전히 현상에 실려 현상과 실상이 '다름 아닌' '바로 그것'으로 조화로운 통일을 이루는 데서 오묘한 진체를 발견한다. 다만 상징주의는 그와 같은 조화로운 통일을 꾀하는데 있어서 '전적이고, 새롭고, 일상언어에게는 낯설고, 마치 주문과도 같은 말'로 이룩되는 순수직관행위인 시적 창조에 전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상징주의는 우주적 진실·실체·전형인 ‘관념’을 궁극적인 이상으로 추구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이상주의 즉 관념론에 입각해 있고, 발광체가 되는 언어 내지 시를 통해서 ‘관념’의 세계를 사모하고 표상해낸다는 점에서 시적·미학적 이상주의에 입각해 있는 셈이다.
이론 및 미학
가 ‘상징’의 이론
㉠ 상징의 의미와 기능
우리가 상징이라 통칭하는 symbol(영), symbole(불)은 그 어원을 희랍어의 sumbolon과 라틴어 symbolus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symbol은 '함께 던지다'라는 어원적 의미와 '表, 인지표시, 표징, 상징'이라는 비유적 의미를 함께 포괄하고 있다. '함께 던지다'라는 어원적 의미에서 던져진 물체를 '함께 나누어 갔다'라는 이의적 의미로 발전하고, 나누어 갖는 물체는 다시 만나게 될 때 진정성을 확인 시켜 주는 '인지표시' 즉 '표징'이 된다.
상징은 그 본모습에 있어 항상 존재로서의 가치와 의미로서의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특히 상징이 기호로서의 자신의 존재만을 우리에게 비춘다면 상징은 하나도 가치로운 수 없다. 이러한 사정은 상징의 어원적 의미에 있어서나 문학적 의미에 있어서 공히 마찬가지이다. 또한 상징은 항상 그 의미가 해독되어야 할 하나의 기호처럼 자신의 존재만을 우리에게 내보여야 하고 또 내보일 뿐, 자신의 의미는 절대로 겉으로 드러내지 말아야 하고 또 드러내지 않는다. 이점 즉 상징이 지니는 존재의 폐시성과 의미의 은페성, 그리고 의미의 다양성 및 모호성이야말로 상징의 존재적 가치와 본질적 가치로서의 이가성과 더불어 상징의 고유한 특성이 된다. 또한 상징은 인식의 투여가 있을 때라야만 상징으로서의 가치를 확립할 수 있다. 아무리 훌륭하고 기발한 상징 혹은 상징물이라도 우리의 인식과 사유 및 상상력의 빛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자족적으로 거기에 있는 객관물에 불과할 뿐 상징으로서의 생명력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상징은 항상 인식주체를 향해 자신의 알몸을 드러내고 있고, 또 인식 주체에 의해 자신의 알몸과 속알맹이가 드러나게 될 밝혀짐에의 기대에 부풀어 있다. 이 점 즉 밝혀짐에의 기대 또한 상징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 상징의 문제
시의 실제에 있어서 상징이 어떠한 문제들을 던져 주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인식주체를 매체로 한 현상과 상징과의 관계가 어떠하며 그리하여 현상은 왜 상징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고, 다음으로는 현상계 및 관념계를 두루 표상하는 데 있어 상징이 어떠한 역할을 하고 그리하여 시에 있어서 상징적 표현이 왜 본질적이고 필요불가결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식론에 있어서 현상의 존재 양식과 관계되어지는 상징의 의미와, 그리고 현상계와 관념계를 시로 표상하는 데 있어서 표현기법상의 상징의 의미가 그것이다.
㉢ 상징과 현상
상징주의는 '현상적인 것은 모두 가상적이다'는 명제가 가지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실상을 탐색하는 형이상학적 작업에 온 힘을 기울였다. 상징주의는 모든 현상의 본질적인 구조를 이원론적으로 보고, 가상으로 포괄되는 현상계·물질계·외면세계의 한 축 저편에 실상으로 총괄되는 본질계·정신계 ·내면세계의 다른 한 축이 있음을 상정했다.
허상으로서의 모든 현상이 실상으로서의 관념을 자신의 본질로 존재 깊숙이 간직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대상의 존재 속에 간직된 본질을 직관하게 될 때 상징주의는 비로소 현상적인 것은 실상적이라는 철학적 종합의 철리에 도달하게 된다. 현상에 대한 부정적 판단으로부터 관념이라고 하는 절대성에 대한 긍정적 직관에 도달하기까지 철학적 지양과 형이상학적 초월을 감행한 상징주의는 그러나 현상을 가상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한에서 원칙적으로 허무주의에 빠져 있으며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철학적 해결이나 미학적 구애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상징주의는 철학과 미학에서 공히 현상의 가상성을 전제하고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초월적 지양을 끊임없이 감행햇고, 이같은 초월적 지양은 허무를 발견한 후에 미를 발견했다는 말라르메의 말대로 현상으로부터 체험된 허무의식의 기이와 비례해서 더욱 견고하게 펼쳐졌고, 마침내는 다시 현상에게로 돌아와 현상의 실상성을 확고부동한 진리로 확립하기 이른다.
㉣ 현상즉상징
상징주의에게는 모든 개체 대상이 추상적 관념을 암시적으로 푯항하고 잇는 상징물이다. 현상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체계를 이루고 있는 상징의 집합체이다. 현상 즉 상징이 자신 안에 깊숙이 숨기고 있는 의미·본질·관념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떠한 것인가. 현상세계 속에 숨겨진 세계는 당연히 추상세계이고 관념세계이다. 그리고 그 추상적 관념이 가상 혹은 상징으로서의 현상을 참된 내용이 실려 있는 존재이게끔 해주는 본질이어야 함도 너무나 당연하다.
상징주의 미학은 상징의 이론을 통해 현상 즉 상징의 실체를 밝히는 본질로서의 ‘관념’에 도달하고, 그런 연유로 상징주의 미학에 있어서는 상징적 현시체인 현상 즉 상징이 은폐하고 있는 바 속알맹이로서의 의미·본질·관념이 ‘관념’으로 환원되어 그 겉껍데기인 형체 위에 무루하게 실리게 될 때 이루어지는 형태와 내용 즉 존재와 본질 간의 조화로운 종합 내지 통일이야말로 더없이 숭고하고 이상적인 참이 되고 미가 되는 것이다. 현상즉상징은 자신의 껍데기인 존재에 의해 알맹이인 본질이 영원히 아름답고 참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동시에 영원히 아름답고 참인 그것이 자신의 형체 위에 무루하게 얹혀지기를 꿈꾸는 것이다.
㉤ 해독자·견자·시인
상징주의에 의하면 현상즉상징 속에 깊이 숨겨진 관념을 밝혀내고 또 밝혀진 관념을 개체대상의 형체위에 무루하게 실어서 존재와 본질간의 조화로운 통일을 시도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견자'인 탁월한 시인이다. 시인만이 현상 즉 상징을 본질의 참이고 아름다운 발광체이게 하는 연금술자가 될 수 있다. '견자'인 시인에게는 현상세계가 모두 암시적인 상징물로 인식된다.
상징주의에 있어 '견자'인 시인이란 현상 즉 상징으로서의 현상계의 상징체계가 유추적으로 암시하는 바 숨겨진 본질을 바르고 명료하게 풀어내어 그 본질로서의 ‘관념’을 밝힘으로써 존재와 본질 간의 다름 아닌 하나로서의 등식관계를 확립시켜 주는 '해독자'이고 이는 곧 '입법자'인 것이다.
㉥ 상징과 표현
상징이 시적 표현에서 어떠한 의의와 가치를 지니는가 살펴보자. 시인이 해독자로서만 머문다면 그는 철학자 혹은 미학자에 불과할 것이다. 시인이 시인인 소이는 그 해독되고 밝혀지는 본질 및 관념세계를 반드시 언어를 매체로 하여 시로 표상하는 장인이라는 데 있다. 상징주의에 있어 시인은 미적 예술세계를 어떻게 창조해내고, 어떠한 이념과 방법을 빌어서 시의 세계를 창조하는가. 상징주의의 시적 표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체 중의 하나는 상징주의가 현상을 인식하고 해석하던 그 철학적 태도를 단지 시적 태도로만 전환시킨 채 시적 표현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적 표현에 있어 '해독자'이자 창조자인 시인은 시 자체를 본질과 본의를 속깊이 은폐한 채 그 존재만을 드러내고 있는 상징체계의 현시체를 만들고 창조해내야 한다. 왜냐하면 현상 속에서 진실 즉 실체는 절대로 직접 지시되어 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상징적으로만 넌지시 밝혀지게 되어 있듯이, 시 속에서도 그 본질 내용은 절대로 직접 지시되어 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상징적으로만 암시되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 상징주의의 기본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상 즉 상징이기 때문에 시도 시 즉 상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상징주의의 시적 표현 방법에 있어서 상징과 암시는 그것의 처음이고 또 마지막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 교응의 미학
㉠ 교응의 근거
상징은 현상 저마다의 존재의 본질을 규명해서 개체 현상이 고유하게 지니는 존재와 본질 간의 유추관계 및 궁극적으로는 자기동일성을 정초해 주는 존재론적 규명의 이론체계이고, 교응은 그렇게 자기동일성으로 환원된 존재와 본질간의 무루한 결합을 근거로 해서 구축되는 현상 상화간의 조화롭고 심원한 통일성 및 일체성을 밝혀주는 관계론적 규명의 이론체계이다.
교응은 항상 종합과 조화를 도모한다. 교응의 미학은 모든 개체 현상이 제각기 자신의 겉껍데기를 벗은 다음 참이고 본질적인 속알맹이로 돌아가서 서로가 서로를 환기시키고 호응하는 가운데 주객합일의 상응의 세계가 펼쳐지기를 기대하고, 또 그와 같은 감각적, 이념적인 교류를 통해 모든 개체 현상이 일체성 속에 무수하게 종합되어서 조화롭고 아름다운 우주의 교향악을 울리기를 갈망한다. 이처럼 본질적인 것으로 환원되어 밝은 빛을 발하는 현상세계 전체의 참이고 아름다운 통일을 기하는 것이 상징주의의 교응의 미학의 요체이다. 요컨대 교응은 개체현상 및 관념적 실체를 함께 포괄하는 세계일반에 대한 질서와 조화의 미학이요 종합과 통일의 이론인 것이다.
㉡ 교응의 실현과 수단
상징주의에 따르면, 교응의 세계를 체험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희한하고 특이한 직관적 권능을 지녀야 한다. 상징주의에 따르면, 교응의 세계를 체험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일상성 속에 머물러 있는 인습적 자아를 버려야 하고, 합리적인 논리에 근거되어 있는 범상한 이성적 자아를 버려야 하고, 주관적 확증을 기초로 삼는 주정적 자아를 버려야 한다. 교응의 세계는 이를테면 일상적·이성적·주정적 자아가 소멸되어 우주적인 통일 속에 인식주체가 온전히 흡입될 때 실현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자아와 세계, 주관과 객관, 대상과 대상 사이의 본질로 환원된 조화로운 통일 혹은 순연한 일치를 도모할 수 있는 이를테면 정신적, 방법적 접합술을 지니고 또 발휘해야 한다. 이런 한에서 탁월한 시인은 시와 미학을 통해 조화로운 우주적 통일을 실현하는 접합술자요, 접신술자이다.
㉢ 보들레르와 랭보의 체험
이와같은 접합술과 접신술의 권능을 지닌 시인을 랭보는 견자라 했고 견자인 시인의 예를 열거하면서 그중에서도 “보들레르야 말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들리지 않는 세계를 듣기 때문에 견자의 으뜸이고 시인 중 왕이고 하나의 참 신입니다.” 라고 말한다. 보들레르는 천부적으로 주객합일의 세계를 꿰뚫어 체험했고 교응의 미학을 시로써 정립한 탁월한 견자이다. 보들레르는 특별히 선택된 견자로서의 탁월한 시인의 권ㄴ으을 빌어 시를 통해 주객이 합일하고 삼라만상이 혼일체가 되는 교정 즉 교응의 세계를 실현하는 것에 예술 및 미학의 궁극적인 목적을 두는 것이다. 랭보도 마찬가지이다. 교응의 세계를 직관하고 실현하는 자가 참된 시인이고 견장라면 랭보 또한 탁월한 시인이고 진정한 견자이다.
㉣ 교응의 방법적 추구
교응의 세계를 체험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첫째로는 주관주의적·이성적 자아를 버려야 한다. 교응의 세계란 주관과 객관 즉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간의 분별 혹은 차별이 완전히 소멸되어 자아까지를 포괄하는 일절제상이 등가관계에 놓이는 조화균제의 세계인 까닭에, 분별지가 지배하는 주관·주정·이성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교응의 세계에 잠입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응의 세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분별지에 얽매인 자아를 버리고 벗어나 마치 선과도 같은 무분별의 분별의 세계에 자아를 들여놓아야 하는 것이다. 다음은 인습에 젖어 온 감각 및 인식체계의 재편성이다. 가상적이 아닌 참이고 아름다운 실상의 세계를 규지하고 건설하기 위해서는 기왕의 감각 및 인식체계를 혁신하여 새로운 질서로 재편성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랭보는 이처럼 새로운 질서의 체계 위에다 참이고 아름다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권능의 소유자를 '견자'라 했고, '견자'가 되기 위한 방법적 수단으로 '모든 견자의 해체'를 들고 있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명제 '자아는 타자이다'는 주객이 합일하는 교응의 세계를 일컬은 것에 다름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교응의 세계를 체험하고 실현하기 위한 또다른 방법적 수단은 언어의 혁신이다. 상징주의는 ‘언어의 연금술’ 통해 직접적인 언어를 본질적인 언어로 재편성하는 이른바 언어의 혁신을 기함으로써 가상적인 현상과 존재로부터 실상적인 ‘관념’과 본질에로의 초월을 단행할 수도 있다.
㉤ 교응의 형태
보들레르와 랭보는 인식주체까지를 포괄하는 현상세계에서 본질로 환원된 대상들이 제가끔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대상 상호간에 마치 이심전심의 비법처럼 내적 교통의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서 어떤 순일한 통일 즉 일체성의 세계를 형성하고 잇음을 체험했고 밝혀낸다. 이와 같은 현상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교류의 세계를 총괄해서 상징주의는 공감성의 세계라 일컬었고, 앙리 뻬르는 수평적 교응의 세계라 했다. 존재와 본질, 현상과 관념, 물질과 정신, 육체와 영혼, 지상과 천상, 인간과 신 사이에서 무수히 이루어지는 교응의 세계를 상징주의는 이를테면 “영적 일체감”의 세계라 일컬었고, 앙리 베르는 “수직적 교응”의 세계라 했다. 상징주의에 있어 영적 일체감 및 수직적 교응은 그러므로 가상적인 것으로서의 현상 혹은 존재와 실상적으로서의 본질 혹은 관념의 조화일치뿐만 아니라 지상적인 것과 천상적인 것 및 인간적 존재와 신적 존재간의 결합일체가 현상세계와 관념세계에서 공히 이루어짐을 통칭하는 미학개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