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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7월왕정 (2) 기조의 보수 정책
7월왕정이 나름대로의 안정과 번영을 되찾은 것은 1840년 이후 8년간 기조의 집권 시기이다. 7월왕정은 1835년경부터 사회적 안정으로 향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정부의 탄압 정책의 결과이고, 정치적으로 아직 안정을 찾지 못하고, 정권은 운동파와 저항파 사이를 자주 왔다 갔다 하였다. 운동파는 7월 헌장을 의회 개혁과 선거 개혁의 출발로 이해하고 거기에 필요하다면 민중운동도 이용하려는 경향을 보였는데, 저항파는 이 운동 방향에 저항하여 헌장을 움직일 수 없는 독트린으로 이해하고 현존 질서를 절대적인 것으로 지키려는 입장을 취하였다. 7월왕정의 내각에는 1830년대 후반 이래 이 두 파의 대표자 격으로 내정과 외교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인 두 인물이 있었다. 바로 티에르와 기조였다. 티에르는 운동 편이었고 기조는 저항편이었다.
두 차례 티에르의 내각은 두 번 다 단명했는데, 퇴진의 이유는 두 번 모두 외교 문제였다. 1836년에는 스페인의 자유주의 운동을 원조하려다가 루이 필리프의 반대에 부딪쳐 물러났고, 1840년에는 터키와 이집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을 때,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영-러-터와 일전을 불사하려다가 역시 왕의 반대에 부딪쳐서 물러났다. 티에르가 영국과의 전쟁도 불사하려 한 것은 성장하고 있는 프랑스의 산업 부르주아의 해외 진출을 위해서였다. 1836년에 스페인의 자유주의 운동을 도우려는 것도 그의 자유주의적 신념에서만이 아니라 스페인에 미치고 있는 영국의 영향에 대항하려는 정책적 배려가 숨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 역시 프랑스 산업 부르주아지의 이익에 일치하는 배려였다.
이렇듯 티에르가 펼친 외교정책은 산업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어찌하여 성공하지 못했을까? 1830년대 프랑스의 산업자본주의는 아직 농업적 이익과 금융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를 누를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못한 시기였다. 그런데 후자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 기조의 정치 이념과 외교정책이었다. 기조는 1830년대에 여러 번 입각하다가 드디어 1840년 10월 티에르의 실각 이후 1848년까지 정권을 쥐었다. 기조의 보수적인 내정과 외교는 어떤 방법으로도 왕좌를 안전하게 지키려는 루이 필리프의 정책에 현실적으로 일치할 수 있었다.
기조는 소르본의 역사학 교수로서 샤를 10세의 반동 정책을 비판하다가 교단에서 쫓겨난 반골파 학자였다. 그러나 7월혁명 후 7월왕정에 입각하여 철저한 오를레앙주의자로서 일단 수립된 체제를 고수하려는 완고한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내무 대신으로서 1830년 10월 4일 하원에서 단체 활동에 대한 형법 291조의 적용 문제를 논의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무질서는 운동이 아니다. 혼란은 진보가 아니다. 혁명적 상태는 사회가 진정으로 진보하는 상태가 아니다. 나는 되풀이하여 말하거니와, 많은 대중 단체가 프랑스를 이끌고 가려는 상태는 진정한 운동이 아니라 질서 파괴의 운동이다. 그것은 진보가 아니라 목표를 상실한 동요이다.
기조에게 7월혁명은 샤를 10세에 의해 침해되었던 자유를 회복하고 그 자유를 수호하는 법적 질서를 확립하는 혁명이었다. 그런데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는 대중 시위, 새 정부를 전복하려는 비밀결사와 음모 등은 회복된 자유를 그르치고 법적 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으로서, 낡은 프랑스의 대표자들이 펼치는 반동 정책과 마찬가지로 응징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기조는 자기의 정책을 중정 정책(politique du juste milieu)이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요컨대 회복된 자유와 질서를 유지하는 정책이었다. 그리고 그 자유와 질서는 7월 헌장에 규정된 제한선거제에 의한 정치적 자유와 중간계급의 특권과 이익을 보호하는 질서였다. 그의 자유와 질서는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7월왕정의 헌장에 확정된 자유와 질서를 영구불변의 것으로 굳히는 자유와 질서였다. 그는 “이제야말로 이 나라의 희망은 획득한 체제에 만족하여 무엇보다도 이 체제를 보수하고, 공고히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정권의 유지와 왕실의 보전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1840년 11월 17일에 기조는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우리나라가 영토를 정복해야 한다느니 정쟁을 일으켜야 한다느니 대담한 보복행위를 취해야 한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을 하지 맙시다. 프랑스가 번영하고 계속하여 자유롭고 부유하고 평화롭고 현명하면 그만이지, 불평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이는 티에르의 강경한 동방 정책에 반대하여 그를 실각시키고 술트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입각한 지 한 달이 안 되어 한 말이다. 당시 프랑스는 과연 번영하고 평화로운 것 같았다. 영국과의 우호 관계가 잿립되고 상공업의 호경기가 계속되고 철도 건설도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그러나 토크빌(Alexis Tocqueville)은 기조 시대의 프랑스 정치를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주주들이 활동하는 주식회사 같다고 평하였다. 기조의 정책은 철저히 상층 부르주아의 이익을 위주로 하였고, 또 의회의 다수를 자기편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영리한 뇌물 정책을 추구하였다. 거기서 외관상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평화가 실현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조 자신이 자랑했던 것처럼 프랑스가 과연 자유롭고 현명했던가는 매우 의심스럽다.
그는 보통선거제를 자유와 질서를 파괴하는 제도로 규정하고, 보통선거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자유와 민주주의와 역사 발전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철없는 파괴 분자들로 몰아세웠다. 뿐만 아니라 선거권의 확대에도 반대하였다. 정치적 자유의 확대를 번영과 질서와 평화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어싿. 투표권자의 재산 가격을 낮추어 더 많은 국민을 정치에 참여시키려는 요구가 보통선거제에 대한 요구와 함께 날이 갈수록 커져갔지만, 기조는 선거 주민(pays legal)의 확대를 사회적 혼란의 원인이 된다며 극력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완고한 반대가 오히려 그가 회피하려는 바로 그 사회적 소란을 야기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그는 깨닫지 못하였다. 그는 선거 주민 확대의 요구에 대하여 “일해서 부자가 되라, 그러면 유권자가 될 수 있다”라는 유명한 말로 화답했다. 그는 또 1840년대 후반기에 의회와 선거제도에 대한 개혁의 요구가 크게 일어났을 때 “나는 선거개혁을 하느니 차라리 100번 사임하겠다”고 말하였다. 극히 완고한 보수주의 정치가의 면모와 신념이 이 이상 더 명확히 표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기조의 정책은 철저한 현상 고수 정책이었다. 산업혁명의 전진과 함께 프랑스의 전통 사회가 어느 때보다도 신속히 변화하고 있는 시대에 현상 고수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기조의 역사적, 정치적 감각은 본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7월왕정과 프랑스를 위하여 실로 비극적이었다. 그런데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깊이 생각하게 하는 재미있는 일은 그렇게 완고한 현상 유지주의자인 기조도 젊었을 때는 정반대의 진보주의 사상을 주창했다는 사실이다. 1821년 어떤 청년이 당시의 왕당파를 공격하는 팸플릿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현재 프랑스는 번영하고, 시끄러운 일이 없다. ......대신들은 아마 거기 만족하고 있겠지. 그들은 두려워할 일도 없고 아무것도 할일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만일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큰일인데.......국민의 물질적 행복보다 더 큰 허위는 없으니까.
이 글은 계속하여 반혁명이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는 것은 ‘운동’이라고 지적하면서 복고 왕정의 현상 유지 정책에 불평을 토로하고 있다. 이 청년의 말은 그 후 20년 뒤의 기조의 프랑스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이 말의 주인공이 실은 바로 청년 시절 기조 자신이었다.
1840년대의 프랑스야말로 상공업의 번영을 구가하고 시끄러운 일이 없이 조용했고, 또 기조의 정부야말로 거기 만족하고 어떤 변화도 거부하는 철저한 현상 유지 정책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번영과 안정은 표피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국민의 물질적 행복보다 더 큰 허위는 없으니까”말이다. 그러므로 외관상의 안정에도 불구하고 7월왕정의 지배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국 1848년 2월에 명백히 입증되고 만다. 마치 청년 기조의 경고가 1830년에 입증되었듯이.
1840년대의 프랑스는 외관상의 번영과 안정 밑에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과 불안이 숨어 있었다. 노동자의 자유는 허위였던 것이다. 노동문제는 정부가 조속히 정당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심각한 사태를 낳을 만큼 나날이 그 심각성을 더해 가고 있었다.
무릇 산업혁명은 산업자본주의를 급속히 발전시키고 산업자본주의의 발달은 산업자본가 계급을 크게 성장시키는 동시에 근대 공업 노동자계급을 급속히 만들어내는 법이었다. 이 산업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그리고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새로 창조된 부의 불평등한 분배였다. 생산기술이 미약한 전산업주의시대보다 생산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산업주의시대에서 빈부의 격차 현상이 더울 현저한 이유는, 산업주의시대에는 사회적인 부의 창조가 월등히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월등히 많아진 새 물질적 생산물을 사회적으로 평등하게 분배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집중될 것은 명약관화했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경험한 선진 산업국가들은 빈부의 격차가 생기는 원인을 미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누구의 눈에도 명백히 나타난 빈부의 격차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줄이긴 해야 했다. 이런 생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실천에 옮기려는 운동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는데, 이를 사회주의라고 하고 그 운동을 사회주의 운동이라 한다.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은 갖가지 이론과 형태로 19세기 선진 산업국가들의 역사를 색칠한다. 특히 19세기 프랑스의 역사가 그렇다. 일찍이 1819년에 벌써 시스몽디(Jean Charles Leonard Simonde de Sismondi)는 <정치경제의 원리(Principes d'economie politique)>에서 스미스(Adam Smith)의 자유방임 정책을 공격한 바 있었는데, 1825년에 죽은 생시몽(Claude Henri de Rouvroy Saint-Simon)은 개량주의적인 사회주의 이론을 체계화하여 7월왕정 시대에는 물론 그 후에도 계속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7월왕정에서 루이 블랑(Jean Joseph Charles Louis Blanc)의 <노동조직(Orgnization du travail>, 트리스탕(Flora Tristan)의 <노동조합(Union ouvriere)>, 라므네(Felicite Lamennais)의 <신자의 말(Paroles d'un croyant),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의 <재산이란 무엇인가?(Pu'est ceque la propriete)> 등은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저술된 사회주의 이론들이다. 이런 책들은 그 이론이 얼마나 잘 되었느냐와는 상관없이 프랑스의 국민의 사회적 양심을 일깨워서 결국 7월왕정에 대한 비판을 강화하게 하였다.
더구나 1833년에 실시된 초등교육법은 글을 읽을 줄 아는 국민의 수효를 늘렸고, 또 인쇄술과 제지법의 발달은 책과 신문 등을 훨씬 염가로 제작할 수 있게 하여 더 많은 국민에게 현실에 대한 비판력을 갖게 하였다. 1846년 당시 파리의 일간지는 26개에 이르렀고 독자는 18만 명이었다. 이는 20년 전의 세 배였다. 지방지들도 1835-1845년의 10년 사이 배로 늘었다. 특히 1840년에 창시된 <라틀리에(L'Atelier)>는 노동자를 상대로 사회개혁을 고취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제는 입헌군주정이 아닌 공화정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생각이 날로 깊어가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샤를 루이 나폴레옹이 1839년에 <나폴레옹의 이념>을 출판하여 보나파르티슴을 생시몽주의에 접근시키는 요술을 피우고 있었다. 이듬해 1840년에는 나폴레옹의 유해가 세인트헬레나에서 파리로 이장되어 나폴레옹의 자유주의 황제 전설이 순진한 국민 사이에 그럴싸하게 퍼져 나갔다. 나폴레옹 유해의 이장은 7월왕정의 실책 중 하나였는데, 샤를 루이 나폴레옹과 그 일당은 그 실책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이제 세기의 영웅으로 숭배될 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실현한 리버럴한 황제로 숭배되었다. 이런 나폴레옹에 비하면 늙고 소심한 루이 필리프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고, 보나파르티슴에 비하면 기조의 정책은 너무나 보수적이고 거의 반동적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날로 7월왕정에서 떨어져 갔다.
다른 한편 이러한 사오항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다시 프랑스 혁명으로 돌리게 하는 훌륭한 역사 연구들이 나왔다. 미슐레(Jules Michelet)의 <민중(Le peuple)>과 <프랑스 혁명사(Histoire de la Revolution francaise)>, 라마르틴의 <지롱드당의 역사(Histoire des Girondins)>를 비롯하여 루이 블랑의 열두 권 짜리 <프랑스 혁명사>도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런 역사 연구들은 사람들에게 기조의 현상 유지 정책이 얼마나 반역사적인가를 날카롭게 비판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1840년대의 파리에는 외국의 망명자들이 득실거리면서 온갖 혁명적인 사회사상과 정치사상을 퍼뜨리고 또 갖가지 비밀결사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1840년대의 프랑스는 외관상 평온하고 번창하고, 사람들은 현실에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나, 그 평온의 밑바닥에는 실은 정치적, 사회적 불만이 날로 커가도 있었다. 정부는 1841년에 20명 이상의 종업원을 가진 기업체에 미성년자 취업을 제한하는 제1차 공장법을 제정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또 1830년대에 시작하여 1840년대에 한결 더 줄기차게 일고 있는 선거법 개정에 대해서는 전혀 마이동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