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에 집을 나와
7시 20분 서울행 버스를 탄다.
안국동 시네코드 선재에 도착한 시간이 9시 50분.
친구들을 만나 잠시 안부를 묻고
10시 30분,
영화 <위대한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
무릎 꿇고 기도하고,
종탑의 종을 울리고,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옷을 재단하고,
음식을 장만하고,
성경을 읽고,
장작을 패고,
말씀을 받아적고,
송가를 부르고,
주님을 찾는 수사들.
중간중간 화면에 등장하는
수사의 얼굴들.
흩날리는 함박눈,
수도원 지붕 위로 몰려왔다 사라지는 구름과
떴다 지는 별들.
골짝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피었다 지는 들판의 꽃,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방울,
빗소리,
새소리......
이것으로 충분했다.
이제부터는 사족이다.
눈먼 노수사는 말했다.
하느님이 내 눈을 멀게 한 데는
그럴 만한 배려가 있을 것이라고.
죽음은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니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고.
하느님을 찾지 않는다면
살아갈 이유가 무엇이냐고.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열명기의 한 귀절이
중간중간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수도원 규칙 중의 하나는
수도생활 중 산책을 하되
마을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는 아니 되며
길에서 어떠한 물건도 받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
산책 시간에 수사들은 토론한다.
식사를 하기 전 꼭 손을 씻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상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꼭 필요한 일만 하고
모든 것을 오직 하나에 바치는 생활.
눈 내린 알프스에서
미끄럼을 타며 장난 치던 수도사.
웃음소리.
.................................................
어젯밤 잠을 설쳤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 겨우 시작인가 했는데
금방 끝이 났다.
그 사이 이 세상의 시간은
162분이 흘러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코끝에 맴돌던
숲의 냄새.
목재 가구의 냄새.
아침마다 일어나
영어 성경을 필기체로 필사해 보기.
하루 중 잠시라도
모든 생각과 동작을 멈추고
고요해지기.
1000페이지에 이르는 지구의 역사책 중
마지막 한 줄만이 아니라
맨 앞 장, 첫 줄을 상상해 보기.
...........................
감독 필립 그로닝은 1959년 독일 뒤셀도르프 출생.
의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그는
1982년 뮌헨 영화 학교에 들어가 각본과 사운드 어시스턴트, 연출 등을 공부했다.
1984년 프랑스의 샤르뜨뢰즈 지역의 카르투지오 수도원에 편지를 보내
다큐멘타리 촬영을 요청했다가 16년 만에 허락을 받고
6개월간 그곳에 머물며 수사들처럼 독방에서 묵으며
영화를 찍고 소리를 녹음했고 편집하여,
19년 만에 <위대한 침묵>을 완성하였다.
카르투지오 수도회는 1084년 성 브루노(1030~1101)가 설립한,
카톨릭교 중 가장 엄격하기로 이름난 수도회.
해발 1300미터의 알프스 깊은 산중에 자리 잡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독립적이며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한다.
방문객을 받지 않으며 외부와 단절된 봉쇄 수도원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에 19개의 수도원이 있으며
수사는 총 370명이다.
외부와 출입을 끊고
반복되는 일을 하며
같은 창문을 통해 바깥 풍경을 보며 사는 이들.
그러나 이들에게는 다른 곳을 향하는,
또다른 창문이 있을 것이다.
생계니
업무 능력 향상이니
친목이니
문화생활이니
자아 실현이니 하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향하는 창문.
영화를 본 후
난로를 지피고 싶어졌고
창문도 닦고 싶어졌다.
콩코드 숲으로 걸어들어갔던
소로우도 생각났다.
..........................................
노수사의 벗은 몸에
연고를 정성스레 문질러 주던 손길.
인연이 있기에
이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인연이 깊다면
이 영화로 인해
조금은 변화할 것이다.
2009. 홍차 |
첫댓글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삶에 여유가 사라진지 오래된거 같습니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야하고 하루종일 격무에 시달리고 퇴근하면...집안일에 친구들 모임등등....영화속 세상이 부러워 보입니다.
보이는 건 달라도 같은 하늘 아래 삶이겠지요.^^*
큰 위안이 됩니다 ^^ㅋ 오늘 점심엔 농땡이 치더라도 느긋하게 차한잔 마시면서 음악이라도 들어야겠습니다
멋장이 십니다 새벽부터 서둘러 영화를 보러가는 홍차님 그래서 위대한 침묵을 보게되고 그래서 우리는 영혼을 청소하고.....저에겐 이런 용기가 없답니다 즉 게으른 탓이죠
감곡 소현님 마당이 바로 수도원이 아닐까요. 스스로 만든 수도원이자 작은 천국......
홍차님 봄이 오면 소현님댁에 나물 캐러 가시지요? 나물 캐시면 소현님께서는 무척 좋아하실 듯합니다. 잡초 뽑아 주신다고...^^*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로소이다.~
보고싶은 영화를 보셨구나..
자족하고 명상하고 기도하는 삶... 그렇게 살고 싶어 이곳으로 왔는대.,,,아니네요^^
그 속에 무언가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