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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기행] 서대문구
글 윤재석(언론인)
--- 교육과 독립, 민주화 그리고 저항의 용광로...
서대문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우리의 주요 근현대사가 씌여진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식 고등교육기관들이 터를 잡고, 수다한 인재를 배출했으며, 나라가 위태로울 때 독립의지를 불태웠는가 하면,
일제강점기엔 국내외에서 투쟁을 벌이던 독립투사들이 고초를 겪은 현장이기 때문이다. 독재정권 시절엔 민주화
인사들도 독립투사와 같은 고초를 겪었다.
현저동 101번지의 추억
서대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있다. 바로 ‘현저동 101번지’. 지금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장중하게 재단장한 곳. 하지만 오랜 세월 이곳은 ‘서대문형무소’라는 이름의 악명 높은 감옥이었다.
1973~74년, 어느 초겨울. 필자는 초조한 심정으로 정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육중한 문이 열리면 해쓱한 얼굴의 친구들이 하나둘 나왔다. 오랜만의 해후를 즐거워할 겨를도 없이 준비해 간 두부를 입에 처먹였다. 친구들은 그걸 꾸역꾸역 씹으면서 담배를 찾았다. 담배 하나씩을 붙여주니 한두 모금 빨자마자 몸을 휘청거렸다. 출소한 친구들을 데리고 맞은편에 있는 설렁탕집으로 간다. 평소에도 맛 집으로 소문난 집이지만, 서대문형무소 출소자들에게 인기 있는 국밥집이다. 설렁탕을 ‘특’으로 시킨다. 국밥속 고기를 안주 삼아 소주를 들이켠다. 긴급조치 몇 호 민청학련 연루 등의 죄목으로 들어가 몇 달 영어(囹圄)의 몸이 됐던 친구들이다.
유신이라는 괴물이 지배하던 야만의 시대. 우리는 이제 청진동으로 진출해 막걸리에 빈대떡, 또는 낙지볶음을 안주로
통음(痛飮)을 시작한다. “이 ×같은 세상, 언제나 제대로 바뀌려나.” 잘못하다간 사회불안 조성으로 구류 29일을 받을
수 있는 불온한 발언. 그러든 말든 이미 전과자가 된 이상 무서울 게 뭐 있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곤 했다.
서대문형무소 얘기가 나왔으니 짚고 넘어갈 게 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자, 이에 항거하는 의병의 봉기와 애국계몽운동 등 국권 운동이 전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거세게 일어난다. 일제는 조기에 식민지화를 이루기 위해 조선인을 철저히 탄압했다. 체포인원이 많아지자 1908년
10월 21일 서대문 현저동에 대한제국 최초의 대규모 근대식 감옥을 신축한다. 이름 하여 ‘경성감옥’. 1910년 한일병탄
(韓日倂呑)이후 독립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수감인원도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마포 공덕동에 새로운 감옥을 신축하여
이를 경성감옥이라 칭하고, 서대문에 있었던 경성감옥을 서대문감옥으로 변경한다.
1919년 기미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인 규모로 번지자 수감자가 급증한다. 일제는 서대문감옥의 기존 건물을 대대적으로 신축, 수용인원 3천여 명의 대규모 감옥으로 운용한다. 1923년 서대문감옥은 서대문형무소로 개명된다. 일제강점기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던 독립 운동가는 4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중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400여 명이 이곳에서 모진 고문 끝에 옥사했다는데, 90위를 제외하곤 시신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
개화의 흔적… 독립문ㆍ서대문정거장
광복 후 서울형무소로, 1961년 서울교도소로, 1967년 서울구치소로 명칭이 바뀌면서 독재정권에 항거한 민주 인사들이 독립투사의 자리를 대신했다. 옛 서울구치소는 독립투쟁과 민주항쟁의 현장이었던 이곳에 대대적인 성역화 작업을 전개,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젠 봄ㆍ가을 결혼 시즌, 신랑 신부가 웨딩사진 찍으러 오는 명소로 바뀐 걸 보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들곤 한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아우르고 있는 독립공원 남쪽 끝엔 독립문이 장중하게 서 있다. 독립문은 조선 시대 한양을 방문하는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장소인 영은문을 허물고 1898년 독립협회가 건립했다. 국민모금행사를 통해 모인 기금으로 만들어진 15m 높이의 문은 파리 개선문을 본뜬 모습이다. 서재필과 이승만 등이 주축이 된 독립협회는 사신이 머물던
모화관 자리에 독립관을 짓고 우리나라 최초의 백가쟁명(百家爭鳴)식 대중 토론회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백성이 주체가 되는 근대사상을 도입하는 역할도 했다.
독립문에서 남쪽으로 죽 내려오면 서대문로터리다. 거기서 서울역 쪽으로 더 내려가다 경찰청 맞은편엘 가보라. 작은 표지석이 하나 보인다. ‘서대문정거장 터’.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1899년 노량진~제물포인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듬해 한강철교가 준공된 이후 서대문~제물포로 구간 연장이 된 것에 대해선 아는 이가 많지 않다. 아주 잠시였지만, 서대문은 우리나라 철마의 출발 지점이었던 것이다.
백 년 넘은 초등학교… 80년 넘은 아파트 이제 슬슬 서대문 여행을 떠나본다. 개교한 지 116년 된(1896년 개교) 미동초등학교를 지나 약 200m쯤 가면 낡은 녹색 건물 하나가 나타난다. 1층에 편의점, 지물포, 사진관, 음식점이 들어선 것으로
보아 무슨 상가건물 같은데, 나무 현판엔 ‘충정아파트’라고 쓰여 있다.
그렇다. 이 아파트가 대한민국 현존 최고령 아파트다. 1930년에 지어진 이 아파트는 소유주 도요타 다네오(豊田種雄)의 이름을 따 ‘도요다아파트’(혹은 풍전아파트)로 불렸다고 한다. 높은 건물이 없던 시절 지하 1층, 지상 4층의 이 건물은 반도호텔(현재 롯데호텔 자리)과 함께 서울역 부근의 랜드마크였다. 중앙난방에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됐다. 도로 확장으로 절반이 헐려 나가고 퇴락한 아파트일지언정 사람 사는 정취는 훈훈하다. 삼각 형태의 특이한 중정(中庭)에는 기능을 잃은 거대한 굴뚝이 남아 있고, 복도 난간에는 화분들이 놓여 있다. 복도는 항아리, 세탁기, 자전거 등 살림살이들로 넘쳐난다. 가끔 외부인이 들어와 세간을 집어가는 듯 ‘고물장수 출입금지’ 쪽지가 곳곳에 붙어 있지만, 입주민에게 구경하러 왔노라 양해를 구하면 선선히 대해 준다.
최고령 아파트 탐방을 끝내고 충정로역으로 향한다. 9번 출입구 앞에서 왼쪽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오른쪽에 서양식 벽돌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충정각’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중국집이 아니다). 1910년 개화기 때 한양에 들어와 있던 독일인이 지은 저택이라는데,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2층 다락방까지 있는데,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이탈리안 음식과 와인을 놓고 여자 친구에게 사랑 고백하기 딱 좋은 공간이다.
한 때 집주인이 재개발을 염두에 두고 부수려고 하다가 건축과 교수, 서울시, 시민 등의 완강한 반대로 일단 보류됐다.
이 골목엔 예전 종기에 바르던 이명래고약 본포 터도 있다. 지금은 호프집이 됐다. 이런 사적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우리 스스로가 부끄럽다.
명문 연세대… 최초의 양방병원
이제 충정로역에서 2호선을 타고 신촌역으로 향한다. 신촌 로터리 및 서강 일대에는 4년제 대학만 다섯 곳이 자리하고
있다.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홍익대, 추계예술대 등이 그곳. 거기에 명지대 인문캠퍼스, 경기대 서울캠퍼스, 감신대 등도 서대문에 있다. 신촌에 대학가가 자리하게 된 데는 선교사들의 영향이 컸다. 그중에서도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자
의과대학인 세브란스병원, 역시 한국 최초의 여자대학인 이화여대는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세브란스병원(연세의료원)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국립병원)이자 의과대학이다. 1885년 4월 10일 미국인 의료선교사인 호레이스 앨런(Horace N.Allen)이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종로구 재동 근처에 광혜원이라는 이름의 종합병원을
세운다. 이후 곧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1886년 앨런 선교사는 제중원 안에 의과대학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양의
(洋醫) 배출에 나선다. 1990년 사업가 세브란스(L.H. Severance)라는 미국인 사업가가 쾌척한 거액으로 옛 서울역 맞은편에 현대식 병원을 지었으니 이것이 세브란스병원이다.
1957년 세브란스의대와 연희대학이 병합해 연세대학교로 출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대문 근처 세브란스병원 자리엔 지금 세브란스 빌딩이 서 있다. 연세대 메인 캠퍼스와 신촌 세브란스병원 사이에 한옥이 한 채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재동 당시의 광혜원 건물을 고증에 따라 복원한 것이다. 연세대의 명물은 뭐니 뭐니 해도 청송대다. 대낮에도 햇빛이
잘 들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이 숲에선, 예전 청춘남녀들의 연애가 끊이지 않았다.
최초의 4년제 여대… 새 명물 ECC ‘눈길’
연세대 의대 쪽으로 나와 한 5분 걸어가면 이화여대 후문이 나온다. 한국 최초의 여자교육기관으로 1886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이 정동 이화여고 자리에 이화학당을 세운 것이 효시다. 하지만 당시 여성이
교육을 받는 것은 점잖은 이들 사이에선 조롱의 대상이 될 정도로 모험이었다. 어렵사리 개교했으나 첫해 유치한 입학생은 단 한명. 그래서 이화여대의 영문명은 지금도 문법에 맞지 않는 ‘Ewha Womans University’다.
고종황제는 당시 기금도 쾌척하고 ‘이화’라는 이름도 하사했다. 배꽃처럼 번성하라는 뜻에서인데, 당시 정동 일대에 배꽃이 많았단다. 1925년 일제강점기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노력으로 여전으로 승격한 이화는, 1935년 지금의 신촌 캠퍼스로 이전한다. 1946년 한국 최초의 4년제 여대로 인가받았다. 올해 개교 126주년을 맞은 이화여대는 학생 수 2만 명, 교수와 교직원 3천600명을 품고 있다. 이화여대는 여성의 지위를 향상 시키고 여성의 권익이 보장받으며 사회진출을 활발하게 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이화여대에 와서 놓치면 아까운 거 하나. 바로 이화캠퍼스 콤플렉스 벨리(ECC Valley)다.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ot)가 설계한 이 공간은 올려 쌓은 것만이 건물이 아니라 땅을 파고도 건물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진기한 사례다. 스크랜튼 여사 동상 쪽에서 남쪽을 향해 보면 널찍한 계곡을 따라 수많은 계단이 이어지면서 양쪽 벽엔 다양한 공간이 존재한다. 대학도서관, 교수연구실, 편의점, 심지어 영화관도 있다.
기왕 이곳에 왔으니 봉원사를 가보지 않을 수 없다. 이대 후문을 나와 10여 분 올라가면 도심에서 보기 드문 대형 고찰에 다다른다. 이 절은 신라 진성여왕 때인 889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그간 수다한 소실을 겪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94년 3천300㎡ 규모로 복원,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과 명부전 범종각 외에 삼천불전과 흥선 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이소정을 옮겨 지은 대방(大房) 등이 볼거리다. 조계종과 쌍벽을 이루는 천태종의 본산인 이 절엔 스님 50여 명이 10만
불자를 아우르고 있다.
이제 봉원사 뒷길을 따라 산에 오른다. 그리 가파르지 않은 산길을 20분쯤 오르니 봉수대 하나가 삐죽이 서있는 산이 나타난다. 안산(鞍山, 296m)이다. 무악산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에선 이따금 산악자전거(MTB) 동호인들이 출몰하곤한다. 물론 일부 산자락엔 암벽이 있어 암벽을 타는 이도 더러 있다. 정상에 오르니 봉수대가 우뚝 서있다. 새해, 해맞이 하러
동해 정동진까지 갈 필요 없다. 안산 봉수대에서도 얼마든지 멋진 해맞이가 가능하다.
뒷산처럼 오르기 편한 안산
정상에서 서대문 일대를 조망하다가 맞은편을 보니 인왕산(仁王山, 338m) 서편 자락이 보인다. 동쪽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하산한다. 대로에 이르니 그곳이 바로 무악재. 현저동에서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무악재 지명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안산을 일명 무악이라고 부른 데서 땄다는 설이 제1설. 풍수지리설에 따라 삼각산 인수봉이 아이를 업고 밖으로 나가려는 형세를 하고 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무악산을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산, 즉 모악(母岳)이라 했고, 그 고개를 모악현이라 하였다는 설이 제2설. 개경에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도읍을 물색하기 위해 남경(당시 지명) 일대를 답사할 때 무학대사가 이 고개를 자주 넘나들었다는데서 연원한 무학재→무악재 설이 제3설. 호랑이(아마도 인왕산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 이 고개를 넘으려면 사람을 모아서 건너갔다 하여 모아재에서 연원했다는 제4설까지 있다. 그 밖에 여러 가지 예명이 있으나 지면 관계상 생략하고 다음 여정에 들어간다.
개미마을, 그리고 화장터
이제는 하도 매스컴에 자주 등장해 식상할 정도가 됐지만, 그래도 한 번 가볼 만한 서울의 몇 안 되는 아름다운 달동네.
홍제동 개미마을에 간다. 3호선 홍제역 2번 출입구 롯데리아 앞에서 7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개미마을)에서 내린 뒤
버스 타고오던 역방향으로 내려오면서 구경하면 된다.
분위기는 이화동 벽화마을이나 삼선동 장수마을과 흡사하지만, 전반적으로 개미마을 쪽이 훨씬 세련된 느낌이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창문틀에 개, 젖소, 돼지 등을 익살맞게 그려 넣은 것이나 축대의 돌 하나하나를 모자이크로 처리한 것, 풍선기구와 종이비행기, 꽃 등을 형상화한 구성 작품들이 재밌다. 전반적으로 마을 분위기가 을씨년스럽지 않고 따사롭다. 자칭 ‘빛 그린 어울림 마을 1호’라는 명칭이 어색하지 않다.
홍제동 하면 중년 이후 세대에겐 잊지 못할 게 하나 있다.
바로 홍제동 화장터. 예전 서울에서 초상을 치른 후 화장을 하려면 이곳에서 했다. 그곳은 어디쯤인가. 3호선 무악재역과 홍제역사이 홍제삼거리에서 모래내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에 고은초등학교가 있다. 바로 이곳이 예전 홍제동
화장터였다. 천재화가 이중섭, 소설가 김동인도 이곳에서 한 줌의 재로 산화했다. 1970년 벽제승화원이 생기면서 홍제동 화장터도 불을 껐지만, 화장터에 대한 뒤숭숭한 기억은 오늘도 계속된다.
이따금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홍제삼거리를 좌회전해서 가자고 하면 기사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럼 짐짓 너스레를 떤다. “아, 지금이 어느 땐데 화장터 자리 신경 쓰세요!”
옛 화장터 길을 따라가다 서대문구청 쪽으로 좌회전해서 구청 청사를 지나자마자 연북중학교 쪽으로 들어가면 서울시 자치구 유일의 자연사박물관이 나온다. 2003년 7월 국내 최초의 종합자연사박물관으로 개관한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이다. 총면적 1만174㎡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로 구성된 자연사박물관은 매년 30만 명 이상 방문하는 우리나라 대표
자연사박물관으로 자리 잡았다.
서대문, 서소문은 언제쯤…
이제 서대문구 기행을 마칠 때가 됐다. 서대문구는 1943년 구(區)제도가 시행되면서 설치된 맏형이다. 한때 은평구 구파발까지 아우르는 넓은 지역이었지만 1975년 남동쪽 일부를 종로구·중구·마포구 등에 각각 편입시키고, 1979년에는 은평구까지 독립시킨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대문은 도심에서 가까운 전통적 주거지역으로 북아현동, 천연동 일대는 오래전부터 형성된 전형적 주택지대다.
특히 공지영의 소설 ‘봉순이 언니’의 무대가 된 북아현동은 1970년대로 거슬러간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할 정도로 아직도 고색창연한 분위기다. 아쉬운 건 서대문구에 서대문(돈의문)과 서소문(소의문)이 없다는 것. 서울시에서 강북삼성병원과 경향신문 사이에 돈의 문을 짓겠다고 발표했던 것 같은데, 아직까진 그곳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