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증언자: 최복덕(여)
생년월일: 1919. 9. 8(당시 나이 62세)
직 업: 구멍가게 (현재 무직)
조사일시: 1988. 12
개 요
22일 오후 5시경 화정동 가톨릭신학대학 근처에서 일어난 총격전에서 부상당한 최복덕 할머니의 증언이다.
집안에서 맞은 날벼락
나는 1919년 9월 8일 장성군 진흥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고, 17살 되던 해에 아는 분의 중매로 결혼을 했다. 남편은 당시 송정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정확히 몇 년도에 광주로 이사를 왔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해방을 광주에서 맞았으니 광주로 온 지도 벌써 40년이 넘은 셈이다. 광주에서는 줄곧 구멍가게를 했다.
1980년에는 화정동에 있는 국군통합병원 맞은편에서 구멍가게를 내고 있었다. 그해 내 나이 예순둘이었으며 왜 그런 난리가 났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들리는 소문에 군인들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가게문도 열지 않고 집에 있었다. 바로 앞이 국군통합병원이라 그 앞에는 항상 군인들이 많이 있었다. 남편과 나는 군인들 눈에 띄기만 하면 죽는 줄 알고 시위 구경은커녕 문 밖에도 일절 나가지 않았다.
내가 다친 날은 22일이다. 저녁 6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요란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남편과 나는 무서워서 뒤꼍에 숨었다. 한동안 총소리가 들리더니 조용해졌다. 이제 괜찮은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됐는가 내다볼 요량으로 거실로 막 들어서는데, 다시 총소리가 들리면서 집으로 총알이 날아 들어왔다. 총소리에 놀라 어쩔 줄 모르고 멍청히 서 있는데 총알이 내 왼쪽 귀를 스치고 왼쪽 볼에 박혔다. 얼굴에서 주루룩 피가 흘렀다. 그대로 주저앉아 있다가 총소리가 그친 후에 남편이 나를 방으로 데려갔다. 얼마나 총을 쏘아댔던지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총알이 장농문을 뚫고 이불 속에 박혀 있었다. 밖에 나가기만 하면 죽는 줄만 알고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23일 아침에 어떻게 알았는지 군인들이 집으로 들어와 나를 업고 국군통합병원으로 갔다. 통합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한 달 동안 있었는데, 식구들과의 면회는 한번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남편조차도 면회를 못 하게 했다. 집에서는 면회도 안 시켜주고 한 달이 넘도록 생사를 확인할 수 없어 내가 죽어서 군인들이 갖다 버리지 않았는가 생각했다고 한다.
내가 있던 병실에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어깨가 잘린 사람, 다리가 절단된 사람, 등에 총알이 박힌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가족과 면회를 하기도 했다. 아마 빽이 있는 사람들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군인들이 끓여준 죽을 먹었다. 침대가 창문 바로 옆에 있었는데 가끔씩 창문을 통해 정문 앞에 서 있는 남편과 친구들을 볼 수가 있었다. 남편과 친구들은 정문 앞에 한참 서 있다가 가곤 했다. 한 달 후에 조선대병원으로 옮겼다. 그 때야 우리 식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조선대병원에 5개월 정도 입원해 있다가 퇴원을 했다.
이북 군인들도 그러지 않았는데
수술을 세 번이나 했지만 왼쪽 귀는 들리지 않고 입이 오른쪽으로 비틀어졌다. 지금도 왼쪽 이마에는 주름이 하나도 없다. 그 후 기독병원에서 사비로 귀수술을 했지만 들리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계속 병원을 다니지만 통증이 없어 지진 않는다.
나는 영세민카드가 있어서 의료보험 처리가 되는데 종합병원으로 가면 소견서를 가져오라는 등 귀찮게 하고 꼭 거지 취급한다. 그래서 개인병원을 다니면서 치료를 하고 있다. 화정동에서 그날(22일) 다친 사람들은 거의 다 '징그러워서' 그 동네에서 살기 싫다고 이사를 갔다. 그 후 우리도 양동, 쌍촌동, 농성동을 전전하며 이사를 다녔다. 내가 다친 이후로는 가게도 못 하고 있다. 자식은 1남 1녀가 있는데, 딸은 충청남도 청양으로 시집을 가서 살고 있고, 아들은 서울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살고 있다. 아들은 가난한 살림에 애들이 다섯명이나 되어서 우리를 돌보아줄 형편이 못 된다. 내가 다치기 전까지만 해도 구멍가게를 해서 먹고 살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젊었을 때 해놓은 금반지 등 모아둔 돈은 치료비와 생활비를 하느라고 다 써버렸다. 동사무소에서 영세민이라고 매달 쌀과 연탄값이 나와서 그것으로 살고 있다.
6.25 전쟁 때 이북 군인들도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내가 살던 동네에 이북 군인이 내려온다고 해서 땅굴을 파고 숨기도 했는데, 이북 군인들은 도리어 우리를 보면 고생한다고 하면서 참 좋게 대해 줬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아무 죄도 짓지 않는 사람들의 집에까지 총을 쏘아대다니 참으로 이해가 안 된다.
나는 5·18 부상자동지회에 등록을 해서 회의를 할 때마다 나가는데, 그곳에는 1980년 당시에 통합병원이나 조선대병원에서 같이 치료받던 사람들이 많이 있어 한 식구 같은 생각이 든다.
금년(1988년) 7월 29일날 시청에서 보상금이라고 3백만 원을 줬는데, 보상금을 더 준다고 말만 해놓고 지금껏 아무 말이 없다. 남편과 나는 올해 일흔 살인데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빨리 보상을 해줬으면 좋겠다. (조사.정리 이현주) [5.18연구소]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