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이야기
윤 소 천
꽃 한 포기 볼 수 없는 겨울의 텅 빈 뜰의 풍경은 언제나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추위를 견디며 나와 함께 겨울을 나는 나무들, 지난 늦가을 한 잎 두 잎 잎을 떨쳐내더니 이제는 알몸으로 처량하게 서 있다. 차가운 하늘 아래 벌거벗은 채로 매서운 추위를 견디며 천연스레 이겨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고개를 숙이게 한다.
나무 가까이 다가가 유심이 들여다보면 단풍은 벌써부터 그 빈자리에 틔울 싹을 삐쭉이 마련하고 있고, 목련은 버들강아지 같은 꽃망울을, 매화는 어느새 꽃눈을 달고 있다.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무들이 한겨울의 추위를 이겨내며 말없이 찬란한 새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단풍의 연두색 여린 잎, 그리고 매화의 은은한 향기, 목련꽃의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을 그려보면 벌써부터 새봄이 기다려진다.
며칠 전 대학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는 딸애가 제주 올레길 트레킹을 하고 돌아왔다. 학창시절 몇 차례 가족여행을 다녀온 후로는 여행의 맛을 알았는지 틈만 나면 국내외 어디든 떠나곤 하여, 이제는 자연스레 홀로 여행 가방을 들고 길을 나선다. 휴가를 이용해 짧지 않은 일정으로 떠나는 여행길을 배웅해 주면서 여자이기에 은근히 걱정도 되었지만, 요즈음은 젊은이들을 위한 유스호스텔이 많아 홀로 여행하는 데도 불편하지 않고 비용도 적게 들어 다들 편리하게 이용한다고 한다.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잊을 수 없는 값진 겨울여행이었다고 수다를 떨며, 특히 <차귀도>의 겨울바다 물빛과 일몰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규격화되고 답답한 도시생활에서 활기를 되찾아주는 것은 여행이 가장 좋은 처방이라 생각한다. 봄과 가을이 여행하기에는 가장 좋은 계절이기는 하지만, 이때에도 가급적이면 홀로 떠나는 것이 좋고, 겨울여행도 봄이나 가을에는 느낄 수 없는 색다른 의미를 맛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혼자의 여행을 권하는 이유는 언제든지 생각날 때 불쑥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동행과의 여러 가지 사정을 맞추기가 어려운 이유에서다.
불가의 최초 경전인‘숫타니파타’에 무소의 뿔이 나오는데, 동반자들 속에 끼이면 쉬거나 가거나 섰거나 또는 여행하는 데에도 항상 간섭을 받게 된다. 남들이 원치 않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한다. 이는 어차피 사람은 하나의 작은 우주로 홀로 설 수밖에 없는 독자적이고 개성적 존재라는 뜻일 것이다.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1805-1875)은 가난한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날 수없이 절망에 빠졌지만 이를 극복하고 수많은 걸작을 남겼는데, 독신으로 지내며 대부분의 생애를 여행으로 보냈다. 그는‘여행은 나에게 있어서 정신을 다시금 젊어지게 해주는 샘이다’라 하였다.
여기 무등산 산정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설경처럼 지금쯤 백두산의 천지와 대협곡은 얼음과 눈에 쌓여 순백의 신세계를 펼치며 그 신령스러움을 더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황산’과‘장가계’의 봉우리와 협곡들도 선경 속에 하얀 눈의 신세계를 선보이고 있을 것이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어디든 떠나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눈과 마주하고 싶고, 날씨 좋은날이라도 만나 겨울바다의 그 짙푸른 물빛에 눈이라도 씻는다면 새롭게 정신이 번쩍 날 것만도 같다.
( 2012 . 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