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일요일 함께 만나 새로 나온 영화를 감상해온지 벌서 12년, 지난 9월 29일 일요일에도 어김없이 우리들 영화모임은 서울극장 로비에서 만났다.
이날 본 영화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6.25전쟁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북한군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양동작전에서 사투를 벌인 학도병들의 투혼을 그린 영화로 나이 어린 학도병들의 나라사랑 정신이 진하게 묻어난다.
장사리 전투는 1950년 9월 14일~15일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서 벌어진 양동작전이다. 다시 말 해 영덕 장사리를 치고 들어가면 적의 시선을 영덕으로 몰아 부산을 치고 들어가려는 길목도 막고, 경기도 인천 지역으로 가는 적군의 병력 유입을 막아서 영덕으로 유인하는 성과를 올리는 작전이다. 이런 양동작전을 위하여 지역을 영덕 장사리 해변으로 정하고 이를 실행 할 것을 미8군에 지시하였으나 미8군의 병력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를 진행하지 못하자 장사상륙작전 유격대원을 모집하게 된다. 그 결과 1950년 9월 13일 오후 3시경 부산항 제 4부두에 유격대원 약 800여명(학생대원 772명, 학생외 지원요원 56명)이 도착하는데 모두 들 우국충정으로 가득 찬 10대 청소년 들이었다.
이들 군번도 없는 어린 나이의 청소년들은 교복을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은 후 15일간 총 쏘는 훈련을 하고 전장에 투입된다. 대부분 부모님께 유서를 쓰고, 유품을 남긴 채, 3일치의 식량으로 건빵 한 봉지와 미숫가루 세 봉지를 지급 받은 채 3일간 버틸 수 있는 총알을 챙겨 받고 전장에 뛰어든다. 원래는 8군에 떨어진 작전명령이었으나 인민군 복장을 입고 특수 작전을 해야 하는 사정상 북한군과 외모가 비슷한 남한 출신 학생들인 학도병에게 작전명령을 맡긴 것이다.
이들 학도병을 태운 LST 문산호(해군 수송함)는 부산항에서 9월 13일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로 출발했지만 때마침 파고 3~4m의 심한 태풍 케지아호의 기습으로 배와 함께 싸워 보지도 못하고 수장되어 버린 학도병도 있었고, 나머지 학도병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서 그 다음날인 14일 새벽 4시 30분에 육지 장사해변에 도착하여 적과의 교전을 벌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적군의 총알이 빗발치는 문산호에 오르기 위해 밧줄을 타지만 적군의 무차별 총격으로 많은 병사들이 바다에 빠져 분사했다.
급기야 9월 15일 오전 문산호를 타고 장사에 상륙한 이들은 국도 제7호선을 봉쇄하고 북한공산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문산호가 좌초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총알과 식량이 부족해진 가운데에서도 7번 국도 차단 임무를 계속 수행하여 인천 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작전에서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사망한 학도병을 제외하면 모두 행방불명 상태였다. 인천상륙작전은 이렇듯 맥아더 장군만의 업적이 아니라 교복을 입은 채로 총을 들고 나가 목숨 걸고 싸운 10대 청소년 특히 장한 학도병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장사리 전투에서 희생된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빈다.
<후기>
6.25당시 학도병들의 활약을 다룬 영화 장사리를 감상하고 난 소감은 자연적으로 박기병 6.25참전언론인회 회장 얘기로 화제가 이어졌다. 박기병 회장은 6.25 당시 춘천사범학교 재학중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춘천대첩의 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총탄이 비오듯하는 춘천전투에서 박기병을 비롯한 학도병들이 포탄을 나르며 용전해 북한군의 서울 침투를 3일간이나 지연시킨 대첩이 바로 춘천대첩이다. 이전승을 기념해 2군단에서는 매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갖고 있지만 대한언론인회의 많은 회원들이 이행사에 참석해 환대를 받을수 있었던 것도 박기병 회장과의 인연이 있어 가능했음을 새삼 상기해 본다. 박기병 회장의 노익장이 더 큰 봉사의 기회로 발현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