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문제 제기로 시작된 '정체성' 논란이 정치권에서 좀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박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두고 정체성이 의심스럽다며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의 간판을 내려야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 바 있다. 또 한나라당은 당 차원에서 정체성 관련 특별 대책기구까지 구성했다.
여권에 대한 박 대표의 이같은 정체성 문제 제기는 최근 여당의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 제출 등이 계기가 된 듯하다. 논란이 된 박 전 대통령의 일본군 복무경력과 창군 초기 그의 좌익전력은 현재 정치권에서 일고 있는 정체성 논란과 결코 무관치 않다. 문건과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친일-좌익행적을 '실록'으로 남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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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제5대 대선 당시 윤보선 후보측은 선거 이틀전에 박정희 후보의 좌익전력을 폭로, '사상논쟁'을 가열시켰다. 사진은 당시 이를 대서특필한 <동아일보> 호외(1963.1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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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선거 가운데 제5대 대통령 선거는 어느 선거보다도 국민적 관심이 높았고 열기도 뜨거웠다. 4.19로 탄생한 민주당 정부를 5.16쿠데타로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은 박정희 후보가 군복을 벗고 여당후보로 나왔다. 이에 맞서는 야당후보는 5.16으로 인해 대통령 자리를 내놓게 된 윤보선 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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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호외' 제작 뒷 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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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대선 당시 일간지들은 연일 호외를 발행하며 선거전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 것은 윤보선 후보 진영의 폭로를 단독보도한 10월 13일자 <동아일보>의 호외.
<동아> 호외는 당시 김성열(동아일보 사장 역임) 정경부장이 주도하고 김아무개 기자가 기사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천관우 편집국장은 반대의사를 표명, 보도를 놓고 사내에서 적잖은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아>는 13일자 호외의 경우 무려 200만장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지방의 경우 헬기로 수송하였으며, 호남지방에 집중 살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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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선거를 불과 이틀 앞둔 1963년 10월 13일. 당시 야당지로 명성을 날리던 <동아일보>의 호외 하나가 서울시내 중심가에 뿌려졌다. 거리에서 타블로이드판 크기의 호외를 주워든 시민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육군대장 출신의 박정희 후보가 좌익혐의로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호외 양면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당시 야당인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측이 증거자료로 제시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1949년 2월 17일자 경향신문과 2월 18일자 서울신문의 기사였고, 또 하나는 자체적으로 입수한 '문건'이었다. 두 신문의 내용은 박 후보가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은 사실을 소개한 짤막한 기사였다.
민정당의 폭로로 공화당은 선거 코앞에서 위기를 맞게 됐다. 서인석 공화당 대변인은 즉각 반박성명을 통해 "조작폭로전술로 악랄한 인신공격"이라고 받아쳤다. 그는 또 "박정희 총재는 김창룡 장군에 의해 관제 공산당원으로 몰린 사실이 있으나 그것은 여순반란사건과 관련시켰던 것은 아니었다"며 "그 후 자유민주주의자임이 밝혀져 군의 요직을 역임했고, 반공전선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고 해명했다.
좌익혐의로 군사재판서 무기징역 언도받아
그러나 서 대변인의 '해명'은 민정당의 폭로를 잠재우기는커녕 도리어 박 후보가 한 때 공산당원이었고 또 그로 인해 재판을 받은 사실을 공개적으로 시인한 꼴이 되고 말았다. 최근 정치권에서 한창인 '정체성' 논란의 원조격인, 이른바 5대 대선 당시의 '사상논쟁'은 이로부터 점입가경으로 빠져들었다.
1949년 2월 8일 구 통위부(미군정 당시 국방부에 해당하는 부서로, 현위치는 서울 충무로 코리아헤럴드 뒷편 인근임) 건물 장교식당에 임시로 군사법정이 마련됐다. 재판장은 김완룡(예비역 소장, 육군 법무감) 중령이 맡았고, 심판관으로 김대현 중령 등 3인, 검찰관 신 모(6.25 때 전사) 중위, 관선변호인으로 최영희(6.25 때 전사) 중위 등이 참석하였다. 또 피의자들의 조서 작성을 맡았던 방첩대 소속 이한진 대위가 배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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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 제1중대장 시절의 박정희 대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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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 군사법정에 당시 육군본부 소속 박정희 소령이 피고인 신분으로 섰다. '문건'에 따르면 박정희는 이날 이발을 새로 하고 머릿기름을 많이 발라서 유난히 번득였다. 복장은 당시로선 예복인 진한 구레바인 정복차림이었다.
그는 재판장의 신문에 순순히 피의사실을 자백하고 또 시인했다. 이날 법정에서 그는 국방경비법 제18조, 33조 위반으로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이 판결로 그는 현역 소령에서 파면됐고, 급료도 몰수당했다.
그와 같이 재판을 받았던 최남근 중령, 오일균 소령, 조모 대위 등은 사형 구형에, 사형 언도를 받고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박정희와 만주군관학교 또는 일본 육사 선후배 사이였다. 최남근은 봉천군관학교 5기생 출신이며, 오일균은 일본육사 61기 출신이었다.
그의 만주 신경군관학교 1년 선배이자 3공 시절 감사원장을 지낸 이주일은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구형받았으나 무죄를 언도받고 풀려났다. 이주일은 박정희의 권유로 군 입대 전에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또 박정희의 주선으로 군에 입대한 것으로 '문건'에 나와 있다.
박정희는 집권 후 자신의 군사재판 관련자료를 모두 폐기토록 지시한 바 있다고 한 인사는 필자에게 증언한 바 있다. 그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공문서 형태로 된 박정희 관련자료는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는 실정이다. 다행히 필자는 지난 97년 모 기관에서 박정희가 좌익혐의로 군사재판을 받은 후 최종적으로 어떤 조치를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공문서 하나를 입수할 수 있었다.
'징역 15년'으로 감형 거쳐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재심의 최대 수혜자
1949년 4월 18일자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18호>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육군본부 총참모장 이응준 소장의 명의로 발령된 이 문건은 숙군 때 군사재판에서 1심 판결을 받은 사람 가운데 이른바 '지휘관 확인', 즉 재심을 거쳐 형량이 재조정된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정희도 이 가운데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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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는 재심과 '확인장관' 등의 선처 끝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사진은 박정희 등 69명에게 감형 또는 형집행정지를 명한 육군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18호) 사본(총5매 짜리). 붉은선 부분이 박정희 관련내용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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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부 특명 제5호(1948년 12월 20일부)에 근거해 용산 육군본부에 마련된 이 법정에서는 박정희 등 69명이 재판을 받았는데, 이들의 죄과는 국방경비법 16조 위반, 즉 '반란기도죄'였다. 이들 중 영관장교는 그를 포함해 소령이 3명, 대개는 위관장교이며, 하사관도 10여 명 포함돼 있다.
이들의 구체적인 범죄사실로는 '전 피고인은 단기 4279년(1946년) 7월경부터 4281년(1948년) 11월경에 이르는 동안 대한민국 서울 기타 등지에서 각각 남로당에 가입하고 군 내에 비밀세포를 조직하여 무력으로 합법적인 대한민국 정부를 반대하는 반란을 기도'하였다는 것. 이들 가운데 박정희의 죄과는 구 경비법 32조 위반, 범죄사실은 '군 병력 제공죄'로 적시돼 있다.
명령서에 따르면, 전체 69명 가운데 정진 등 4명은 무죄 판정(한동석은 징역형에 한하여 집행정지)을 받았으나 나머지 66명은 유죄 판정을 받았다. 대상자 대다수는 여기서 감형조치를 받았다. 즉 징역 15년은 10년으로, 징역 10년은 5년으로, 또 징역 5년은 징역 1년으로 각각 감형되거나 혹은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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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재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은 박정희를 '형집행정지'로 풀어준 이응준 육군본부 총참모장(육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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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경우 (1심)'판결'에서 '파면, 급료몰수, 징역 무기'를 선고받았으나 '심사장관의 조치'에서 '징역 15년으로 감형하며, 감형한 징역을 집행정지함' 조치를 받았고, 그리고 다시 '확인장관의 조치'에서 '확인'을 받았다.
박정희는 이들중 유일하게 무기징역 판결을 받은 사람이었으나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는 재심의 최대 수혜자인 셈이다. 당시 '확인장관'은 당시 육군의 최고 책임자인 이응준 총참모장으로, 그는 일제하 일본군 대좌(대령) 출신이다.
그와 함께 '재심'을 받은 사람 가운데는 신경군관교 후배인 황택림(5기생, 본과는 일본육사 59기 졸업) 대위도 포함돼 있다. 황은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재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됐으며, 다시 확인장관 조치에서 징역 5년으로 감형됐다.
죽음의 문턱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박정희는 이후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의 배려로 육본 정보국에서 무급 문관으로 근무하다가 6.25 발발 5일 뒤인 6월 30일자로 현역에 복귀했다. 그는 이로써 '좌익 악령'을 공식적으로는 떨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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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근 오일균 사형집행 때 '대한민국 만세' 불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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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정희 등 재판서 재판장 맡은 김완룡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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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군 당시 처벌받은 사람 가운데 영관급은 몇 안됐다. 박정희, 이상진, 오일균, 조병건, 김학림 등이 소령이었고 대부분은 위관급 장교와 하사관들이었다. 처형된 사람 가운데 중령은 최남근과 김종석 두 사람이었다. 최남근(崔楠根)은 봉천군관학교 6기생 출신이며, 김종석(金鍾碩)은 일본육사 56기로 박정희 1년 선배였다.
둘 가운데 최남근은 유독 일화가 많다. 춘천 8연대장 시절 그의 밑에서 경리장교를 지낸 박경원(육군 중장 예편, 내무.체신장관 역임)씨는 "통솔력이 우수해서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며 "금전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가 좌익혐의로 잡혀온 것을 알고 찾아가 만났더니 "하우스만이 나를 빨갱이로 몰아서..."라며 말끝을 흐리더라는 것이다.
그의 재판 당시 재판장을 맡았던 김완룡(예비역 육군 소장, 육군 법무감 출신)씨는 재판 당시 상황을 아직도 소상히 기억하고 있다. 김씨는 지난 97년 필자와 만나 그의 재판을 둘러싼 비화 등을 자세히 증언한 바 있다. 그의 증언 한 토막을 들어보자.
"재판장석에 앉아서 재판을 하고 있는데 그가 다른 사람들 몰래 나를 향해 오른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면서 사형 여부를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그 때 주모자는 극형에 처하라는 주문을 받고 재판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최와 친했는데 더 이상 재판을 할 수 없어 재판을 거부했었죠."
당시 군사재판은 사실심리 후 변론을 마치고 곧바로 그 자리에서 언도를 내리는게 관행이었다. 그러나 김씨는 최에 대해서는 언도를 미루었다. 당시로선 '특례'였다. 그리고 그 길로 김씨는 이응준 총참모장을 찾아가 "최남근을 무기징역에 처하자"고 건의하자 이 총참모장은 "재판장이 알아서 해야지"라며 명확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김씨는 다시 채병덕 장군(당시 3군 참모총장)을 찾아가서 상의를 했더니 채 장군이 "이게 무슨 소리냐"며 노발대발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이범석 국방장관을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이 장관은 "채 장군 말이 맞다. 다른 사람은 다 사형시키는데 그 사람만 왜 빼느냐"고 해서 다음날 서면으로 '최남근 사형'을 통지한 후 얼마 뒤 (보직)사표를 내고 청주 병사부사령관으로 내려갔다.
김씨는 그 때를 회고하면서 "숙군 재판 당시 주모자급은 위(상부)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 재판관이 재판에서 완전히 독립한 상태는 아니었다"며 "최남근과 오일균은 사형집행 때 '대한민국 만세'를 불러 진짜 빨갱이로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그의 사형집행을 맡은 사람은 헌병장교 문용채였다. 문용채는 만주 봉천군관학교 5기생으로 최남근의 1년 선배였으며, 만주군 복무시절 평촌헌병대장을 지냈다. / 정운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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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문제제기로 시작된 '정체성' 논란이 정치권에서 좀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박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두고 정체성이 의심스럽다며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의 간판을 내려야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 바 있다. 또 한나라당은 당 차원에서 정체성 관련 특별 대책기구까지 구성했다.
여권에 대한 박 대표의 이같은 정체성 문제 제기는 최근 여당의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 제출 등이 계기가 된 듯하다. 논란이 된 박 전 대통령의 일본군 복무경력과 창군 초기 그의 좌익전력은 현재 정치권에서 일고 있는 정체성 논란과 결코 무관치 않다. 문건과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친일-좌익행적을 '실록'으로 남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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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는 육사 제1중대장으로 근무시절 남로당 가입혐의로 체포됐다. 사진은 육사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정문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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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 졸업앨범 |
| 박정희가 남로당 가입 등 좌익혐의로 군 수사당국에 체포된 것은 1948년 11월 11일이었다. 이 날은 육사 7기생들의 졸업식날이기도 했다. 박정희(당시 육사 1중대장) 소령은 여순사건 관련자 토벌 차 광주로 따라 내려갔다가 육사로 돌아온 직후였다. 당시 군 수사당국은 육사로까지 범위를 넓혀 좌익분자를 색출하고 있었다.
이 무렵 태릉 주둔 1연대의 정보주임 김창룡(특무대장 역임)은 수족들을 풀어 서울시내에서 '거동수상자'들을 붙잡아 조사를 벌였다. 그러던 중 부하들이 한 거동수상자를 체포했는데, 그가 붙잡히자마자 뭔가를 우물우물하며 삼키는 걸 보고 수상히 여겨 김창룡에게 그를 보고했다. 확인결과 그는 박정희를 포섭한 이재복이었다.
거동수상자 불심검문에서 잡힌 남로당 군총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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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포섭한 이재복은 누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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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를 남로당에 가입시킨 이재복(李在福, 1948년 당시 46세)은 원래 목사였다. 평양 신학전문대학 졸업 후 일본 동지사대 신학부를 나와 경북지방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사회주의자가 된 그는 해방 뒤 경북 도인민위원회 보안부장을 거쳐 남로당에 입당했다.
그는 박정희의 형 박상희, 5.16후 박정희를 포섭하러 남파됐다가 체포돼 사형된 황태성 등과 동년배로 친구사이였다. 그는 이른바 '대구 10.1사건'으로 박상희가 죽자 그의 가족을 돌봐주는 등 박정희 집안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남로당에서 군(軍)총책을 맡고 있었는데, 군부의 세포들은 대개 그가 포섭했거나 아니면 그가 포섭한 중간책에게 다시 포섭당한 사람들이었다. 박정희와 처형된 최남근 중령 등은 그가 직접 포섭한 인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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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창룡의 직속상관인 김안일(육군 준장 예편) 특무과장은 이재복이 체포된 경위를 유양수씨(육군 소장 예편, 현 박정희기념사업회장)에게 증언한 바 있다. 다음은 유씨의 전언.
"어느 날 김창룡이 와서 '거동수상자를 하나 붙잡았는데 이것저것 조사해도 마땅한 증거 같은게 안나와서 석방하려다가 석방 직전에 오일균을 감옥서 꺼내 물어보니 그가 바로 남로당 군 총책 이재복이었다."
이재복에 이어 이재복의 비서 겸 군사연락책 김영식이 체포되면서 숙군 수사는 급진전됐다. 수사팀은 김영식을 통해 군내 좌익세포 명단을 통째로 손에 넣게 됐다. 다시 김안일 특무과장의 증언을 들어보자.
"김영식을 데리고 전국의 군부대를 돌면서 그에게 남로당 세포들을 찍으라 했더니 이후의 수사는 그냥 주워 담기만 하면 되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재복의 명단 속에 바로 박정희 소령의 이름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군내 좌익세포 조직을 처음으로 제공한 사람은 박정희"
박정희에 앞서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을 지낸 김점곤(81, 육군 소장 예편, 전 경희대 부총장) 평화연구원 원장은 "숙군 과정에서 군내 (좌익세포들의) 조직구도를 처음으로 구조적으로 제공한 사람은 박정희 소령이었다"고 지난 97년 필자에게 증언한 바 있다. 김 원장은 그러나 "당시 박정희는 남로당 특수조직부에서 지명한 '거물'이었으나 이데올로기 때문은 아닌 것 같으며, 활동도 미약했다"고 덧붙였다.
박정희가 좌익연루 혐의로 군 수사당국에서 조사를 받고 있을 때 한 인사가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을 방문했다. 그는 해방후 미군정 때 외무부 직원 신분으로 중국에 파견돼 북경, 상해에 머물고 있던 동포들의 귀환작업을 도왔던 강측모씨(97년 당시 79세, 함북지사, 이북5도위원장 역임)였다. 강씨는 북경서 박정희 이주일 등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가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달려온 것.
그는 백 국장을 만나자 서명용지 하나를 꺼내 보이며 "중국에서 귀환한 동포 20여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은 것"이라며 "박정희는 중국에서의 경력으로 볼 때 빨갱이가 아닌 것을 확신한다"고 장담했다. 6.25 발발 후 정일권 참모총장의 보좌관 시절 강씨는 대구로 옮긴 육본에서 '민간인 신분'의 박정희를 만났다. 그는 박정희에게 "빨갱이라면 왜 대구 왔나, 빨리 계급장 달아라"고 말했다고 필자에게 증언한 바 있다. 어쩌면 강씨의 판단이 정확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한 경위와 시점 등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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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비서관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눴던 김종신씨. 사진은 70년대 초반 청와대 경내에 나타난 멧돼지를 배경으로 찍은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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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신씨 제공 | 박정희는 생전에 자신의 좌익전력에 대해 가끔 털어놓은 바 있다. 부산일보 기자로 활동하다가 '0시의 횃불' 출간을 계기로 60년대 후반 청와대 사회.언론 담당 비서관으로 근무했던 김종신씨(74, 전 부산문화방송 사장)는 그런 얘기를 가장 가까이서 직접 들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70.7.7)될 무렵 어느날 김 비서관은 박정희와 육사 동기생인 정강 장군을 만났다. 헌병 출신인 김 비서관은 헌병학교 교장 출신인 정 장군과는 알고 지내온 사이였다.
이날 정 장군은 김 비서관에게 박정희와 자신과의 관계를 털어놓으면서 "5.16 쿠데타가 일어난 아침 주동자가 박정희 소장이라는 말을 듣고 나라가 뒤엎어질 줄만 알았다. 나는 그와 동기생이기 때문에 그의 전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위험한 인물로 봐 왔다"고 말했다.
그 후 정 장군 문병을 갔다온 얘기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김 비서관은 정 장군이 들려준 얘기를 용기를 내 박정희 앞에서 꺼냈다. 선거 때마다 '사상논쟁'이 벌어졌으나 한번도 당사자의 시원한 해명이 없었기에 그 역시 궁금한 점도 없지 않았다. 이윽고 박정희의 답이 이어졌다.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되는 분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면서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하려다 사관학교 교관생활이 따분하기도 하고 해서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 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
박정희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 찍은 적 없다"
박정희의 '고백'대로라면 그는 남로당에 가입한 적이 없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숙군 실무책임자로 조사과정에서 박정희의 '자술서'를 직접 읽어본 김안일 특무과장은 박정희의 남로당 가입설을 강하게 주장한다. 김 과장은 "박정희는 '대구 10.1사건'으로 형 박상희가 우익에 피살되자 그에 대한 복수심과 이재복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한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그가 남로당에 가입한 시기는 흔히 '춘천 시절'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8연대(연대장 원용덕 대령)가 주둔하던 춘천은 그가 육사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1946.12.14)한 후 첫 부임한 곳이다. 이곳에서 그는 9개월 정도 근무 후 다시 이듬해 9월 육사 중대장으로 전보됐다. 그러나 그의 근무행적을 기록한 '장교자력표'에는 춘천시절이 빠져 있다. 아마 원본은 없어지고 이후 재작성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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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 8연대 작전참모 대리로 근무하던 시절에 박정희가 작성한 망양리 인근 가상 작전도. 제작일자는 (19)47년 7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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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와 춘천 8연대에서 같이 근무했던 사람 가운데 생존자는 그리 많지 않다. 지난 97년 필자는 취재과정에서 육사 3기생 출신으로 춘천 8연대 시절 박정희 밑에서 교범 번역 등을 도왔던 염정태(육군 대령 예편, 97년 당시 74세)씨를 만나 박정희의 '춘천 시절'을 복원할 수 있었다. 다음은 그의 회고담이다.
"사관학교 시절부터 박 선배의 명성을 들었습니다. 당시 그는 연대본부 작전주임을 맡고 있었는데, 강릉 3대대(대대장 송요찬 중령)로 잠시 파견을 나와 3개 대대 신임장교(36명)들의 교육을 맡았습니다. 당시 철도관사를 장교숙소로 썼는데 파견돼 오는 날 보니 샤벨(칼날은 없고 크롬 도금한 지휘도)을 차고 오셨더군요."
그 무렵 두 사람은 죽이 맞아 바쁜 와중에도 일과가 끝나면 강릉에 있는 명월관, 봉래관으로 쏘다니며 자주 술을 마셨다. 술값은 보급품으로 지급되던 '씨레이션'(미군 야전용 휴대식품)을 팔아 충당했다. 1개월간의 파견 근무가 끝난 후 박정희는 춘천 연대본부로 복귀했다. 박정희가 남로당 인맥과 연결된 것은 바로 그 이후라고 염씨는 확신했다.
"8연대에는 빨갱이가 수두룩했습니다. 우선 박정희와 신경군관학교 2기 동기생인 이상진(8연대 부연대장) 소령은 연대 내 총책이었습니다. 박 전대통령이 이들과 자주 어울렸습니다. 당시 이들은 포섭대상자들을 가입시키기 이전에 ○, △, ×로 분류한 다음 검증을 거쳐 최종 '○'를 받은 자에 한해 가입을 시켰는데 박 전 대통령도 여기서 '○'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박정희는 남로당이 탐낼만한 '최고의 성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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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점곤 장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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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연대 시절 경비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박정희 소위를 휘하에 소대장으로 데리고 있었던 김점곤 평화연구원장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펴고 있다.
"춘천 시절 남로당 군사부 총책 이재복이 춘천까지 찾아와서 박정희를 만나곤 했습니다. 그 때 박정희는 나에게 이재복을 '숙부'라고 소개했습니다. 박정희가 체포된 후 그의 자술서를 봤더니 이재복을 통해 입당했다고 돼 있더군요."
이어진 김점곤 원장의 설명은 더 설득력이 있다. 김 원장은 "남로당에서 박정희에게 군 총책을 맡길 때 이미 그는 당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며 "박정희는 빈농 출신에다 형의 죽음 때문에 원한이 있었고, 특히 사범학교 때 조선공산당사건을 접했으며, 또 군관학교 수석 졸업 등 이른바 '최고의 성분'을 가지고 있어 남로당 측에서 탐낼만한 인물이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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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3기생은 '빨갱이 기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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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동창회 명부 중 '유고자 명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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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96년 육사 개교 50주년을 맞아 육사 총동창회에서 펴낸 회원명부. 사진은 3기생 사망자 명단 가운데 포함된 '유고자 명단'. 이들은 대개 숙군 때 처벌을 받은 사람들이다. |
ⓒ육사 총동창회 회원 명부 | 지난 1996년 육군사관학교 개교 50주년을 맞아 육사 총동창회(회장 김점곤, 1기)는 <육사 총동창회 회원명부>를 발간했다. 이 명부에는 1기에서부터 52기까지의 졸업생 명부가 실려 있다. 앞 기수로 갈수록 사망자 명부가 각 기수별 명단 말미에 별도로 첨부돼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3기생의 경우 전사자, 순직자, 사망자에 이어 '유고자 명단'이라는 항목이 별도로 있는데 그 숫자가 무려 56명이나 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숙군 때 처형된 사람들이다.
대표적으로 여순사건의 주모자 김지회, 홍순석을 비롯해 동해안 일대의 좌익 총책 강문영, 박정희와 함께 군사재판을 받은 김종모(대위, 급료몰수 및 징역 15년, 최종 징역 5년 감형), 홍순오(중위, 급료몰수 및 징역 15년, 최종 징역 10년 감형), 한상순(중위, 급료몰수 및 징역 15년, 최종 징역 10년 감형), 한동석(중위, 급료몰수 및 징역 15년, 최종 징역형에 한하여 집행정지), 김형식(중위, 급료몰수 및 징역 10년, 최종 징역 1년 감형) 등이 그들이다.
또 제주 주둔 9연대장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주모자 문상길도 이 명단에 포함돼 있다. 특히 군내 좌익분자들을 색출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김창룡(1연대 정보주임, 나중에 특무대장 역임)도 바로 3기생 출신이다. 한마디로 쫓고 쫓기는 사이가 서로 동기생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대해 3기생 출신 염정태씨는 "3기생 300명 가운데 50% 정도가 좌익에 포섭됐다는 얘기도 있었다"며 "이는 생도시절 생도대장 오일균(당시 소령, 일본 육사 61기)과 중대장 조병건(당시 소령, 일본 육사 60기) 등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분석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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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문제제기로 시작된 '정체성' 논란이 정치권에서 좀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박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두고 정체성이 의심스럽다며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의 간판을 내려야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 바 있다. 또 한나라당은 당 차원에서 정체성 관련 특별 대책기구까지 구성했다.
여권에 대한 박 대표의 이같은 정체성 문제 제기는 최근 여당의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 제출 등이 계기가 된 듯하다. 논란이 된 박 전 대통령의 일본군 복무경력과 창군 초기 그의 좌익전력은 현재 정치권에서 일고 있는 정체성 논란과 결코 무관치 않다. 문건과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친일-좌익행적을 '실록'으로 남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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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은 오랫동안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하고 감시했다. 사진은 5.16 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주한유엔군 총사령부를 방문(1961.8.21), 당시 멜로이 사령관과 악수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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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 8기생 졸업식(1949.5.23)이 있기 일주일 전 쯤인 5월 중순경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이 전투정보과 사무실로 불쑥 들어섰다. 당시 전투정보과 과장은 유양수(육군 소장 예편, 현 박정희기념사업회장) 대위였다. 이 자리는 원래 소령 T/O였으나 워낙 인원이 없어 유 대위가 과장 대리격으로 있었다. 백 국장은 유 대위를 향해 반가운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임자, 채병덕 (3군)참모총장의 특별지시로 전투정보과를 보강하기로 했네. 이번에 졸업하는 8기생 가운데 임자 마음대로 필요한 인원만큼 선발해서 쓰시오. 참, 가는 길에 계인수(정보국 첩보과장) 중령이랑 같이 가지..."
백 국장 말이 떨어지자 무섭게 유 대위는 즉각 교무처로 달려가 8기생 졸업생 명부를 구했다. 그리고는 1등부터 30등까지 30명 전원 개인면접을 거친 후 최종 15명을 선발했다. 당시 1등 졸업생은 엄용승이었다. 유 대위는 이들을 전원 전투정보과에 배치시키고는 추가로 15명을 선발, 타 과에도 배치시켰다. 이들은 배치전 2주간 청량리 정보학교에서 기본교육을 받았는데 그 인연으로 '청정회'라는 친목단체를 꾸렸다.
육본 정보국의 '무급 비공식 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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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와 같이 육본 정보국에 근무했던 유양수씨. 사진은 지난 61년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일행의 기념사진으로 박정희 왼쪽이 유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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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기생 신참 15명을 대거 보강해 과의 면모를 갖춘 7월초 유 대위는 정식 과장에 취임했는데 뒤이어 보름 뒤 유 대위는 다시 소령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보름 뒤인 7월말 백 국장이 예고도 없이 다시 유 과장의 방을 찾아왔다. 백 국장은 더러 부하들의 방을 직접 찾기도 했다.
"임자, 박(정희) 소령 알지?" "아다마다요, 사관학교 때 우리 중대장을 하셨는데요!" "어때, 지금 그 사람 놀고 있는데 같이 일하면 안되겠나?" "좋습니다. 보내주세요. 과거에 모신 적도 있습니다. "알았네, 나도 도울테니 같이 잘 지내게"
형집행정지로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박정희는 한동안 민간인 신분으로 지내다가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의 도움으로 정보국 전투정보과에서 문관으로 지냈다. 당시 신분이 민간인 비공식 문관이어서 그에겐 급료가 없었다. 그래서 주변에서 백 국장의 기밀비 일부를 떼고 씨레이션을 팔아 그의 급료를 마련했다. 이 때 박정희는 풀이 죽어 지냈다.
숙군 당시 중형을 선고받은 군인 가운데 구명된 케이스는 박정희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과연 어떤 사정으로, 누구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졌을까?
박정희가 김창룡팀에 의해 처음 끌려간 곳은 서울 충무로 입구 신세계백화점 인근 서울헌병대였다. 당시 헌병대 건물은 콘센트 막사였다. 그는 이곳 영창에서 1주일을 보냈다. 박정희와 육사 2기 동기생인 김안일(육군 준장 예편) 정보국 특무과장은 이 무렵 박정희를 불러 직접 신문한 적이 있다.
김 과장은 박정희에게 양면괘지 한 묶음을 건네며 '자술서'를 쓰라고 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써내려 갔는데 그 속에서 좌익세포들의 명단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수사팀은 이 명단을 토대로 마치 '고구마 캐듯' 세포들을 색출해 냈다. 김창룡 등 수사팀은 '박정희 리스트'의 위력에 혀을 내둘렀다.
수사실무팀에서 나온 '박정희 구명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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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인' 백선엽에 대한 박정희의 보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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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의 최대의 '은인'인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 |
| '박정희 구명'의 최대 공로자랄 수 있는 백선엽(84, 육군대장 예편, 전 육군참모총장)씨에 대해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후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백씨가 교통부장관(1969-71) 시절의 일화 한 토막.
백씨가 장관 부임 직후 어느날 정부-여당의 당정회의에서 백 장관이 국회의원에게 호되게 당하자 박 대통령이 의원들의 말을 막고 나서며 "백 장관이 부임한 지 얼마 안돼 아직 업무파악을 제대로 못한 모양인데 다들 좀 봐주시오!"라며 분위기를 바꿨다.
박정희는 집권 기간 내내 그에게 대만 대사 등 여러 나라 대사와 장관, 국영기업체 사장 등의 '자리'를 만들어 줘 나름대로 자신을 구명해준 은혜에 대해 보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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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사 실무책임자인 김안일 과장은 "박정희를 살려주자고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은 다름아닌 그를 수사했던 김창룡 대위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박정희와 육사2기 동기생이었던 김 과장은 김창룡의 구명 건의를 받아들여 직속상관인 백선엽 정보국장에게 박 소령을 한번 만나줄 것을 요청했다. 다음은 백선엽씨가 자신의 회고록 <군과 나>에서 밝힌 관련 내용이다.
"...숙군 5단계 작업이 완결될 즈음인 49년초 어느 날 방첩대의 김안일 소령이 나에게 '박정희 소령이 국장님을 뵙고 꼭 할말이 있다고 간청하니 면담을 해주십시오'라고 전했다. 김 소령은 아울러 박정희 소령이 조사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을 들어 꼭 만나봐줄 것을 요청했다. 김 소령은 나의 승락이 있자 곧 박정희 소령을 나에게 데려왔다.
내가 박 소령을 면담한 곳은 정보국장실이었다. 박 소령은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한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작업복 차림의 그는 측은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면담 도중 전혀 비굴하지 않고 시종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평소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약간 알고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에도 침착한 그의 태도가 일순 나를 감동시켰다. "도와 드리지요." 참으로 무심결에 이러한 대답이 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박정희의 구명운동은 그를 체포하고 수사한 수사팀에서부터 출발했는데 어쩌면 그래서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수사실무자인 김창룡과 김안일 과장이 박정희에 대한 신원보증서 겸 구명사유서를 만들어 백 국장을 찾아가서 결재를 받아낸 것이 사실상 구명운동의 시작이었다.
수사팀에서 그를 살리기로 결정이 내려지자 이후 일정은 수사팀 몫이 돼버렸다. 백 국장은 미 군사고문단에 양해를 구하고 또 육본에 재심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 구명운동은 이밖에도 다양한 채널에서 진행됐다. 만주인맥이 큰 힘이 됐다. 만주 군관학교 교의(校醫, 중좌)를 지냈고, 박정희가 첫 부임한 춘천 8연대 시절 연대장을 지낸 원용덕이 백선엽 국장을 움직였다. 백선엽이 평양사범 졸업 후 의무복무 도중 군관학교에 입학해 말썽이 됐을 때 원용덕이 나서서 도움을 줬는데 이 일을 두고 백선엽은 늘 고마워했었다. 백선엽 역시 만주인맥의 일원(봉천군관학교 9기)이다.
같은 만주인맥의 일원이자 여순가담자 토벌에 참여했던 고 송석하씨(봉천 5기, 육사 2기, 육군소장 예편, 99년 작고)는 "여순사건 때 박정희가 남원까지 온 것으로 안다. 그 때 최남근과 박정희가 안보이길래 우리는 지리산부대(김지회 부대)에 잡혀간 줄 알았다"며 "그 때 원용덕이 박정희를 붙잡아 '살려면 남로당 조직표 내놔라'라고 설득해서 서약받은 후 백선엽에게 구명요청을 했다"고 지난 97년 필자에게 증언한 바 있다.
박정희 재판 때 재판장을 맡았던 김완룡씨는 당시 주변사람들의 구명 노력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다음은 김씨의 증언.
"재판을 앞두고 있는데 백선엽 국장한테서 전화가 왔더군요. 백 국장은 '박정희가 (좌익활동 했다는) 구체적 증거가 없고 피해 없으면 목숨만 살려줄 수 없느냐'며 박정희를 살리는데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당시 박정희는 '지리산'에도 관계하고 해서 일단 잡아 넣은 상태였죠."
김씨는 "백 국장 이외에도 당시 나와 약수동 앞뒷집에 살았던 송요찬 장군과 김형일 장군 등도 그의 구명을 요청해 왔다"고 밝히면서 "당시 박정희는 구체적인 행동이 드러난 것이 없었고, 수사에 적극 협조한데다 머리좋은 수재라 죽이기 아깝다는 여론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고 회고했다.
숙군 관련 전권을 쥐고 있던 백선엽 정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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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군' 박정희 좌익전력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능력과 주변의 도움으로 박정희는 장군으로 진급(1953.11.25)했다. 사진은 육군대학 졸업(1957.3.20)후 포천 주둔 6군단 부군단장 시절(준장)의 박정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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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와 육본 정보국에서 같이 근무했던 김점곤 원장도 이와 비슷한 의견이다. 그는 "박정희를 서대문형무소에서 풀어줄 때 이미 그를 살리기로 결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후의 군사재판(무기징역 언도)과 육본의 재심(징역 15년 감형), 확인관 조치(형집행정지) 등은 사실상 후속조치에 불과했다"며 "당시로선 참모총장도 좌익에 대해선 살려주자고 말을 꺼내지 못할 시절이었는데 당시 숙군과 관련해 전권을 쥐고 있던 백선엽 정보국장을 움직인 탓에 박정희를 살려낼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군내 선배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이후 장군으로 진급도 했지만 그의 주변에는 '좌익 악령'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대통령선거 때마다 사상시비가 단골메뉴로 불거졌으며, 몇몇 좌익사범 사건 때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힘들게 한 것은 미국의 감시였다. 미국은 '전향자'인 그의 사상전력에 대한 의혹을 떨치지 못한 채 집권 기간 내내 그를 감시했다. 박 정권과 미국과의 갈등은 여기서 한 자락이 연원한 측면도 없지 않다.
숙군 회오리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장군으로 승진하고 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박정희에 대한 미국의 감시 눈초리는 끊이지 않았다. 특히 5.16 직전부터 '거사설'이 나돈 뒤부터 미국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지목하고 있었다. 당시 육본 정보참모부장(1957), 연합참모본부장(1959)으로 있던 김점곤 원장의 증언을 들어보자.
"5.16 직전 미8군 댄스톤 정보국장이 매그루더 사령관의 친필 메시지를 들고 나를 찾아왔었습니다. 그는 20명의 명단이 적힌 한국군 장교들의 명단을 한 명씩 보여주면서 그들의 좌익관련 여부를 묻더군요. 명단 속에는 내가 잘 아는 사람도 있었는데 거의 좌익이 아니었습니다. 박정희 장군도 물론 명단에 들어 있었습니다.
박 장군에 대해 묻길래 나는 '과거 형님의 죽음 관계로 공산당에 들어간 적이 있지만 지금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별을 두 개나 단 사람이 기득권을 버리고 공산당으로 갈 것로 보지 않는다'라고 답했습니다. 당시 그와 동행한 여비서가 우리들의 대화내용을 모두 녹음하더군요."
'전향자 박정희'에 대한 미국의 감시와 의혹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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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주가에 성격은 과묵, 상황판단 뛰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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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사인' 육본 전투정보과 시절 박정희가 만든 자신의 '사인'. 사진은 한무협씨가 97년 필자의 취재노트에 그의 사인을 흉내내 보인 것으로, 진짜 박정희의 사인과 구별이 안될 정도로 닮아 있다. |
| 숙군에 협조한 공로로 석방된 박정희는 49년 초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전투정보과는 남, 북한반 2개 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북한반장은 유양수(7특, 육군소장 예편) 중위가 8기생 7명을 데리고 북한측 상황을 체크하고 있었고, 남한반장은 한무협(6기생, 육군소장 예편) 소위가 8기생 3명을 데리고 지리산, 속리산, 태백산 일대 무장공비 관련 사항을 취급하고 있었다.
한씨에 따르면, 당시 박 과장은 일본군대의 지휘관용 '상황판단' 전술교범을 늘 옆에 끼고 살았는데, 이 책을 완전히 소화한듯 했으며, 매사에 판단이 치밀하고 정확했다고 한다. 또 당시 박정희는 과묵한 성격에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날이 잦았으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때가 많았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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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본 정보국에서 박정희 휘하에서 근무했고, 또 그와 친분이 깊었던 '정보맨' 한무협(육사 6기, 육군소장 예편)씨는 지난 97년 서울 북창동 소재 자신의 사무실에서 필자에게 이런 증언을 한 바 있다.
"민주당 시절 이종찬 장군이 장면 총리에게 박정희 장군의 중용을 건의한 적이 있습니다. 장 총리가 이 문제를 가지고 매그루더 사령관과 논의했는데 얼마 후 매그루더가 육본으로 박 장군의 신원조회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김형일 참모차장이 '박정희는 레프트(좌익)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랬더니 매그루더 가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며 항의를 했습니다. 당시 박 장군은 육본 작전참모부장이었는데 이 일이 있은 후 2군 부사령관으로 전보됐습니다."
미국의 감시도 감시였지만 당시 박정희에 대한 사상문제는 한국군 내부에서도 완전히 정리가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한 김형일은 이 일로 박정희와 등을 지고 말았는데 5.16후 군정에 반대하다가 참모차장 자리에서 예편했다.
그 뒤 2년간 미국 유학후 귀국, 야당으로 투신한 그는 6대 국회 때 정부전복 음모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9대까지 내리 4선을 하면서 신민당 원내총무 등을 지낸 그는 78년 55세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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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이 내민 조직표에 '박정희' 이름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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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렬 전 국방장관의 '회고록' 중 관련내용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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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렬 전 국방장관 |
ⓒ연합뉴스 |
| 숙군 수사팀의 일원이 아닌 사람 가운데 박정희의 좌익연루 사건을 소상하게 증언한 사람이 있다. 초대 공화당 의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김정렬씨(작고)가 그다. 김씨는 지난 93년 자신의 회고록에서 자신이 육군 항공사관학교 초대 교장으로 있을 때 휘하에서 교수부장으로 있던 박원석 대위가 어느날 좌익혐의로 끌려간 후 경위를 알아보니 조직도상에 박 대위가 박정희의 세포(조직원)로 돼 있더라며 당시 상황을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김씨는 일본육사 54기 출신으로 박정희(57기)의 3년 선배이자 박 대위의 4년 선배였다. 박 대위는 또 만주에서 해방을 맞았으며, 박정희와도 이미 알고지낸 사이였다. 다음은 <김정렬 회고록> 가운데 관련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필자 주
"...1949년 2월 육군 항공사관학교가 창설되고 내가 교장으로 부임해서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날 밤 관사 문을 요란히 두드리길래 나가봤더니 직속부하인 박원석 교수부장이 건장한 장정 서너 명에 둘러싸여 “저는 잘못이 없습니다”며 울부짖고 있었다. 경위를 알아보니 숙군 수사팀에서 그를 빨갱이라며 체포하러 왔었다.
이튿날 수사팀이 일러준 명동 수사대 건물로 갔더니 김창룡 소령이 웬만한 사람의 키보다 큰 차트를 펼쳐 보였다. 알고보니 그게 남로당 군사조직표였는데 박원석 대위는 맨 하단에 이름이 올라 있고 바로 그위에 박정희 소령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공산주의자일 리가 만무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곧바로 나는 정일권 육군참모차장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정 차장은 “지금 김창룡이가 나를 빨갱이로 보고 나를 못 잡아서 안달인데 내가 어떻게 하겠소”라고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김창룡의 직속상관인 백선엽 정보국장을 찾아가 박정희와 박원석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백 국장은 “그건 저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묘안을 생각하다가 문득 김창룡의 약점이 떠올랐다. 그는 정규 일본육사 출신들에게 꿈벅 죽고 들어가는 성향이 있었다. 그 길로 채병덕(일본육사 49기) 육군참모총장 댁으로 급히 찾아갔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두 사람의 구명을 호소하자 “야! 지금 박정희 뿐이냐! 억울하게 잡혀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어떻게 박정희만 빼줄 수 있느냐!”고 쏘아붙였다. 그래서 마치 동생이 형에게 떼 쓰듯이 졸라댔더니 김창룡을 집으로 불렀다.
김창룡이 채 총장 집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잠시 얘기를 나눈 후 김창룡이 간 뒤 채 총장이 내게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인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풀어줄 길은 있다고 하는구만...”이라며 한가닥 실마리를 암시했다. 그래서 “그 길이 무엇이오?”하고 물으니 방첩대에서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갈 때 열 번 만 박정희를 앞세우고 얼굴을 내비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첫째, 박정희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여기에 협력하여 누명을 벗을 것이요, 둘째, 설사 그가 공산주의자라 하더라도 열 번이나 그들에게 반역을 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 세계에서 영원히 추방되고, 그 결과 확실하게 전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박정희가 이 일에만 협력하면 풀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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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선생님' 박정희는 20세 되던 해인 1937년 3월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 꼭 3년간 교사로 근무했다. 사진은 1939년 봄 학교 맞은 편 신사 자리에서 여제자들과 함께 찍은 모습으로, 뒷줄 왼쪽 끝이 군관학교 시절 편지를 주고 받았던 정순옥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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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정순옥씨 제공 |
| 1940년 봄 어느날 그 해 보통학교를 갓 졸업한 정순옥(문경보통학교 26회 졸업생, 97년 당시 71세로 서울 강동구 거주함)씨는 한 살 아래인 사촌여동생(당시 문경보통학교 6학년)으로부터 분홍비단 손수건과 편지 한 통을 건네받았다. 그가 동생에게서 건네받은 손수건은 문경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편지를 받아 겉봉의 발신자를 보니 '만주 신경 육군군관학교 제3구 4연대 박정희'라고 적혀 있었다. 낯익은 글씨에 반가운 이름이었다. 편지를 보낸 주인공은 보통학교 6학년 때 1년간 자신을 가르쳤던 '박정희 선생님'이었다. 편지에는 조선말로 "처마 끝에 참새같이 짹짹이던 너희와도 이제 마지막이다. 어디로 갈 지 모르겠다. 씩씩하고 훌륭한 조선여성이 돼 주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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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의 문경보통학교 여제자 정순옥씨.(97년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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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정운현 | 지난 97년 취재차 만났을 때 정씨는 반세기 가까이 전의 일을 마치 엊그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만주로 가신 뒤 박 선생님 한테서 평균 2개월에 한 통 꼴로 편지가 왔습니다. 한번은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했다고 알려왔더군요. 또 더러 편지에 사진을 같이 부쳐오기도 했는데 한번은 칼을 든 사진도 보내왔었습니다. 군관학교에 가신 후 2년여 편지왕래가 있었는데 마지막 편지 때 쯤 '이제 본과는 일본으로 간다'고 쓰셨던 기억이 납니다."
문경보통학교에서 훈도(교사)로 근무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교사 박정희'는 왜 돌연 만주로 간 것일까? 그의 '만주행'은 박정희 개인의 역사는 물론 우리 현대사에서도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만주행이 없었다면 '군인 박정희'는 없었을 것이고, 또 이후의 '5.16'도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만주행에 대한 비밀은 아직도 완전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당사자인 박정희 그 자신이 밝힌 것은 생전에 비서관에게 한 마디 툭 던진 정도가 전부이며, 주변 사람들의 증언 역시 정연한 것은 아니다. 이제 그 진실의 모자이크를 하나씩 꿰맞춰 보자.
그간 나온 박정희 관련 연구서나 잡지 기사 가운데 박정희의 만주행을 언급하면서 자주 거론되는 단골메뉴는 '장발사건'이다. 이 이야기의 발단은 그와 대구사범 동기생인 권상하(97년 당시 81세)씨의 증언에서 비롯됐다. 다음은 권씨의 증언 요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당시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전의를 고양시키기 위해 교사들도 군인처럼 머리를 빡빡 깎게 했다. 복장도 국민복, 국민모에 각반까지 차고 다니게 했다. 그런데 그 시절 박정희는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 해 가을 마침 연구수업 시찰을 나온 일본인 시학(장학사)이 박정희의 긴 머리를 보고 "아직도 총력정신이 결여된 교사가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날 저녁 시학을 위해 교장 관사에서 연 연회에서 이것이 다시 논란이 됐고, 이튿날 교장이 그를 불러 간밤의 행동을 질책하자 울컥한 끝에 교장을 두들겨 패고는 그 길로 짐을 챙겨 문경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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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사 박정희'의 마지막 흔적 사진은 박정희가 (소화 15년)1940년 3월 31일부로 '의원 면 본관', 즉 본인의 희망으로 교사직에서 물러난 사실을 발령한 사령 원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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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문경군청 소장 | 권씨의 이같은 증언은 객관성이 상당히 결여돼 있다. 우선 당시 일개 평교사가 일본인 시학과 교장에게 그같은 행동을 하기가 현실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것이다.
특히 당시 '교사 박정희'의 모습을 담은 여러 장의 사진을 살펴 봐도 그의 장발 모습은 찾을 수 없다. 반면 당시 장발은 그가 아니라 학생들이었다는 한 여제자의 증언이 있다. 박 교사 부임 당시 2학년이었던 이순희(97년 당시 70세)씨가 그 증언자다.
"머리가 긴 것은 박 선생님이 아니라 학생들이었습니다. 당시 동네에 바리캉이 한 두 개 뿐인데다 그걸 빌리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돈을 주고 빌리기도 쉽지 않았구요. 그래서 제 때 머리를 깎지 못해 머리가 긴 학생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일본인 교사들은 이런 사정은 제쳐놓고 무조건 머리가 긴 학생들에게 벌을 세우곤 했습니다. 이런 일로 박 선생님과 일본인 교사간에 언쟁이 더러 발생하곤 했습니다."
'장발 사건'은 권씨가 꾸며낸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과장됐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대체 그를 만주로 이끈 것은 무엇인가. 필자와의 얘기 끝에 여제자 이씨가 실마리가 될만한 얘기 하나를 불쑥 꺼냈다.
"어느 핸가 시학관이 학교로 시학을 온다고 연락이 와서 3학년 여학생들이 옷을 잘 차려입고 정류소 앞에 도열해 기다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박 선생님은 학교에서 평소 좋아하던 나팔을 불고 있었는데 급사가 가서 내려오시라고 해도 듣지 않자 일본인 교사들이 가서 박 선생님을 집단 구타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박 선생님은 '내가 꼭 복수해 주겠다. 조선에는 사관학교가 없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간다'고 얘기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뒤에 들으니 박 선생님께서 졸업한 제자에게 돈을 빌려 김천서 하룻밤을 자고 만주로 갔다고 들었습니다."
1932년 봄 구미보통학교를 졸업(11회)한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했다. 대구사범의 경우 당시 지방학생들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했다. 대구-구미간을 열차로 오가던 박정희는 열찻간에서 당시 대구간호학교에 다니던 네 살 연상의 '누님'을 한 사람 알게 됐다.
두 사람은 당시 학생사회에서 유행하던 S-B(Sister-Brother, 누나-동생)사이가 되었다. 이들의 인연은 박정희가 교사가 된 이후에도 계속됐다. 주인공 주현숙(재미, 97년 당시 85세)씨를 취재한 한 전직 언론인의 증언을 들어보자.
"박 대통령은 문경 교사 시절 때도 '집(구미)보다 여기가 가깝다'며 토요일마다 예천 주여사 댁으로 놀러오곤 했답니다. 그 때 두 사람은 모두 결혼한 상태였는데 박 대통령은 '마누라가 미쁘다고(마음에 안든다고) 꼬집어대서 못살겠다'는 얘기를 자주 했답니다.
그런데 언젠가(1939년말) 한번은 박 대통령이 놀러와서 '군인이 돼 높은 사람이 돼서 오겠다'며 일본군가, 혁명가를 부르더랍니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와서는 '누님, 내일이면 헤이다이상(군인)이 되러 갑니다. 술 좀 사주십시오' 해서 술을 사주었는데 그 다음날 예천역에서 만주로 간다며 떠났답니다."
앞에서 여제자 이씨가 언급한 '김천'은 어쩌면 '예천'의 잘못인지도 모른다. (참고로 66년 1월 27일 경북 예천역 광장에서 열린 경북선(예천~점촌) 재개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이 행사장에서 주씨를 만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을 재미교포인 주씨의 아들이 지난 97년 필자에게 보내온 바 있어 두 사람의 '인연'은 확인되고 있다.)
주씨의 증언을 살펴보면 그의 만주행에는 가정생활에 대한 불만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이 읽혀진다. 실지로 그는 첫 부인과 부부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문경에서 교사로 3년간을 보내면서 그가 부모형제와 처자가 있는 구미 본가를 찾은 적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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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가 하숙했던 하숙집 주인 아들 임창발씨.(97년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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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정운현 | 지난 97년 문경 현지취재 때 필자는 박정희가 교사 시절 2년여 동안 하숙했던 하숙집 주인의 아들 임창발(97년 당시 78세)씨를 만났다. 그는 박 대통령보다 두 살 아래로 친구처럼 지냈다.
임씨는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셔서 나팔을 부셨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면서 "방학 때도 고향에 안가시고 우리집에 머무셨고, 또 만주 군관학교 생도시절 휴가 때도 본가로 안가시고 우리집에 계시다가 가셨는데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으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만주행은 부인과의 불화로 인한 도피심리가 한 요인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여제자 이씨와 '누님' 주씨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일본인에 대한 복수심이 단초가 됐고, 여기에 군인이 돼 출세하겠다는 야심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생전에 그는 터놓고 얘기를 나눴던 김종신(74, 부산문화방송 사장 역임) 비서관에게 "긴 칼 차고 싶어 (만주로) 갔지"라고 얘기한 바 있다.
여기서 박정희가 언급한 '긴 칼'은 권력의 상징어로 볼 수 있다. 즉 그는 당시 군국주의 하에서 최고의 권력집단이었던 군인을 평소 동경했고, 그래서 군인이 되기 위해 만주로 갔다는 얘기다. 그와 '긴 칼'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 한 토막이 있다. 증언자는 앞에 등장했던 여제자 이씨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박 선생님이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누런색 군복에 빨간 견장, 붉은 군모, 그리고 에리(목 컬러)에는 별이 하나 그려져 있더군요. 그리고 칼을 하나 차고 있었는데 칼끝이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습니다.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후 박 선생님께서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 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머리숙여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박 선생님이 교사 시절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모두 그 장면을 보고 통쾌해 했습니다."
박정희의 만주행은 그것이 개인적인 울분에서 기인한 것이든, 아니면 시대상황이 빚어낸 시대사적 산물이든 동기 자체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의 만주행이 '교사 박정희'를 '군인 박정희'를 만들었고 이후 그가 '권력자 박정희'로 변신하는 하나의 단초가 됐다는 점이다. '군인 박정희'가 없었다면 '대통령 박정희'도 우리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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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로 떠나기 직전 '교사 박정희' 1940년(소화 15년) 2월 7일 와다나베 경부 송별식 기념촬영 사진. 이 사진은 그가 만주행에 오르기 직전 찍은 사진으로, 붉은 원 안이 박정희 교사다. 당시 그의 머리칼은 짧고 단정한 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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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 소식 접하면 향 한 대 피워주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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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로 떠나는 박정희 교사 환송식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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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2월 중순경 박정희는 만주행에 올랐다. 당시 (일본)군에 가는 사람에게는 모두 환송식을 해주는 관행이 있었다. 그 역시 군인이 되려 군관학교로 가는 길이니 이에 해당됐다.
당일 행사는 문경보통학교 바로 옆에 있는 버스정류장 자리였다. 마침 봄방학이어서 환송식 행사에는 몇몇 동료 교사와 학생 5~6명이 모습을 보였고, 주민들도 더러 참석했었다. 이들은 길 양 옆으로 도열해 만주로 가는 박 교사를 환송했다.
당시 전송식 행사장에 참석했던 오태구(문경보통 31회 졸업생, 97년 당시 69세)씨는 "학교에서 간단한 행사를 마치고 참석자 일행이 버스정류장까지 따라 나가서 길가에 도열해 박 선생님을 전송했다"며 "당시 박 선생님은 붉은 글씨가 씌어진 띠를 머리에 두르고 있었으며, 전쟁터에서 목숨을 지켜준다는 센닌바리(千人針)을 들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박 교사는 환송 나온 동료교사들에게 "전사 소식을 접하면 향 한 대나 피워주게"라며 짧고도 비장한 한 마디를 던졌다. 그리고 훌쩍이는 어린 제자들의 어깨를 다독이며 "섭섭해 하지 말아라. 긴 칼 차고 대장이 돼 돌아오겠다"고 위로했다. 만주에서 그로부터 편지가 제자들에게 날아든 것은 이로부터 대략 한 달 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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