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사람들 이야기 -- 趙甲濟
싱가포르, 군대 안 갔다 오면 공무원 될 수 없다!
18세에 입대, 2년 근무 후 예비군 편입, 매년 40일간 소집근무.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도 군대 가야.
최근에 한 외교관 출신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싱가포르의 兵役(병역) 실태를 소개해주었다. 인구가 약 350만 명인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이스라엘을 닮은 국방제도를 유지한다. 국민총생산에서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6%로서 한국의 두 배이고, 이스라엘의 반이다. 현역은, 직업군인이 3만2700명, 징병된 병력이 3만9800명, 합쳐서 7만이다. 인구비례로 따지면 한국은 100만(지금은 70만) 兵力을 유지해야 싱가포르와 같아진다는 계산이다.
싱가포르는 국민皆兵制(개병제)이다. 18세가 되면 군대에 징집되는데, 연기가 되지 않는다. 重病者(중병자)가 아니면 모두 입대한다. 兵役특혜는 없다. 심지어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도 군대에 가야 한다. 훈련기간은 3개월이다. 체육선수에게 주어지는 특혜는 훈련기간의 단축이다. 뚱보들에겐 훈련기간을 길게 한다. 제대한 이후에도 예비군에 편입되어 나이 50세(장교)나 40세(사병)가 되기까지 매년 40일간 소집된다. 30만 명이 넘는 예비군이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군대 복무를 하지 않은 사람은 공무원으로 채용하지 않는다. 싱가포르 군대는 1960년대 후반 이스라엘 장교들이 지도하여 만들었다. 이스라엘 고문단은 멕시코 사람으로 위장하여 建軍(건군) 작업을 도왔다고 한다.
싱가포르의 가상 敵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이다. 싱가포르의 국민 구성은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등으로 복잡하다. 국민개병제는 다양한 출신성분을 초월하여 싱가포르 시민들을 하나의 국민집단으로 용해시키는 용광로 역할을 한다. 싱가포르는 한국보다도 더 평화스러운 안보환경에 있다. 그럼에도 自主국방정신은 한국보다 더 강하다. 싱가포르는 물론 운동선수에게 兵役면제의 특혜를 주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 석사장교 제도가 생겨 특혜 논란을 불렀다. 석사 소지자 중 우수한 자를 시험으로 선발하여 6개월간 군사훈련과 전방 체험을 거친 후 소위로 임관함과 동시에 轉役시켜주는 제도였다. 당시 군 복무기간이 3년에 육박한 점을 고려하면 파격적인 혜택이었다.
그 뒤 兵役면제 특혜가 남발되었다. 스포츠, 예술, 과학계의 人材를 2, 3년간 군대에 보내는 것은 국가적 낭비라는 주장이 일견 설득력이 있는 듯하나 이는 短見이다. 군대 복무중에도 특기를 살릴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 수 있다. 특혜는 한번 주어지면 확대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군 복무를 충직하게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모자라는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 미국에서도 징집제 시절 병역특혜를 일체 인정하지 않았다. 테드 윌리엄즈와 같은 대타자도 2차대전과 한국전쟁 두 차례 징집, 戰線에 배치되어 4년간 복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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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號와 운명을 같이 한 8명의 樂士
-紳士道 실천으로 남자의 20%만 살아남았다.
1912년 4월14일 밤 세계최대의 여객선인 타이타닉호가 처녀항해중 대서양에서 氷山과 충돌, 15일 이른 새벽에 침몰하였을 때 2223명이 타고 있었다. 31.8%인 706명만이 살아남고 1178명이 사망하였다. 여자승객의 74%, 어린이의 52%가 살아남았는 데 반하여 남자승객의 20%만이 구조되었다.
'여자와 어린이 우선(Women and children first)' 원칙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이 알려진 것은 1852년 영국 군함 빌켄헤드호가 침몰할 때 水兵들이 모범을 보인 이후이다. 타이타닉호 사고 때 이 원칙을 너무 엄격하게 해석한 선원들이 救命보트에 빈 자리가 있음에도 남자를 태우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타이타닉에 준비된 구명보트는 1178명을 태울 수 있었는데, 706명만이 구조된 것은, 다 태우지 않고 출발한 보트가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일부 승객들은 큰 배에 남아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였다.
1등석에 있던 일곱 어린이들중 여섯 명, 2등석의 어린이들 전부가 구조되었으나 3등석의 어린이들중 34%만이 구조되었다.
영국 남자 승객들의 사망률이 미국남자들보다 훨신 높은 것은 '紳士道'를 실천한다고 救命보트에 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월래스 하트레이가 지휘하던 8명의 樂團은 전원 사망하였다. 이들은 기울어가는 갑판에서 계속 연주를 하였다. 공황상태에 빠진 승객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배가 거의 수직으로 기울어 침몰을 시작할 때까지 연주를 했다고 하여 타이타닉호를 다루는 영화에마다 등장하는 장면이 되었다.
이 樂團이 마지막으로 연주한 곡목에 대하여는 이견이 많으나 찬송가 '내 주를 가까기 하게 함은'이라는 게 定說이다. 하트레이는 평소에도 "만약 내가 탄 배가 침몰하면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을'을 연주하겠다"고 친구들에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타이타닉호에서 살아남은 남자들은 '비겁자'라는 욕을 먹을까 봐 눈치를 보면서 살았다고 한다. 뉴욕항을 목표로 처녀항해를 시작한 이 배에는 영국과 미국의 상류층이 많이 타고 있었다. 이들이 生死의 갈림길에서 보여준 紳士道는 두 나라의 엘리트가 가졌던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의 한 예일 것이다.
타이타닉호에 救命보트가 적었던 이유는 승객수가 아니라 톤수에 따라 구명보트의 의무적 보유척수를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영하 2도의 바닷물에 노출된 후유증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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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엘리트 연구: 1000명이 3억 인도를 다스린 비결
-청렴, 공평, 滋善이 행동기준
영국이 꽃을 피운 자유민주주의는 누가 만들어서 준 것이 아니라 귀족들과 자본가들이 王權과 싸워 쟁취한 것이다. 그들은 富에 따른 명예와 의무를 생활신조로 삼았다. 영국의 신사는 힘 센 사람이 아니라 '신사답게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이 자본가였다. 체제를 만든 사람들이 그 체제를 지키기 위하여 희생할 자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독재자와 선동가로부터 자유를 지켜낼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 자유민주체제의 가장 큰 수혜자인 자본가와 기업인들은 애국운동단체를 거의 돕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敵들을 돕고 있다. 그들은 독립투사들과 군인들과 혁명가들과 엘리트 관료들이 만들어준 체제의 혜택만 볼 뿐 체제를 싸워서 지켜내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린 비겁한 富者들이다. 그러니 좌파들의 밥이 되는 것이다.
19세기말 영국이 인구 3억의 인도를 다스릴 때 인도엔 약15만 명의 영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6만 명은 군인이었다. 영국 군인들은 이 광활한 대륙의 邊境에 퍼져서 주둔했으므로 보통 인도인들은 영국 군인들을 볼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하여 이런 少數로써 多數를 다스릴 수 있었는가.
인도행정청(India Civil Service: ICS)이 그 비밀이었다. 인도행정청에는 약1000명의 영국 공무원들이 근무했는데, 이들이 인도 각지에 파견되어 식민지 행정을 맡았다. 이 천명이 사실상 3억 인구를 다스린 것이다. 이 3억 인구는 주요 언어만 해도 스무 가지가 넘고 지방語는 셀 수 없을 정도인데다가 종교 인종도 각양각색이었다. 이런 인도를, 영국 공무원 한 사람이 30만명씩 안정적으로 관리했던 셈이다.
이 불가사의한 행정의 비밀에 대한 연구서적이 최근에 출판되었다.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ur)라는 사람이 쓴 '지배계급'(The Ruling Caste: 출판은 Farrar, Straus, Giroux, 381페이지, 27 달러)가 그것이다.
인도행정청에서 근무할 영국인을 뽑고 훈련하는 과정에서 영국정부는 애국심과 자부심에 기반한 公人윤리를 반복교육으로 깊게 심었다. 학생들은 인도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었다. 영국정부는 이들에게 그런 현지 관련 지식보다는 '제국의 魂'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 인도에 대한 지식은 현지에 부임하여 배우도록 했다. 그 대신 大英제국의 知的이고 도덕적인 우월성에 대한 교육이 행해졌다. "유럽 도서관 선반 하나 위에 올라 있는 책이 인도와 아라비아 전체의 문학작품을 모두 모은 것보다 더 우수하다"는 식의 교육이었다.
著者 길모어는 이 책에서, '제국주의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으로 무장한 이 젊은 관료들은 '책임을 떠 안는 것의 쾌감'을 간직하고 어떤 경우에도 조국을 실망시켜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강했다고 분석했다. 이들이 인도에 가서 부임하는 곳은 교통이 불편한 奧地(오지)인 경우가 많았으므로 무슨 사고가 일어나도 상부 지시에 따라서 행동할 수가 없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결단력이 요구된다. 영국관료들은 실용주의와 상식에 기초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습관을 부임 초기부터 터득해나갔다.
소요사태를 예방하려면 우선 지배층이 민중을 자극하지 않아야 했다. 영국관료들은 인도사회의 풍습이나 사회적 慣行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았다. 다만, 남편이 죽으면 부인을 불태워죽여서 殉葬(순장)하는 식의 야만적인 풍습은 금지시켰다. 인도사람들은 세금을 내고, 지역관리들을 죽이지만 않는다면 영국인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영국관리들은 그들이 다스리는 현지의 언어에 숙달해야 했다. 이 식민통치 관리들의 행동윤리는 피지배층을 대할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듯이 자선적이고, 공평하며, 청렴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영국관리들은 절대로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인도민중의 定評이 이들의 통치를 수월하게 해주었다.
인도는 독립한 뒤에도 영국행정청의 이름을 India Administrative Service로 바꾸고 그 골격을 이어갔다. 물론 영국인은 인도관리로 교체되었다. 인도는 영국관리들이 남긴 전통, 즉 자선적이고 공평하며 청렴한 公職규범을 그대로 계승하여 오늘날 세계최대의 민주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영국 행정관료의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慈善, 公平, 淸廉은 어느 시기, 어느 나라에서도 필요한 국가엘리트의 행동규범이다. 영국의 인도통치의 예에서 보듯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기도 하다. 자선, 공평, 청렴의 행동규범을 뒷받침한 것은 애국심과 자부심이었다.
국가, 전통, 그리고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무장한 국가엘리트가 이끌어가는 대한민국은 언제 만들어질 것이며, 이런 엘리트 집단을 양성할 국가적 교육기관은 또 어떻게 만들 것인가.
李承晩 대통령은 독립투사 엘리트의 대표였고, 朴正熙 全斗煥 盧泰愚는 군 장교단의 대표였다. 이들은 국가를 찾겠다고 싸우고, 국가를 지키려고 고민하고 피를 흘리는 과정에서 國益을 중심에 놓고 思考하는 습관을 길렀다. 그 뒤에 등장한 소위 민주투사 출신들은 당파, 지역, 계급의 이익을 국민과 국가의 이익보다 우선시키면서 국가 엘리트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민주투사 출신들은 역대 정권과 싸우는 과정에서 정권과 국가를 혼동하였다. 그들은 정권에 대한 유감이 국가에 대한 유감으로 변질됨으로써 애국심의 근저를 이루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역사와 전통에 대한 존중심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니 정권을 잡고도 대한민국의 주인이란 의식보다는 손님의식, 또는 백성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다.
역사, 철학, 문학 등 인문적 교양을 바탕으로 하여 애국심과 자부심으로 자신을 가득 채운 국가 엘리트층의 再建이 바로 가장 중요한 대한민국 再建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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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 일곱 명이 죽어도 훈련을 계속한 사단장
-그러나 强風의 위험도를 알기 위하여 혼자만 낙하산 타고 뛰어내려.
국군은 建國의 초석, 護國의 간성, 근대화의 기관차, 민주화의 울타리였다. 국군은 앞으로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을 뒷받침해야 한다. 국군 장교단이야말로 지난 60년간 가장 많은 피, 땀, 눈물을 흘린 직업群이다. 군인은 국가가 부를 때 死地로 달려간다. 살고 죽는 것에 대한 남다른 철학이 있어야 한다. 한 미국 군인의 예를 든다.
윌리엄 C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월남전 때 미군 사령관으로서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 그 뒤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고 몇 년 전 사망했다. 그는 '한 군인의 보고서'(A Soldier Reports)라는 회고록을 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정치와 언론이 월남전을 망쳤다고 분개하는 한 군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미군이 戰場에선 지지 않았는데 언론의 反戰보도와 여론의 변화, 여기에 영향을 받은 미국 국가 지도부가 전쟁의지를 상실했기 때문에 졌다고 말한다.
1968년 베트콩의 舊正공세는 그들의 大敗로 끝났지만 이것이 텔레비전을 통해서 미국의 안방 여론을 反戰으로 움직였다. 존슨 미국 대통령부터 전쟁의지를 상실하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공산당측과 협상을 제의했던 것이다. 자유월남이 망한 것은 그 7년 뒤였다. 웨스트모어랜드(별명이 웨스티) 장군은 이 책에서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가장 공정한 보도를 했다고 평했다. 이 책을 읽어보면 미국의 군사문화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생긴다. 이런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1958년 웨스티는 미국의 정예부대인 101 공정사단의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켄터키주 포트 캠벨에 본부가 있었다. 부임한 직후 낙하훈련이 있었다. 낙하지점에 나간 장교가 풍향과 풍속을 잰 다음 녹색 연기를 뿜어 올렸다. 낙하해도 좋다는 신호였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을 포함한 502 연대 장병들이 낙하했다. 웨스트모어랜드가 着地(착지)하니 예상하지 못했던 강풍이 낙하산을 몰고 갔다. 그는 수백 미터를 끌려가다가 다른 장병들이 낙하산을 주저앉혀 다치지 않았다. 이 强風에 걸려 일곱 병사들이 사망했다.
웨스트모어랜드 사단장은 그러나 기상조건을 이유로 하여 훈련을 중단할 수는 없다고 결심했다. 전쟁은 원래가 악조건하에서 치러지는 것이므로. 다음날 그는 훈련 강행을 명령했다. 다만 낙하 훈련의 경우엔 자신이 먼저 뛰어내려 바람 상태를 점검하기로 했다. 다른 사병들은 대기하도록 한 뒤 사단장이 혼자서 뛰어내렸다. 전날처럼 강풍이 불어 웨스트모어랜드는 착지한 뒤에도 한참 바람에 끌려가다가 설 수 있었다.
그는 낙하훈련을 중단시키고 육상훈련만 하도록 했다. 이 사고를 분석한 미군은 着地한 뒤 낙하산을 빨리 분리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했다.
일곱 명이 낙하훈련중 죽는 사고가 한국군에서 일어났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사단장은 조사받기에 바빴을 것이고, 훈련은 물론 중단되었을 것이다. 웨스트모어랜드 사단장은 이 사고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피할 수 없는 사고였다고 판정된 때문일 것이다. "전쟁은 피크닉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수년 전 이라크에서 미국의 여자 장교가 戰死했다. 미 육사 출신이었다. 그녀는 보병부대를 지휘했다. 이스라엘에서 여자 장교가 戰車 교육부대에서 교관으로 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軍人정신은 국가에 대한 희생과 충성을 핵심으로 한다. 군인, 특히 장교의 死生觀은 군대의 가장 중요한 戰力이다. 북한군은 몇 번의 간첩선과 잠수정 침투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잡히기 직전에 自爆, 自殺하는 정신력을 유지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군의 가미가제 특공작전을 연상시킨다. 물론 병사들이 굶주리는 북한군의 일반적 士氣는 높지 않다.
한국군 장교단은 좌파정권이 韓美동맹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韓美연합사 해체 공작을 강행해도 이에 순응했다. 연합사 해체 주장에 대해서 그렇게 반대했던 국군이, 좌파 대통령의 지시 한 마디에 그 전의 소신을 간단하게 접어버렸다. 자리를 걸고 참말을 하는 장교가 한 명도 없었다. 목숨을 걸 필요도 없고, 감옥에 갈 일도 아니었다. 국가와 국군을 위한 충정의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인가?
한국군 장교단의 死生觀을 묻고 싶다. 일본의 武士道를 定義할 때 "죽는 것에 대한 自覺"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다. 군인, 특히 장교의 직무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각오가 되어 있는가? 自問自答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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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의 恩人 리지웨이 장군의 紳士道
-인간애와 교양, 그리고 애국심
6.25 熱戰이 한창이던 1950년 겨울은 추웠다. 참전 미군들의 회고담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가 'cold'이다. 미군이 싸운 전투중 가장 온도가 낮았던 것이 6.25였다.
지금 북한동포들은 우리가 6.25 때 겪었던 그 추위를 거의 알몸으로 견디고 있다. 춥고 배고픈 시절은 남한에선 추억이 되었으나 북한동포들에게는 현실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포함한 남한사람들도 몇 사람의 미국인이 아니었으면 지금 북한동포처럼 추위에 떨고 있을 것이다.
'알지도 못한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참전을 결단했던' 트루먼 대통령, 군사전문가들의 거의 일치된 반대를 꺾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戰勢를 역전시켰던 맥아더 장군, 낙동강 방어선과 부산교두보를 확보하여 반격의 힘을 축적했던 워커 미8군 사령관. 워커는 1950년 12월에 한국군 트럭에 받혀 사망하였다.
중공군 대공세 시기에 워커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유엔군의 총붕괴를 막고 서울을 재탈환했던 릿지웨이, 조종사 아들을 북한상공에서 잃은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에 대하여 고마워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
나는 릿지웨이 장군의 한국전 회고록을 읽었을 때 여러 번 감동했다. 文明국가의 장교들이 가진 紳士道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戰死한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미8군 사령관에 임명된 그는 부인한테 제대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도쿄를 거쳐 대구로 날아온다. 맨 처음 그가 한 일은 李承晩 대통령 예방이었다. 李 대통령은 미군이 중공군의 총공세에 굴복하여 한국을 포기하고 철군하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나는 이 완강한 戰士를 만나 내가 8군을 일본으로 데려가기 위해 온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싶었다. 그는 약간 수동적으로 나를 맞았다. 나는 악수를 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을 했다. 말을 돌려서 할 시간도 없었다.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대통령 각하, 여기 오게 되어서 기쁩니다. 저는 여기 머물려고 온 것입니다"
이 말을 그는 기다렸던 것 같았다. 그는 태양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눈에 물기가 고였다. 그는 두 손으로 나의 손을 잡았다>
일단 서울을 포기한 직후 릿지웨이 장군은 한국군의 丁一權 참모총장에게 보낸 친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직 하나의 궁극적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귀하의 국민들의 자유를 지켜내는 일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함께 싸워야 한다>
릿지웨이 장군은 1951년 1월21일 苦戰中인 미8군을 향해서 '우리는 왜 여기에서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란 제목의 글을 내려보낸다. 이 글에서 그는 "우리는 한국의 마을과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만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국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만 싸우는 것만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지는 글의 요지는 이러했다.
<핵심적 문제는 서방문명이 공산주의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가, 아니면 포로들을 사살하고, 시민들을 노예화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지배층이,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神聖視하는 정부를 무너뜨릴 것인가이다. 우리의 동맹국인 한국의 자유뿐 아니라 우리의 자유, 우리의 自主독립과 생존을 위해 우리는 싸우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공산주의와 개인의 자유 중 兩者擇一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으나 동시에 최선의 기회를 부여받았다. 군인이란 직업의 명예를 드높여, 우리를 믿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의무를 다할 기회가 왔다>
1951년 1월1일 그는 서울 북방으로 가서 후퇴하는 한국군을 보았다. 회고록에서 그는 한국군이 무질서하게 무기도 버리고 지휘계통도 무너진 채 퇴각하는 모습을 실감 있게 묘사했다. 릿지웨이 장군이 차에서 내려 한국군의 潰走(궤주)를 정지시켜려고 해도 공포에 질린 한국군은 미군 사령관의 말도 듣지 않더란 것이다. 그는 한국인들의 참혹한 피난행렬에 대해서 이런 요지의 묘사를 했다.
<그 장면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수염을 기른 노인들, 아들의 등에 어린아이처럼 업힌 할머니들, 그들은 말 없이 한강을 건너갈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공산주의의 폭력을 피해 잠시 맛보았던 그 자유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이 시기 미군은 후퇴하고 있었고 릿지웨이는 병사들과 함께 막사에서 생활하면서 미군의 士氣를 회복시켜 반격의 찬스를 만들기 위하여 苦鬪하고 있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시기에도 그는 한국인에 대한 예의와 동정심과 배려를 유지했다. 그의 회고록엔 고생하는 한국인들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紳士란 어려운 조건하에 처했을 때 품위를 유지하는 言行의 소유자이다.
같은 시기 毛澤東은 人命손실에 대해서는 일체의 고려 없이 작전을 짜고 수행했다. 중공군이나 북한군측의 기록에선 인간적 배려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戰場에서도 인간의 생명, 그것도 他國民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 릿지웨이 장군. 그는 1951년 봄의 반격작전을 통해서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한국포기를 검토하던 미국 워싱턴의 정책입안자들을 안심시키고 한국을 지켜냈다.
그때 미국 정부 일각에선 '한국 포기'를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유엔군의 主力인 8군 장병들의 사기는 떨어졌다. 한국의 겨울 추위는 미군들의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릿지웨이 장군은 이들의 士氣를 회복시키지 않고서는 반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50代의 이 猛將은 텐트를 치고 장병들과 행동을 함께 했다. 가슴에 수류탄을 달고 전선을 누비면서 장병들의 軍心을 파악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발끝에서 입술까지 얼어붙은 몸을 녹인 커피 한 잔의 추억을 실감 있게 묘사했다. 아래 소개하는 글은 릿지웨이가 미8군 소속원들에게 내린 훈령 全文이다. 미군 장교들의 생각과 筆力을 잘 보여준다. 진짜 군인은 모두가 知性人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내가 한국에 온 지난 數週 동안 제8군 장병들의 마음속에 두 개의 절실한 의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이다. 8군 사령관으로서 나는 모든 장병들이 나의 응답을 들을 권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1951년 1월21일자로 8軍에 소속되거나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아래와 같은 나의 응답을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첫번째 질문, "왜 우리는 여기에 있는가?"에 대한 답은 간단하고 단호하다. 우리가 존중하는 정부의 合憲的으로 구성된 당무자들이 내린 결정에 의해서 우리는 여기에 와 있다. 유엔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말했다: "유엔 회원국들이 우리에게 부여한 임무에 따라서 우리 사령부는 한국에서 군사적 布陣을 유지할 것이다"
더 이상의 논평은 불필요하기 때문에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바치고 기대하는 충성심은 이상의 명령에 대한 아무리 사소한 의문이라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대답은 단호한 것이다.
두번째 의문은 아주 심각한 것이므로 우리 사령부 소속원들은 논리적이고 완전한 답변을 들을 권리가 있다. 나의 답변은 이렇다.
나로선 문제가 명쾌하다. 한국의 이런 저런 도시와 농촌을 지키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그런 不動産 문제는 부수적인 것이다. 문제는 동맹국 한국의 자유에만 한정되지도 않는다. 한국인들의 지조와 용기가 전쟁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꺾이지 않았음을 우리가 높게 평가하지만, 한국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것은 더 큰 명분의 한 상징이며 이 大義명분 속에 포함되는 셈이다.
문제의 본질은 서구 문명의 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에서 꽃피도록 하신 그 힘이 공산주의를 저지하고 패배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인간의 존엄성을 비웃고, 포로들을 쏘고, 시민들을 노예로 삼는 독재세력이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神聖하게 보는 민주세력을 뒤집어엎을 것인가이다. 문제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심에 따라서 우리가 생존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시체처럼 사라질 것인가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싸움은 동맹국 한국의 국가적 생존과 자유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이 논란의 여지가 없이 명백해진다. 이 전쟁은, 우리의 조국이 독립과 명예를 누리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자유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이다. 우리가 바친 희생과 도움은 他人을 위한 자선이 아니라 우리를 지키기 위한 직접적 自衛행동이었다.
결론적 분석: 여기 한국에서 제기된 문제의 핵심은 공산주의냐, 개인의 자유냐의 투쟁이며, 무리가 목격한 그 겁에 질린 사람들의 대탈주를 중단시킬 것인가, 아니면 머지 않는 장래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절망적이고 비참한 그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 것인가이다.
이것들이 우리가 싸우는 이유들이다. 일찍이 그 어떤 軍 사령부의 소속원들도 우리가 직면한 이런 도전을 감당한 적이 없다. 이는 挑戰이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과 우리 국민들 앞에서 최선의 노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리하여 군인이란 직업과 우리를 키워준 용감한 사람들에게 영광을 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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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 플리트 8군 사령관 아들의 戰死
-사령관은 실종된 아들에 대한 과도한 수색을 중단시켰다.
6.25 남침 전쟁 때 유엔군의 主力이던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그의 아들이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한 경우이다. 그의 아들 지미는 그리스에서 근무하다가 本國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해외 근무를 한 직후라 다시 海外근무를 할 자격이 없었지만 굳이 자원을 하여 한국 전선을 택했다. 그는 한국 전출 명령을 받자 어머니에게 이런 요지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만...저는 자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전투중에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機首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에는 기관총 射手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야간비행을 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싸우고 있으며 드디어 저의 微力한 힘이나마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뤄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지미는 한국으로 부임하자 동료 승무원들을 데리고 미8군 사령부를 찾아가 아버지를 만났다. 1952년3월19일 밴 플리트가 만60세 생일을 맞은 날이었다. 며칠 뒤 父子는 서울 북쪽의 갯벌로 기러기 사냥을 나갔다. 4월2일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과 통화를 했는데 아들 짐이 그즈음 북한 지역으로 출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1952년4월4일 오전 10시30분, 밴 플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제임스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아들 지미가 야간 출격을 한 뒤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지미와 두 승무원은 압록강 남쪽에 위치한 순천 지역을 정찰 폭격하기 위하여 출격했었다. 지미로서는 네번째 출격이자 최초의 단독 비행이었다. 새벽 1시5분에 이륙한 그는 새벽 3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다와 접촉했다. 지미는 主표적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면서 예비 표적을 요구했다. 예비표적을 향하여 날아가던 지미의 폭격기는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긴 것이었다. 그에 대한 구출작전이 진행되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에 대한 공군의 수색작업이 도를 넘지 않도록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구출 작전을 중지하라"고 명령한 것도 그였다. 그 후로도 그는 가끔 아들이 실종된 지역의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그해 부활절 밴 플리트는 한국 戰線에서 실종된 군인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 벗은 미국 국민이기도 할 것이고, 남침을 당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더구나 밴 플리트의 아들은 자원해서 한국에 왔다. 동포가 아닌 他國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던진 이 젊은이에게 살아 있는 한국인들은 모두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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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CIA 부장의 외아들, 한국에 참전, 머리에 총 맞아
-프린스턴 대학교에선 이름 딴 賞 제정
알렌 덜레스와 존 포스터 덜레스 형제는 장로교 목사를 아버지로 하여 태어났다. 兄인 알렌 덜레스는 2차 세계대전 때 스위스에 머물면서 정보工作을 지휘하였다. 그는 1947년 미국 CIA가 창설될 때 많은 도움을 주었고 1953년부터 9년간 CIA 부장직을 맡았다. 그의 동생 덜레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래서 國務장관으로 일하였다.
알렌 덜레스는 獨子를 가졌는데 이름이 알렌 메시 덜레스 2세였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역사와 정치를 공부하면서 公職者의 길을 준비하고 있던 중 6.25 남침전쟁이 터지자 해병대에 지원하여 장교로서 한국戰線에 배치되었다. 그는 최전방에서 싸웠다. 아버지는 아들을 후방에서 근무하도록 해달라는 따위의 영향력을 전혀 행사하지 않았다. 그는 1952년 머리에 총상을 맞고 영구적인 정신장애자가 되었다. 프린스턴 대학은 1997년에 '알렌 메시 덜레스 51년 賞'을 제정하여 국가를 위하여 봉사한 학생들에게 주고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존 셀던 도드 아이젠하워도 장교로 참전하였다. 아이젠하워가 195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을 때 아들은 한국戰線의 미군 전투 대대에 배속된 소령이었다. 대통령 당선자는 한국戰線을 방문한 자리에서 지휘관에게 "내 아들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부탁한다"고 했다. 대통령의 아들이 敵軍의 포로가 되어 이용당하는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이젠하워 소령은 사단본부 근무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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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富者 동네의 한심한 사람들
몇년 전 서울의 부자동네 사람들이 많이 나온 모임에 갔다. 구청장이 자랑을 했다.
"그곳에 임대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라는 정보를 미리 입수하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우리 區가 무너질 것이란 위기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서울시를 설득하여 그곳에다가 테니스장을 짓기로 했습니다"
江北에 사는 나는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공무원이 이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해도 되나'하는 생각이 하나이고, 이런 말을 듣고도 모두가 잘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 부자마을 사람들의 양심은 도대체 몇 원짜리인가 하는 분노였다.
임대아파트가 옆에 들어서면 주거, 교육환경이 나빠지고, 아파트 값이 떨어진다고 건축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는 부자들이 있기 때문에 좌파들이 득세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양극화 선동'이 먹히는 것이다. 임대아파트 입주자를 마치 백인이 흑인 보듯이 하면서 합법적인 건축을 방해하는 이런 부자들이야말로 한국 사회를 계급적으로 분열시키는 사람들이며 도덕적으로 평가해도 親北좌파보다 못한 존재이다. 임대아파트가 들어선다고 용감하게 억지를 부리는 부자들일수록 평소엔 호화판 생활을 즐기면서 애국운동을 기피하고, 투표일엔 외국여행을 나가는 경우가 많다. 좌파의 도전에 대한 위기의식도 거의 없다. 자신들의 자유와 재산은 그 누군가가 대신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富者들은 김정일과 그 추종세력의 위협에 직면해서도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지 않는다. 모든 생명체는 생명체로서의 존립을 위협하는 외부 세력에 대해서는 싸워야 할 생명체로서의 의무가 있다. 생명의 핵심은 자유이다. 자유를 위협하는 세력에 맞서 싸우지 않는 순간 그런 생명체는 생명력을 잃고서 無생물이 되는 것이다. 밟았을 때 꿈뜰대는 지렁이는 생명체이지만 밟아도 반응이 없는 것은 생명이 아니라 시체이든지 돌과 같은 무생물이다. 무생물체는 자유를 상실하여 아무런 가치가 없으므로 쓰레기 취급을 받아도 할 수 없다.
친북좌파들은 자신들의 존립을 보장받기 위하여 피나는 투쟁을 계속해왔다. 여론과 언론과 권력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건하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지키고 확장하기 위하여 싸웠다. 그들의 지향점은 틀려먹었으나 생명체로서의 의무는 다한 셈이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봐서도 싸우는 좌파는 안 싸우는 우파보다 우월하다.
가장 경멸해야 할 부류는 못사는 사람들에게 못되게 굴면서 권력을 쥔 좌파에 대해서는 싸움을 기피하고 굴복해버리는 '잘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오만함으로써 좌파들을 키웠고 비겁함으로써 좌파들을 강화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大選에서 사이비 좌파를 물리치고 정상적인 사람이 이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강남사람들부터 보다 겸손해지고 보다 용감해져야 할 것이다.
[ 2010-01-20, 1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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