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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세유표(經世遺表)
교관지속(敎官之屬)
호조(戶曹) : 판서 경(卿) 1인, 참판 중대부 1인, 참의 하대부 1인, 정랑 상사 2인, 좌랑 중사 4인.
서리 20인, 조례 40인.
살피건대, 원전에는 서리가 60명이다.
생각건대, 호조의 사무가 비록 번다하나 서리의 정원이 이렇게 많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주례》는 천자(天子)의 예이나, 대사도(大司徒) 부사(府史)의 정수(定數)가 18명에 불과한데 하물며 작은 나라이겠는가? 이것은 대개 호조는 이록(利祿)이 풍족한 까닭으로 차차 증가되어 이에 이른 것이었다. 구전(舊典)에는 38명인데 속전(續典)에 60명으로 되었으니 이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하물며 현재는 경전사(經田司)ㆍ판적사(版籍司) 따위, 별도 아문(衙門)을 차린 것이 많고, 그곳 서리는 모두 호조에서 갈라져 나간 것이므로 이번에는 서리를 다만 20명만 배정하였다. 고지기가 또 20명은 되어야 할 터이니, 조례 40명과 급료를 변통하면 거의 적당할 것이다.
한성부(漢城府) : 판윤(判尹) 경 1인, 좌윤(左尹) 중대부 1인, 우윤(右尹) 하대부 1인, 서윤(庶尹) 상사 2인, 주부(主簿) 중사 2인.
서리 20인, 조례 40인.
생각건대, 한성부라는 것은 한(漢)나라 때의 경조윤(京兆尹)과 같은데, 《주례》에는 이런 관직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향수(鄕遂)를 총괄하는 관직이니 지관(地官)에 속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건대, 서윤 2명 중 한 명은 판관이다(예는 앞에 보임).
육부(六部) : 부령(部令) 부마다 중사 1인, 교관(敎官) 부마다 하사 2인.
서리 부마다 4인, 조례 8인.
생각건대, 옛적 왕국(王國)의 제도에, 국도(國都)를 정전(井田) 꼴같이 아홉으로 나누었고 왕궁이 복판에 위치하였다. 모든 관공서가 앞쪽 한 구역에 있고 모든 저자 가게는 뒤쪽 한 구역에 있으며, 좌우 6향(鄕)이 서로 마주한 것이 선왕(先王)의 법이다. 우리나라도 창건한 당초부터 비록 이와 같지는 않았으나 부(部)를 가르는 수효는 여섯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고 다섯으로 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다. 이제 5부로 된 것은 갈라서 6부로 배정하고 동북 쪽은 동(東) 1부, 정동 쪽은 동2부, 동남 쪽은 동3부라 한다. 그리고 서북 쪽은 서(西) 1부, 정서 쪽은 서2부, 서남 쪽은 서3부라 한다. 6부로써 6향에 맞추어 선왕의 법에 따르는 것은 그만둘 수 없다.
생각건대, 옛적에 대사도의 직무는 전적으로 인민의 교육을 관장하였다. 이른바 “향3물(鄕三物)로써 만민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후세의 호부(戶部)는 오로지 재부(財賦)만 관장하여, 오직 거두어들이는 것만 직무로 삼았으므로 백관(百官)이 별처럼 많이 있어도 사람을 가르치는 관직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러므로 윤기(倫紀)가 끊어지고 풍속이 무너져버렸다. 후세의 정치로는 한 문제(漢文帝)와 당 태종(唐太宗)이 훌륭했다 하겠으나, 끝내 3고(古) 시대와 비슷할 수 없었음은 모두 이 때문이었다. 《주례》에 향로(鄕老)ㆍ향대부(鄕大夫)ㆍ주장(州長)ㆍ당정(黨正)ㆍ족사(族師)라는 등속은 모두 사람을 가르치는 관직이므로, 이제 육부(六部)ㆍ육학(六學)을 오로지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직무로 삼아 단지 사송(詞訟)만을 듣는 것에 그치지 않도록 한다. 그러므로 도사(都事)를 고쳐서 교관(敎官)이라 하였다.
육학(六學) : 향대부(鄕大夫) 학마다 2인, 교수(敎授) 학마다 중사 1인, 훈도(訓導) 학마다 하사 1인, 동몽교관(童蒙敎官) 학마다 하사 1인.
서리 학마다 4인, 조례 학마다 8인.
살피건대, 옛적에 당(黨)에는 상(庠)이 있고, 주(州 : 5당이 1주)에는 서(序)가 있으며, 향(鄕 : 5주가 1향)에는 교(校)가 있고, 국(國 : 6향이 1국)에는 학(學)이 있었는데, 이것이 맹자(孟子)가 말한 상ㆍ서ㆍ학ㆍ교라는 것이었다. 그런즉 지금의 4학은 곧 옛날에 향교(鄕校 : 옛적에 四門小學이라는 것이 있어, 오로지 글자만 익혔는데, 지금 사람들이 4학을 4문 소학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라 이른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여섯으로 할 것이고 넷으로 함은 마땅하지 않으며, 옛적 향로ㆍ향대부ㆍ주장ㆍ당정의 직무를 상고하여 힘써 시행함이 마땅하고, 다만 시부(詩賦) 따위로 유희 삼아 책임을 메우는 것은 불가하다. 그런즉 의당 그 명위(名位)를 높여야 할 것이다.
6부에서 각각 덕망 있는 대부 두 사람을 선발하여 6부의 향대부로 삼아 6학의 교수로 한다. 무릇 사람을 가르치거나 사람을 벌할 때에 모두 향대부에게 명(命)을 품(稟)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다. 《주례》에는 향마다 향대부가 경(卿) 한 사람으로 되어 있으나, 이번에는 반드시 두 사람으로 하였다. 이것은, 그때에는 위에 향로(鄕老 : 2향마다 公이 한 사람임)가 있고, 그 밑에 주장과 당정이 있었으므로 비록 경이 한 사람이더라도 넉넉했으나, 지금은 그렇지가 못하니 마땅히 두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 중 한 사람은 정경(正卿)으로, 한 사람은 중대부나 하대부로 한다. 만약 본부(本府) 안에 본래 정경이 없으면 중대부와 하대부 각각 한 사람이라도 가하다. 만약 중대부도 없으면 이웃 부(部)의 경대부(卿大夫)에게 그 직무를 대신해서 주관하도록 하여도 불가할 것은 없다.
생각건대, 무릇 관직을 마련하는 법에 비록 1원이라도 통솔받지 못하는 곳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 지금 동몽 교관(童蒙敎官)만이 소속된 데가 없이 스스로 한 관직으로 된 것은 옳은 제도가 아니다. 옛적에 향학 외에 소학(小學)이라는 것이 공궁(公宮) 남쪽에 별도로 있었다(王制에 보임). 북위(北魏)의 효 문제(孝文帝)가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4문 소학을 세웠는데, 지금의 4학은 곧 향학이며 또한 4문학이다. 그런즉, 동몽 교관도 4학의 정식 관직이 됨이 마땅한데 어찌해서 허공에 떠서 정박할 데를 모르는 것인가? 이미 6학을 설치했고 또 학마다 동몽 교관 한 사람을 두었으니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함은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전자서(典粢署) : 제조 경 1인, 주부 중사 1인, 봉사 하사 2인.
서리 2인, 조례 6인.
생각건대, 《주례》 지관(地官)에 용인(舂人)ㆍ희인(饎人)이 있어, 자성(粢盛)을 공급했는데, 원전에는 자성을 맡은 관직이 없다. 오직 동교(東郊)에 적전(籍田) 두어 구역이 있어, 백성의 힘을 빌려서 갈고 김매다가 수확할 때가 되어서는 호조 낭관(郞官)이 벼 베는 것을 감독하는 것뿐이다. 지금은 낭관이 베는 것을 감독하던 법마저 없어졌으니, 법의 큰 결점이다. 나는, 동교에다 적전을 더 설치하고 적전 가에다 공서(公署) 하나를 설치해서, 호조 낭관이 밭갈기, 씨뿌리기, 옮겨심기, 김매기, 거두기, 방아찧기, 쌀쓸기를 감독하며, 쌀을 받아서 저장했다가 제사 때가 되면 제소(祭所)에 바쳐서 희생(犧牲)을 맡은 관직같이 함은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생각건대, 원전 친경(親耕)조에 적전 영(籍田令)이 있으니, 전자서 낭관에게 이 직무를 겸하도록 함이 마땅하다.
전생서(典牲署) : 제조 경 1인, 주부 중사 1인, 봉사 하사 2인.
서리 6인, 조례 10인.
생각건대, 《주례》에 전생관(典牲官)의 서차(序次)가 재부(財賦)를 관리하는 여러 관직의 위(牧人ㆍ充人 등)에 있는데 제사를 중하게 여긴 것으로서 이번 또한 그대로 하였다.
사축서(司畜署) : 제조 중대부 1인, 주부 중사 1인, 봉사 하사 2인.
서리 4인, 조례 8인, 목인(牧人) 20인.
살피건대, 속전(續典)에도 오히려 이 관청이 있으니, 혁파된 것이 오래지 않았다. 생각건대, 짐승을 기른 다음이라야 희생이 있을 수 있는데, 목관(牧官)은 없애고 생관(牲官)을 남겨둔 것은 희생을 잇따라 제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 사람이 “조선(朝鮮)에는 양(羊)이 없다” 하나, 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양을 치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 풍속에 집집마다 소를 치니 소를 구할 수가 있고, 마을마다 돼지를 치니 돼지도 구할 수 있으나, 유독 양은 구할 수가 없다. 오직 외방(外方) 고을 창고 뜰에다 10여 마리씩 기르는데 창노(倉奴)에게 기르도록 할 뿐이요, 먹이는 데에 부지런한가 게으른가를 주관(主官)이 고찰하지 않으며, 줄고 느는 것도 감사가 묻지 않는다. 양 한 마리가 불어나면 창노에게 1년 동안 해롭고, 두 마리가 불어나면 창노에게 2년 동안 해가 되는데 양이 어찌 불어나겠는가?
이제 목축(牧畜)을 맡은 관서를 다시 설치하고 목인 수십 명을 증원한 다음, 근교(近郊)에 갈라 보내서 양치는 데에 전념하도록 함이 마땅하다. 밤섬[栗島 : 용산에 있음]ㆍ전도(典島)ㆍ청라도(靑羅島 : 부평에 있음)ㆍ미법도(彌法島 : 강화에 있음) 같은 여러 곳에 모두 우리를 설치하고 양을 칠 것이다. 그해 연말에 공장(功狀)을 아뢰도록 하고 본서(本署)에서 그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고찰한 다음, 호조에 보고한다. 그리하여 공이 있는 자는 서반(西班) 말직(末職)에 참여하도록 하면 10년이 못 되어 조선에도 양이 많아질 것이다. 그 요포(料布)와 소비되는 재물 같은 것은 사축서 공물(貢物)을 본서(지금은 호조에 속해 있다)에 다시 이속(移屬)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또 빙고(氷庫)에 얼음 저장하는 법을 나의 말대로 한다면 해마다 수만 꿰미 돈이 남을 터이니, 그 절반을 사축서로 넘겨주면 넉넉하지 못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광주(廣州) 당정주(棠亭洲)에도 양을 칠 만하다.
평시서(平市署) : 제조 경 1인, 판관(判官) 상사 1인, 주부 중사 2인.
서리 6인, 조례 10인.
생각건대, 《주례》에 사시(司市)가 지관 소속이므로, 이제 그대로 하였다.
사록창(司祿倉) : 제조 중대부 1인, 부정(副正) 상사 1인, 주부 중사 1인, 봉사 하사 2인.
서리 8인, 조례 12인.
사록창이란 광흥창(廣興倉)이다.
생각건대, 광흥창이란, 백관에게 녹봉(祿俸)을 분배하는 관부(官府)이다. 《주례》 지관에도 사록이라는 관직이 있는데, 그 직장(職掌)은 비록 누락되었으나(經文이 결락되어 있다) 그 명칭을 없앨 수는 없다.
생각건대, 원전에는 광흥창에만 홀로 제조가 없는데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만약 호조에 관계된다고 해서 제조를 두지 않은 것이라면, 다른 기관도 그런 것이 많으니 호조 참판에게 예겸하도록 함이 마땅하다.
사희창(司餼倉) : 제조 하대부 1인, 부정(副正) 상사 1인, 주부 중사 1인, 봉사 하사 2인.
서리 8인, 조례 16인.
사희창이란 군자감(軍資監)이다.
생각건대, 군자감은 오로지 서리와 조례[吏隸]의 요(料)를 관장하는 곳이다. 비록 군수(軍需)도 있기는 하나 중점이 요를 주는 데에 있으므로, 사희창이라 한다.
살피건대, 속전에 군자감 제조는 호조 판서가 예겸하도록 되어 있다.
살피건대, 6관에 3대부(大夫)가 있는 것은, 겉치레로 둔 것이 아니고, 그 직무를 분담하여 함께 국사를 처리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이(吏)ㆍ병(兵)ㆍ형(刑) 3조의 참판과 참의는 그런대로 관장하는 직무가 있으나, 호(戶)ㆍ예(禮)ㆍ공(工) 3조의 참판과 참의는 전연 맡은 일이 없어 순전히 쓸데없는 관직[冗官]으로 되어 있으니, 또한 법을 잘못 세운 것이다. 이제 사희창 제조를 호조 참의가 예겸하도록 배정한다.
사향창(司餉倉) : 제조 경 1인, 주부 중사 2인.
서리 2인, 조례 6인.
내향고(內餉庫) 서리 1인.
사향창이란 용산 별영(龍山別營)이다.
생각건대, 용산 별영은 곧 군향(軍餉)을 맡은 곳이다. 지금 제도는 호조좌랑이 예겸하나, 호조의 낭관(郞官)은 본래 사무가 바쁜데도 이 직무를 겸하고 본시 풍성한 기관의 관원으로서 또 이 녹봉을 겸하도록 함은 모두 고르지 못하다. 이제 별도로 한 관청을 설치하여 그 제조는 호조 판서가 예겸하도록 하고, 낭관만은 별도로 두 사람을 둠이 마땅하다. 그리고 서리와 조례는 호조에서 줄여 옮겨 씀이 편리하다.
내향고란 양향청(粮餉廳)이다. 저동(苧洞)에 있으며, 별영과 더불어 서로 표리(表裏)가 된다.
직공사(職貢司) : 제조 경 1인과 중대부 1인, 부정(副正) 상사 1인, 주부 중사 2인.
서리 10인, 조례 20인.
직공사란 선혜청(宣惠廳)이다.
생각건대, 선혜청에 도제조가 3원으로 3공(公)이 겸하는데, 대개 창설 초기에 대신에게 관리하도록 했던 것을 그 후에도 답습해서 고치지 않은 것이다. 지금은 법제가 이미 확립되었으므로 대신에게 창조(倉曹)를 거느려서 서리와 조례를 차임(差任)하고, 두곡(斗斛)을 고찰하도록 하는 것은 사체에 방해될 듯하니 그 자리는 줄이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생각건대, 선혜청을 창설하던 때에는 대동법(大同法)이 영구히 시행될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 낭관을 판관(判官)ㆍ주부라 하지 않고 임시로 낭청(郞廳)이라 하여, 군직(軍職)의 녹을 받도록 했던 것이다. 지금은 대동법을 세운 지 이미 오래이고 시행에도 폐단이 없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임시 설치한 것으로 명칭할 것인가? 모든 일이 초창기에는 모두 이와 같았다. 이제 낭관을 모두 정관(正官)으로 편입시켜서, 산만하고 기강이 없도록 하지 말 것이다.
생각건대, 선혜청 낭관이 본시 5원이었으나, 이제 균역청(均役廳)과 상평청(常平廳)이 모두 별도 관청으로 되었으므로 낭관을 2원으로 줄인다.
상평사(常平司) : 제조 경 1인, 주부 중사 2인.
서리 4인, 조례 8인.
생각건대, 선혜청 안에 상평청(常平廳)과 진휼청(賑恤廳)이라는 것이 있는데, 상평청은 국초(國初)에 설치한 것으로 지금은 그 명칭만 남았을 뿐이다. 여러 도의 환상곡(還上穀)이 처음에는 모두 상평과 진휼 두 청의 곡식이었으나, 그 모곡(耗穀)에 불편함이 있다는 이유로 일 맡은 신하가 그 양을 해마다 줄이고 달마다 깎아버렸다. 그리하여 지금 외방 고을에 상평청과 진휼청 곡식이 많은 곳도 3~4섬, 적은 곳도 3~4말인바, 구차스럽게 그 명목만 남아서 존양(存羊)하는 뜻을 은근히 담고 있을 뿐이다.
생각건대, 상평청이라는 것은 3대 때의 떳떳한 법이다. 맹자의, “개와 돼지가 사람의 먹을 것을 먹어도 단속할 줄 모른다”라는 말은, 풍년이 들어서 낟알 곡식이 어지럽게 흩어져도 물가를 공평하게 하여 거두어들일 줄 모른다는 말이고, 또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널렸는데도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구제할 줄 모른다”는 말은 흉년에 곡식이 금싸라기같이 귀해져도 물가를 공평하게 하여 나눠줄 줄을 모른다는 말이다. 선왕의 법이 본래 이와 같았는데 이것이 어찌 경수창(耿壽昌)이 창안한 것이겠는가?
왕제(王制)에 “나라에 3년 동안 먹을 만큼 저축한 양식이 없음은 위망(危亡)할 조짐이다” 하였으니, 만약 상평하는 방법이 아니면 어찌 3년 동안 먹을 만큼의 양식을 저축할 수가 있겠는가? 이제 상평청으로서 성(城) 안에 있는 것은 별도 아문을 만들어서 내사(內司)로 하고, 또 강변에 터를 잡아 창고를 세워서 외사(外司)로 하여 풍년이 든 가을마다 값을 올려서 사들였다가, 흉년이 든 봄에 값을 내려서 내다 판다. 그리하여 물가가 항상 평등하도록 하는데 이것을 상평이라 이른다. 상평이라는 것은 흉년을 구제하는 정사이니, 진휼(賑恤)하는 정사도 상평관(常平官)에게 붙이는 것이 마땅하다. 상평청과 진휼청을 원래 서로 분리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약 진휼하는 해를 만나면 상평청 제조는 5인으로 증원하고 낭관은 4인으로 증원하는 것이 마땅하며, 6부를 갈라 맡아서 진휼하는 것을 감독하도록 한다.
평부사(平賦司) : 제조 경 1인과 중대부 2인ㆍ하대부 2인, 첨정(僉正) 상사 2인, 주부 중사 2인.
서리 8인. 조례 16인.
평부사란 균역청(均役廳)이다.
생각건대,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전지(田地)가 있는 자에게는 부세(賦稅)가 있다” 하였으니 부(賦)라는 것은 주(周)나라의 9부이다. 《주례》에는 천관 총재가 9부로써 재물을 수렴했는데, 첫째 방중지부(邦中之賦), 둘째 사교지부(四郊之賦), 셋째 방전지부(邦甸之賦), 넷째 가삭지부(家削之賦), 다섯째 방현지부(邦縣之賦), 여섯째 방도지부(邦都之賦), 일곱째 관시지부(關市之賦), 여덟째 산택지부(山澤之賦), 아홉째 폐여지부(幣餘之賦)로, 대부(大府)에서 9부의 2등품을 관장하여 그 재물을 받아들였다. 관시지부로 왕의 찬수(饌羞)와 의복을 대령하고 방중지부로 빈객(賓客)을 대접하며, 사교지부로 초말(稍秣)을 대비하며, 가삭지부로 분반(匪頒)할 것을 대비하며, 방전지부로 국가 공사에 대비하고, 방현지부로 폐백(幣帛)을 대비하며, 방도지부로 제사에 대비하며, 산택지부로 상사(喪事)에 대비하며, 폐여지부로 사여(賜與)에 대비하였다.
사회(司會)는 9부(賦)하는 법으로써 전야(田野)의 재용(財用)을 영(令)하였고, 지관 재사(載師)는 모든 토지의 생산력을 요량하였다. 그리하여 국택(國宅)에는 부세가 없고 원전(園廛)에는 20분의 1을, 근교에는 10분의 1을, 원교에는 20분의 3을, 전(甸)ㆍ초(稍)ㆍ현(縣)ㆍ도(都)에는 모두 10분의 2를 초과하지 않았으나, 오직 옻나무 숲에 대한 부세는 20분의 5로 하였다. 무릇 택지에 나무를 심지 않은 자에게는 이포(里布)가 있었고, 전지를 경작하지 않는 자는 옥속(屋粟)을 내야 했으며, 백성으로서 직사(職事)가 없는 자에게는 부가의 정[夫家之征]을 내도록 했는데, 수시로 그 부를 징수하였다.
여사(閭師)는 서울 안과 사교(四郊)의 인민과 육축(六畜)의 수효를 관장하여, 때에 따라 그 부를 징수하였다. 현사(縣師)는 방국(邦國)ㆍ도비(都鄙)ㆍ초전(稍甸)ㆍ교리(郊里)등 지역을 관장하여 그 부가(夫家)ㆍ인민(人民)ㆍ전래(田萊 : 경작하지 않은 전지를 萊라 함) 따위의 수효를 분변하고, 육축과 거련(車輦)까지 상고하여 연말에 전야(田野)의 부공(賦貢)을 징수하였다. 수인(遂人)은 나라의 야(野 : 전ㆍ초ㆍ현ㆍ도)를 관장하여 연말에 그 가구의 많고 적음과, 육축과 거련을 조사하고, 노유(老幼)와 폐질(廢疾)을 분변하여 공부(貢賦)를 내도록 하였다. 이재(里宰)는 그 읍의 인민과 육축을 비교하여 연말에 그 재부를 징수하였다. 부(賦)라는 것은 요순(堯舜)과 삼왕(三王)의 법이었고, 후세에 백성의 재물을 취렴(聚斂)하던 신하가 창설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는 본래부터 부법(賦法)이 없었고 이른바 전세(田稅)라는 것도 또한 맥(貊)의 법에 가까워서 국용(國用)과 관용(官用)이 자연 부족하였다. 이리하여 명목 없는 부세가 날마다 불어나서 모두 전결(田結)에 따라 징수하는데, 옛적에는 맥의 법이었던 것이 지금에는 걸(桀)의 법이 되어버렸다. 시험 삼아서 남방(南方) 사정을 논한다면, 무논[沓]에 종자 열 말을 뿌리면 대개 곡식 20포(苞)를 수확하는데, 그 중 10포는 전지 임자에게 보내고, 2포는 종자로, 2포는 환상곡으로, 2포는 잡부(雜賦 : 자잘한 명목은 지금 다 기록할 수도 없다)로 각각 들여가니, 농부가 먹는 것은 기껏해야 3~4포에 불과하다. 선왕은 10분의 1을 징수했는데 지금은 10분의 7~8을 내야 하니, 백성이 무엇으로 살겠는가? 높고 큰 선박이 해마다 수천 꿰미 이익을 남기고, 염전과 어장에도 해마다 수백 꿰미 이익을 얻는데 여기에 부세를 징수하는 것을 어찌 학정이라 이르겠는가?
세상에서는 홍계희(洪啓禧)가 균역청을 창설함으로써 집안이 멸망하게 되었다 하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진실로 법을 잘못 세웠다 하여 반드시 천벌을 받는다면 군포(軍布)를 창설한 사람은 장차 씨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입법하던 초기에 선인(船人)ㆍ어부(漁夫)ㆍ향리(鄕吏)들이 근거 없는 말로 선동함으로써 식견 없는 사대부가 따라서 화동(和同)한 것이었다. 균역법(均役法) 조목을 읽어보니, 우리 영조대왕이 이 법을 창설할 때에 선포(宣布)한 전교(傳敎)는 그 지극한 정성과 독실(篤實)했던 뜻이 천지와 귀신을 충분히 감동시켰고, 그 영단을 내린 말씀은 만부(萬夫)라도 빼앗지 못할 용기가 있었으니, 왕자(王者)의 기상이 이처럼 성대하여 참으로 크게 일을 할 만한 임금이었다. 그러나 이때 정사를 맡은 신하는 두려워서 벌벌 떨며, 다만 백성의 원망이 자기 몸에 돌아올까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세운 조례들은 모두 이럭저럭 때워넘긴 것이어서 법제로 되지 않았다. 구전(口錢)과 택세(宅稅)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고, 또 솔밭[松田]ㆍ대밭[竹田]ㆍ옻숲[漆林]ㆍ닥숲[楮林]ㆍ과원(果園)과 육축(六畜) 같은 것은 도무지 의논조차 하지 않았다.
여러 고을 은결(隱結)을 조사해서 밝혀냈다는 것도 또한 하나를 들춰내는데 백(百)은 누락되어, 헛 명목만 있을 뿐 실상은 없었다. 지금은 마땅히 위로 우공(禹貢)과 《주례》의 본법(本法)을 상고하고, 아래로 한(漢)ㆍ당(唐)ㆍ송(宋)ㆍ명(明)의 남긴 제도를 고찰해서, 9부(賦)를 제정하여, 민역(民役)을 고르게 하는 것은 그만둘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균역청을 별도 아문으로 세우고 명칭을 평부사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제조는 호조의 3대부가 예겸하도록 하며, 그 밖에 중대부와 하대부 한 사람씩 사리를 환하게 아는 사람을 엄선하여 부공(賦貢)을 고르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판적사(版籍司) : 제조 경 1인, 판관(判官) 상사 1인, 주부 중사 2인.
서리 4인, 조례 8인.
살피건대, 판적사는 별도 아문을 세워서 그 제조는 호조 판서가 예겸하도록 하고, 서리는 호조에서 뽑아오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건대, 정전(井田)하던 때에, 백성이 호구 조사에서 혹 누락될까 두려워했던 것은 그 형편이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전제도가 없어지고 요역(徭役)이 날로 복잡해지자, 백성은 오직 호구(戶口)를 속이고 숨기는 것으로 가계(家計)를 삼았으니 진실로 별도 기관을 세워서 전적으로 호적사무를 정리하지 않으면 마침내 성과가 없을 것이다.
살피건대, 《주례》 소사구(小司寇)에는 대비년(大比年)에 백성의 수효를 등록하면서, 이가 난 아이[生齒] 이상을 천부(天府)에 올렸고 추관 사민(秋官司民)에도 만민의 수효를 등록할 때 이가 난 아이 이상을 모두 판적에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나라 안과 도비(都鄙) 및 교야(郊野)를 분변하며, 남녀를 달리 기록하고, 해마다 그 죽고 난 것을 올리고 삭제하며, 3년 대비(大比)에는 만민(萬民)의 수효를 사구(司寇)에게 알렸다. 사구는 첫겨울, 사민성(司民星)에게 제사하는 날에 그 수효를 왕에게 바치면, 왕이 절하고 받아서 천부에 올렸던 것이니 판적이라는 것은 추관이 관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호조(戶曹)라 부르는데, 호라는 것은 호구를 통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판적사를 호조에 붙이지 않을 수가 없다.
경전사(經田司) : 제조 경 1인과 중대부 2인, 하대부 2인, 부정(副正) 상사 2인, 주사(主事) 중사 4인.
서리 6인, 조례 18인.
생각건대, 오늘날 국가에 가장 긴급한 것은 전정(田政)이다. 오랜 시일을 전야(田野)에 살면서 전정의 문란함을 직접 보고, 진실로 눈물을 흘리고 싶은 때가 많았다. 강진 고을은 누락된 전결(田結)이 가장 적다고 일컫는 곳이다. 그런데 전안(田案)에 등록된 전지가 6천여 결이고, 누락된 전지가 거의 2천 결이나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공가(公家)에서 4분에 3을 취하고 고을 아전[縣吏]이 4분에 1을 갖는 것이니, 비록 노(魯)나라의 계씨(季氏)가 공실(公室)의 재물을 4분 했으나 어찌 이보다야 더했겠는가? 해남은 강진과 비교하면 지역은 더욱 작은데 누락된 결수는 오히려 많으며, 나주는 누락된 결수가 원안(元案)에 기재된 결수보다 많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그러나 특별히 몇 결만을 지적해서 누락된 결이라 한다 해도 그 해됨이 그리 심하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한 고을 전지를 통계(通計)한 다음 호부(豪富)한 민호로서 세를 바치기에 염려 없는 자의 전지를 택해서 누락된 결로 만들고 사사로 돈과 쌀을 징수하는데 이것을 방결(防結)이라 하며, 현리(縣吏)와 저리(邸吏)가 여기에 틈을 타서 이(利)를 노린다. 그리하여 전지 중에 하천이 되어버린 것, 유사(流沙)가 덮여진 것, 예전부터 묵었거나 근래에 묵혀진 것 따위와 떠돌이ㆍ비렁뱅이ㆍ홀아비ㆍ과부ㆍ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와 가난하고 병든 자에게 피부와 골수를 다 긁어낸다[剝膚椎髓] 해도 어쩔 수 없는 자들의 전지를 골라서 원안에 기재된 결수에다 충당한다.
그리고 현리와 저리들은 늦은 겨울이나 이른 봄에 징수하기를 마치면 큰 배에다 실어서 혹 영남으로 보내거나 혹은 경강으로 보내고 그 남은 것을 먹는데, 관청에서 수입하는 세는 100석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한악(悍惡)한 아전과 교활한 포교(捕校)로서 민간에 나다니면서 명목을 검독이라 하고 받아내다가, 받을 수 없는 자의 결세(結稅)를 그가 살던 이웃이나 그 마을 사람에게 징수하며, 그의 친족간이나 인아간(姻婭間)에게서 징수하기도 한다. 방(房)을 수색하고, 땅을 파며, 목을 달아매고 결박을 한다. 솥과 가마를 들어내고, 송아지와 돼지를 빼앗아서 온 마을이 시끄럽게 되고, 우는 소리는 하늘에 진동하여 천지의 화기(和氣)를 해쳐 쓸쓸해진 인가가 비참하기만 하다. 이들이 지나가면 열 집에 아홉은 비게 되며, 추녀가 무너지고 벽이 부서지며, 창문이 넘어져버린다. 그런데 검독해서 빼앗아간 것은 관가에는 한 톨도 들어가지 않으니, 이른바 갈백(葛伯)이 제물을 제가 먹어버리고 선조에게 제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세곡(稅穀)을 실으러 왔던 경강 조선(京江漕船)들은 배를 말뚝에 달아매고 봄ㆍ여름을 그냥 넘긴다. 그러면 현령(縣令)과 현리가 따라서 꾀기를, “기왕, 만선(滿船)이 되도록 싣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를 기다리느라고 돌아가지 못할 바에는, 배에 조금 실은 쌀이라도 영남에다 팔아넘기면 그 이를 내가 먹고 너에게도 몫이 있을 것이며, 가을이 되면 손해를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한다. 그리하여 사공(沙工)들은 빈 배를 모래밭에 끌어올려놓고 가을이 되기를 기다린다. 그렇게 되면 일을 맡은 신하는 조당(朝堂)에 아뢰기를, “백성의 버릇이 간사하여 관망하기만 일삼는다”라고 한다. 그러면 조정에서는 공문을 띄워서 크게 꾸짖어 백성 단속이 더욱 엄중해지니, 실상은 백성들은 세를 바치고 나서 죽고 없어진 지가 벌써 달이 넘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국가의 세입이 평년에도 12만 섬을 넘지 못하는데, 만약 흉년을 만난다면 경강으로 실어나르는 곡식은 매양 수만 섬을 넘지 못할 것이니, 나라의 경비는 장차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우리나라 제도는 보통 한 결의 전지에 전세 네 말, 삼수미(三手米) 두 말 두 되, 대동미(大同米) 열두 말을 징수하는데, 그것을 조운(漕運)하는 선가(船價)는 그 중에서 나오니, 한 결에 대한 수입은 열여덟 말 두 되에 불과하다. 그리고 태창(太倉)에서 녹(祿)을 갈라주거나, 선혜청에서 공물(貢物) 값을 갈라줄 때에는 열다섯 말이라는 것이, 지극히 작은 말[斗]이어서 열 한두 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한 결에서 징수하는 것으로 나라에서 쓰는 것은 다해도 열다섯 말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창 민간에서 거둬들일 때에는 섬[斛] 같은 말로써 서른네 말을 거두는데, 서울 말[京斗]로 풀이하면 적어도 마흔다섯 말 아래로 내려가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또 백성이 바치는 것은 셋인데 나라에서는 그 하나만을 받아들이는 셈이 된다.
위로는 나라를 가난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벗겨내어 그 중간에서 살찌는 자는 탐학한 관원과 간활(奸猾)한 아전들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은가? 옛날 성인은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정전(井田)하는 법을 마련해서 그 간사함을 미리 막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정전법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오활(迂濶)해서 사리에 적절하지 못하다고 지목한다. 그렇다면 옛날 성인은 오활하고 지금 사람은 지혜가 많으며, 옛날 성인은 사정에 어둡고 지금 사람은 사무(事務)를 안다는 것인데, 어찌 그런 이치가 있겠는가? 다만 옛적에는 밭뿐이었는데 지금은 논[水田]이 많으며, 또 우리나라 지세는 산림이 많고 원야(原野)가 적으니 정전은 진실로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있어, 정전 모양은 없으면서 정전 같은 실효는 거둘 수 있게 되니 어찌 좋지 않겠는가? 전지 10결마다 그 중 한 결은 공전으로 만들고 나머지 아홉 결은 사전으로 만든 다음, 아홉 결을 받은 농부에게 공전 한 결을 함께 가꾸어서 국세에 충당하도록 하고, 사전 아홉 결에는 부세를 없애서 죄다 자기 집에 들이도록 하면, 이것이 바로 정전이다. 바삐 한 관청을 세우고 경전사(經田司)라 명칭하여, 공전을 관리하도록 하는 법은 늦출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제조 5원(員) 중에 3원은 호조의 3대부로 삼고, 2원은 문서와 사리에 주밀(周密)하고 밝은 사람을 특별히 뽑아서 전적으로 관장하도록 한다. 그리고 부정 2인은 옥당 학사(玉堂學士) 중에 총명한 사람으로 삼아, 여러 도에 나가면 경전 어사(經田御史)가 되고 왕도(王都)에 들어오면 경전사 부정이 되도록 한다. 주부 4인은 일찍이 수령을 지내면서 치적이 있던 자를 삼는다. 이리하여 먼저 경전 어사를 보내 남모르게 드나들면서 관원을 차출하여 전지를 측량한다. 숨긴 것과 누락된 것을 밝혀내고, 묵은 것과 거친 것을 조사하여 이곳에 남은 것으로써 저곳에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며, 그러고도 남는 것은 원적(原籍)에다 편입한다. 그리고 공부(公府)와 군문(軍門) 및 여러 도에 봉치(封置)해둔 돈을 다 내어, 사전을 사들여서 공전으로 만들어 원장(原帳)이 400결이 되면 40결을 매수하고 원장이 500결이 되거든 50결을 매입하면, 10분의 1로 하는 법이 이에 따라 확립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정전이 아니겠는가? 정전은 9분의 1로 하는데, 여기에 10분의 1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9분의 1이 곧 10분의 1이다(뜻이 맹자의 논설에 있음). 10분의 1을 넘는 것은 걸(桀)의 법이고, 10분의 1이 못 되는 것은 맥(貊)의 도(道)로서, 10분의 1로 하는 것이 천하의 중도(中道)이다(《春秋傳》에 이 뜻이 있음).
바야흐로 공전을 창설할 때에는 온 나라가 소란해질 것이다. 하지만 우매한 백성은 성공을 함께 누릴 수는 있지만 처음 계획에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이니 온 나라가 시끄럽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임금의 한 마음은 만 가지 교화의 근본이니, 진실로 성상의 결단이 확연하여 영조가 균역법을 세우던 것과 같이 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어찌 걱정하겠는가? 영조가 이르기를, “나라가 비록 망한다고 하더라도 균역하는 법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였으니, 아아! 이것이 왕자의 정대한 말이었다. 순(舜)이 말하기를, “능히 힘을 분발해서 임금의 일을 밝히는 자가 있거든 총재[百揆] 자리에 앉혀서 모든 일을 밝히고 온 백성을 사랑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분(奮)이란 분발하는 것이며 분신(奮迅)하는 것인데, 닭이 뛰어나게 힘센 것을 분이라 하고, 양(羊)이 뛰어나게 힘센 것을 분이라 하는 것이니(爾雅에 있다), 아래에 있는 신하로서 능히 분발하고 협찬(協贊)함이 있은 다음이라야 공전하는 법을 세울 수가 있다. 그리고 규모와 절목(節目)은 모름지기 세밀하여 조리가 분명하게 한 다음이라야 이에 폐단이 없이 시행할 수가 있을 것이다. 아울러 다음 편에 기록하였다.
조운사(漕運司) : 제조 경 1인ㆍ중대부 1인, 첨정(僉正) 상사 2인, 감찰(監察) 중사 2인.
서리 2인, 조례 6인.
생각건대, 우리나라 뱃길 가운데 위험해서 건너기 어려운 지역은 서남(西南) 바닷가의 칠산(七山)과 안흥(安興) 두어 곳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파선(破船)되는 배는 해마다 10여 척이나 되는데, 그 원인으로는 첫째 배를 만드는 제도가 좋지 못했고, 둘째 수령들이 가외의 것을 보태어 실은 때문이며, 셋째 뱃사람들이 일부러 파선시키기 때문인데, 그 중에도 일부러 파선시키는 것이 열에 일여덟 척이나 된다. 별도로 한 관청을 설치하고 조운사라 명칭하여, 그 제조는 호조의 대부가 겸무하며, 첨정 2명은 일찍이 헌부(憲府)의 관직을 거친 자를 삼아, 조정에 있을 때에는 본사(本司)의 첨정이 되고, 외방에 나가면 서남도 전운어사(西南道轉運御使)가 되어, 남모르게 드나들면서 선인(船人)의 간악한 짓을 금하도록 한다. 또 공전미(公田米)를 혹 환롱(幻弄)하여 간사한 짓을 하면서 즉시 발송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밝혀내서 죄주고, 혹 여러 길 조운관(漕運官 : 法聖浦僉使ㆍ牙山縣監 등과 같다)으로서 조운을 영솔(領率)하는 데에 착실치 못함이 있거나, 연로(沿路) 수령으로서 조선을 호송하는 데에 조심성이 없는 자는 아울러 출척(黜斥)하는 벌을 시행하도록 한다면, 당ㆍ송(唐宋)시대의 전운사와 비교하더라도 폐단은 적으면서 성과는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감찰(監察) 2원(員)은 또한 경기 연안 또는 충주(忠州)ㆍ여주(驪州) 강변에 은밀히 다니면서 조사하고 다스리기를 법대로 하면, 그 효과가 반드시 현저할 것이다.
감찰의 직함은 선무랑 조운사도사 검교감찰원 부어사(宣務郞漕運司都事檢校監察院副御史)라 한다.
사포서(司圃署) : 제조 중대부 1인, 별제(別提) 중사 2인.
서리 4인, 조례 8인.
생각건대, 《주례》에 장인(場人)의 직무는 나라의 포장(圃場)을 관장하여 과목(果木)과 초과(草果) 따위를 심는 것인데, 지관(地官)에 소속되었으므로 이제 그대로 하였다.
생각건대, 심고 가꾸는 정사는 또한 나라의 쓰임을 넉넉하게 하고 백성의 살림을 돕는 것이다. 봉산ㆍ황주의 배, 가평ㆍ양주의 밤, 청산과 보은의 대추, 풍기ㆍ순창의 감, 강진ㆍ장흥의 귤ㆍ유자ㆍ치자 따위는 법을 시행하여 모두 심도록 권장함이 마땅하다. 그리하여 혹 널리 심어 숲을 이루어서, 능히 천 그루 만 그루에 이르도록 한 자는 사포서에 보고하여, 거짓인가 사실인가를 조사한 다음, 추천하여 서반 말직(西班末職)에 보임되도록 한다. 묘당(廟堂)에서 불러 시험해서 능히 농서(農書)를 환하게 알고 그 땅의 알맞은 작물을 가려서 농포(農圃)를 경영할 만한 새 지식이 있는 자는, 사포서 관직에 승진하여 보임시킨다. 이와 같이 하면 10년을 넘지 않아서 나라 안의 진기한 과실을 이웃 나라에 판매하여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기에 족할 것이다.
사광서(司礦署) : 제조 중대부 1인, 판관(判官) 상사 2인, 주부 중사 2인.
서리 2인, 조례 6인.
생각건대, 《주례》에 횡인(卝人)의 직무는 금ㆍ옥ㆍ주석ㆍ보석 따위 광물이 생산되는 지역을 관장하여, 사굴(私掘)하는 것을 엄하게 금단하며, 지관에 예속되었으니 이제 그대로 한다. 횡이란 곧 광(礦)이라는 뜻인데, 원전에는 호조 낭관(戶曹郞官)에 은색(銀色)이라는 것이 있으니, 이제 별도로 이 관직을 만듦이 마땅하다.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산악이 웅장하여 금ㆍ는ㆍ동ㆍ철이 곳곳에서 산출된다. 강계의 은파동(銀坡洞)과 수안의 홀곡점(笏谷店)은 우연히 노출된 것이다. 관가에서 금령(禁令)을 베풀어서 저절로 방지되게 하는 것과 간사한 백성이 도굴하여 범법하는 것은 모두 마땅하지 않다. 무릇 금ㆍ는ㆍ동이 나는 광혈(礦穴)은 모두 관에서 재물을 내어 채굴하고, 혹 사사로이 채굴하는 사람은 사전(私錢)을 주조하는 것과 같은 율(律)로 다스리되 오직 철광만은 백성이 사사로 채굴하도록 허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을 주조하는 방법은 이용감(利用監)에서 북쪽의 중국에서 배워 와서 사광서에 가르치는 것이 마땅하다.
육보서(六保署) : 제조 중대부 1인, 별제 중사 2인, 봉사 하사 2인.
서리 2인, 조례 6인.
육보서란 활인서(活人署)이다.
생각건대, 《주례》에 대사도(大司徒)는 여섯 가지의 보식(保息)으로써 만민을 길렀다. 첫째 어린이를 사랑하고, 둘째 늙은이를 봉양하며, 셋째 궁한 이를 구원하고, 넷째 가난을 구휼하며, 다섯째 질병을 위로하고, 여섯째 부유한 자를 안정시켰다. 우리나라 활인서의 관직은 도성 안 병자를 구휼하는 일을 관장하였을 뿐, 그 직장(職掌)이 구비되지 못했다. 그러나 마땅히 지관에 예속되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부유한 자를 안정시키는 정사는 오직 마음에 둘 뿐이고 힘쓸 필요가 없다. 이제 역질(疫疾)을 구료(救療)하는 것을 여섯 가지 보식하는 수효에 충당하려 한다. 대개 질병을 위로하는 것은, 귀머거리ㆍ장님ㆍ절름발이ㆍ벙어리의 부류를 관장하고, 역질을 구료하는 것은 오로지 염병ㆍ홍역 따위를 구료하는 것이다.
산학서(算學署) : 제조 경 1인, 교수(敎授) 중사 2인, 훈도(訓導) 하사 4인.
조례(皁隸) 4인.
생각건대, 한 가지 기예(技藝)로써 벼슬하는 자는 각각 그 관서(官署)가 있는데, 오직 산학이 호조에 예속되고 율학(律學)이 형조(刑曹)에 예속됨은 의리가 고르지 못하다. 이제 이것은 별도 기관으로 했으나, 제조는 호조판서가 예겸하도록 함이 마땅하다.
생각건대, 훈도가 네 사람인데 그 중 두 사람은 주사(籌士)이다. 그 예는 앞에 기록하였다.
[주D-001]존양(存羊) : 구례(舊例)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두는 일. 노 문공(魯文公)이 종묘에 삭일(朔日)을 고유(告由)하는 제사에 참석하지 않으므로, 자공(子貢)이 그 제사에 소용되는 양(羊)마저 없애려 하니, 공자가 “사(賜)야, 너는 그 양을 아끼느냐? 나는 그 예를 아끼노라” 하였다. 제물에 양이라도 있으면 그런 예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만, 양마저 없애면 그 예는 드디어 없어지게 되는 까닭이다(《論語》 八佾篇).
[주D-002]경수창(耿壽昌) : 한 선제(漢宣帝) 때 사람. 상술에 밝았다. 대사농 승(大司農承)이 되어서는 변방 고을에 모두 창(倉)을 설치하도록 하여, 곡식이 흔할 때는 값을 더 주고 사들였다가, 귀할 때에 가서 시가보다 싸게 팔았는데, 명칭을 상평창이라 하였음.
[주D-003]초말(稍秣) : 초는 군사들의 요미(料米), 말은 말[馬] 먹이는 꼴.
[주D-004]현리(縣吏) : 고을 아전.
[주D-005]저리(邸吏) : 경저리(京邸吏)와 영저리(營邸吏)의 줄인 말. 서울이나 감영(監營)에 있으면서 지방 관청의 사무를 연락하고 대행하던 서리(胥吏). 경주인(京主人)ㆍ영주인(營主人)이라 하기도 함.[주D-006]갈백(葛伯) : 갈(葛) 땅의 백(伯). 탕(湯) 임금이 박(亳) 땅에 있을 때 갈과 이웃이었는데, 갈백이 선조에게 제사를 모시지 않으므로 탕이 사람을 시켜 “어째서 제사하지 않는가?” 하고 묻자 갈백은, “제사에 소용되는 희생(犧牲)이 없어서 못한다.”고 하였다. 탕이 소와 양을 보내주었으나 갈백이 먹어버리고 또 제사하지 않았다는 고사. 이는 당시 관리들이 백성들에게 무리한 세금을 착취해서 나라에 바치지도 않고 자기들 사욕만 채우는 것을 비유한 말
.[주D-007]삼수미(三手米) : 훈련도감에 소속된 군병으로서, 사수(射手)ㆍ살수(殺手)ㆍ포수(砲手)를 삼수라 하는데, 이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특별 과세하는 것을 삼수미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