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돌
유병덕
2015harrison@naver.com
요즈음 내 마음이 바쁜지, 세상이 바쁜 것인지 모르겠다. 이리저리 뚫고 쏘다니다가 병을 얻었다. 허리가 아파서 며칠째 침대에 누워있다 보니 비로소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창밖에 가을하늘이 눈에 가득 담긴다. 코앞에 둥글둥글한 조그만 물체도 눈에 들어온다. 주먹보다 조금 더 커 보이는 유순한 돌이 사람 심장처럼 생겼다. 저항할 수 없는 세월과 거센 비바람에 부딪히며 깎인 몽돌이다.
한참 몽돌을 바라보니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파하는 내 꼬락서니를 보며 혀를 차는 것 같다. 몸 상태가 기침만 하여도 허리가 땅기고 온몸의 근육이 아프다. 지인이 온다고 하여 일어나보려고 용을 써보지만, 허리통증 때문에 이내 자지러지고 만다. 이제 병마의 먹잇감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여기저기 아픈 곳이 더 드러난다. 하긴 갑년이 지나도록 오래 써먹었다. 자동차 같으면 박물관에서나 볼 나인데 아직 살아 있음을 하느님께 감사한다.
몽돌은 오랜 세월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천둥·번개 속에 벼락을 맞기도 하고 거센 홍수에 휩쓸려 정처 없이 밀려가기도 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험난한 절벽에서 떨어져 나와 거친 세상을 헤엄치며 이름 모를 개천을 지나 강바닥에 둥지를 튼다. 몽돌은 자연에 순응하며 부딪치고 깨지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단단한 모습을 지키고 있다.
몽돌이 영화 필름 같다. 잊혀가는 희미한 아버지의 기억을 재생한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검단산자락에서 태어났다. 천현리 427번지. 어느 날 몽돌이 홍수에 쓸려나가듯 일본 놈이 쳐들어와서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터전을 빼앗겼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수배되어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서산 갯마을로 피신했다. 집을 지키던 큰아버지는 무자비한 경찰에 두들겨 맞으며 끌려갔다. 몽돌이 먹구름이 물러나면 낯선 곳에 홀로 남듯 아버지는 해방을 맞고서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사이 가족이 죽거나 풍비박산 나버렸다. 일본에 끌려간 큰아버지마저 행방불명되었다. 아버지가 여러 차례 일본에 오가며 수소문하였으나 오사카 교민회에서 찾을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하였다.
또 새로운 먹구름이 몰려왔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6·25전쟁이 터졌다. 또 다른 환란의 시작이다. 군 특수부대에 입대하여 전방부대를 전전했다. 용산, 의정부, 동두천, 춘천, 양구….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돌아가셨다. 사실 생전의 아버지는 그믐달만큼이나 보기 어려웠다. 늘 비상이 걸려 군부대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아버지는 비상이 정상 같고 정상이 비상 같은 세상을 보냈다. 그러니 어머니는 따라다닐 수 없어 외갓집에 방 한 칸 얻어 더부살이할 수밖에 없었다.
강가의 홀로된 몽돌의 사연을 누가 알까.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말 없는 몽돌처럼 둥글둥글하지 않고 늘 모나고 차가웠다. 아무런 이유 없이 두 해나 일찍 학교에 보내 남들이 겪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어린 나이에 형들과 어울리는 게 쉬운 일 아니다. 거의 매일 울다시피 집에 온 것 같다. 학교에 가면 형들한테 하루가 멀다고 두들겨 맞았다. 코피가 나고 무릎이 깨지는 일이 다반사다. 외삼촌이 사준 가죽가방을 빼앗기고, 새 신발을 신고 가면 누가 신고 가서 맨발로 걸어오곤 했다. 학교에 안 가겠다고 울면서 어머니한테 버티다가 단단한 몽돌이 날아와 불이 번쩍했다. 자라면서 아버지를 수없이 원망했다. 살아 계실 때에는 서운함만 보이더니 헤어지자마자 그리운 마음이 사무쳐왔다. 아버지의 장례식 날 불효했다는 마음에 한없이 눈물 흘렸다. 당시 아버지께서 강원도 북부지역 군 보안업무를 담당했다. 자별하게 지내던 관할지역 헌병 대장이 조문와서 몰랐던 아버지의 과거를 들려주었다.
“너의 아버지는 체구는 작지만, 몽돌처럼 다부진 분이셨다.”
6·25전쟁은 세찬 물살에 몽돌이 서로 부딪히며 깨져 나가듯 전쟁터의 인간은 서로 살려고 아귀다툼하던 세상이다. 그 속에서 특수부대에 근무하며 수많은 참혹한 현장을 누볐다. 상대를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으니 불가피한 일이다. 내 목숨 지키려고 동족을 죽이고 생매장해야 했던 시절, 그가 들려준 말은 너무 끔찍하고 소름이 돋아 더 적고 싶지 않다. 전쟁 통에 삶은 홍수에 휩쓸려가는 막돌보다 더 처참한 지옥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자 특수부대 경험을 살려 전방부대를 돌며 방첩 활동과 정훈교육을 담당했다. 특히, 반공교육에 앞장섰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의 유품이라며 내게 물건을 건네주었다. 아버지 서랍 속에 있던 노트와 몽돌이다. 노트 제목이 특이하다. ‘내 운명을 사랑한다.’ 부제로 ‘때려잡자 00당’이다. 아버지는 몽돌처럼 운명을 받아들이고 즐긴듯하다.
갑자기 몽돌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사람의 말은 아니지만 내 시선을 의식한 듯 뭐라고 계속 중얼대는 것처럼 보인다. 그 모습에 다른 토를 달고 싶지 않다. 존재하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인간은 의지와 상관없이 몽돌처럼 어느 날 툭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운명을 거부할 수 없고 시간의 흐름 속에 묵직한 내공을 쌓는다. 몽돌에 새겨진 비와 바람의 흔적이 인간의 섬세한 내성의 궤적과 다를 바 없다. 몽돌의 본질은 여전히 돌이고 언젠가 다시 그 역사로 돌아가듯 인간의 생성과 소멸도 반복하는 영겁의 수레바퀴 속에서 한순간 살다가 먼지처럼 사라지리라.
오늘따라 몽돌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한 많은 격동의 시대를 살다 가신 아버지가 그리워서일 게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유품이 마지막 유언인지도 모른다. 니체의 말처럼 주어진 상황에 주눅 들지 말고, 삶을 긍정하며 내게 주어진 운명을 사랑(Amor Fate)하라는 의미 같다. 지금 허리가 아파 침대에 붙어있는 것도 내 운명이다. 마침 라디오에서‘아모르파티’ 노래가 흘러나온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