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30: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보라 - '볼지어다'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감탄사 '헨'과는 달리 '직접 눈으로 확인하다', '주목하다'란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생명과 사망, 축복과 저주 이 두 가지 중에서 그들이 양자를 똑똑히 주목하여 살펴 관찰한 후,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셨다.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예비해 놓으신 길은 '생명 및 복의 길'과 '사망 및 화의 길'이라고 하는 단 두 갈래 길밖에 없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서는 후일 예수께서도 '좁은 문'과 '넓은 문'의 비유로써 우리들에게 명확히 교훈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벗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자는 더 늦기 전에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시 16:11]"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 '생명의 길'이란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길을 의미한다. 다윗이 다만 이 땅에서 불과 몇 십년을 살다가 죽는 짧은 생명을 가리켜 '생명의 길'이라고 표현했다고 보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 없다. 그는 궁극적인 구원, 곧 부활을 내다보며 이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영원한 즐거움 - 이 즐거움은 세상에서 잠시 잠깐 맛보는 그런 즐거움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궁극적으로 부활을 미리 내다보고 있기에 그 부활시에 얻을 수 있는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마 7: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여기서 인생의 가는 길에는 "좁은 "것과 "넓은 "것이있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1) 고행주의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육체의 소욕대로 방종스러이 살 수 있는 넓은 길과 하나님의 복음 진리대로 따라가는 규범있는 생활의 길을 대립시킨다. 좁은 길이라고 하여 거기에는 낙이없고 고통만 있다 함은 불가하다.
이 좁은 길에는 도리어 감추인 만나를 먹는 참된 희락이 있는 것이다. (2) 이것은 자력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을 포함하는 것인가? 그런 것도 아니다. 여기 이 비유가 포함한 뜻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따라가는 길이 함부로 범죄하는 생활에 비해서는 제한이 있고 절제가 있다.
그러나 이 좁은 길은 하나님의 은헤로 구원얻는 길이니 그 길을 가는 도중에도 생명과 희열이 있고 그 길을 다 간후에는 영생의 면류관을 받는다.
[요 1: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생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조에'는 '영원한' 이라는 형용사를 수반하여 '영생'이라는 용어로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요한은 단지 '조에'라는 단어로써 영원한 생명을 묘사할 때도 많으며 본문의 경우도 그러하다. 한편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생명의 주인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생명관이 반영된 것이 본문의 '생명.이다.따라서 저자 요한은 '생명'이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이 영원한 생명임을 명시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접하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이 부여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본원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영생을 매개로 하여 영원한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엡 2:19). 사람들이 빛이라 - '빛'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자연 현상인 빛을 가리키거나 빛과 어두움을 절대적 차원에서 대치시키는 이원론적인 종교 사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빛에 대한 개념은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1) 빛을 발하는 구름이나 불기둥 가운데 현현하시는 분 (2)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는 빛나는 분 (3) 빛과 어두움의 주 (4) 이스라엘의 영원한 빛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요한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인류에게 임할 참빛이라는 사실을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본절의 두개의 문장에서 '에이미'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인 '엔'을 두 번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생명과 빛은 창조되었거나 형성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삼위 일체 하나님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도들로 하여금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라는 기쁨의 찬양에 이르게 한다.
[요 5: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내 말을 듣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순종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단지 귀로만 듣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 "내 말을 듣고 ... 영생을 얻는다"는 어귀는, 말씀이 생명력을 마술적으로 전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부셋트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작용을 마술적인 것으로 간취하고, 그것을 헬라의 비지적 오묘란 것 과 동일하게 보았으니 잘못이다.
여기 "듣는다"함은, 헬라 신비주의의 범신론 사상이 가르친 마술적인 생명 전달이 아니다. 그 들음은, "나 보내신 이"를 믿는데 이르게 하는 지석 요소를 가진 동시에, 신자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결과로 가져온다. 이것은, 지식성과 인격성이 제외된 마술적 작용과는 청양지차로 다르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곧, 신자가 현세에서부터 벌써 영생을 소유했다는 뜻이다. 이런 사상은, 성경 다른 부분에서도 가르친다. 스밀데는, 이 점에 있어서 요한의 사상이 바울의 칭의론과 원리상으로 같다고 하였다. 곧, 신자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벌써 옳다 함이 되도록 현세에서부터 심판 보장의 칭의를 받았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