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압과 박해 속에서
믿음을 지킨사람들... (호헌신학 im강도사 연구수집자료 중에서 )
第4章 得信高等聖經學 校와 趙順天牧師
越順天 牧師의 號는 松谷 平南 大同郡 在京里面 望德里 189,趙貞俊의 장남 으로 1907년 6월 10일 출생하였다.
그의 가정은 기독교적 先覺者의 가정이었고 조부의 영향을 받은 애국자의 가 정에서 태어났다. 망덕리 교회별관에서 김준모 선생으로부터 한문공부를 배울 때도 한문 성경을 해석하면서 애국사상으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는 국운이 어지러운 때였다. 한일합병이라는 굴욕에서 국권을 회복하려 는 온 민족의 가슴에는 애국애족의 일념뿐이었다. 한학과 기독교 교육으로 양 육한 그의 선친은 기독교계 소학교인 평양 숭덕학교에 입학시켰다. 숭덕학교 는 기특교 선교사들의 힘으로 설립된 초등교육기관이었다. 한국 근대음악의 선구자인 洪蘭波, 李尚俊, 李亨俊 등을 키웠으며 金仁湜도 이학교 출신이다. 아마도: 松谷이 찬송가학의 권위자가 됐던 것도 그 어릴 때 숭덕학교 선교사들 의 영향이 컸던 것이 아니었다 싶다. 또한 그 시절엔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사건을 비롯하여 1919년 3월 1일 대 한독립만세운동 등 국내외적으로 소란한 때였고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가슴에 애국애족이 무엇인가를 가장 마음깊이 새기는 때였다. 숭덕학교를 졸업하면 그 다음이 숭실중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정규진학과정 처럼 됐던 그 시대였기에 松谷도 아무런 어려움없이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는 데 그 시절 역시 음악과 기독교 교육을 위해 기반을 닦았다.. 어느날 松谷의 조부께서 두 손자를 불러놓고 "많은 재산을 지키며 농사를 짓 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더 많은 공부를 하겠느냐? 너희 생각을 말해봐라"하 고 물었을 때 장손인 松谷은 "공부를 하겠읍니다"하고 차손은 "저는 재산을 지 켜 농사를 짓겠읍니다"라고 각기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후 松谷은 열심히 공부하여 일제압박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민족 과 국가를 위해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특히 숭덕학교와 숭실중학교에서 열 심히 공부한 송곡이 모든 학우들에게 신임을 받고 선생님으로부터도 사랑을 받아 거의 반장으로 지냈고 채기은은 부반장으로 지냈다고 한다. 교내 행사가 있을 때면 의례히 음악순서가 있는 법인데 조순천, 채기은, 송영길 등의 합창 이 절정을 이루기도 했다. 1929년 3월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할 때 중학 친구 인 宋永吉은 너무 집이 가난하여 교복을 사서입을 돈이 없어 송곡은 양복 두 벌을 해서 한별은 자기가 입고 한벌은 친구 송영길에게 주어 다같이 전문학교 입학식에 새 양복을 입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희망에 부풀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송곡을 불렀다. "너는 가정사정으로 볼 때 아버지는 없고 할아버지는 나이 많고 가족은 많은 데 큰집 살림이다 보니 결혼을 하여야 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송 곡에게는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으며 그때는 당사자의 권한이 없고 집안어른들이 정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때였다. 거기서 10리 가량 떨어져 있는 빙장리교회 김형걸 장로가 몇번 왔다가더니 혼담이 되어 빙장리교회 김용 찬 장로의 3녀 金信愛양과 정혼을 하게 되었다. 金應燦 장로는 그 동리에서 대 농가로 부자였다. 근면하고 성실한 농부로서 자수성가한 착실한 가정이었다. 교회에서 주인으로 봉사하였고 지역사회에서 도 후덕한 분이었다. 또한 그 가정은 개명한 집안으로서 일찌기 그 아들 金濟 했은 평양숭실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숭현학교 교사로 시무하여 많은 제자들을 키워내기도 했었다. 또한 그는 3. 1운동시 평양의 애국지사들과 뜻을 같이 하여 독립선언문을 등 사하는 책임을 지고 미국선교사의 집 지하실에서 선언문을 등사하여 평양 시 내에 산포하고 지방에 발송하기도 했었다. 그 뿐 아니라 105인 사건에 지목되 어 많은 수난을 겪기도 했었다. 이러한 가정에서 가정 교육과 신앙 훈련을 쌓은 김신애 양은 평양 숭의학교 졸업생으로서 미모가 아름답고 외유내강한 신앙여성으로 훗날 목회자의 내조 자로서 미덕을 갖춘 분이었다. 1926년 결혼식을 거행하여 가정을 이루어 2남 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당회장)가 선임되었다. 그들은 우선 · (1) 일본 사람들이 주관하던 각 기관을 우리들이 인수할 것 (2) 해방 경축 시민 시위 행사를 주도할 것 (3) 교회연합하여 해방기념예배를 드 릴 것 둥둥을 결의했다. 鎭南浦 得信學校 진남포 득신학교는 1905년 5월에 창립되었는데 당시 1,300평의 대지위에 250평의 7개 교실과 교직원 7명 학생은 362명 운동장은 1, 050평이었다. 일제말기였기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항거와 애국정신 고취에 교육목 적을 두고 당시 비석리교회에서 시작했던 것이다. 일제는 정식보통학교 인가 를 거부하고 소위 말하는 잡종(을종 : 乙種)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1912년 10 월에 학교 건물을 신축하여 1929년 1월 14일에 중축하였다. 일제말 그들의 눈 에는 가시처럼 여기던 특신학교는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고 내부적인 갈등 때 문에 일시 폐교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이르렀으나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는 길 은 오직 종교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있다는 것을 믿고 사재를 털어 바치는 유 지들과 교인들의 후원에 힘입어 계속 유지되었다. 송곡 조순천 목사가 특신학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아마도 1939년 10월 진남 포 억양기 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득신학교 이사장을 겸직한 때부터 인 것이라 하겠다. 그후 계속하여 진남포에서 목회를 하였으니 그가 1949년 12 월에 공산정권에 의해 피검되어서 순교할 때까지 약 10년간을 진남포에서 살 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송곡 조순천을 한마디로 평한다면 전형적인 장로교 목 사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철저한 칼빈주의적 장로교 신학이외의 어떤 신 학이나 학설, 주의에 대하여 타협하거나 절충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확실한 신앙관이 그로 하여금 순교의 자리까지 이르게 한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그 분이 억양기 장로교회에서 시무하고 득신학교 를 운영하던 1939년은 일제 탄압이 극심한 때여서 일제는 국어(조선어)를 못 쓰게 하고, 創氏改名을 강요하던 때였다. 교회종각을 헌납하고 학교문을 닫아 야 하는 아픔까지는 어떻게 견디어 날 수 있었다고 하겠으나 신사참배만은 절대할 수 없다하여 완강히 반대하던 때였다. 그 당시 일부 교역자는 변절하여 신사참배를 동의하였고 그것이 본의아닌 것이었던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조순천 목사는 본의가 됐던 형식이 됐던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득신 학교는 문을 닫게 됐던 것이다. 학교문을 닫게 된 그 마음은 하루도 편할 수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전이 우리에게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맞이하였 으나 뜻하지 않게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득신학교사는 소위 국유화 법령에 따 라 물수하여 공산정권이 중등교원 연수기관으로 빼앗겨 버렸다. 그렇게도 갈 망하던 특신학교 재건 문제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설상가창으로 득신학교 제긴을 다짐하던 碑石里教會 朴尚純 牧師와 강양욱, 안신호(안창호 매씨) 등 이 기독교라는 간판을 걸머지고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득신학교 재건이 문제가 아니라 신앙적 근본 문제까지 흔들라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초목사는 비장한 결심과 각오를 하케 되었다. 득신학교 건물은 되찾 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특신학교라는 校名 네글자만이라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공산정권에게 반동분자라는 낙인이 찍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많은 신앙학생들은 갈 곳이 없으니 그들을 모아놓고 신앙과 애국정신으로 키워야하 겠다는 결심으로 得信學校 再建에 봄 바치기로 결심했다. 해방이후 우후축순 처럼 일어났던 종교 교육기관이 다 없어지고 평양에는 장로교 평양신학교와 감 리교 성화신학교가 있을 뿐 이북의 목사 장로들을 위시하여 교인들의 자녀들 이 갈 곳이 없었다. 1946년 10월 그는 득신고등성경 학교를 설립 개교하게 되었다. 첫 입학생은 32명이었다. 과정은 신학교예과 과정으로서 평서노회 주선과 비석리교회 제 직들의 협조를 얻어.비석리교회 유치원으로 사용하던 1층을 빌려서 교실로 사 용하게 되었다. 교무실을 비롯해서 넓은 교실이 넷이나 있으니 운동장은 좁지 만 그런대로 남북통일이 되어 득신학교 교사를 되 찾을 때까지 참고 나가자 는 것이었다. 이때의 교직원에는 교장 조순천, 교감 송영길, 교무 변수경, 이 정엽, 변익성, 김희보, 이윤영, 현영주, 조기호, 홍만춘 등이었다. 당시 진남
포에서 기독교인 중 이름있는 교육자는 대개 득신 학교와 인연을 맺고, 헌신봉 사하지 않는 분이 별로 없었다. 여기서 조목사에 대하여 잠깐 소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몇가지 있다. 첫째 그는 시간 잘 지키기로 유명했다. 학교에서는 교장이었지만 시간 지키 는데는 따라갈 분이 없었다. 출퇴근 시간이 분명했고 강의시간도 시종여일하 고 분명하게 지켰다. 채풀시간에 특별강사가 와서 설교할 때 시간이 지나면 그때부터 회중시계를 꺼내 보기 시작하는데 모든 학생들은 시간이 지냈구나 하 는 것을 알게 되엇다고 한다. 둘째 명강의 명교수였다. 구약강의도 유명했지만 종교음악 강의는 참으로 일품이었다. 특히 찬송가학은 성경학교 신학교 교재로서 너무나 유명했다. 찬 송가학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찬송가 해설집을 발간했기 때문이다. (편자주 : 찬송가학은 진남포 득신고등성경학교에서 강의하던 교재로 꾸몄던 것인데 피 난때문에 가지고 나오지 못해서 못내 아쉬운 일이다) 셋째 음악 교재 발간이었다. 8. 15 해방이 되었으나 각 학교에서 교육 교재가 부족했다. 특히 정식교육을 위한 음악 교재도 없었다. 그때 중등학교 음악교재를 발간하여 제이 국민정서 교육에 크게 공헌하기도 하였다. 네째 애국가 보급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을 때 남북이 함께 舊曲으로 애국가를 불렀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안익태가 애국가 신곡을 작곡하여 발포하게 되자 일제히 이 것을 부르게 되었으나 이북에서는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부르지 못하고 김일 성 장군의 노래 등을 보급하여 부르게 되었다. 그때 조목사는 안익태가 작곡 한 애국가 신곡을 라디오를 통하여 듣고 오선지에 음을 그려 비밀리에 보급하 는 일에 힘썼다. 우리나라가 통일되려면 애국가부터 통일하여야 한다고 하시 면서 이웃과 교회, 학교 등에서 가르쳐 부르게 했던 것이다. 다섯째 평화적인 사람이었다.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 성품이 평화적이고 밝고 의리가 깊고 모든 일에 충성스럽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체구는 크지만 그 마음이 곱고, 항상 음악속에서 살기를 즐겨했고, 평
화를 사랑하였다. 음악을 하니까 평화적이고 밝게 되는지 평화적이고 밝은 성 품이 음악을 좋아하게 되는 지는 몰라도 다분히 평화적이고 항상 밝게 살려고 노력하는 분으로 알고 있다. 1947년 4월 당국에서는 몇가지 지시가 내렸다. 1) 김일성 초상화를 교실정 면에 걸어야 한다. 2) 교과목중 인민과가 빠졌으니 한주간에 2시간 이상 수업 시간을 넣어야 한다. 3) 교수는 모두 기독교연맹에 가입한 사람으로 한다. 여기에 대하여 조교장의 태도는 완강하였다. "우리 학교는 교육이념과 교육 목표가 있으며 거기 준하여 교육할 것이오 그외의 과목은 시간 형편을 따라서 할 것이니 교과목 내용을 강요할 것이 못되고 우리 학교는 기독교 연맹에 속 한 학교가 아니요, 대한예수교 장로회 평서노회 작영학교이니 기독교연맹 가 입여부는 관계가 없고 학교 정관에 따라 운영할 것이요 "라고 분명하게 대답을 하였던 것이다. 1948년에 들어서면서부터 학교는 크게 발전하여 460여명의 학생으로 늘어나 게 되었다. 이처럼 급진적으로 학생이 증가하게 된 원인은 1) 공산정권 교육 에 대한 반발과 2) 공산정권하에서의 정신적 지주는 이곳밖에 없었기 때문이 다. 그리하여 1948년도 입학 경쟁율은 2.5: 1의 치열한 경쟁을 치뤄야 했다. 그래서 비석리에다 별관 교실까지 마련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평서노회와 조순천 목사와의 관계를 좀 살펴보기로 한다. 1945년 8. 15해방을 맞이한 평서노회는 真池洞教會에서 해방의 기쁨과 더불어 감격어린 노회가 개최되었다. 노회장에 曺承翊 목사(曺仲瑞의 先親), 서기에 趙順天 목 사가 피선되었다. 노회장의 선창으로 과거를 회상하면서 통곡하여 회원들은 물론 방청객까지 철야기도로 눈물의 바다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일제 시대때 본의 아니게 결의한 결의 몇가지를 꼭 꼭 지목 발췌하여 버리자는 결 의를 하였다. 이때는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될 기미가 보이는 불안한 때이었다. 그래서 남 한과 북한이 통일적으로 총회로 모이게에는 문제점이 있을 것을 예기하여 그 에 대한 방책에 고심하던 때이었다. 총회 총대는 선출하되 남북한의 모든 노 회가 한자리에 모일 수 없을 때 잠정적으로 북한 지역의 노회만이라도 연합기
구 설치 문제를 검토하게되었다. 1945년 12월 38선이 굳어지면서 남북이 완전 히 분단되어 왕래가 차단되고 미소공동위원회는 계속되는 중 사회는 혼란하고 민심은 점점 각박하여집에 따라 교계도 어지러웠다.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겨울의 찬바람은 우리 민족을 더욱 더 싸늘하게 했 다. 1946년 가을 노회때 조목사는 노회장으로 피선되어 "성직자로서는 기독교 연맹 가입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전면적으로 걸의했다. 강앙욱은 더 이상 설 득공작이나 말만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다는 판단아래 목사 6명 과 더불어 1946년 10월 28일 정식으로 북조선 기독교도 연맹조직을 선포하게 되었다. 1946년 10월 21일 江西 岐陽教會 목사관에는 평서노회 중진목사들이 앞으로 다가오는 11월 3일 김일성 괴뢰정부의 총선거일이 주일이었으므로 거기에 대 한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서 모였다.. 조목사의 제안으로 1) 우리 기독교인들은 주일에는 선거할 수 없다(11월 3일) 2) 부득이 주일에 선거한다면 우리들에게 는 자유를 달라 3)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일 외에는 어떠한 일이든지 할 수 없다. 4) 노회내 각 지교회 담임 목사에게 주지시켜 일치 행동하도록 하자 이상의 결의 사항을 효과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시찰책임자를 작 정하였다. 강서시찰 책임 한의원 목사, 태평시찰 책임 우성옥 목사, 용강시찰 책임 박성빈 목사, 남포시찰 책임 김덕모 목사들이었다. 이 일에 대하여 한의원 목사는 괴뢰정부 책임자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자 하 니 조 목사는 우리 노회만 하는 것 보다는 5도 연합노회 (교역자회)의 명의로 합이 유리하다고 하므로 그렇게 하기로 가결하였다. 당시 5도 연합노회장에는 김진수, 부회장 김화식, 서기 김길수이었다. - 진남포 특신고등성경학교 제1회 졸업식 - 1949년 3월 정치적으로도 자유가 없고 신앙적으로도 핍박과 환난이 계속되 는 그 어느날 진남포 비석리 교회당에서는 학생과 학부형 및 이를 축하하기 위 해 1,000여명의 교우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득 신고등성경학교는 북풍한설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3년간 가르치고 교훈하여 첫 아들을 해산하게 된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도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 라 "(시 126:5-6)
조목사의 수고는 헛되지 않았다.
교장훈시의 시간이 되었 다.
조목사의 교훈은 항상 무게있는 말씀이었으나 이날 따라 더욱 더 의미심 장하게 들렸다.
요한복음 21 : 22을 읽고는 헬라 원어 성경으로 읽어주었다. 그리고 나서
(1) 너는 (2) 나를 (3) 따르라 세가지로 부탁하시는 말씀이었다.
1) 너는 : (1) 부름받은 너, (2) 사명을 받은 너 2) 나를 : (1) 십자가를 지신 예수, (2)인류의 구세주 예수 3) 따르라 : (1) 헌신하라, (2) 순종하라, (3) 복음을 전하라 교문을 나서는 졸업생들에게 주신 말씀은 굳은 결심과 각오를 가지게 했다.
基督敎徒聯盟 1946년 3월 1일 그날은 해방후 처음 맛는 3.1절 기념일이었다.
평양 장대현 교회를 비롯하여 각처의 교회종은 정오를 기하여 울려퍼졌다.
해방의 기쁨이 완전한 자유해방이 되도록 합심기도하였다. 그러다보니까 감사예배가 공산당 에 대한 성토로 이어졌다. 공산당은 적위대로 하여금 교회로 난입하여 난동을 부리고 보안서원들은 교인들을 검거하였다. 이제 북한 하늘엔 먹구름이 감돌 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강양욱은 기독교도연맹이라는 깃발을 들고 교계 에 군림했다.
물론 1945년 12월 25일 불교도연맹이 결성될 무렵부터 기독교 연 병을 조직할 생각이었으나 조선민주당의 조만식 장로가 신탁통치반대를 정면 으로 내세우는 바람에, 그리고 또 한가지는 3.1절 기념 예배때의 기독교의 분 위기가 그로하여금 추춤하게 하였다가, 1946년 8월 15일 해방기념식 이후부터는 강양욱의 심사가 변화되면서 기독 교연맹 결성을 서둘게 되었다.
강양욱은 진남포 비석리 장로교회의 박상순 목 사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매씨 안신호 권사(진남포 비석리교회 권사) 감리교 의 김창준, 홍기주 등을 배후에 두고 먼저 황해노회의 김익두 목사를 매수하려 했으나 황해노회의 완강한 반대에 부딛쳤다.
"강양욱을 몰라보는 기독교" 에 대하여 강양욱은 더욱 분개했다.
북한 정권의 권력 순위 3위의 자리에 있 는 강양욱을 몰라보고 기독교연맹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각처에서 반 기를 들고 저함까지 하는 기독교를 그대로 방임할 수가 없었다.
기독교 정신 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강양욱은 물리적인 탄압에 앞서 설득 공작에 나섰다.
기맹에 가입하느냐. 기독교의 순수한 신앙단체가 아닌 어떤 정권의 허수아비 이니만큼 절대 가맹하지 않고 순교정신으로 교회를 순수하게 지키느냐 하는 양 자택일의 기회가 온 것이다. 대다수 아니 전체 북한의 기독교인은 물론 기독교연맹을 반대했다.
1948년 가을 평서노회가 平南線 降仙驛前 腰村教會에서 모이게 되었다.
개회시간이 되어 노회장 조목사는 늠름한 큰 키에 까만 예복 차림으로 강단에 올라가 에 배를 인도하였다. 사무진행에 들어가 서기가 회원을 점명하니 회장이 개회됨 을 선언하였다. 서기가 "오늘 이 시간 평양에서 오신 강양욱씨가 중대한 공문 을 가지고 와서 전하는 동시에 30분 가량 언권을 달라고 요청하니 어떻게 할 까요"하고 제외하였다. 그때 회원 뒷자리에서 어떤 회원이 큰소리로 회장하고 일어섰다.
그 공문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읍니다. 만일 기독교연맹에 대한 것이라면 우리 노회에 서 결의한 바가 있으니 임원회에서 처리하기로 동의합니다(1946년 추기노회 때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는 단체가입은 허락하지 않기로 했다.) 지혜있고 영리한 회장은 재빨리 사무를 진행시켜 임원선거를 끝냈다. 회장 방준원, 부회장 우성옥, 서기 이순경, 부서기 송영길, 회계 김승일, 부회계 임 호순 임원을 교체하려고 하는 순간 예비실에서는 좀 뒤숭숭한 소리가 들려왔 다. 강양욱의 수행원들이 회장에게 제2차적으로 시간요청을 강요하는 것이었 다. 임원을교체하면 저희들의 제안이 다시 나올 수 없을 것을 알고 교체하기 전 조목사에게 간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목사는 외모로는 부드럽고 애교 있는 호남으로 보이나 법리를 캐는 데는 딱딱한 명회장이었고 노회장으로 재 선되기도 했다. "나는 시효가 이미 지나가 버렸다"고 하시며 눌러버리고 임원 교체를 계속 진행했다. 비상한 시국에 대처하여야 할 임원진이었으므로 회원들은 오랜 박수로 환영하여 주었다.
신임회장 방준원 목사는 "미약한 종은 우리들의 아름다운 전통을 그대로 게 중할 것 뿐입니다. "하고 취임인사를 했다. 노회 제1일 저녁시간을 끝냈다. 노 회석상에서 언권을 얻지 못한 강양욱은 분노가 가득하여 "여러분 내가 말씀드 릴 것이 있으니 좀 남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광고를 하였으나 노회에 모여 든 회원과 방청객은 모두 나가버리고 말았다. 강양욱 일행은 면중하게 되어 · 퇴장해 버렸다.
1949년 12월 각도 대표로 소위 기독교도연맹 총회를 결성하여 강력한 조직 을 하였다. 평양서문밖교회에서 총회장 : 김익두 목사, 부회장 : 김웅순 복사, 서기 조택수 목사로 진행했다. 이때 5도연합노회 중요간부가 일제히 검거, 투옥되었다. 누구든지 기독교연 맹에 가입하지 않는 교역자는 강단에 설 수도 없고 교회를 시무할 수도 없다 고 결의하고 각 교회에 통지 발송했다. 평양 어느 교회는 목사가 연맹에 가입 치 않았다고 기독교연맹에서 다른 목사를 파송하여 시무목사와 파송목사가 다 같이 예배를 인도하려고 하니 파송목사가 당신은 연맹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 문에 권한이 없고 이제부터는 내가 예배인도 권한이 있읍니다하고 밀어내고 인 도하려고 하니 예배에 참석하려고 나왔던 교인들은 모두 일어서 퇴장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몇몇 교회지도자는 강양욱의 마술에 걸려들었다. 그분들을 공개하기 엔 너무나 미안한 일이기에 보류하기로 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강 양욱에게 동조한 교계의 지도자 몇분은 왜정때도 신사참배를 서슴치 않던 사 람들이었고 6.25가 발발해서 우익진영 인사들을 학살할 때 어느 누구보다 먼 저 회생됐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연맹에 대한 강양욱의 생각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국제회의때나 대 외선전에 북조선 기독교연맹을 들먹거렸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는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는 기독교연맹이라는 것이 있다고 자랑했다. 또 실제세 계종교회의나 평화회의에 강양욱은 서슴없이 출석했다. 한편 그는 북한에서의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을 더욱 심하게 했다.
강양욱의 威脅 1949년 11월 하순경 득신학교 교정에는 검은색 고급승용차가 들어왔다. 통 통한 체구에 머리기름을 흡백바른 기름진 중년신사 강양옥이 내렸다. 강의시 간이 끝날 무렵이었으니까 오후 3시경이었을 것이다. 그는 수행한 정치보위부 원이나 내무서원으로 보이는 사복차림의 사람들은 돌려보내고 비석리교회 김 모 장로와 안신호 권사등과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김장로와 안권사는 교회 2층 으로 올라가고 강양욱은 교장 조순천 목사와 단독면담을 요청하였고 두사람은 맨끝 강의실 (3학년 교실)로 들어갔다. 조승익 목사와 교직원들은 불안한 생각 에서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엿들었다.
강양욱은 조목사를 향하여 당당한 기세로
1) 당신은 어째서 노회때마다 박상순 목사(기독교도 연맹중앙위원 장 전 비 석리교회 당회장)의 발언을 가로막아 기독교연맹 선전을 못하게 하느냐?
2) 학급수가 해마다 늘어나는데 어째서 기독교연맹에 가입한 학생들은 받아 주지 않느냐?
3) 당국(공산당)에서 각 신학교에 인민과중 헌법을 매주 1시간 이상 강의 하도록 공문지시하였는데 이 학교에서는 교묘한 방법으로 유물사관을 비 판하는 등 적당히 지내보낸다는 보고가 있는데 사실이오?
4) 라시산 목사(기독연맹인사)를 평서노회장으로 세우고저 하는데 이 일에 협력해 주시오 하는 것 등이었다. 여기에 대하여 조순천 목사는 구김없이 답변을 했다.
1) . 내가 박상순 목사의 발언을 가로막는 것은 이유가 있소. 1946년 10월 31 일 평서노회에서는 정치에 참여한 목사는 정직 원칙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그 런 것이요 그러니 그가 우리 노회에 와서 기독교연맹을 선전하는 것은 옳지 못 한 일이기 때문이오.
(2) 기독교연맹 가입 학생은 절대로 입학시킬 수 없소. 학교를 속이고 입학 하는 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없지 않으나 적발되면 단호히 퇴학시킬 생각이오 학생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학교의 기본 방침이요.
(3) 당국으로부터 인민과목 중 헌법강의하라는 지시공문을 받았소. 또 진남 표 인민위원회 서기장 김순철(안신호 권사 아들)의 전화연락도 받았소. 금번 학기부터 당국의 요구하는 헌법강의를 어느학교에 못지 않게 잘하고 있소 단 지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우리 학교는 신학교 예과 과정이니 고등교육기관이 요 인민학교나 고급중학교와는 달리 구별해야 하오. 적어도 신학교에서의 헌 법학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헌법을 무조건압송하는 초등교육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오. 우리 학교는 헌법강의도 초보적인 헌법강의가 아닌 현법학 의 의의, 역사적 배경, 사회과학적 위치 (기본권), 그리고 자본주의 헌법과 공 산주의 사회주의 헌법과의 비교 등 헌법을 학문적으로 강의하고 있는 것이 우 리 하교의 강의수준이오. 그런 고로 당국에서 지시 공문한 것을 가장 잘 지키 고 있으며 어긋난 것은 하나도 없고 내가 도리어 반박하고 싶은 것은 헌법학 의 이론적 강의를 위해 강의용 교재 (유물사관의 변증법적 이론과 헌법)을 무 허가 인쇄물이라고 해서 나와 담당교직원 (홍만춘 선생)을 감금하고 교재전부 볼 압수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생각하느냐?
(4) 당신의 평서노회 노회장은 누구를 시키느니 마느니 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요 노회장은 헌법에 의하여 노회 에서 선출하는 것이 아니냐? 하고 구김없이 대답하였다. 그의 답변은 너무나 명확하고 이론적이었다. 그러나 강양욱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말대로만 하면 당시 공 산당이 중등교육연수기관으로 사용하고 있던 득신학교 교사도 찾아주고 당국으로부터 재정지원도 받도록 해주겠다고 유혹을 했다. 그러나 여기에 넘 어갈 분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 결론도 없이 악수도 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그것이 강양욱과 조목사와의 마지막 혜어짐이었다. 예 공산치하에 살고 있는 이북에서는 많은 젊은이들이 평양신학교로 모여들었 다. 그 때 평양신L는교는 5도 연합노회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매 우 운영이 어려웠다.
그래서 신학교 주일이 되면 신학생들을 이북 전역 교회 파송하여 1차 헌금해주는 것으로 크게 도움을 얻어 운영해 갔다.. 1949년 12:
1947년도 교직원 교장 : 조순천 목사, 교감 : 송영길 목사 교수 : 유정철 목사, 유성옥 목사, 김덕모 목사, 변수경 장로, 홍만춘 선생, 김영호 선생, 이윤영 선생 1949년 12월말 현재 교수진 교장: 조순천 (찬송가학, 구약 : 순교) 이사장: 조승익 (구약, 신학개론 : 순교) 학감: 박성빈 (신약, 설교학 : 순교) 교수: 변수경 (영어, 교회사), 이정엽 (신약개론, 철학개론), 홍만춘 (윤리학, 교육학개론, 사회학개론), 조기호(신약), 김회보(국문학, 영어 : 전 총신대학 장), 변익성 (수학, 물리, 화학), 현영주(국어) 재적 학생수:480명 교실 (강의 실): 6교실 학급수:4학급-1학년 2학급, 2학년 1학급, 3학년 1학급 鎮南浦得信高等聖經學校 出身으로 牧會를 계속하고 있는 牧師들은 다음과 같다. 홍태우(인천제물포교회) 김인식(동산교회) 이동춘 (연천감리교회) 이능백(삼송교회) 이성택(평안교회) 김인철 의정부시온교회) 한재성 (죽산교회) 김원우(구로남도교회) 이성화(전주예수병원) 김준근(한광교회) 오석희 (영광교회) 김용상(배배교회) 우춘식 (황지중앙교회) 황신환(부산명신학교) 관선희 (소망교회) 김영담(대구수송교회) 이원식 (국일교회) 김창인(광성교회) 이병준(장위제1교회) 이웅선 (약수교회) 이병덕 (김포교회) 김현구(전주예수병원) 임중현 (구파발교회).
추운전(평화교회) 비환봉(진정교회) 집광식(인천제3교회) 천성연(상계중앙교회) 강성국 이기정(개봉교회) 박지훈(한남교회) 이상찬(필라델피아 Taith 신학교) 其他 김충신 조낙법 최순호 조지찬 박용욱 한승진 노대충 이영순 홍법식 박치복 조순억 이찬순 김영수 정관국 박창선 業南浦 碑石里 長老教會와 「王中王」 葉南浦 碑石里 長老教會는 平西老會와 得信學校의 기둥이었고 이지방 長老 教會의 상징적 존재였다. 일제의 탄압과 모진 환난을 당하면서도 이겨 낸 교 화이다. 馬布三悅 蘇安論의 宣教區域으로서 宋麟瑞 金永俊 金聖鐸 許德化 朴 刻純 宋永吉 呂俊成등 平西老會 重鎭들이 視務하였고 金春植 魚少女 柳善妃 金順銓 安士麟 吳場善 崔善擇 吳大允 参相速 趙誠實 金元道 金和承 安信浩 張時擇 鄭忍愛 趙竜天 申秀玉 鄭裕善 李鳳善 承昌信 南在鎬 朴承範 徐秉益 李光允 주출부 金晸善 全興경 朴賛永 이신권 소영주 나병주 등이 청년회와 부 인회에서 선교사업을 돕고 있었다. 물론 그많은 교인들을 전부 기술할수는 없 으나 1924년 1월 통계에 700여명 이었다고 하니 당시의 教勢는 매우 경이적이 있다. 그런가운데 이 교회에서는 의외의 일이 생겼다. 그것은 소위 「王中王」 사건이다.
1939년 9월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큰시련을 겪고 있었고 득신학교는 일제의 탄압때문에 학교재정이 매우 궁핍하여 동창회에서 학교재 정을 돕고저 「예수一代記 王中王」 이란 영화를 상영키로 하였다. 영화라야 無聲영화이다. 즉 벙어리 화면에 辯士가 그화면에 마추어 목청을 높이는 것이다. 울기도 하 고 웃기도 하고 흥분하기도 하며 땀을 뻘뻘 흘리며 그영화의 감정을 표현 하 였다. 그당시 특신학교 교장은 전홍경이었는데 그는 광고선전물을 인쇄하여 신문 에 끼어서 진남포일대에 배포했다. 그것이 문제가 됐던 것이다. 「王中王 萬王 의王 예수 일대기」라는 표제에다 그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했는데 그광고가 나 가자 인근 각교회 교인들은 영화상영장인 港座에 운집하는 것이였다. 그때가 1939년 10월 26일이다. 오전 첫회상영이 끝나고 오후 상영을 준비하고 있던 줄 校長과 辯士를 경찰이 연행하고 즉시 구속하는 것이였다. 죄목은 不敬罪라 했 다. 즉 일본천황에 대한 불경죄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구속되고 있었는데 소영주 이신권 박찬영 세 청년이 잡혀온것 이다. 소영주는 득신학교 교사로 면려 청년회 지육부장 이었고 이신권은 청년 회서기 그리고 박찬영은 음악부와 찬양대를 지휘하던 음악청년 이었다. 이들 의 구속이유는 治安維持法위반이라 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全校長을 구속해 놓고 그여죄를 추궁하면서 全校長의 가택수색을 하였는데 그때 소위 不穩文書 가 나왔다고한다. 그不穩文書란 朴贊永청년이 靑年會討論大會때 연설내용중 모세에 관해 例를 들어 토론한 그원고가 不穩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때 박 찬영 청년과 토론회에 참가했던 소영주 이신권 까지 소위 일망타진 되어서 잡 혀온것이다. 예수일대기 「王中王」이나 「모세」의 행적이 不敬罪 治安維持法에 저촉되어서 구속해야할 이유가 전혀 성립될수 없는데도 日帝는 구속 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와같은 實例에서 日帝가 자행한 종교탄압의 일면을 살펴 보 았다.
이와같은 탄압과 박해를 이겨냈던 진남포 비석리 장로교회가 해방후 또 공 산당에게 시달려야 했다. 宋永吉牧師를 비롯하여 많은 교인이 순교했고 비명 에 갔다. 九死一生으로 피난월 남한 당시의 박찬영은 서울永樂教會의 重鎭長老로서 또 는 企業人으로서 현재까지 봉사하고 있으며 전홍경교장은 元老長老로서 여생 을 조용히 정리하고 있다. 한가지 아쉽다면 옛 믿음의 동지였던 朴尚純牧師 安信浩권사(島山安昌浩妹 氏)康良煜등이 이교회를 떠나서 돌아오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본 자료는 임명락 강도사 단독 수집자료이며 추가자료 문의는 truss620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