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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4대 작품인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피에타 상, 베드로 성전돔을
오늘 모두 보게 된다.
일생에 이 위대한 작가의작품을 접할 수있게되어 행운이라 생각한다. 한번은 보아야한다는 미켈란젤로의 4대대작을
못본다면 반드시 후회하게된다고 ...
최후의 심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다.
1541년 최후의 심판 완성
그의 나의 61세
미켈란젤로 필생의 역작은 바티칸 시스티나성당의 제단 앞 벽화에 있다.
등장 인물은 무려 391명
그런데 발표 당시 최후의 심판은 전 로마 시민의
찬사와 경악의 표적이었다.
왜?
2. 팬티화가의 덧 칠
등장인물의 은밀한 부분, 심지어 예수까지도 노출 된 나체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미켈란 젤로가 세상을 뜨자
최후의 심판은 전폭적으로 수정되었다.
중요부위에 천을 그려 넣었는데
그 화가들을 팬티화가라 불렀다.
그리고 이 화가는는 끝내 귀저귀 화가라는 비난 속에
자살하고 만다.
그들이 그린 팬티는 모두 36장
미켈란젤로는 죽어서도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3. 외골수의 걸작
사람들이 함부로 덧칠 하리란 걸 알고 있었던 걸까
미켈란젤로는 작품 속에 자신의 분신을 남겼다.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수난을 당한 성인 '바르톨로메오'
그가 들고 있는 흉측하게 늘어진 살가죽은 바로 미켈란젤로이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속옷이 덧칠되어지는 상황을 참을 수 있었을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작업기간 4년 6개월, 미식축구장 1.5배, 20미터 높이의 천장
미켈란젤로는 받침대를 대고 천장 가까이 올라가 옹색하게 허리를 젖히며 작업했다.
작업이 끝날 때 그는 피부병 허리디스크 눈병 등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제자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의 보조를 제외하곤 혼자서 작업을 했으며
작업 동안은 아무에게도, 심지어 교황조차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완성 후 모든 사람들이 달려와 경탄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높은 천장 탓에 작업은 어려웠지만 바로 그 때문에
천지창조는 덧 칠 되지 않은 걸작으로 남았다.
나의 천직은 조각가
르네상스 최고의 회화, 조각, 건축을 담당했던 미켈란젤로.
어렸을 적, 채석장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그를 알아본 메디치가가 도제 수업을 가르친다.
23세의 미켈란젤로를 스타작가로 만들어준 것은 조각 '피에타상'
그가 남긴 최고의 조각은 뭐니해도 '다비드'
그는 사방에서 깍아 들어가지 않고
부조처럼 정면에서만 조각해 들어갔다.
미켈란젤로 그는 말한다
"조각은 대리석 안에 갇혀있는 인물을 해방시키는 작업이다
대리석 안에는 혼이 살아있으며 조각이란 혼을 꺼집어내는 작업이다.
신이 진흙에서 생명체를 창조했듯이 조각가 역시 돌에서 아름다움을 끌어낸다."
그는 90세의 고령, 죽기직전까지도 조각을 하고 있었다.
출처: 예술사-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는 1536년부터 1541년까지 쉬지 않고 「최후의 심판」작업에 매달렸다.
「최후의 심판」은 분명 대단한 작품이지만, 이것이 60대 노인의 강도 높은 육체적 작업에서
비롯된
창조물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거의 신화에 가까운 작품으로 여겨진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던 날로부터 29년이 지난 1541년에
「최후의 심판」이 모습을 드러내
높이는 17m이고 폭은 13m가 넘는 이 거대한 그림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큰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미켈란젤로는 61세부터 66세까지 이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이 그림은 노인의 작품이 아니다.
힘이 넘치고 역동적이며, 혁신적이고 신화에 가까운 작품이다.
이 작품을 주문한 사람은 교황 클레멘스 7세였다.
1527년에 합스부르크 황제 카를 5세의 침략으로 로마는 약탈을 당했다.
수 많은 미술가들이 목숨을 잃었고,
많은 미술품들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그 무렵 로마교회에 닥친 더 심각한 위기는 종교분열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1,500년간 유지해온 가톨릭의 단일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교황은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상기시키고,
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미켈란젤로에게 <최후의 심판>을 주문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명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는 오로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영묘작업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클레멘스 7세가 죽고 나서 뒤를 이어 바오로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워 다시 한 번 시스티나 성당작업을
위임한다.
첫 번째 조건은 그를 ‘교황청 최고의 건축가, 조각가, 화가’로 임명한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그에게 장려금으로 매년 금화 1,200에퀴를 평생 지불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세 번째 조건은 그림이 그려지는 동안 작품내용에 대해 전혀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그림을 갖기 위해 교황이 되기를 30년 동안이나 기다렸소.”
교황의 감동어린 말 한마디가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노인임을 잊게 했다.
그래서 천지창조를 그린 지 24년이 지난 1536년에 그는 시스티나성당으로 다시 왔다.
그는 새 프레스코를 제작하기 위해 다섯 점의 작품을 없애야했다.
자신이 그린 예수님의 족보에 관한 두 점의 루네트화(반달모양의 그림)를 비롯하여,
페루지노가 그린 <성모승천>과 다른 화가들이 그린 <예수님의 탄생>과 <모세의 발견>
을 없앴다.
그리고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어 <최후의 심판>을 그렸다.
이 작품은 도식적으로 네 개의 띠로 이루어졌다.
꼭대기에 있는 첫 번째 띠에는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사용된 도구들을 들고 있다.
왼쪽 루네트에는 대천사 가브리엘을 중심으로 천사들이 십자가를 들어 올리고 있고,
일부 천사들은 가시관을 들고 간다. 오른쪽 루네트에는 천사들이 책형기둥을 일으켜 세우고,
한 천사가 채찍을 들고 온다. 이것으로 수난에 사용된 도구들이 바로 구원의
도구임을 천사들은 말하고 있다.
그림의 중심에 해당되는 두 번째 띠에는 심판자 그리스도와 성인들이 있다.
한복판에는 오른팔을 치켜든 심판자 그리스도가 선택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를 갈라놓으려한다
.
그분의 동작은 물과 육지를 가르는 하나님의 동작을 닮았다. 그분은 성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
그리스도의 주변에는 사도들과 순교자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중 중심인물은 왼쪽에 있는 세례자 요한과 베드로 사도이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생활을 상징하는 낙타털옷을 망토처럼 걸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를 낙원에서 추방되어 황무지를 일구어야 했던 아담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 또 베드로는 두 개의 열쇠를 들고 있다. 왜 두 개의 열쇠를 쥐고 있을까?
하나는 과거의 열쇠요, 다른 하나는 현재의 열쇠 아닌가?
그래서 그를 바오로 3세 교황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세례자 요한과 성모님 사이에는 안드레아 사도가 십자가를 들고 뒤돌아 서 있고,
베드로 사도 위에는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 요한이 예수님과 비슷한 동작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아래에는 라우렌시오 성인이 석쇠를 들고 있고
,
바르톨로메오 성인이 살가죽을 들고 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석쇠 위에서 화형을 당하면서 재판관에게 이런 농담을 했다.
“다 구워졌으니 이제 뒤집어서 잡수시오.”
그의 일화는 전설이 되어 그는 로마의 가장 유명한 순교자가 되었다
.
또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아르메니아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했는데
,
산채로 살가죽을 벗기는 형벌을 받았다.
원형을 이루는 성인들의 왼쪽에는 여선지자들과 구약의 여인들이 있고,
동정녀와 순교자와 성녀들이 모여 있다. 무릎을 굽힌 어린 소녀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여인은 보통 하와 혹은 교회로 불린다.
또 오른쪽에는 구약의 예언자와 성조들이 있고, 성인들이 서 있다.
그 중심에는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진 키레네 사람 시몬이 큰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다.
그리고 선한 도둑 디스마도 작은 십자가를 들어 올리고 있다.
그 사이에 블라시오 성인이 강철제 소모기를 들고 있고,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 는 부셔진
칼날바퀴를
들고 있으며, 세바스티아노 성인은 화살을 손에 들고 있다
.
블라시오는 강철제 소모기로 찢겨서 순교했고,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는 칼날을 박은 바퀴로
찢어 죽이려고 했으나, 갑자기 벼락이 떨어져 고문도구를 부수자 결국 칼에 맞아 순교했으며,
세바스티아노는 화살에 맞아 처형될 뻔 했으나, 극적으로 살아났다가 다시 발각되어 영웅적으로
순교했기 때문이다
.
세 번째 띠의 중앙에는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천사들이 일곱 나팔을 불고 있고
,
구원자들의 명부를 든 대천사 미카엘이 구원의 명부를 펼쳐들고 있으며,
반대쪽의 천사는 지옥의 명부를 펼쳐 들고 있다. 그런데 구원의 명부는 작고 지옥의 명부는
크지 않은가?
또 왼쪽에는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가는 복된 사람들이 있고,
오른쪽에는 지옥의 불로 떨어지는 천벌 받는 자들이 그려졌다.
묵시록에 보면 심판의 날에 천사들이 나팔을 불면 무덤이 열리고, 사람들은 덕행과 악행의
무게를 잰 다음
구원받는 영혼과 저주받는 영혼으로 나뉘어서 천국으로 올라가거나 지옥불의
아가리 속으로 떨어진다
.
왼쪽의 모습을 보면 선행한 영혼들이 자력으로 천국으로 오르는 것을 힘겨워하자 천사들이
위에서 당겨주고
끌어올려 주고 있다. 그러나 왼쪽의 모습을 보면 천국으로 올라가려고 애쓰는 영혼에게
천사들이 난폭하게
주먹질을 하지 않는가? 또한 악마들도 소리 지르는 영혼들을 붙잡아 끌어 내리고 있다.
악마와 뱀에게 사로잡혀 있는 절망의 천벌을 받는
영혼은 내면의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그 고통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고통과 유사하다.
그는 이 작품을 그리면서 절망과 회의를 느꼈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반대자들에 의해 그림 전체를 없애야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야했다.
네 번째 띠 왼쪽에는 무덤에 갇혔던 영혼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고,
오른쪽에는 영벌을 받은 영혼들이 카론의 배에 실려 지옥으로 향하고 있으며, 이들을
심판하는 미노스가
지옥문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클레멘스 7세 교황은 수도복을 입고 무덤에서 나오는
영혼을 돌보고 있고,
교황청 의전 담당관인 체세나 추기경은 미노스로 표현하지 않았던가? 체세라는 공식적으로
이렇게 논평했다
. “이처럼 거룩한 장소에 부끄러운 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낸 수많은 나체를 그린 것은
매우 그릇된 일이며
, 이 작품은 교황의 소 성당이 아니라 목욕탕이나 매춘 굴에나 어울린다.” 미켈란젤로는
지옥의 망령들 속에 체세나의 초상
을 그려 넣음으로써 그에게 복수했다. 체세나는 다리에 꽈리를 튼 큰 뱀과
악마의 한 가운데 있으며, 큰 뱀이 그의 성기를 물고 있다
.
그러나 미켈란젤로 자신은 바르톨로메오 성인 손에 들려진 가죽위에 노년이 된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었다.
그의 표정은 마른 걸레처럼 일그러졌다. 말라서 구겨진 살 껍질에 산 자의 초상을 새겨 넣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이로써 육신의 희미한 그림자 속에 예술의 고귀한 영혼이 깃들게 된 것이다
천지창조, 1508∼12년, 프레스코, 280 x 570cm,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작업기간 4년 6개월, 미식축구장 1.5배, 20미터 높이의 천장
미켈란젤로는 받침대를 대고 천장 가까이 올라가 옹색하게 허리를 젖히며 작업했다.
작업이 끝날 때 그는 피부병 허리디스크 눈병 등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제자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의 보조를 제외하곤 혼자서 작업을 했으며
작업 동안은 아무에게도, 심지어 교황조차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완성 후 모든 사람들이 달려와 경탄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높은 천장 탓에 작업은 어려웠지만 바로 그 때문에
천지창조는 덧 칠 되지 않은 걸작으로 남았다.
창세기
1. 어둠과 빛을 구별하다
2. 해와 달을 창조하다
3. 바다와 육지를 분리하다
4. 아담을 창조하다
5. 이브를 창조하다
6. 원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다
7. 노아의 제사
8. 홍수와 노아의 방주
9. 술 취한 노아
구약성서에 나오는 구원의 장면
10. 하만을 벌하다
11. 모세와 뱀
12. 다윗과 골리앗
13.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예언자
14. 요나
15. 예레미야
18. 다니엘
19. 에스겔
22. 이사야
23. 요엘
25. 스가랴
여자 예언자
16. 리비아 예언자
17. 페르시아 예언자
20. 쿠마엔 예언자
21. 엘리트레아 예언자
24. 델피 예언자
그리스도의 조상
26. 솔로몬과 어머니
27. 이세의 부모
28. 르호보암과 어머니
29. 아사와 부모
30. 웃시야와 부모
31. 히스기야와 부모
32. 스룹바벨과 부모
33. 요시야와 부모
천지창조’엔 해부학 이론이 숨겨져 있다.
‘아담의 탄생’ 그림에서 창조주를 둘러싼 배경이 두개골의 단면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뇌의 마루엽과 관자엽을 나누는 띠 고랑은
조물주의 어깨를 가로지르며 왼팔 아래로 내려가서 바로 아래에 있는 천사의
엉덩이를 따라 연장된다.
또 오른쪽에는 구약의 예언자와 성조들이 있고, 성인들이 서 있다.
그 중심에는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진 키레네 사람 시몬이 큰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다.
그리고 선한 도둑 디스마도 작은 십자가를 들어 올리고 있다.
그 사이에 블라시오 성인이 강철제 소모기를 들고 있고,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 는 부셔진
칼날바퀴를
들고 있으며, 세바스티아노 성인은 화살을 손에 들고 있다
.
블라시오는 강철제 소모기로 찢겨서 순교했고,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는 칼날을 박은 바퀴로
찢어 죽이려고 했으나, 갑자기 벼락이 떨어져 고문도구를 부수자 결국 칼에 맞아 순교했으며,
세바스티아노는 화살에 맞아 처형될 뻔 했으나, 극적으로 살아났다가 다시 발각되어 영웅적으로
순교했기 때문이다
교황청 의전 담당관인 체세나 추기경은 미노스로 표현하지 않았던가? 체세라는 공식적으로
이렇게 논평했다
. “이처럼 거룩한 장소에 부끄러운 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낸 수많은 나체를 그린 것은
매우 그릇된 일이며
, 이 작품은 교황의 소 성당이 아니라 목욕탕이나 매춘 굴에나 어울린다.” 미켈란젤로는
지옥의 망령들 속에 체세나의 초상
을 그려 넣음으로써 그에게 복수했다. 체세나는 다리에 꽈리를 튼 큰 뱀과
악마의 한 가운데 있으며, 큰 뱀이 그의 성기를 물고 있다
.
천지창조’엔 해부학 이론이 숨겨져 있다.
‘아담의 탄생’ 그림에서 창조주를 둘러싼 배경이 두개골의 단면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뇌의 마루엽과 관자엽을 나누는 띠 고랑은
조물주의 어깨를 가로지르며 왼팔 아래로 내려가서 바로 아래에 있는 천사의
엉덩이를 따라 연장된다.
그에 이어지는 하단의 녹색 스카프는 척추동맥을 형상화한 것이다.
뇌하수체는 화면 하단으로 이어지는 천사의 다리와 발에 의해 표현된다.
르네상스 천재였던 미켈란젤로는 일부러 반전을 깔아놓은 것일까.
천지창조, 1508∼12년, 프레스코, 280 x 570cm,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아홉개의 주제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 바로 <아담의 창조>일 것이다.
근엄하신 하나님께서 천사들에 둘러쌓여 아담을 창조하시고 생기를 넣으시는 장면이다.
손가락을 보면 하나님의 손가락에는 강렬한 힘이 느껴지는 반면 아직 생기가 없는 아담의
손가락은 힘이 없이 축 늘어
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닿을 듯 말 듯 그려있는 손가락 사이에는 우주 근원의 에너지가 전달되고 있을 것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와 미켈란젤로의 만남은 동서양의
모든 세계가 감탄하는 대 걸작
(시스티나 천장벽화)를 만드는 동기가 되었다.
성격이 불같이 무섭고 거만한 무인 기질이었던 교창 율리우스와, 격정적이고 두려움을 모르며
자부심이 강한 미켈란젤로는 서로 맞먹는 거인이었다.
1505년 창조적 능력의 절정기에 도달한 서른살의 미켈란젤로를 로마에 불러온 것은 바로
1503년에 출황이 된 율리우스 2세였다 (그는 그 전까지 추기경이었다).
처음에 율리우스는 미켈란젤로에게 어느 교황의 무덤보다도 거대하고
장엄한 자신의 무덤을 설계하고 건립하는 일을 맡겼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이태리에서 가장 비싼 대리석이
나는 카라라에 가서 근 일년에 걸친 대리석 선택 작업을 마치고 무덤에 쓸 돌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황은 감자기 생각을 바꾸어 초대 교회의 낡은 베드로 성당을 헐고 재건할
대성당에 자신의 무덤을 안치할 엉뚱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작업비를 받기 위해 교황청에 찾아가곤 했다. 몇 번이나 히탕을 친 뒤 화가 치민
그는 1505년 4월 17일 로마를 빠져나가 고향인 피렌체로 도망가버렸다.
그가 떠나버린 그 다음날 4월 18일에 교황은 새 베드로 성당의 초석을 놓았다.
그 당시 미켈란젤로는 너무나 화가 났었고, 36년이 지난 후에도 그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모든 정성을 다해 사업을 계속하라고 교황에게 탄원했다.
어느 날아침 이 문제에 대해 말하려고 그를 찾아갔을 때
한 하인이 나를 내쫓았다. 나는 집에 가서 교황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가장 축복된 교부님, 저는 당신의 명령으로 교창청에서 내쫓겼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당신이 저를 찾으시려면 로마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게 될 것이라는 걸
알려드립니다.'
나는 바로 나가서 말을 타고 피렌체로 떠났다.
교황은 내편지를 읽자마자 다섯 사람의 기마병을 보내 밤이 깊어졌을 때 포기본시에서
나를 따라잡아 교황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이 편지를 읽는 즉시 당장 로마로 되돌아 오라, 괘씸죄를 받을 각오로.' 나는 그 자리에서
교황에게 답을 썼다.
'나에게 진 채무를 같으시면 돌아가겠습니다. 그렇지 않으시면
저를 다시 보기를 원하실 필요조차 없습니다.
' 그 후 내가 피렌체에 있을 때 교황은 시정부의 원로들에게 세 번이나 서신을 보냈다.
세 번째 편지가 온 후 원로들이 나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 때문에 우리는 교황 율리우스와 전쟁하기를 원치 않네. 그대는 돌아가야 하네.
그렇게 한다면 교황이 자네를 해치려 할 경우 이 원로원한테 하는 짓으로 간주하겠다는 권위의
서한을 자네에게 써 주겠네.' 나는 그 편지를 갖고 교황에게로 돌아갔다"
원로원은 1506년 볼로냐에 군사 원정 나온 교황에게 미켈란젤로를 보냈다.
그는 목에 밧줄을 감고 무릎을 꿇어 사죄를 했다 교황 율리우스는 미켈란젤로를 용서하고
볼로냐에서 자기의 동상을 만드튼 일을 시켰다.
불행히도 이 동상은 1년 후 볼로냐 시민들이 율리우스의 점령에 반기를 들고 녹여 없애버렸다.
이때 율리우스 2세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미켈란젤로를 처벌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나 (최후의 심판) 같은 걸작들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한 예술가가 교황에게 등을 돌렸던 유례도 없었고,
또 그런 성급한 일개 미술인을 관대하게 포용한 권력 있는 고객도 없었다.
율리우스는 독선적이고 격정적인 교황이었지만,
미켈란젤로의 타고난 재능을 이해하고 용서할 만큼 도량이 넓었고,천재를
알아보는 혜안이 있었다.
천지창조에 숨겨진 3가지 의미
하나는
힘이 없는 아담의 떨어진 손과
힘껏 내미는 신의 손으로
인간과 신의 내면이 담겨있단다.
또 하나
신과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있음에서
아직 최후의 심판이 도래하지 않았단다.
그것을 위해
기독교인들은 열심히 기도를 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예비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아담의 오른쪽 정강이에
이브를 숨겨 놓았단다.
미켈란젤로(1475~1564)의 피에타상
(마리아는 알고 있었다_그분이 누구이신지를...)
미켈란제로 24세때 완성된 작품으로 피렌체에 보관중인
다비드상, 로마 성베드로의 쇠사슬 성당에 보관중인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에 하나로 미켈란젤로의 작품 중 유일하게 그의 서명을 남긴
작품이라고 합니다
.
거대한 대리석에 미켈란젤로는 영적 영감을 가지고 완성한 명작품-피에타상
성경에 예수그리스도와 마리아의 관계 속에 특이한 사항이 한가지가 있는데
예수그리스도가 자칭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모독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마리아는 이 사실에 관하여 누구보다 진실을 알고 있었으나 예수의 일에 관하여 구명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 은 예수그리스도는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하나님 아들 이요!
하나님
되심을 침묵적으로 시인하고 계신 것이었다.
이 작품은
드라그롤라 추기경이 주문한 「피에타」였다.
그는 죽은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님을 표현한 조각상을 의뢰했다.
계약서에는 “살아 있는 어떤 화가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이
명시되었고, 미켈란젤로는 종교 조각사에서
지금까지도 이 조각상을 능가하는 작품이 거의 없을 만큼 뛰어난 걸작을 만들어 이 계약을 지켰다.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원작자를 표시한 것으로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성모님의 어깨에서 가슴을 가로지르는 띠 부분에는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제작’ 이라는
뜻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바사리는 단순하고 흥미로운 설명을 내놓는다.
자신의 작품을 두고 밀라노 출신의 솔라리라는 조각가가 만들었다고 말하는 방문객들의 얘기를 우연히 들은
미켈란젤로가 밤에 다시 돌아와 굵고 확실한 서체로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를 일약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해준 미켈란젤로 최초의 조각상이기도 하다.
미켈란젤로가 이 작품을 완성한 것은 겨우 24살 때의 일로 이 조각 자체도 영원한 젊음을
간직한 듯하다.
「피에타」의 마리아는
무릎에 쓰러진 죽은 아들 예수보다 더 젊게 표현되었다. 미켈란젤로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순결한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자들보다
젊음을 훨씬 더 오래 간직한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하물며 그 어떤 음란한 욕망에 단 한 번도 노출되지 않았던 마리아의 젊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이 조각상을 지배하는 것은 주변을 압도하는 고요함이다.
다른 피에타 상에서 흔히 묘사된 것처럼 깊은 슬픔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대신 깊은 사색에 빠져 있고, 감상자도 함께 명상하기를
권하듯 왼손을 뻗어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신의 섭리에 대한
복종을 다룬 심오한 작품임을 강조하는 몸짓이기도 하다.
이러한 작품의 의도는 무거운 감상주의에 빠지는 대신 절제되고 아름다운 날카로움을
통해 구현되었다.
마리아의 가슴에 두른 띠에 ‘조각가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을 새긴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을 만든 자신에게 스스로 긍지와
자부심을 부여한 것이 아닐까? 우스운 얘기로 롬바르다 인이
이 작품을 보고 롬바르다 인의 작품이라고 한데 격분한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이 있는 성당에 몰래 들어가 마리아가 두르고 있는
경대부분에 자신의 사인을 하고 나왔다.
그리고 저녁나절 성당문을 나서다가 노을이 지는 석양을 보고 감탄을 한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
어디에도 하느님이 ‘어디의 누가 만든 하늘이다’라는 표시를 하지 않았는데,
고작 내가 만든 작품 하나 때문에 경솔한 행동을 하다니…
”라는 생각이 깊이 스치게 된다.
그 후로 그는 어느 작품에도 자신의 사인을 남기지 않게 된다.
이 작품을 바라보면서 가장 놀라운 것은 무엇인가?
과연 이 작품의 재료가 차갑고 단단한 대리석인가라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성모 머리의 미사포와 옷의 주름이 흠 잡을 구석 하나 없이 사실적이다.
얼굴을 가리지 않도록 들어 올린 미사포, 앞가슴에 두른 띠에 의해
돌출된 앞가슴의 옷 주름, 목 아래의 장식을 넣은 잔잔한 주름 효과
, 넓게 벌린 다리로 인해 크게 퍼진 치마 주름. 대리석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효과들이다.
또한 두 인물의 균형과 조화 또한 완벽하다.
성모 마리아의 숙인 머리와 어깨의 넓이, 예수의 젖혀진 머리와 조화를
이룬 전체적인 신체의 균형이 이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참으로 편하게 한다.
바로 예술에서의 균형과 조화, 통일감이
무엇인지를 한 눈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작품에서 보이는 인체의 해부학이 미켈란젤로의
예술적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해부학이란 무엇인가? 신체를 이루는 근육과 뼈 등 골격과 구조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즉 인체 내부의 생김새를 알아야만 인체의 겉모습을 제대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신체의 비례 역시 해부학의 한 요소이다.
머리의 크기와 몸의 크기가 어울려야 하며, 목의 길이와 어깨의 넓이,
손의 크기와 손가락의 길이 등등 신체 각 요소의 비율이 합당할 때
인간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은가? 이런 신체의 비례도 해부학의 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이상적인 두 인체의 조화 ‘피에타’
이 작품은 바로 이런 해부학의 두 요소를 충족시키고 있다.
신체의 조화와 균형이라는 비례 이외에도 머리와 가슴,
배와 다리의 생김새, 신체 각 부분의 근육과 골격의 모양이
매우 순조롭고 원만하다. 특히 마리아의 벌려진 오른손이 예수의 오른쪽 어깨 밑을
들어 올림으로써 아래로 쳐져버린 팔의
근육이 매우 이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더욱이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의 몸에는 아직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런 모습은 인간 육체의 모습을 완전하게 묘사하기 위해
미켈란젤로가 해부학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실제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의 후원으로 산 스피리토 교회의 지하실에서
실제 시체를 해부하면서 인체의 구조를 연구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으며,
그 연구의 결과로 그는 완전한 형상의 육체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해부학에 대한 지식은 자신의 박식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지 않은가?
바로 자신을 하느님의 종으로 삼는 한 예술가의 겸허한 자세와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기 위한 그 강한 열정을 볼 수 있다.
이런 해부학적 요소 이외에도 이 작품의 조형적 특성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전체적인 구도이다. 마리아와 예수가 합쳐진 형상은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다. 이 구도는 시각적 편함을 유도하기에 가장 적절한 조형적 구도이다. 그 시각적 편안함으로 인해 보는 이는 마리아가 겪는 슬프고 측은한 마음에 철저히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구도가 어색했다면 그 어색함이 방해요인이 되어 완전한 공감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술품이 된 돌덩이 「다비드」
는 도나텔로, 베로키오 등 여러 조각가들이 청동과 대리석으로 제작했으나
미켈란젤로의 이 작품을
최고로 친다. 높이가 무려 4미터에 달하는 대형 조각상이었으니 다른 조각가들이
이 석재를 보고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1501년 미켈란젤로는 아버지의 간청에 못 이겨 26살 생일을 보낸 직후 피렌체로 돌아왔다.
1504년 피렌체 정부는 그에게 다윗 상을 의뢰했다.
이 작품은 그때까지 미켈란젤로가 의뢰받은 작품 가운데 가장 특별한 것이어서 그는
이 일에 대한 열의에
가득 차 있었다. 스케치북에 그는 이렇게 썼다.
“다윗이 돌팔로 거인 골리앗을 이긴 것처럼 미켈란젤로도 거대한 대리석을 이길 것이다.
” 높이가 4미터에 달하는 이 작품으로 미켈란젤로는 동시대 최고의 조각가로 군림할 수 있었다.
「다윗」상은 오늘날까지도 피렌체 정치의 심장부를 지키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라도 소용없다네
다만 대리석이 제 몸을 드러내어야 하지
대리석이 일러주는데로 그마음을 읽고
조각가는 손을 놀려서 빚어낼 따름이라네
잉크와 펜이 다를 게 없지만
잘된 시도 나오고 모자란 시도 나오네
그저 그런 시도 있다네
다만 대리석에
고귀하고 천박한 형태가 있다면
그건 순전히 망치를 든 사람 탓일세
나의 영혼이 신을 닮았다면
바깥의 아름다움을 탐닉하지 않았을 것을
이제 덧없는 가치에는 더 이상 눈돌리지 않으리
영원한 형태가 나에게 이리오라 손짓하네
미켈란젤로
다비드 얼굴부분확대 4미터의 거대대리석을 정면에서만 조각해 나갔다.
미켈란젤로는 망치와 끌로 대리석을 조각하여 '물질 안에 속박되어 있는 개념'을 보여주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 작업을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자연에서 얻어온 대리석 덩어리를 응시하고 있는 미켈란젤로. 그는 돌 안에 가두어져 있는 위대한 형태를 보고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품 주위를 둘러쌓고 있는 돌을 조금씩 뜯어내는 것이다.
다비드상의 섬세한 손과 힘줄부분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에게는 여러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예술의 천재, 신과 같은 미켈란젤로,
불멸의 거장 등등. 그의 예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수식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작품들을 많이 남겼지만,
미켈란젤로는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체상을
만들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미켈란젤로의 걸작품「다비드」는 고전 시대 이후의 미술사상
가장 크고 가장 널리 찬탄의 대상이
된 남자 나체상이다.
이 작품은 하나의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를 조각한 것으로
이전의 피렌체 조각가들이 남긴 역작을 모두 능가했다.
「다비드」는 완벽한 균형미와 흠잡을 데 없는 아름다움을
갖춘 남자의 형태로 신을 재현하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조각가들이 각 부분을
따로 조각해 합쳐 놓은 반면 미켈란젤로는 하나의 덩어리에서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는 어마어마한 대리석을 보고 질려버린
단토니오 대신 대리석에 형태를 주고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었다
. -그것이 바로 다비드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외경심을 갖게 하지만
동시대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과 혼란을 줄 뿐이었다.
벨베데레의 토로소
사자 가죽위에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헤라 클레스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무척 좋아 했는데, 이 조각의 나머지 부분을 완성시켜 달라는 의뢰가
들어오자
토로소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작품이라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보고 큰 감동과 영감을 얻었고 그의 작품 세계에 일대 전환점을 맞았다고 회상할 만큼
큰 영향력을 주었다 합니다.
역동적이고 강한 남성미를 가진 이 동상의 형체는
이후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에서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델로 재현된다
벨베데레의 토로소
"미켈란젤로 동기"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미켈란젤로는 고집이 세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굉장히
자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령에 따라,
그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불후의 명작 <천지창조>를 그리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의 성당 출입을 막고 4년 동안 성당에 틀어박혀 그림 그리기에만 몰두했다.
어느 날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 구석구석에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리던 미켈란젤로에게
한 친구가 물었다.
"여보게,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까지 그렇게 정성을 들여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나?
그렇게 완벽하게 그려봤자 누가 알겠나?"
그러자 미켈란젤로가 무심하게 한마디 던졌다.
"내가 안다네."
이런
내적 동기를 '미켈란젤로 동기'라고 부른다. 이는 칭찬, 이익, 출세 등의 겉으로
드러난 보상이 아니라
성취감 같은 순수한 내면의 에너지를
끌어올릴 수 있는 동기부여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사람이 외적인 보상을 중시한다면 보상이 사라지는 순간 열정과
흥미도 거품처럼 사라지게 마련이다.
반대로 내적 동기에서 나온 행동은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뿐 아니라 성취감 역시 외적인 보상과는 비교할 수 없다.
대성한 사람들의 경우 '미켈란젤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로렌초는 예술가와 학자들, 즉 피후견인들에게 상하 관계가 아닌 자신과
동등한 자격으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의 후원을 받은 예술가로는 다빈치의 스승 베로키오(1435˜1488),
미켈란젤로의 스승도 메니코기를란다요(1445˜1516),
보티첼리, 레오나드로 다 빈치 등이 있다. 로렌초는 말년에
산마르코 수도원에 조각 학교를 열었다. 그곳에서 그는 15세 가량의 한 학생을
눈여겨보고 메디치 궁으로 불러들여 친아들처럼 돌보고 교육했는데, 그 소년이
바로 미켈란젤로였다.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와의 만남
로렌초와 미켈란젤로의 만남도 재미있는 일화로 남아 있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공방에서 공부하고 있던 미켈란젤로
는 1490년, 로렌초 일 마니피코 소유의 조각 정우너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된다.
어는 날 조각 정우너을 지나가던 로렌초가 미켈란젤로의 작업대 앞에 섰다.
미켈란젤로는 로렌초의 서재에 있던 ꡐ목축의 신ꡑ을 본뜬 작품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의 조각은 원작에 비해 너무 젊은 모습이었다.
로렌초는 이점을 지적했고,
다음날 미켈란젤로의 ꡐ목축의 신ꡑ은 20년이나 더 늙어 있었다.
ꡒ조작가는 시간의 지배자입니다.
대상을 늙게도 젊게도 할 수 있지요ꡓ라는 것이 재치와 신념에 넘치는 미켈란젤로의 변이었다.
이 사건 이후 로렌초는 미켈란젤로를 메디치 궁에 들어오게 해 친아들처럼
돌보며 후원했다. 로렌초는 어린 소년에 지나지 않았던 미켈란젤로가
기베르티와 도나텔로의 후계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미켈란젤로는 팔라초 메디치에서 교육적으로
훌륭한 자극과 지원을 받게 된다.
로렌초의 장남 피에로, 훗날 레오 10세 교황이 되는
차남 조반니, 조반니의 사촌으로 그 또한 나중에 클레멘스 7세 교황이 되는 줄리오,
조반니의 여동생 콘테시나 그리고 메디치 가문이 후원하는
플라톤 아카데미의 석학들과 어울릴 기회도 가졌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미켈란젤로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웠고
시를 쓰는 법도 익히게 되었다.
즉 조각가, 화가, 건축가 그리고 시인으로서 갖춰야 할 교양을 쌓을 수 있었다.
특히 미켈란젤로는 그보다 세 살 아래의 병약한 콘테시나와 매우 가깝게 지냈다.
그녀는 미켈란젤로를 가족처럼 대해 주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마음속에는 우정 이상의 감정이 싹트고 있었고,
콘테시나는 메디치 가문의 여느 딸들처럼 정략 결혼을 하게 된다.
신분상 이룰 수 없는 사랑이었지만 미켈란젤로에게 있어 그녀는 각별한 존재였고,
이후에도 그는 콘테시나를 진심으로 돌본다. 1492년, 미켈란젤로가 17세 되던 해
로렌초는 세상을 뜨게 된다.
그의 임종 이후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를 떠나 본격적인 조각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성베드로성당의 돔
1534년 교황 바오로 3세가 선출되었다.
교황은 미켈란젤로를 ‘로마 교황청 최고의 건축가, 조각가, 화가’ 로 임명했다.
미켈란젤로는 제단 위쪽의 거대한 벽면을 덮고 있던 페루지노의 프레스코화 일부를 지우고,
꼭대기 부분의 벽을 앞쪽으로 기울도록 해 작업 도중에 먼지가 앉지 못하게 했다.
미켈란젤로는 확실히 이 주제를 마음에 들어 했고,
생피박리형을 언도받은 성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피부가죽에 미켈란젤로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넣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에서 최후의 심판까지의 방대한 역사를 깔끔하게 처리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말년에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나아가 또 다른 관심분야를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도시계획이었다.
늘 순례자로 넘쳐나는 로마의 교통 혼잡을 해결하기 위해 미켈란젤로는 로마로 들어가는 새 관문 ‘포르타 피아’를 만들었다.
이 관문은 1561년에서 1564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미켈란젤로는 1564년 2월 18일, 88세를 일기로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의 소망에 따라 시신은 비밀리에 피렌체로 이송되었고,
지금은 그가 어렸을 때 예술의 세계를 익혔던 산타 크로체 성당 안에 안치되어 있다.
대성당 중앙 끝의 창문에 있는 날개의 길이가 1.5m인 '성령의 비둘기'
한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위대한 작업 앞에서
우리는 경탄하기도 하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질투를 느끼기도 한다.
미켈란젤로의 <다윗> <피에타>과 같은 조작 작품들과
바티칸 시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과 같은 그림을 보면
비록 그것이 진품이 아니라 화보일지라도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더군다나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조각가라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가 화가가 되어 붓을 들고 고개를 위로 쳐들고 천장에다
그림을 그리고 불멸로 만들었다.
그의 작품을 올려다보면서, 이 천재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단 말인가?
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천재를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천재란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미켈란젤로를 보라'라면서 로맹 롤랑은 그가 어떻게 일을 했는지
, 이렇게 나에게 귀띔해 주었다. "약간의 빵과 포도주를 들고
나면 일에 파묻혀 잠도 몇 시간밖에 자지 않았다
. 볼로냐에서 율리우스 2세의 동상을 만들 때,
그와 세 사람의 조수를 위하여 마련된 침대는 하나뿐이었다.
이때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장화를 신은 채 잤기 때문에
한 때 다리가 부어 장화를 칼로 찢어야만 했다.
무리하게 장화를 빼면 다리의 살점까지 함께 묻어나올 지경이었다."
성베드로성당
성베드로광장은 베르니니가 1656년에서 1667년까지 11년에 걸쳐 양쪽
회랑을 포함하여 세웠다고 합니다.
광장은 그 폭이 246미터, 광장의 입구에서 대성당의 입구까지의 길이가
300여 미터나 되며
, 전체 회랑에 세워진 원주형 기둥이 284개,
사각으로된 기둥이 각각 네 줄로 88개가 세워져 있으며, 회랑 바닥에서 천정까지는
높이가 16미터이고
구성되어 있고,
석상 하나의 높이는 3.24미터임)이 세워 져 있습니다.
이렇듯 거대한 회랑을 광장 양 옆에 나란히 세운 까닭은, 대성당은
그리스도의 몸, 양쪽 회랑은 그리스도
의 양 팔을 상징한 것으로
베르니니는 양 팔을 벌리고 이곳에 오는 모든 이 들을 종교나 종족, 언어,
관습 등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집에 초대 한다는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였다고 합니다.
성베드로성당
개장시간은 7:00-18:00(하절기 18:00)까지이며 복장은 노출이 심하지 않아야 입장을 할 수 있고,
성당 내부의 6만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홀은 길이가 현관을
포함하여 211.5m이며, 천정높이는 45.44m라고 합니다. 성베드로 대성당 입구
성베드로 대성당에는 500개의 기둥과 10개의 돔이 있고
44개의 제대와 400개의 조각상, 1300개의 모자이크 그림이 벽을 장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두오모성당은
고딕양식으로써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로마 바티칸 성당, 런던 세인트폴 성당, 독일 쾰른대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성당으로
한번에 2만명 이 들어 갈수 있는 있으며, 138개의 첨탑과
3400개의 조각품으로 장식된 장엄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 입니다.
175년 엄청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아름다운 꽃의 성모마리아성당 두오모는
피렌체 시내 어떤 외진 곳에서도 두오모의 아치형 돔의 일부가 보일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한 성당입니다..
돔 위에 까지 올라가볼 수있으니 혹 가실 기회 있으시면 꼭 저 위에 올라가 보시기 바람니다.
피렌체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박물관 개관 기념문
문 위에 가운데 조각상이 현재의 건물을 세운 교황이고
왼쪽 망치를 들고 있는 조각상은 미켈란젤로(1475~1564)이고, 오른쪽 팔레트를 들고 있는
조각상은
라파엘로(1483~1520)
조각가와 화가임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피렌체의 산 조반니 세례당 동쪽에 설치된 기베르티 제작의
제3청동대문(1425~52) 이름. 두개의 대문을 각각 5구획으로 나눠, 10구획 속에
『구약성서』 이야기를 부조로 나타냄(청동에 금도금).
배경의 건물과 풍경에는 원근법을 사용하여 회화적 구성과 화려한 장식성을 나타냈고, ‘조각을 회화화하였다’는 비난도
있었으나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으로서도 손색없다’라고 말한 이후 이렇게 불리워졌다
트레비 분수 (Fontana di Trevi) 고대 로마의 사학자 프리니오는
세계의 경이스러운 것 중의 하나로 "물의 여왕"이라 일컫는 로마제국의 상수도를 꼽고 있다.
트레비 분수의 드레비는 삼거리란 뜻으로
분수앞에 있는 광장이 세갈래 길이 모이는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네요.
한때는 로마의 인구가 약 150만까지 육박했었던 로마제국
시절에 건설된 14객의 고가수로를 통해 물을 풍부하게 공급받은 로마는 이로 인해
아름답고 기념비적인 분수들을 많이 갖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때 교황들은 고대 로마제국의 상수도 시설들을 수리함과 동시에
새로운 수로를 개발히여 물의 공급을 원활하게 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많은 분수들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이 트레비분수였다.
"트레비 분수"는 니콜라 살비에 의해
1732년에서 1762년 까지 30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완성 되었다.
로마시대에서 볼수 있는 바로크양식의 마지막 걸작품으로 분수설계 공모전에 당선된 니콜라살비 작품으로
트레비 분수는 로마시 에서 볼 수 있는 바로크 양식의 마지막 걸작품으로서
트리톤 신들과 두 해마가 끌어 을린 커다란
조개 위에서 넾툰신이 위엄 있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대리석
조각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모두 부랏치의 작품이다. 트레비 분수에 공급되는 물은
"처녀의 샘"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전쟁에서 돌아온 목이 마른 로마 병정들에게 한 처녀가 샘을 알려 주었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그 샘을 수원지로 한 물이 트레비 분수에 공급되기 때문이었다.
트레비 분수에 공급되는 물은 아우구스투스 대제 때의 집정관 아그립빠에 의해 건설된 고가수로를
통해 공급되고 있으며 이곳 분수에 동전을 던지고 감으로서
다시 로마에 올 수 있다는 전설 때문에 로마를 다시 방문하기를 기원하는
많은 관광객들이 등을 돌리고 분수에 동전들을 집어 넣는 즐거운 광경들이 매일
연출되고 있다.
노인과 여인
그
림을 자세히 보세요..젊은 여인이 부끄럼도 없이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고
거의 벗다싶이 한 노인이 젊은 여인의 젖을 빨고 있습니다.
루벤스(Rubens)의 작품이며,
그러나..
그 나라 국민들은 이 그림 앞에서 숙연해집니다. 눈물을 보이기도 합니다.
커다란 젖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는 저 여인은 노인의 딸입니다.
검은 수의를 입은 노인은 젊은 여인의 아버지입니다.
독재정권은 노인을 체포해 감옥에 넣고, 가장 잔인한 형벌을 내렸습니다.
'음식물 투입 금지'.. 노인은 감옥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갔습니다.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연락을 받은 딸은
해산한지 얼마 되지 않은 무거운 몸으로 감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본 순간..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에 핏발이 섰습니다.
굶어 돌아가시는 아버지 앞에서,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 앞에서 무엇이 부끄러운가..
그리고 불은 젖을 아버지의 입에 물렸습니다.
부녀간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애국심이 담긴 숭고한 작품입니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은 이 그림을 민족혼이 담긴
'
최고의 예술품'으로 자랑하고 있습니다.하나의 그림을 놓고 어떤 사람은
'포르노'라고 비하하기도 하고, '성화'라고 격찬하기도 합니다.
'노인과 여인'에 깃든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비난을 서슴지 않지만..
그러나 그림 속에 담긴 본질을 알고 나면
사람들은 가끔 진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나 진실을 알면 시각이 확 바뀔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실과 진실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니까요.
눈에 속지 말고, 귀에 속지 말며
생각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쏘렌토항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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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걸작을 단 10분만에 이해할수는 없지만 잘 봤습니다.
촌놈 스페인 성당의 의리의리한 걸작들을보다 넘어질뻔했던 아찔한 기억이 생생한데 이 실물을 봤으면 어쨌을지....
천지창조 . 미켈란젤로는 이 천장화를 위해 이동식 비계를 직접 개발했고 4년이 넘게 걸친 작업으로 신경통과 목디스크.눈병.관절염등에 시달려야 했다.-하루18시간 이상을 (4년6개월 이상)천정에 매달려 .작업중 천정에서 떨어져 죽을 수도 있었던 작품을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이 대작을 완성한 작품에 대한 열정과 사랑. 세밀한 작품의 설계와 안목 해부학과 철학 예술에 대한 박식함으로 다가오는 미켈란 젤로의 이해는 우리를 풍요롭게 하고 무한한 꿈과 도전의식 창의적 사고의 틀을 키워주는 것 같아 이 바티칸 박물관의 최대 걸작 (6시간 소요)의 해설을 정독해 (1시간소요3번)보실 것을 권하여 봅니다.
다시 읽어보니 고개를 처 들고 보다가 목을 주물렀던 기억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