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북한강은 북쪽 지명으로 강원도 금강군 신읍리, 남쪽 지명으로 강원도 회양군 사동면 신흥리에서 발원한다. 가볼 수도, 물어볼 수도 없으니 딱히 발원지 샘 이름을 알 수 없고, 위치도 옛 지도나 택리지, 대동여지도 등으로만 들여다보니, 그저 대강 짐작할 뿐이다. 다만 강원도와 함경도를 나누어 북쪽을 관북, 동쪽을 관동이라 하는 높이 685m의 북쪽 철령과 동쪽의 그리운 금강산, 남쪽의 단발령 등 삼각형 터에서 흐르는 물이 북한강 발원수구나 한다.
1618년이다.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서인에 반대하던 백사 이항복이 함경남도 북청군으로 유배 가며 철령을 넘었다. 이때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라는 시조를 읊었다. 이항복이 유배지에서 병사한 뒤다. 광해군은 연회 중에 이 시조를 듣고 아쉬워했다.
금강산은 더 말하여 무엇하랴. 그리움과 가고 싶음, 그리고 아쉬움의 상징이다.
단발령은 신라 말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며 출가를 다짐하는 뜻으로 여기서 삭발하였기에 이름이 된 태백산맥의 고개이다.
그렇게 철령과 금강산, 단발령에서 온 북한강이 강원특별자치도를 지나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에서 태백시 금대산 검룡소에서 솟은 남한강과 함께 팔당호를 만들고 한강이 된다.
양평의 용문산은 1,157m의 북한강과 남한강 사이에 웅대한 모습으로 늠름하게 서 있다. 그 용문산 기를 받아 높이 42m, 둘레 15.2m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나이도 많은 은행나무가 절집 용문사에 있다. 용문사는 7세기 중엽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신덕왕 때인 913년 대경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이곳 용문사 은행나무의 민담이 둘이다. 하나는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935년 고려에 투항한 뒤 마의태자가 단발령에서 머리를 깎고 금강산으로 들어갈 때다. 마의태자는 잠시 용문사에 들러 망국의 슬픔을 달래며 지팡이를 땅에 꽂았는데, 그 지팡이에서 움이 텄으니 바로 지금의 은행나무이다.
또 하나는 신라 고승 의상대사의 지팡이라는 민담이다. 650년이다. 의상은 여덟 살 손위인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가던 길에 요동(遼東) 변방에서 고구려 군사에게 첩자로 오인되어 잡혔다가 겨우 빠져나왔다. 그 뒤 661년이다. 의상과 원효는 이번에는 바닷길을 택했다. 바닷가 한 고분에서 원효는 깨우침을 얻어 돌아왔고 의상은 당나라에서 화엄종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이 의상이 꽂은 지팡이에서 싹이 텄다는 것이다.
용문사 은행나무가 마의태자 지팡이면 1,100여 살, 의상 지팡이면 1,400여 살이다. 하지만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그저 우리 선대 어른들과 애환을 나눈 신령스런 나무인 것이다.
조선 태종은 이 용문사 은행나무를 보고 ‘세상 모든 나무의 왕’이라 하였다. 세종대왕은 당상관 직첩의 벼슬을 내렸다. 은행나무가 불타 없어진 사천왕문을 대신한다고 천왕목(天王木), 수차례의 전쟁과 환란에 민초와 함께했으니 호국목(護國木)이다. 6·25가 일어나기 전 구슬피 울기도 했다. 쌀 한 말을 바치고 치성을 드려 가문을 잇는 자녀를 얻어 사랑목이다. 그뿐인가? 지금도 해마다 350여 kg의 은행이 열리니 아직 청춘목이다.
하지만 1907년 순종원년에 의병의 근거지인 용문사를 일본군이 불태웠고, 하마터면 은행나무도 다시는 못 볼 뻔했다. 은행나무 한 그루도 지키지 못하면서 나라는 어찌 지킬 것인가? 비록 한 그루 나무지만, 생명처럼 지켜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