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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상의 글 >
말을 위한 기도
시인 수녀, 이해인 (클라우디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놓은 말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웬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 속에서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주여!
내가 지닌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할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이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품위있는 한 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道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 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내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에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내뱉지 않게 도와주시어
좀 더 겸허하고, 좀 더 인내롭고,
좀 더 분별 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
특히 사랑을 거스른 비방과 오해의 말들을,
경솔한 속단과 편견과 위선의 말들을
주여! 용서하소서.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노래처럼 즐거운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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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서동 본당
한 바오로 (민희)
“ 성령을 받아라... ” ( 요한 복음 20, 22 )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의 ‘사랑의 상처’를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고 하십니다.
십자가 죽음의 상처를 보여 주시며, 사랑이 어떤 고통이나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도 "고통이 깊은 사랑일수록 그 향기는 짙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지 같은 작은 나의 존재를 당신 고통과 죽음으로 만드신 사랑과 성령의 양분으로 먹여 주시고 키워 주시어 이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심을 깊게 믿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서 우리들의 욕심과 판단(심판)과 시기와 미움과 무관심으로 인해 소외되고 도태되어 아무도 받아들여 주지 않아 거리로 내몰린 이들(노숙인, 부랑인)과 희노애락을 함께 하면서 제 생활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요즘은 날씨가 더워져 거의 씻지 않고 술에 항상 쩔어있는 이들과 상담을 할 때면 코를 심하게 자극하는 역겨운 냄새가 나지만, 이제는 별 불편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매우 큰 은총이라 믿으면서 이제는 그들과 거의 가족이 되어 가고 있는 듯합니다.
부족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성령을 의식하며 겉으로 표현은 안 하지만, 영으로 그들이 치유되어지기를 간절히 빌며 손도 잡고 어깨동무도 하고, 때론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전철역에서 그들이 술기운으로 민망하게 꽉 안으며 고맙다고 눈물짓는 이들을 보듬어 주기도 합니다.
야간 순찰을 하면서 어떤 이끄심으로 그 곳을 가게 되면 가장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힘들어하는 노숙자를 발견하고 병원이나 저희 쉼터로 데리고 와서 돌봐드리는 경우가 많이 있으며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사랑을 간절히 기다리는 또 다른 모습의 예수님이라는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조금씩 무디어져 이러한 일들을 내 안의 주님께서 하신다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잊고 내가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섬뜩한 유혹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하며 내가 아닌 내 안의 주님이 잘 사실 수가 있음을 깊게 느껴봅니다. 내가 먼저 힘과 용기와 희망으로 살아갈 때 길을 잃어 방황하는 그들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으리라 다시금 깊은 마음으로 되새겨봅니다.
항상 감사드리며 주어지는 하루하루는 내 인생의 덤으로 받는 진정한 은총으로 받아먹으며 주님이 나를 만드신 창조목적에 합당한 소임을 하며 살아가는 작은 '가난한 바보'로 살려고 합니다.
"성령을 받아라."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당신 사랑으로 내려 주시는 성령을 내 뜻만이 아닌 주님의 뜻대로 진정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공동선'을 위해 아낌없이 나눌 때 우리는 세상에서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참 기쁨과 참 평화와 참 행복을 맛보며 죽음 후의 천국이 아닌 바로 내가 숨쉬는 이 삶에서 그 분과 함께 천국을 살고 있는 것이라 믿어 봅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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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4주일
2011. 7. 3
마태오 11, 25 ~ 30
♠ 복음 연구
* 25-26절 : 마태오 복음서 가운데 여기서만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라는 엄숙한 인사말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나 우리의 아버지에 대해서, "아버지" 라는 이러한 인사말의 형태가 갖고 있는 평이하고 친숙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버지는 또한 전능하신 창조주시요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아버지는 하늘과 땅을 "태초에 창조하신" (창세기 1,1) 하느님이시다. 그분 외에 다른 신은 있을 수 없다. 온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절대적인 주이신 그분께 속해 있다.
* 27절 : 이 말씀은 지식과 관계된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한 지성적인 지식이 아니다. 성서에서 "안다" 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안다는 것은 더 나아가서 어떤 것과 친숙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면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사기도의 뜻이 밝히 드러난다. 유다교 지도급 인사들에게 배척을 받아 전도가 사실상 실패하던 무렵에 아주 조금 성공을 거두신 때에 이 감사기도를 바치셨다.
* 28절 :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져보려고 항상 그분 주위로 몰려들었다. 예수께서도 친히 언제나 그들을 찾아 나섰으며, 냉대 받는 사람들과 식사를 함께 하셨다. 이제 예수께서는 그들 모두를 당신께로 부르시며, 그들을 편히 쉬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처럼 율법에 억눌려 있는 사람들이다. '짐'은 613가지의 율법계율을 말한다. 그들은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주어졌던 율법을 수백 가지의 특수한 규정으로 만들어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게 하였다.
* 29절 : 억눌리고 고된 그들의 생활의 짐이며 특히 율법의 해석으로 인해 생겨난 견딜 수 없는 규정들의 짐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짐 때문에 그들은 지쳐 있고 억눌려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발걸음을 가볍고 기쁘게 해주실 것이다. '배우다' '온유하다' '겸손하다'는 예수님의 돋보이는 모습이다. 예수님은 해석이 까다로운 율법의 멍에 대신에, 편히 쉬게 할 말씀에 순명하는 멍에를 쓰라고 권유하신다.
* 30절 :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다." (Ⅰ요한 5,3) 왜냐하면 이 계명은 간단하며 두 가지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 헌신과 사랑이다. 왜 예수님이 지우시는 짐은 가벼운가? 613 가지의 계율을 예수님은 황금률(7,12)과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환원시키셨기 때문이다.
♠ 복음 요약 :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강력한 행업의 의미를 거부하는 반면, 철부지 어린 아이들은 그것을 다 받아들였다. 보고 믿는다는 것은 아버지의 계시에 달려있지만, 이 계시는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교만한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또 그분과 아버지 사이에는 지식의 완전한 상호교환이 있기 때문에 모든 신비를 말할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맡겨진 것은 모두 그분이 원하는 사람에게만 계시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들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는 말씀들은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 즉, 인생고와 나날의 긴장에 지친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위안과 휴식을 찾고 안식을 얻게 된다.
♠ 대화 방향 : ① 기도할 때 예수님은 하는님을 "아버지" 라고 부르며 찬양과 감사로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살고 있는지 나누어 봅시다.
② 당신은 고생하고 지쳐있을 때 어디서 위안을 찾습니까? 예수님입니까? 다른 무엇입니까?
♠ 참고 문헌 : ▪ 영적독서를 위한 마태복음 (성 요셉 출판사)
▪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 출판사)
▪ 주석 성서 [신약] (성요셉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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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일
2011. 7. 10
마태오 13, 1 ~ 23
♠ 복음 연구
* 1-23절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하늘나라는 한 농부가 씨를 뿌린 것에 비유된다. 여기서 씨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은 전혀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은혜로운 선물로 받아들이지만 잠시뿐, 그 말씀으로 인해 어떤 곤란이 생기면 말씀을 버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귀담아들으나, 세상에 대한 근심과 걱정 그리고 부귀에 대한 집착으로 말씀을 질식시키는 사람을 가리킨다.
한편 옥토에 떨어진 씨앗은 말씀을 깊이 새겨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 열매를 맺는 사람을 가리킨다. 우리는 우리 영혼을 옥토로 가꾸어야 한다. 처음부터 옥토를 가진 사람은 드물다. 기도와 선행으로 가꾸고, 지혜의 씨앗을 마음의 밭에 새기는 삶을 반복할 때 우리의 밭은 옥토로 바꿔진다.
우리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했던 유명한 말을 기억하자.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 보다 번제물이나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을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사무엘 상: 15;23)
♠ 복음 요약 :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우리의 처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마도 우리 대다수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과 자신의 모습을 동일시하게 될 것이다. 말씀을 가리키는 씨앗을 마음 밭에 심고 잘 가꾸어 열매를 맺으려 했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에 대한 애착에 정신이 팔려 거름 주는 것과 잡초 없애는 것을 태만히 하였고, 그 결과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고 있을 것이다. 마태오복음 6장 22-23절에 보면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라고 나온다. 여기서 “눈이 성하면”이라 할 때 “성하다”는 그리스 말로 “하나의 초점을 갖다”란 의미를 갖는다. 오직 주님에게만 하나의 초점을 맞추면 우리의 삶은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이 될 것이다.
♠ 대화 방향 : 마음의 밭을 옥토로 가꾸기 위해 어떤 방법이 효율적인지 체험을 서로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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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일 (농민 주일)
2011. 7. 17
마태오 13, 24 ~ 30
♠ 복음 연구
* 24-30절 : 예수님은 하느님의 왕권이 임하기 시작했는데도 이 세상에 죄악이 판을 치고 있는 현실에 답하신다. 예수님은 하늘왕국을 설명하기 위해 자기 밭에 좋은 씨인 밀을 뿌린 사람의 경우를 비유로 제시하셨다.
사람들이 잠자는 사이, 그의 원수가 밤에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심어두고 갔다. 독보리 종류인 가라지는 밀과 함께 자라면서 밀의 성장과 결실을 방해한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라지가 어디서 나왔는지 묻자, 주인은 원수가 자기의 농사일을 망치려고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원수는 악마, 제자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 악을 저지르는 자이다.
제자들은 가라지를 뽑아 모을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주인은 밀 뿌리와 가라지 뿌리가 서로 뒤엉켜 있어서 가라지를 뽑다가 밀이 함께 뽑힐 위험이 있으니,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일렀다. 가라지는 밀보다 뿌리를, 더 깊게 내리고 더 강하다. 집주인은 추수 때 일꾼들을 시켜 먼저 가라지를 다발로 묶어 연료로 사용하고, 밀은 자기 창고에 모아들이게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위 비유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활동을 통해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지만,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 하느님은 죄악을 당장 제거하지 않고 세상종말까지 공존을 허용하신다. 그러나 세상종말에 그 분은 당신의 왕권에 속하는 이들에게는 영생을 베푸시지만, 이 왕권을 반대하는 이들은 영원한 파멸에 떨어지게 하신다. 그 때 하느님의 왕권이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악이 선과 공존하는 현실에 실망하지 말고 하느님의 왕권이 반드시 실현될 것을 희망하면서 복음을 충실히 믿고 따라야 한다.
♠ 대화 방향 : ① 그리스도의 시대는 심판의 시대가 아니라 구원의 시대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② 하느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참아 주신다는 사실에 감사드리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말씀의 등불 (가톨릭 신문사)
▪ 말씀의 두레박 (생활성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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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7주일
2011. 7. 24
마태오 13, 44 ~ 52
♠ 복음 연구
* 44절 : 보물은 하느님 나라이며 또한 성서에 숨겨져 있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진정한 자기의 상징이기도 하다. 진정한 자기,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훼손되지 않는 모상은 보잘 것 없는 흙에 숨겨져 있다. 내가 진정 참된 자아를 찾고자 한다면 나의 땅을, 지저분한 바닥을 파야한다. 자신의 진정한 핵심을 만난 사람에게는 그러한 과정들이 결코 두렵지 않다.
* 45-46절 : 진주가 조개 안에서 자라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셨다. 조개안의 진주처럼 그리스도의 신성은 육신 안에 숨겨져 있고, 내 육신 안에도 숨겨져 있다. 좋은 진주를 찾아 나서는 장사꾼처럼 우리는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진리를 찾아낼 수 있도록 헌신하며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자는 삶의 자리로 돌아가더라도 소유물에 집착하지 않으며 내적 평화를 누리며 살아간다.
* 47-48절 : 그물은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들어 있는 교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 비유는 좋은 물고기에 속하기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하는 경고의 비유이다. 선을 위한 결단을 통해 좋은 물고기들 사이에 있게 되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 달려있다. 마태오는 심판의 상징으로 벌하시는 하느님상을 우리에게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태도의 결과를 가리키고자 할 뿐이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응답하며 행동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한다.
* 49-50절 : 인간의 삶속에 감춰져 있는 악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존경과 숭배를 받고 외적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는 자라 할지라도 그의 참된 자질은 “마지막 날”에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때를 아시는 분은 하느님뿐이시며 모든 사람은 이를 깊이 생각해야한다. 밭에서 보물과 값진 진주를 발견할 그리스도인들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다. 신심이라는 가면 아래 자신의 실제를 덮으려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찾는 또 다른 악일 수 있다. 선과 악을 가려낼 능력이 인간에게 없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그분에게 빛과 은총을 청해야 하는 것이다.
* 51-52절 :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중요한 것은 이해하는 것이다. 이제 올바fms 이해력을 받은 새로운 “율법학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과거와 철저히 관계를 끊기를 원치 않으시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치를 원하신다. 마치 가장이 가족을 돌보며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듯 교회의 교사는 새로운 것에만 한정 될 수 없으며, 옛것과 현대적인 것을 결합시켜야 한다. 옛것은 교회의 전통 안에 실재해야 하지만, 언제나 보다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통해 더 나은 실현을 추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지혜의 화신으로 모든 것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 내시는 분이다.
♠ 복음 요약 :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선물들은 우리의 눈에 과연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는가? 사랑한다는 것은 나 아닌 다른 이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이다. 그럴 수 있으려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며, 그럴 수 있는 힘과 행동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 우리의 삶이 의미 없고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거저 받는 그 사랑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 인내를 선택하기 보다는 더 빠른 세상의 방법에 에너지를 쏟아버리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지고의 가치가 어떤 것이지를 제대로 깨달아 보물을 캐닐 수 있기를 바라시며, 그분 사랑에 힘입어 나날이 새롭고도 희망에 찬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 대화 방향 : ① 우리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가치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분의 사랑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까?
② 개인적인 체험이 있다면 나눠주시고, 그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 생활적용 방향 (일시, 장소, 방법까지)
▪ 44절을 생각하며 쉬는 교우와 대화 나누기
▪ 52절을 떠올리며 화해가 필요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기
♠ 참고 문헌 : ▪ 예수, 구원의 스승 (분도 출판사)
▪ 영적독서를 위한 마태오 복음 (성요셉 출판사)
▪ 기초교회 공동체의 복음화를 위한 길잡이(가톨릭대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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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8주일
2011. 7. 31
마태오 14, 13 ~ 21
♠ 복음 연구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4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유일한 기적사화이다. (마태14,13-21; 마르6,30-44: 루가9,10-17; 요한6,1-15) 아마 그 이유는 성찬의 전례(Eucharist)의 왕국에서의 마지막 잔치를 준비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8,11:26,29). 그러나 이러한 앞날에 대하 암시뿐 아니라, 출애급 때 사막에서 이스라엘인들에게 만나를 먹이신 이을 상기시킨다. (탈출16장). 또한 2열왕 4,42-44에서 엘리사가 적은 양의 음식으로 100명을 먹인 일을 회고 할 수 있다. 또 마태 15.32-39와 마르8,1-10에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으로 나오는데, 마태14장과 마르6장은 전통이 좀 더 오래되고, 또 갈릴래아 호수의 서쪽이 무대가 되고 있다고 보여 진다.
* 13절 : 세례자 요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셨다.
* 14절 :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보시고 측은하여 아픈 사람을 고쳐 주셨다. 반면에 마르코 복음에서는 군중들을 가르치셨다.
* 15-16절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훈련시키셔서 자신감을 갖고 상황을 능동적으로 타개하고 지도자가 되라고 가르치신다.
* 17절 : 물고기의 희랍어 표기 익큐슈스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 18-19절 : 축복하시고, 잘라서 주심은 매일 매일의 유태인 식사를 할 때의 의식이다. 또한 이 의식은 최후의 만찬을 암시하고 있다(26,26). 여기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군중들 사이의 중개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 20절 : 모든 사람이 먹었다고 했는데,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모으신 모든 이스라엘을, 12개의 바구니는 12부족과 12제자를 대표한다. (19,28 참조)
* 21절 :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하고 남자만 5천명을 먹였다고 했는데, 이는 미루어 군중들의 수는 2-3만 정도 되지 않았을까 추산된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의 인구는 약 50만이었기 때문에 인구에 약 20분의 1을 먹이신 셈이다. 따라서 치유의 기적과는 달리 두 번에 걸친 군중을 먹이신 기적은 사회적 성격을 띠게 된다. 자연의 기적이나 윤리적 기적(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나누어서 모두가 고루 나누어 가지는 경우) 이외에 우리는 이 군중을 먹이신 기적을 사회적인 기적으로 보아야 한다.
♠ 복음 요약 :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기적을 두 가지 관점에서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육신적인 굶주린 대중을 먹이기 위해서요, 둘째는 이 기적을 통하여 더 신령한 진리 (성체성사)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굶주림은 죄악이다’라고 F.B창립자 신부님께서 늘 말씀하신 것처럼 주린 자를 먹이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내실 때 영환만 내신 것이 아니라, 육신을 먼저 지으셨다. 우리 육신은 음식을 먹어야 산다. 그러므로 굶주린 이웃이나 민족을 도와주는 것은 사실 주님을 도와 드리는 것이 될 것이다. 아모스 예언자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결함이 아니요...’라고 외쳤다. 야훼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로 말미암아 굶주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사름은 떡으로 살 수 없다고 했다. 이 영의 굶주림으로 말미암아 영의 먹을 것을 먹지 못함으로 죄를 먹고 마시는 향락과 허영에 들떠 있다. 근심, 걱정에 싸이고 미신과 사교에 빠져 들어 버린 이 시대에 진정한 영의 양식, 성체와 말씀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를 봉헌 했을 때 기적이 일어나듯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그대로를 겸손히 봉헌 할 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사용하여 감사의 기적을 베푸실 것이다.
♠ 대화 방향 : ① 영적으로 굶주린 적은 없었는가?
② 이 주림을 채우기 위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③ 영육 간에 굶주린 이웃을 생각하며 우리의 봉헌 생활을 생각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The Catholic Study Bible, Oxford by Don Senior & Caroll Stuhlmueller. Novum Testmentum Graece-Nestle & Arland 한경직. 1988 (누구를 위하여 일하는가, 도서출판 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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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의 글 >
코이노니아 - 말씀을 생활화합시다.
안산 원곡동 성당 FB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우리가 매주 미사 중에 들려주는 말씀은 드라마의 편집과 같습니다.
성경말씀은 매일 흘러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극히 일부분이 일요일의 말씀만 잘라서 들여다봅니다.
그러기에 그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편집이라는 것은 어떤 때는 그 의미를 함축적으로 요약하기도 하지만, 어떤 점에는 상당히 오해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필요로 하는 것은 성경전체를 통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성경말씀의 흐름을 잘 읽어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례봉사자에 대한 교육이 많이 있는데요, 제가 보기에는 그 내용보다는 그 절차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많은 제약이 있었던 탓이기도 합니다.
아주 힘든 작업 중의 하나인 성서필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전체를 필사하면 좋을 것입니다. 저는 시도는 해보았지만 완성하기는커녕 조금하다가 중도에 그만 두었습니다.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반면에 성경통독은 손쉬운 방법 중의 하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들은 일반적으로 일 년 52주간으로 잘라서 성서를 52주간동안 다 통독하는 프로그램을 짭니다. 그런데도 어지간한 결심을 하지 않으면 이를 다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대다수 사람들은 중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했던 방법으로 주말에 토요일 저녁미사 이후 12시까지 성당에 보여서 몇 사람이 돌아가면서 한 절씩 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성경은 몇 달이면 끝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를 몇 차례하고 나면 아마도 신약성경 말씀은 눈에 아른거릴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생활 속에서 유용한 말씀이 무엇인지를 잘 깨닫게 되고 우리가 이를 근거로 어떻게 생각해 나가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를 잘 인지가 될 것입니다.
저는 오래전에 이일을 해보았기에 지금 말씀을 들으면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기억은 나는데 그 말씀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혼자서이든 아니면 여러 사람들이 합심해서 하든지 간에 성경 전체를 읽지 아니하면 이를 생활화할 수가 없을 뿐더러 묵상하기란 더더욱 힘들 노릇일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일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가톨릭은 여러 가지 훌륭한 명상법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소공동체 묵상법도 잘 발달되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성경말씀을 잘 설명해 주는 해설집은 그리 발달되어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희 집에는 가톨릭에서 출판한 주해석집이 있습니다.
아주 옛날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외국에서 만들어 놓은 것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책을 일찍이 서점에서 별로 본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책을 서울 평화시장 뒤편에 있는 헌책방에서 구입했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주해석집은 성서를 세밀하게 해설해 놓은 책입니다. 종류도 몇 가지가 있습니다. 아주 두꺼운 책입니다. 제가 그 책방에 갔을 때에는 그 책이 마구 바닥에 뒹굴어져있었고, 소설책보다 싼 단돈 천원에 그 책을 팔고 있었습니다. 저는 주저하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책들을 가져올 수 있을 만큼 들고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여러 차례 이사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창세기, 탈출기 그리고 마르코를 비롯한 복음서와 바오로서간문을 주로 보았습니다. 오래전에 외국의 유명한 신부님이 해설해 놓은 것을 우리나라에서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이유로 영어로 된 해설서를 보기도 하고, 대로는 개신교의 책을 구입해 보기도 합니다.
말씀을 생활화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만들었던 중의 하나는 청년성서모임입니다. 서울교구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전국적으로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담당신부님이 피정을 통해서 정리해주곤 있지만, 대다수의 시간을 보내는 나눔시간은 오로지 평신도 젊은이들이 성서를 읽고 나눔이 전부입니다. 이 미약한 활동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전문적인 신부님이나 수녀님에 의해서 진행되는 여러 가지 성경프로그램은 일부사람들에 의해서만 운영되고 유지됨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말씀은 전문가에 의해서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시는
분에 의해서 성경말씀을 평신도들이 접근하기가 어려운 것이 오늘날의 모습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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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큰모임 행사 후기 >
70 아해 같은 누님을 바라보면서...
전주의 이쁜 누님! 감사드립니다.
성거산성지...
허리가 아파서 비록 십자가의 길을
다른 이들과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80 아지매, 70 누님,
그리고 안건식(안젤로)형제님과 함께 했던
간이순례의 묵주기도는 그 나름대로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신부님의 말씀대로,
남의 눈치도 아니 보시고,
앞장서시는 70 이쁜 누님 !
늘 감사드립니다.
늘 고우십니다.
그날따라 유달리
고운 높은 음의 소리를 내시는지 말입니다.
41주년 내내
FB의 가는 길을 쭉 보셨으리라 여깁니다.
저는 그날따라 허리가 아파서
남들처럼 큰 도움은 되지도 못했구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남들보다는 조금 더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주셨습니다.
늘 생각하고 지낼 수 있었으면 하는
맘입니다.
신부님이 그 무명 순교자들,
그들의 이름은 남아있지만,
그들의 기록이 소실되는 바람에,
그 안타까움을 쭉 지켜보시는 신부님...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진정코 누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저도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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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재정 회계 보고 >
✟ 2011년 5월 1일 ~ 30일 수입 지출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