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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바윗덩어리’ 최경환, 두 달간 고문받다 옥사
▲ 수리산 성지 최경환 성인 묘소. 최양업 신부는 수리산을 들를 때마다 아버지 묘소를 찾아 정성껏 기도하고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 최경환 성인이 회장으로 있었던 수리산 뒤뜸이 교우촌에 조성된 수리산성지 순례자성당 제대 모습.
▲ 수리산 뒤뜸이 교우촌 1900년대 모습. 최양업 신부 가족이 살던 1830년대 후반에도 뒤뜸이 마을은 아마도 이러한 정경이었을 것이다.
최양업은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안드레아)과 함께 1836년 12월 3일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롤로), 이광렬(요한),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동행했다. 일행은 1836년 12월 28일 중국 변문에서 샤스탕 신부를 만났다. 이후 샤스탕 신부는 12월 31일 4명의 조선 신자와 함께 국경을 넘어 1837년 1월 15일 서울에 당도했다. 세 신학생은 샤스탕 신부의 길 안내자인 중국 서만자(西灣子) 출신 투안(Touan) 마리아노, 첸(Tchen) 요셉과 함께 6개월간 중국 땅을 걸어 종단한 후 1837년 6월 7일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했다.
최양업은 1837년 6월 7일부터 1842년 2월 15일까지 약 4년 8개월간 마카오 유학 시절을 보냈다. 최양업은 이 시기 “작은 방에 외톨이로 남아 있다”(1842년 4월 26일자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고 표현할 만큼 큰 상심을 겪었다. 바로 동료 최방제의 죽음이다. 최방제는 마카오에 도착한 그해 11월 27일 위열병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더 큰 인간적 상심이 그에게 닥쳤다. 바로 부모의 순교다.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은 양업이 마카오 민란을 피해 필리핀 마닐라에 머물고 있을 때 (1839년 4월 6일~11월 말)에 서울 포도청에서 옥사했다. 어머니 이성례(마리아)도 1840년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됐다.
최양업은 부모의 순교 사실을 1843년 3월 중국 만주 소팔가자(小八家子)에서 김대건에게 들었다. 김대건은 1842년 12월 27일 중국 변문 인근에서 조선 교회 밀사 김프란치스코를 만나 기해박해가 일어났고, 동료 양업의 부모가 순교한 것을 알았다.
최양업은 이때 심정을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고백했다. “저의 동포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면 탄식과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의 부모와 형제들을 따라갈 공훈을 세우지 못했으니 제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의 그처럼 장렬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1844년 5월 19일자 편지에서). 사제가 돼 조선에 입국한 최양업은 수리산 뒤뜸이 담배촌(현 경기 안양 만인구 병목안로 408)에 들를 때마다 집안 식구들을 모두 불러 아버지 최경환 묘소 앞에서 정성을 다해 기도하며 슬픔을 달래곤 했다.
부평에서 수리산 뒤뜸이로 이주
학자들은 최경환 성인 가족이 부평에서 수리산 뒤뜸이로 이주한 때를 1838년 10월 이후로 보고 있다(수리산성지 안내서에는 1837년 7월께 이주했다고 적혀 있음). 1838년 10월 부평에 사는 정 바오로가 조상 위패를 부수는 바람에 12명의 신자가 체포되고, 50여 명의 신자가 피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최경환 가족도 수리산으로 들어갔으리라 추정한다. 이 같은 학자들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자료도 있다. 최양업의 첫째 동생 최의정이 증언한 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이다. 그는 “자신이 12살 되던 해에 수리산으로 들어갔다”고 밝혔다. 그가 1827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12살 되던 해는 1838년이다.
수리산 뒤뜸이는 1820~1830년대에 충청도 신자들이 도망와 자리한 교우촌이다. 많은 이들이 최경환 일가처럼 1830년대 중반 이후 이곳에 피신했다. 1839년에는 100명이 넘는 신자들이 살았다. 최경환의 신앙심과 인물됨을 익히 알고 있던 모방 신부는 그를 이곳 회장으로 임명했다.
최경환은 1839년 기해박해가 터지자 서울로 올라가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둬 매장한 후 순교를 각오한다. 그해 7월 어느 날 새벽 포졸들이 수리산 교우촌을 덮쳤다. 회장인 최경환은 당황하지 않고 그들에게 “어찌 이리 늦게 오셨소. 우리는 오래전부터 초조하게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소.…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잠시 쉬었다가 아침을 먹고 기운을 돋운 다음 질서 정연하게 떠납시다”라며 반갑게 맞았다. 의연하고 담대한 최경환의 모습을 본 포졸들은 “이 사람과 이 가족들이야말로 진짜 천주학쟁이”라고 감탄했다.
이날 어린아이를 포함한 40여 명의 신자가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됐다. 다음날 최경환은 맨 먼저 끌러나가 심문을 받았다. 배교를 거부하자 형리는 주리를 틀어 그의 팔다리를 으스러뜨렸다. 또 곤장을 110대나 때렸다. 맏아들 최양업이 사제가 되기 위해 다른 나라로 떠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더욱 혹독한 형을 받았다. 그래도 배교하지 않고 소리 내 기도하고 포졸이 준 성경을 읽으며 신자들에게 순교를 권면했다. 형리들은 최경환을 ‘바윗덩어리’라 불렀다. 두 달여 동안 하루씩 걸러 고문을 받은 최경환은 1839년 9월 12일 옥사한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함께 옥에 갇혔던 둘째 아들 최의정은 아버지 최경환의 유언을 기해ㆍ병오박해 시복재판에서 하느님 앞에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내가 예수님의 표양을 따라 사형장으로 나가 칼 아래 죽자 하였더니 옥에서 죽게 되니 막비주명(莫非主命, 주님의 명령이 아님이 없음)이라”(101회차 재판에서).
양업, 아버지 묘소에서 한 서린 슬픔을
최경환의 시신은 양업의 어린 형제들과 교우 두세 명에 의해 애오개(현재 서울 아현)에 임시 매장됐다가 그해 가을에 수리산으로 이장됐다.
최양업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애틋했다. 귀국 후 그는 광주 소리울(현 경기 용인 수지 손골)에 살던 넷째 동생 신정(델레신포로) 부부를 수리산으로 이주시켜 아버지 묘소를 지키게 했다. 최양업 신부는 아버지 최경환의 묘소를 찾을 때마다 왜 한 서린 슬픔을 토해냈을까. 아버지를 쏙 빼닮은 자상한 최양업 신부의 심성으로 보아 아마도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함께 순교하지 못했다는 자책일 것이다.
남편 최경환의 죽음에 흔들렸으나 ‘영광스러운 순교’ 선택
▲ 심순화 작 ‘이성례 마리아’.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보다 어머니인 이성례(마리아) 복녀가 신자들 사이에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옥중에서 젖먹이 막내가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배교했다가 다시 순교를 자청했던 그녀와, 어머니를 고통 없이 단칼에 베어 달라며 휘광이(망나니)에게 동냥한 돈 몇 푼과 쌀을 전하는 네 아들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다.
최양업 신부의 서한집에서 어머니를 소개하는 내용이 딱 한 편 있다(1851년 10월 15일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서 최양업 신부 부모에 관한 이야기는 이만 줄인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조선의 저명한 경주 이씨 가문에서 출생했다. 이 가문에서 유명 인사를 여럿 배출했다. 그중 한 분이 단원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다. 그의 집안 딸들에게서 2명의 사제가 탄생했다. 그의 딸 이 멜라니아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조모이고, 어머니 이 마리아는 이존창의 사촌 누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이다.
이 마리아는 4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씩씩했는데 18세에 프란치스코와 혼인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 가운데 험한 산속으로 방황하기를 수년을 거듭했는데도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남편을 따라 먼 곳으로 이사 갈 때나 먼 길을 걸을 때,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거릴 때면 예수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 가던 이야기, 갈바리아 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자식들에게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 줬다. 그는 남편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데도 남편을 공경하며 한마음 한뜻으로 화목하게 살았다.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남편을 여의고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1893년 포졸들이 집을 덮쳤을 때 조금도 소란을 피우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해 포졸들을 먹였다. 서울에 도착한 마리아는 남편과 큰 자식들과 격리돼 여인들만 있는 감방에 갓 난 아들과 함께 갇혔다. 다음날 팔다리가 으스러지고 곤봉에 찢겼으나 그리스도를 용감하게 증언했다.
그에게 가장 큰마음의 고통은 갓난아기에 대한 모성애였다. 갓난아기는 젖을 달라고 하는데 젖이 안 나와 엄마의 눈앞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남편 최경환)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줄곧 꿋꿋이 버텼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죽고 또 어린 것이 더러운 감방에 축 늘어져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마리아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곤장과 칼 앞에서도 용맹했으나 자식에 대한 애정에는 약해졌다. 그래서 살덩이와 핏덩어리들이 흩어져 있는 감옥에서 마리아는 마음과는 달리 거짓말로 배교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여종의 나약함을 다시 구제하는 은혜를 주셨다. 마리아가 풀려나 집에 가 있는 동안 그의 맏아들 최양업 토마스가 마카오에 보내졌다는 사실이 탄로 났다. 이 때문에 마리아는 상급 재판소인 형조로 이송됐다. 거기서 마리아는 신자에게 순교 권고를 듣고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재판관 앞에서 배교를 용감히 취소했다. 재판소에서 마리아는 자기의 갓난아기가 기아로 죽는 끔찍한 모습을 목격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두 아들(양업과 갓난아기)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했다.
최양업의 첫째 동생(최의정, 당시 15세) 야고보는 한 달 이상 감옥에 머물면서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갇힌 포로들을 위해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죽는 날까지 지켜보면서 증인이 됐다. 마리아는 형조에서 세 차례 고문을 당한 후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형 날이 가까워져 오자 평온한 모습으로 야고보를 불러 마지막 훈계를 했다. 하느님의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고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도록 타일렀다.
사형 집행일, 마리아는 기도를 마치고 난 후 야고보에게 어머니를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타이르고, 형장에 따라오지 말고 떠나라고 명했다. 야고보는 고아로 남겨질 어린 세 동생(선정 안드레아 12세, 우정 바실리오 9세, 신정 델레신포로 6세)을 거느리고 살아야 할 처지였다. 마리아는 형장에서 야고보의 모습을 보고 그 순간 모정에 끌려 마음이 허약해지고 흔들려, 최후의 전투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덜 된 모습을 남에게 보여줄까 봐 두려웠다. 야고보는 어머니에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자고 작별 인사를 하고 감옥에서 나왔다.
마리아는 다른 6명의 교우와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휘광이의 칼을 받고 1840년 1월 31일 39세로 순교했다.
▨ 당고개 성지
이성례는 서울 당고개에서 순교했다. 오늘날 서울 용산 청파로 139-26에 자리한 당고개 성지<사진>는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서울에서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이 탄생한 순교성지이다.
당고개는 원래 신자들의 처형지가 아니었다. 설을 앞둔 상인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처형지를 옮겨 달라고 요청해 한강 가로 조금 나간 당고개에서 신자들을 처형한 것이다.
이곳에서 1839년 12월 27일(음력)부터 이틀간 이성례를 비롯한 10명이 순교한다. 이들 중 한 차례 배교했던 이성례만 제외하고 모두가 1925년 7월 5일 시복됐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이성례는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시복됐다.
유학 6년 만에 귀국길에 오르지만 실패를 거듭하는데…
최양업 신부는 1849년 12월 말 조선으로 귀국했다.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지 13년 만이다. 최 신부는 조선 입국을 위해 1842년 7월부터 총 6차례 귀국 여행길에 오른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제1차 귀국 여행
최양업은 1842년 7월 17일 마카오에서 프랑스 함선 파보리트호에 승선해 귀국 길에 올랐다. 제1차 귀국 여행이다. 최양업은 파쥬 대위 지휘로 조선에 가서 프랑스와의 통상 조약을 요청하기 위해 떠나는 이 배에 통역사로 승선했다. 이 여행에 만주대목구 선교사 브뤼니에르 신부와 쟝시니 프랑스 외교사절이 함께했다. 만약 프랑스 함선이 조선으로 가지 못할 경우 쟝시니 외교사절이 북경으로 가서 조선의 남쪽 해안까지 둘러보고 올 계획이었다.
귀국 길에 오르는 날을 고대하면서 최양업은 마카오에서 그 설렘을 스승에게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하루하루 그 군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의 동포들이 마침내 시온성으로 회두하여 우리의 창조주이시요 구세주이신 하느님을 찬송할 날이 언제쯤 올 것인가요”(1842년 4월 26일 마카오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7월 17일 마카오를 떠난 코르벳함 파보리트호는 8월 23일 상해 인근 오송(吳淞)에 닻을 내렸다. 오송에 올 때 하구 모래 위에 좌초돼 닻 4개를 분실하고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최양업의 제1차 귀국 여행은 곧 실패로 끝나고 만다. 영국과 청나라가 아편전쟁을 끝내고 남경조약을 체결하면서 동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하자 프랑스 함대가 조선 원정을 포기하고 변화 추이를 지켜보기 위해 상해에 머물기로 했기 때문이다.
파보리트호에서 하선한 최양업 일행은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와 합류한 후 강남대목구장 베시 주교의 도움으로 1842년 10월 12일 중국 배를 타고 상해에서 출발해 23일 요동 태장하(太長河)에 도착했다.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거지로 변장하고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해 압록강 변문쪽으로 갔고, 최양업은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머물고 있는 소팔가자(小八家子, 현 길림성 장춘시 합륭진 소팔가자촌)로 떠나 11월 그곳에 도착했다.
제2차 귀국 여행
최양업은 소팔가자에 머물면서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대단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한 살만 더 많았다면 아마 그를 올해에 사제품을 하는 일이 옳을 것입니다”(페레올 주교가 1843년 2월 20일 소팔가자에서 그르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1843년 3월 김대건이 변문에서 조선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난 후 소팔가자로 왔다. 김대건은 1839년 기해박해로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뿐 아니라 최양업의 부모인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 등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최양업은 “언젠가 좋으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의 동포들을 만날 행운이 저에게 다가오기를 하루하루 바라면서 머물러 있습니다.…저의 부모와 형제들을 따라갈 공훈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의 그처럼 장렬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1844년 5월 19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라고 한탄했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1844년 12월 10일께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았다. 페레올 주교와 김 부제는 조선 입국을 위해 변문으로 떠났고, 최양업 부제는 교구장의 지시로 메스트르 신부와 소팔가자에서 1846년 1월 말 제2차 귀국 여행을 떠날 때까지 머무른다.
“페레올 주교가 (최양업) 토마스에게 반감을 품었습니다. 이것은 주교와 얼마 동안 같이 지내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아주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저는 벌써 이 문제에 대해 그에게 몇 번 지적하였습니다. 그가 이것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진정될 것입니다”(메스트르 신부가 1845년 5월 25일 소팔가자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1846년 1월 소팔가자에서 훈춘으로 떠났다. 두만강 국경에 접한 조선 마을 경원(慶源)에서 밀사와 만나 조선으로 입국하기 위해서였다. 제2차 귀국 여행이다.
최양업과 메스트르 신부는 17일 동안 산과 골짜기를 지나 두만강 얼음을 타고 만주의 황야를 걸은 후 훈춘에 도착했다. 설맞이를 위해 열흘간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을 위해 경원에서 장이 열리는 데, 둘은 이 개시(開市)의 혼잡함을 이용해 입국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장이 열리기 전날 많은 포졸을 거느린 만주 장교 4명에게 체포된 후 3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석방돼 소팔가자로 되돌아갔다. 제2차 귀국 여행도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 페레올 주교가 조선 입국을 위해 머물던 소팔가자는 최양업, 김대건 신부가 부제품을 받고 조선 입국로 개척의 중심 거점 역할을 한 교우촌이다.
제3차 귀국 여행
소팔가자로 돌아온 최양업은 신학생들을 지도하던 중 1846년 12월 말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압록강 귀국로 탐사차 여행길에 오른다. 변문(邊門)을 통한 귀국을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도 저는 우리 포교지 밖에서 떠돌고 있으니 저도 매우 답답하고, 신부님의 마음도 괴로우실 것입니다. 저는 이제야 겨우 저의 동포들한테로 가는 도중입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저로 하여금 저의 신부님들과 형제들을 반가이 만나 포옹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기를 빕니다”(1846년 12월 22일 심양에서 르그르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라고 여행 도중 스승에게 편지를 보냈다.
최 부제는 이번 3차 여행이 꼭 성공할 수 있기를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이제 발걸음은 가볍게 뛰어 달리고 있으나, 얼굴은 무겁게 푹 수그러지고 있습니다. 죄악의 막중한 무게에 짓눌리고 극도의 빈곤과 허약으로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풍요한 자비심에 희망을 갖고,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에 저를 온전히 맡깁니다.… 매일 두렵고 겁이 납니다만, 하느님께 바라는 희망으로 굳세어져서 방황하지 않으렵니다. 바라건대 지극히 강력하신 저 십자가의 능력이 저에게 힘을 응결시켜 주시어, 제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시기를 빕니다”(1846년 12월 22일 심양에서 르그르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압록강 변문에 도착한 최양업과 메스트르 신부는 1846년 기해박해로 국경 감시가 너무 엄중해 또다시 귀국에 실패하고 만다.
고군산도까지 갔으나 고국 땅은 밟지도 못하고
▲ 1858년 새로 건조한 프랑스 함선 라 글로와르 호. 아마도 신치도에 좌초된 라 글로와르 호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 라 빅토리외즈 호 함장 리고 드 즈누이 소령. 훗날 제독이 되어 코친차이나를 점령해 베트남을 프랑스 식민지로 만든 인물이다.
최양업 부제는 1846년 12월 말 제3차 변문을 통한 귀국 여행을 실패한 후 이듬해 홍콩으로 가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생활했다. 그는 이곳에서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 글로 작성해 보내온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라틴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이 라틴어 번역본은 파리외방전교회 르그레즈와 신부의 교정을 거쳐 로마 교황청으로 보내져 시복 자료로 활용됐다.
“지금은 지루하고 긴 여행을 한 후 메스트르 신부님과 함께 홍콩으로 돌아와서, 여기서 하루하루 프랑스 함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함선을 타고 존경하올 페레올 주교님께서 명하신 대로 조선에 상륙하는 길을 다시 찾아보려 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이번만은 다행히 성공하여 지극히 가난한 우리 포교지에 도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홍콩에서 1847년 4월 20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편지에서처럼 최 부제가 기다리던 프랑스 함선은 라 피에르 대령이 함장인 라 글로와르 호와 리고 드 즈누이 소령이 지휘하는 라 빅토리외즈 호였다. 두 함선은 중국ㆍ인도 주재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 제독의 명령에 따라 코친차이나(지금의 베트남) 감옥에 억류된 가톨릭 선교사들을 구출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그해 4월 15일 다낭에서 전투를 벌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두 함선은 중국 광동성 광주에서 정비를 마친 후 세실 함장이 1846년 6월 1일 자로 1838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참수한 것에 대해 조선 조정에 보낸 항의 서한에 대한 답을 받아내려고 조선 원정길에 오를 계획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 본 목적은 코친차이나 침공과 마찬가지로 통상 조약을 체결해 경제적 외교적 이득을 취하는 데 있었다.
최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는 1847년 7월 30일 이 함대에 승선해 귀국 길에 올랐다. 라 글로와르 호에는 장교 21명, 수병 406명이, 라 빅토리외즈 호에는 장교 8명, 수병 125명이 승선했다. 수병 대다수가 전투 경험이 있는 정예 함대였다. 최 부제는 1차 귀국 여행 때와 마찬가지로 통역사 역할을 했다.
둘을 태운 프랑스 함대는 중국 광동성 광주 황포(黃浦)를 출발해 주강(珠江) 입구인 호문을 지나 조선 근해까지 순조롭게 항해했다. 8월 9일 제주도 해상을 지나 다음 날 아침 일찍, 서양인 가운데 그 누구도 탐사한 적이 없는 고군산도 인근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때 두 함선은 바다에서 육지로 들어가는 포구에서 심한 돌풍을 만나 파도에 휩쓸려 모래톱에 좌초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음날까지 바닷물이 거의 빠지지 않자 좌초된 두 함선은 곧 파선하고 말았다.
라 글로와르 호 함장인 라 피에르 대령은 8월 12일 아침, 모든 수병에게 하선해 ‘북쪽 또는 북서쪽 2마일(약 3.2㎞) 지점에 있는 섬’으로 철수할 것을 명했다. 철수 과정은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하역 중대가 구성돼 가장 먼저 대포를 비롯한 무기류와 탄약 그리고 환자와 어린 수병들이 섬으로 옮겨졌다. 초병들이 수량이 많은 물줄기를 찾아내자 다음으로 식량과 남은 인원들 모두가 상륙했다. 철수 과정에서 승선자 562명 중 최 부제를 비롯한 560명은 무사했으나 수병 2명은 거친 파도에 휩쓸려 익사하고 말았다. 이 과정을 조선 수병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고군산진 요망감관((瞭望監官-관측병) 윤승규는 프랑스 함대의 좌초 사실을 유진장(留陣將) 조경순에게 즉각 보고했고, 조경순은 다시 전라감사 홍희석에게 알렸다. 그런 후 즉각 군사를 이끌고 함께 배를 타고 좌초된 함선을 조사했다. 그리고 프랑스 해군의 야영지를 주시했다.
전라감사 홍희석은 바로 헌종에게 장계를 올렸으나 프랑스 함대가 좌초된 지 9일이 지난 8월 18일에서야 처음으로 이 사실이 조정에 보고됐다. 홍희석의 장계에는 “부안 화도(현 부안군 계화리) 뒷바다의 만경현 신치도 무영구미 풀두렁(개펄의 해초 언덕)에 프랑스 함대가 표착했고, 두 함선이 좌초한 신치 풀두렁에서 10리쯤 되는 신치산 아래 남쪽 기슭에 혹은 신치산 아래 모래사장에 프랑스 해군이 상륙해 야영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라 피에르 함장은 8월 13일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는 조선 수군에게 서한을 통해 ‘1846년 세실이 조선 조정에 보낸 서한의 답을 받기 바란다’는 뜻을 전달하고, 식량과 배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했다. 전라감사는 이 요청을 다시 조정에 보고한 후 물과 식량, 배 등 필요한 물품을 프랑스 야영지에 공급했다. 또 만경현령, 부안 겸 고부군수, 위도첨사, 여산부사, 익산군수 등을 차사원(差使員, 관찰사가 중요한 임무를 지어 파견하는 관원)과 문정관(問情官, 외국 배가 들어오면 그 사정을 알아보는 임시 관리)으로 임명해 동정을 살피도록 하고, 우수사와 연해 각 읍과 진에 관문을 보내 경계토록 했다.
조정은 라 피에르 함장에게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것은 그들이 표류인이 아니라 잠입자였기 때문에 정당하다. 우리는 그들이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나 설사 그들이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처벌했을 것’이라는 내용의 회문(回文)을 보냈다. 조선 조정이 서양 함선과 처음으로 주고받은 외교 문서였다. 최양업 부제는 이 역사적인 사건에 직접 관여했을 것이다. 통역사였던 최 부제는 라 피에르 함장이 조선 조정에 보낸 한문 서한을 직접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안타깝게도 라 피에르 함장은 조선 조정의 답을 전달받지 못했다. 조정의 회문이 신치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프랑스 군인들은 철수하고 없었다.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장) 박사는 최양업 신부 편지, 라 피에르 함장 보고서와 홍희석의 장계, 일성록, 헌종실록 등을 근거로 프랑스 함대의 좌초 지점과 야영지를 처음으로 확인했다. 차 박사는 2013년 11월 전주교구가 주관한 학술 심포지엄에서 프랑스 함선 좌초 지점은 북위 35도 79분, 동경 126도 50분 인근(현 신시도 33센터 배수갑문 안쪽 인근)이며 야영지는 북위 35도 81분, 동경 126도 48분 인근(신시전망대 광장 일원)이라고 밝혔다.
신치도에서 눈물을 삼키며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으니…
▲ 최양업 부제와 프랑스 해군 560명이 한달간 표착생활을 했던 신치산 아래 남쪽 기슭 모래사장터. 전주교구에서 세운 최양업 부제 일행 난파 체류지 팻말이 있다.
▲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를 태운 프랑스 함대가 좌초한 고군산도 만경현 신치도 무영구미 풀두렁 자리로 지금은 방조제 간척사업으로 새만금 33센터가 들어서 있다.
라 피에르 함장은 함대의 고군산도 좌초 사실을 알리고 영국이나 미국 함선에 구조 요청을 위해 8월 25일 오늘날 구명정에 해당하는 종선(從船)을 상해로 급파했다. 이 종선은 중국 광동성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영국 함대에 구조를 요청했다.
영국의 수해(Suhae) 함장은 주함인 다이달로스(Dadalus)호와 에스피에글(Espiegle)호, 칠더스(Childers)호를 함대로 편성해 8월 31일 중국 광주 주강을 출발, 9월 5일 고군산도 신치도 앞바다에 도착한 뒤, 12일 프랑스 해군을 모두 태우고 그곳을 떠났다. 라 피에르 함장을 비롯한 300명의 글로와르호 대원들은 다이달로스호를 타고 9월 23일 홍콩에 도착했다. 즈누이 함장과 257명의 빅토리외즈호 수병은 나머지 두 배에 나눠 타고 상해로 갔다.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도 빅토리외즈호 해군들과 함께했다.
신치산 아래서 한달간 머물러
프랑스 해군은 1847년 8월 10일 신치도 무영구미 풀두렁에 좌초된 다음 배를 버리고 12일 신치산 아래 남쪽 모래사장에 상륙해 영국 함대에 구조될 때까지 꼬박 한 달간 이곳에서 머물렀다. 최양업 부제도 1847년 8월 12일 프랑스 해군과 함께 조선 땅을 밟았다. 조선을 떠난 지 무려 11년 만의 일이었다. 최양업은 신치도에 한 달간 머물면서 프랑스 해군 장교와 조선 관리들 사이의 통역을 맡아 육지로 들어갈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저는 혹시나 신자들에 대해 무슨 소식이라도 좀 알아내고 싶어서 날마다 수소문하며 기웃거렸습니다. 저의 동포들을 보기도 하고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니 크게 위로가 됐습니다. …저녁이 되면 혹시 신자의 거룻배가 우리에게로 오지 않을까 해서 사방을 두루 살피면서 기대도 하고 기도도 하느라고 애가 바짝바짝 탔습니다”(상해에서 1847년 9월 20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양업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통역할 때 조선말을 하지 않고 한자만을 사용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그리고 협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함께 배를 탄 조선인에게 손바닥에 한자를 써가며 천주교에 대해 조심스럽게 묻곤 했다. 그들 중 한 명이 그토록 찾던 신자였다. 바로 1847년 9월 9일이었다.
“한 사람이 제게 가까이 와서 ‘예수님과 마리아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알고 말고요. 나는 잘 압니다. 당신도 압니까? 당신은 그들을 공경합니까?’하고 제가 그에게 대답하는 동시에 조급하게 물었습니다. 그는 그렇다고 시인했습니다.…그는 자기 온 집안이 모두 다 신자이고, 대공소(오늘날 전북 부안군 변산면 석포리 대소 공소)에 살고 있는데 그곳은 우리가 있는 고군산도에서 백 리가량 떨어져 있다고 대답했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최양업은 그에게서 9월 11일 “신자 배가 신치도로 올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하지만 구조선인 영국 함대는 이미 신치도 앞바다에 정박해 있었고, 조난자들을 모두 승선시켜 12일 떠나기로 돼 있었다. 최양업은 드디어 입국한다는 희망과 함께 신자 배를 꼭 타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꼬박 이틀 밤낮을 견뎌야만 했다. 하지만 최양업은 약속한 11일에 신자 배를 만나지 못했다. 조선 수병들의 경계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신자 배가 오길 기다리고 기다리고
“끝끝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밤에는 조선 거룻배들이 사방에 횃불을 켜고 경비했으며, 낮에는 아무도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돼 있었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이날 신자 배를 만나지 못한 최양업은 신자들이 자신을 태우러 올 때까지 신치도에 남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라 피에르 함장을 찾아가 “혼자만이라도 신치도에 남겠다”고 간절하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만다.
“저는 고군산도에 남아 있기를 원하여 함장에게 여러 번 청하였으나 함장은 저의 뜻에 결코 동의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서원까지 하면서 간절히 소망해 마지않았고, 또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손안에까지 들어온 우리 포교지를 어이없이 다시 버리고 부득이 상해로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저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신치도에 혼자라도 남겠다는 최양업의 판단은 맞았다. 실제로 최양업의 이종사촌 형이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거룻배를 가지고 고군산도에 와서 그해 여름 내내 기다렸었다.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양업은 크게 가슴 아파했다.
최양업은 1847년 9월 12일 참담한 심정으로 영국 함선에 올랐다. 눈앞에서 조금씩 작아졌다 끝내 사라지고만 고군산도를 보면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여전히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고, 전능하시고 지극히 선하신 섭리에 온전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저도 하느님 안에서 항상 영원히 희망을 가질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려고 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맡겼으니 그분을 언제나 믿을 것입니다”(같은 편지에서).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며 기도
최양업은 스승에게 보낸 이 편지 내용처럼 스스로 낙담하여 무너지지 않으려고 더더욱 하느님께 의지했다. 라 피에르 함장이 신치도를 떠나면서 “올해 안으로 다시 프랑스 함선이 조선으로 올 것”이라고 자신에게 밝힌 다짐을 되뇌면서 최양업은 조국을 위해 기도했다.
“주님, 보소서. 저희의 비탄을 보시고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소서. 저희의 죄악에서 얼굴을 돌리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성심에 눈길을 돌리시어, 당신을 향해 부르짖는 성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소서”(같은 편지에서).
고군산도로 다시 올 것이라는 최양업의 기대와 희망은 프랑스 해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탓에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이로써 최양업의 제4차 조선 입국 여행도 실패로 끝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