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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제 눈을 찌른, 호생관 최북 / 허영환
세상 사람들은 성질이나 언행이 범상하지 않은 사람, 즉 별난 사람을 기인 또는 괴짜라고 부른다. 좀더 유식한 말로 표현하면 방외지인(方外之人)이라 한다.
이 말을 쉽게 풀어보면 테두리 밖의 사람, 범위 밖의 사람, 세속의 바깥에 있는 사람, 속세의 속된 일을 벗어난 고결한 사람 등이 된다.
또 다른 말로 하면 국외자(局外者)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뜻은 테두리 밖에 있어서 테두리 안의 일에는 관계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과거를 재조명해 볼 때, 인류의 역사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살피면 정상적인 또는 범상한 인물보다는 기인이나 방외지인들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최북은 남달리 풍부한 영감(靈感), 날카로운 직관력, 탁월한 조형(造形) 능력 등을 지닌 천재였으며, 당대의 방외지인이었다.
대부분 방외지인이란 위대한 시대, 위대한 전통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즉, 한 개인이 아무리 탁월한 재능을 갖추고 있어도 그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을 만나지 못하면 그는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질 뿐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적인 상관성, 민족적인 상관성, 지역적인 상관성 속에 사는 인간은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때와 장소와 사람을 만나야만 그의 천재를 발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위대한 방외지인은 속되고 따분한 테두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으며, 테두리 밖에서 큰소리를 질렀던 선지자들이었다고 하겠다.
사실 그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것을 먼저 알고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 영조(英祖, 1724-1776) 때 불같은 정열로 그림을 그렀던 화가 최북(崔北)을 단순한 괴짜로서만이 아니라 세속에 안주하려 하지 않은 화가로서, 타락해 가는 세태를 향하여 광야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질타한 한 초인으로서 재조명하는 것은 매우 뜻있는 일이다.
정승이 더 좋지 않은가
솔직하고 대담하면서도 기운이 생동하는 필법으로 산수. 인물. 영모(새나 짐승을 그린 그림). 화조(꽃과 새를 함께 그린 그림) 등을 두루 다 잘 그렸던 최북의 첫 이름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 유용(有用). 칠칠(七七), 호(號)는 성재(星齋). 기암(箕菴). 삼기재(三奇齋). 호생관(毫生館) 등이었다.
그의 자나 호를 보면 최북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스스로를 ‘성스러운 그릇(聖器)’으로 본 것이나, 이름인 북(北)자를 두 글자로 나눠 칠칠(七七)로 함으로써 칠칠한 사람, 즉 하는 일이 거침새 없이 민첩한 사람, 주접이 들지 않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일컫은 것이나, 붓 한 자루에 인생을 걸었다는 뜻으로 호생관(毫生館)이라고 한 것, 그의 당호(堂號, 집 이름)를 ‘세 가지 기묘한 짓을 하는 사람의 집(三奇齋)’ 이라고 지은 것 등도 다 그의 사람 됨됨이를 가늠할 수 있는 사실들이다.
괴짜들이 행적이 대개 그렇듯이 최북에 대해서도 알려진 건 거의 없다. 그가 전라도 무주 사람이며 49세로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만이 그에 대한 전기적(傳奇的)사실로 남아 있는 것의 전부이다. 추측건대, 그는 철저하게 떠돌이로 지내면서 한 세상을 살았던 것 같다.
최북과 함께 서울 화단에서 그림을 그렸던 강세황(1713-1791), 김홍도(1745-1818?), 이인문(1745-1821), 신윤복(18세기 중엽 - 19세기 초엽) 등의 화가들도 그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며, 혹시 그림을 함께 그렸다든지 하는 사실조차 확인할 수 없다.
특히 강세황은 서화에 관한 많은 글을 써 모은 문집(文集)인 [표암유고(豹菴遺稿)]를 남겼지만 최북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양반 출신의 학자이면서 당대의 지도적 서화 비평가이기도 했던 강세황으로서는 출신 성분이 좀 낮았던 최북에 대해서, 특히 괴짜 노릇을 하고 다닌다는 그에 대해서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최북이 서울 화단에서 그림을 그리고 기행을 저지르고 다닐 무렵에 쓰여진 몇몇 문집에만 그의 기행을 적은 재미있는 일화나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남공철(1760-1840)이 쓴 [금릉집(金陵集)], 신광수(1712-1775)가 쓴 [석북집(石北集)], 조회룡이 쓴 [호산외사(壺山外史)] 등이 그것이다.
[금릉집]에 있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최북이 어느 날 서울의 한 귀인댁(貴人宅)을 찾아갔는데, 그를 안내하는 자가 칠칠(七七)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 미안해서 “최직장(崔直長)께서 오셨습니다.”라고 여쭈니, 칠칠은 화를 내면서 “너는 어찌하여 나를 최정승(崔政丞)이라 하지 않고 직장이라 하느냐”고 했다. 그 자가 웃으며 “언제 정승이 되셨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칠칠은 “내가 직장이 된 때가 언제 있었느냐, 만일 거짓 직함을 붙인다면 정승이나 직장이나 일반이거늘 하필이면 큰 것을 버리고 적은 것을 붙여 주려 하는가”라며 귀인을 만나지 않고 돌아갔다.
남공철의 [금릉집]에는 또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최북은 그림을 잘 그리나 눈 하나가 멀어서 항상 안경 한 알만 붙이고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평소 술을 즐기고 구경을 좋아했다. 금강산의 구룡연 폭포를 구경하고 사뭇 즐거워 술을 잔뜩 마시고 웃다가 울다가 하더니, 이윽고 “천하의 명인(名人) 최북은 마땅히 천하의 명산(名山)에서 죽어야 한다”고 외치며 연못 속으로 몸을 던졌으나 마침 구해 주는 사람이 있어 죽지 않았다.
이때가 [금강산도(金剛山圖)]와 [표훈사도(表訓寺圖)]를 그린 때였을 것이다. 이 두 그림은 그 무렵(1750년대)에 한창 유행한 겸재화풍(謙齋畵風)으로 그린 것인데, 경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치밀하게 묘사한 실경(實景) 산수라 하겠다.
특히 [표훈사도]는 산과 바위의 묘사법인 준법(㕙法)과 집을 그리는 옥우법(屋宇法) 등이 겸재화풍을 많이 따르고 있다. 18세기 한국 산수화의 대부분은 겸재 정선(1676-1759)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말 많고 무더운 세상을 사는 심정
[금강산도]와 [표훈사도]. 이외에도 최북이 남긴 그림을 통해서 그의 호방한 작품 세계와 회화 사상을 살펴보면 더욱 재미있다.
[미법산수도(未法山水圖]는 먹색이 번지는 화법인 발묵법(潑黙法)을 써서 그린 것으로 미불(米佛, 북송시대의 산수화가)의 화풍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작품이다.
[수하담소도(樹下談笑圖)]는 선면화(扇面畵, 부채 위에 그린 그림)로 우람한 나무의 묘사가 특이하다. 두 그루의 나무를 대담하게 그린 것은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설산조치도(雪山朝雉圖)]. [수하쌍치도(樹下雙雉圖)]. [호취박토도(豪鷲搏兎圖)] 등은 구도와 화법이 비슷한 화조인데, 모두 당시에 유행하던 화풍으로 그린 것이다. 특히 수리가 토끼를 잡는 모습을 그린 [호취박토도]는 현재 심사정의 [호취박치도(豪鷲搏雉圖)와 나무. 바위. 수리 등의 모습이 너무나 닮았다. 그러니까 최북 역시 그가 살았던 시대의 화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화가였다고 하겠다.
[해변기암도(海邊奇巖圖)]. [관폭도(觀瀑圖)]. [단구승유도(丹丘勝遊圖)] 등은 곧 무너져 내릴 듯한 괴석(怪石)을 힘차게 그린 최북의 그림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그림들이다. 농담묵(濃淡黙)의 대비와 준법(㕙法)등의 구사가 빼어나며, 그의 기인적인 성품도 암시하는 그림들이다.
[처사가도(處士家道)]는 남산골 아래의 자기 집을 그린 듯 을씨년스러운 모습의 그림이다. 날카롭고 힘차게 꺾인 나무 아래의 죽림 속에 조용히 엎드려 있는 초가삼간은 그의 정신이 가득한 집이라 하겠다.
기행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으되, 문장이 뛰어나고, 비교적 단정한 문인화풍(文人畵風)의 그림도 많이 남긴 최북의 정신세계를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그림이 바로 [처사가도]라 하겠다. 화제(畵題)는 ‘장생불로신선부(長生不老神仙府), 요초경화처사가(瑤草境化處士家)’라 하여 늙지 않고 오래 신선처럼 살고 싶었지만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인 50세도 못 되는 나이로 세상을 떠난 최북의 심정이 들어 있는 듯하다. 그는 당시 중인들의 시사(詩社, 시 짓기 모임)인 송석원 시사의 일원이었던 점으로 보아 당대의 시인들과도 교분을 가졌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최북의 그림 20여 점 가운데 그의 호방한 정신과 대담한 화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그림은 역시 [선상대취도(船上大醉圖)]이다.
더운 복중(伏中)의 달밤에 옷을 훌렁 벗고 배 위에 드러누워 있는 술 취한 사나이는 틀림없이 그 자신일 것이다. 말 많고 무더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나운 꼴을 보면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싶었던 최북의 심정을 너무나 잘 나타낸 그림이다.
찬하명산의 최 메추라기
[호사외사(壺山外史)]에는 최북의 한쪽 눈이 먼 내력 등 몇 가지 얘기가 실려 있다. 번역하여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최북은 향을 피워 놓고 그림 구상에 잠기곤 했다. 황대치(黃大癡, 본명은 황공망(黃公望)으로 중국 원 나라 때의 산수화가)를 숭배하여 마침내 자기의 뜻으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스스로 호(號)를 호생관(毫生館)이라 했다. 사람됨이 격양하고 오만하며 작은 절도에 스스로 구속되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어느 집에서 달관(達官, 높은 관직, 또는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을 만났는데, 달관이 최북을 가리키며 주인을 향하여 “거기 앉은 자의 성이 무언가”라고 했다. 이에 최북이 낯을 들어 달관을 보며 말하기를 “먼저 묻노니 그대의 성은 무언가”라고 했다. 최북의 오만함이 이와 같았다.
한 귀인이 최북에게 그림을 요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니 그를 위협하려 했다. 최북이 화를 내어 말하기를 “남이 나를 손대기 전에 내가 나를 손대야겠다”라며 드디어 한쪽 눈을 찔러서 실명하게 했다.
늙어서 돋보기안경 한쪽만을 낄 뿐이었다. 49세에 죽으니 사람들이 ‘칠칠(七七)의 참(讖)’ (칠칠은 사십구이니 그 자신이 49세에 죽을 줄을 미리 알았다는 뜻으로 이 말을 썼다)이라고 했다.
이러한 최북의 기행은 자기의 귀를 자르고 자살한 고호와도 비슷하다. 언제나 고독하고 사귐성이 없으며, 감정에 치우친 단순한 눈으로 사물을 보면서도 작품 제작에 열심인 천재 화가들이 범하기 쉬운 행동인 것이다.
[金陵集]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도 있다.
칠칠은 언제나 하루에 대여섯 되의 술을 마셨다. 시중의 여러 장사치가 술병을 들고 오면, 칠칠은 집안의 책과 지폐를 끌어내어 전부 털어 주고는 그 술들을 모두 샀다. 용돈이 무척 군색하여 서경(西京, 평양)과 동래에 가서 그림을 파니 그 지방 사람들이 비단필을 들고 문 앞에 모여들었다.
어떤 사람이 최북에게 산수화를 그려 달라고 청했는데 그는 산만 그리고 물을 그리지 않았다. 그 사람이 이상히 여기고 물으니까 그는 붓을 던지며 “종이 바깥은 모두 물이다”라고 대꾸했다.
또 최북은 자기 마음에 들게 잘 그려진 득의작(得意作)인데 주는 돈이 적으면 화를 내면서 그림을 찢어 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림이 잘못되었는데도 주는 돈이 많으면 껄껄 웃으며 주먹으로 그 사람을 밀면서 돈을 그 사람에게 도로 주어 문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고는 손가락질을 하며 “저 사람이 그림 값을 모른다”고 했다.
세상에서는 최북을 주객이니 화사(畵史, 조선 왕조 때 궁중 전속으로 그림을 그리던 부서인 도화서(圖畵署)이 벼슬 이름)니 하고, 심한 사람은 광생(狂生)이라고까지 지목한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가끔 묘오(妙悟, 신묘한 깨달음)와 쓸모 있는 내용이 있었다.
영조 때 서화(書畵)로 유명했던 신광수가 최북의 [설강도(雪江圖)]에 붙여 노래한 시를 보면 그림을 팔아 겨우 살아가던 최북의 궁핍하고 을씨년스런 살림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석북집]에 있는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에서 그림을 파는 최북을 보소
오막살이 신세밖에 아무 것도 없네
필통을 꺼내 놓고 유리 안경을 쓰고
문을 닫고 종일토록 산수화를 그려
아침에 한 폭 팔아 아침밥 먹고
저녁에 한 폭 팔아 저녁밥을 먹네
추운 날 헌 방석에 손님이 얹았는데
문 앞의 작은 다리에 눈이 세 치나 내렸네
여보소 나 올 때 본 설강도(雪江圖)를 그려 주오
두미(斗尾)라 월계(月溪)라 나귀 타고 돌아드니
남북의 청산은 하얗게 보이는데
어가(漁家)라 고산(孤山)이라 풍설(風雪)속에
맹처사(孟處士)나 임처사(林處士)만 그려야 하나
또다시 너와 함께 복사꽃 뜬 물에 가서
설화지(雪花紙)에 봄 산을 그려나 주게
최북은 그림 중에서도 특히 산수와 메추라기에 뛰어나서 최산수(崔山水) 또는 최순(崔鶉, 최 메추라기)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당시 변상벽이라는 화가가 고양이를 잘 그린 까닭으로 변묘(卞描, 변 고양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것과 비슷한 일이다.
남의 비위를 맞추며 살기를 싫어하고, 대담 솔직하면서 매인 곳이 없는 필법으로 그림을 그린 최북은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 먹을 사용하며, 채색을 할 경우 엷은 빛깔을 써서 주로 산수를 그린 그림)뿐만 아니라 당채(唐彩, 중국에서 광물질로 만든 물감)를 사용한 화려한 채색화에도 능통했다. 이런 화려한 채색화는 주로 그의 화초 그림에 많다.
자유로운 메추라기와 꿩처럼 하늘을 날면서 살고 싶었던 그는 어쩌다 사나운 매 같은 인간을 만나면 환멸을 느끼고, 어떻게든 그 자를 희롱하고 비꼬면서 살았다.
요컨대 최북은 예술에는 말할 것도 없고 무슨 일에나 틀에 갇히기를 싫어했으며, 다른 사람의 비평이나 눈치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기행과 주벽(酒癖)의 화가였다고 하겠다.
이미 말한 대로 최북은 49세의 나이에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그는 그가 즐겨 찾던 천하명산(天下名山) 어딘가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그가 그린 그림의 새처럼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허영환(許英桓)
1937년생으로 한국외국어대, 중국문화대, 고려대 등에서 영어, 중국어, 미술사, 중국사 등을 배웠고 고려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이화여대 등의 강사를 거쳐 성신여대 교수로 정년퇴직하였다. 성신여대박물관장, 대학박물관협회장, 미술사연구회장, 문화재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서울시문화재우원, 서울역사박물관 자문위원, 상백한중학회연구원장 등으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중국화원제도사>, <중국화론>, <동양화일천년>, <동양미의 탐구>, <중국문화유산기행> 등 20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