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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기상하 메시야 왕국의 대망
(3) 믿음의 계보 역대상 1장 1절~ 2장 2절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든 누구든 족보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강아지 족보라면 모를까 사람의 족보는 결혼할 때나 할아버지가 묻지 않는 이상 별로 궁금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요. 이 시대는 신분과 혈통이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고, 신분과 상관없이 누구든 열심히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모두 뿌리가 있고, 그것을 이어가며 살고 있습니다. 저 개인과 현재의 삶이 제일 중요한 미국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멋있는 미국이름을 새로 만든다 한들, 중국에서 건너간 사람은 중국 성을,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 역시 한국성을 가지고 사는 것이지요. 그만큼 뿌리를 기억, 내가 누구인지를 붙들고 있는 것이 중요한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흔들릴 때 우리는 표류하고 방황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흑인 작가 알렉스 헤일리는 『뿌리』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이 소설은 저자의 7대 할아버지 쿤타킨테가 아프리카 감비아의 주프레라는 곳에서 흑인 사냥꾼에게 붙들려서 미국에 노예로 팔려서 자기대까지 이르게 된 것을 소설로 쓴 것입니다. 쿤타 킨테는 노예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네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는데, 마지막으로 붙들렸을 때 발등을 도끼로 잘리게 되고, 그때부터는 탈출을 포기하고 노예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슬람교도인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기 딸에게 고향의 지명과 자기종족의 습성을 외우게 합니다. 그리고 딸도 자식에게 그것을 전수시켜 줍니다. 그러던 중 3대째, 조지라는 아들이 닭싸움을 해서 돈을 벌고, 나중에는 그 돈으로 자유를 사게 됩니다. 그리고 7대째 아들은 조상들이, 할아버지가, 어머니가 전해준 강 이름이나 다른 이름들을 언어학자들에게 문의하게 되고, 그리고 이 자손은 계속된 수소문과 연구를 통해 자기 할아버지가 살았던 아프리카 감비아의 마을을 찾아가게 되고, 그 마을에 옛날 자기 할아버지와 같은 이름 쿤타 킨테라는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없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흑인 작가 알렉스 헤일리가 이 소설을 쓴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트작을 써서 돈을 벌려고요? 아뇨, 흑인들의 뿌리가 처음부터 노예가 아니며, 아프리카의 씩씩한 용사들이었고, 자유인들이었음을 밝히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미국 땅에 차별받고 무시당하고 있는 흑인들, 자기들 스스로도 열등의식을 가지고 위축되어 있는 흑인들을, 자신들의 인생을 도둑이나 깡패, 폭력배들, 전과범에 마약사범, 총기사범으로 살고 있는 저들을 위해 자신들의 뿌리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백인들에 의해 왜곡되고 잘못 세뇌된 정체성을 바로잡는 일을, 이 소설을 통해서, 사실을 밝혀냄으로, 그 뿌리를 확인함으로 해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흑인들에게 『뿌리』라는 소설이 있었다면, 오늘 여전히 바벨론에 살고 있는 대다수 유대인들과 간신히 기회를 얻어 옛 유다의 터전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에게는 ‘역대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족보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노예가 되어, 식민지 백성이 되어, 문화도, 정신도, 언어도, 신앙도 다 소멸되어가던 저들을 위해 뿌리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저 이방인들에 의해 왜곡되고 세뇌된 쓸모없는 인종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지으심을 입고 택하심을 받은, 오히려 저들보다 큰 복과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아름다운 자녀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태초로부터 존귀하게 이어져온 온 열방에 우뚝 서서 빛을 발할 선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루하고 심심한 사람들의 이름들이 가득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 방대한 이름들 속에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 믿음의 계보,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살펴보시면서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기억할 것은, 믿음의 계보는 전혀 신앙적이지 않은 배경 속에서 이어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태초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신 이후, 어쩌면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청종한 시대는 거의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에덴동산에서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께 책임전가를 하고, 하나님께 핑계와 이유를 대는 것이 저 아담이요, 하와의 모습이었지요. 그래요. 믿음의 계보는 그 어떤 시대도 ‘성경적인 세계관’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는 때에 이어져왔습니다. 지금 바벨론에 머물러 있는 유대인들의 형편도, 지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살아가고 있는 유대인들의 형편도 믿음을 지키고 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온통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이 힘과 권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이들을 위협하고 핍박하고, 회유하고 넘어뜨려가는 시대였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 오늘 역대기는 믿음으로 서 있었던 이름들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1-4절입니다.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셈, 함과 야벳은 조상들이라”
일체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난 후 노아의 홍수까지, 하나님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의 이름들만 딱딱 선언되고 있습니다. 마치 황폐한 땅에 말뚝을 하나씩 박는 느낌입니다. 마치 조상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황폐한 시대와 역사 가운데 하나 하나 우직하고 올곧게 박힌 기둥처럼 그 이름이 하나씩 기록되고 있습니다. 악하고 범죄한 세상 가운데, 그들의 논리와 가치체계를 거부하고 오직 성경대로 서겠다고 하는 어떤 의지와 마음이 전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요. 나라도 잃고 영적인 능력도 다 잃어버린 유다 백성들이 다시 힘있게 설 수 있는 길은 조상들이 걸었던 성경적인 삶, 하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무언의 선언이요, 초청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전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바벨론 제국의 노예가 되어 끌러 왔을 때 많은 유다백성들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여기서 살아남고 번성할 것인가?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저들의 문화와 사상에 하루라도 빨리 적응하고 동화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오늘 다시 기회를 얻어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자기들 역시, 저 거대한 세상의 힘과 권력을 바라보며, 다시금 그 마음들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대기는 이야기합니다. 우리와 같은, 아니 어쩌면 우리보다 더한 불신앙의 시대를 살고 있었던 믿음의 조상들, 그들이 걸어온 길을 보라고, 우리가 바로 이 계보를 잇는 사람들로 서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요. 아담이나 셋, 에노스나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같은 이들 모두 철저한 불신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었으나, 그 가운데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앞에 바르게 살았던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특히 에녹같은 사람은 노아 홍수 이전, 사람의 죄악이 관영하던 때, 인류를 물로 멸하셔야만 할만큼 악하던 시대에도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삶을 살았노라고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노아는 어때요? 하나님의 홍수심판 가운데, 사람은 물론, 모든 기식이 있는 동물들이 다 죽임을 당하던 때, 노아의 가족 여덟 식구가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았고, 다시금 지면에 생명을 이어가는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지금 역대기는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성전이 불타고, 유다가 망했다고 황폐한 땅이라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때라고 생각하고, 아니, 우리의 지금 형편은 우리 조상들보다 훨씬 나으니, 성전도 지어져 있고, 바벨론의 고레스왕도 하나님의 종이니, 더욱 믿음으로 서야한다고, 할 수 있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중에 믿는 사람들도 어떻게 하면 이 생존경쟁의 시대에 도태되지 않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지를 많이 고민하고 생각합니다. 고리타분한 유연하지 못한 고집스런 하나님의 말씀과 방식이 아니라, 오늘 저 세상의 세련되고 예민하고 시대에 맞게 유연하고 발빠르게 대처해가는 저 세상의 방식을 따라가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저 신앙생활은 주일에, 교회에서만하고, 세상에서는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이중, 삼중의 삶을 살아야하는 그리스도인들 말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역대기는 믿음의 조상들을 이야기합니다. 저 험악한 시대, 물질과 맘몬과 권력으로 신앙인들을 협박하고 회유하던 시대, 하나님은 저 믿음의 사람들, 뚝심있고 우직하게, 물론 가뭄에 콩나듯 띄엄띄엄이었지만, 말뚝같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일해 오셨고,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많은 민족과 열방 가운데 보이시고 가르치시고 증언해 오셨노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체계,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지으신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길을 말씀해 오셨고 보여 오셨다고 말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한 세상을 살아갈텐데, 어떤 가치, 어떤 목적, 어떤 꿈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를 오늘 역대기를 통해 도전하고 계십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걸었던 길, 성경으로, 말씀으로, 하나님으로 사는 삶으로 저 세상 많은 이들에게 보아스와 야긴 같은 이정표와 든든한 안내자가 되라고 말이지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역대기를 공부하면서 더욱 하나님의 사람들로, 이 위대한 믿음의 계보에 이름을 올리실 수 있는 분들로 더욱 서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믿음의 계보는 참으로 미약하고, 곁가지들이 더욱 번성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믿음의 계보가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분들은 열매가 맺히는 나무보다 열매를 방해하는 잡초나 가라지가 더 무성하게 빨리 자란다는 것, 그리고 열매가 달리는 가지보다, 공연히 영양분을 빼앗는 곁가지들이 더 많이 뻗어나고 자란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수시로 김을 매주어야 하고 수시로 젖순을 떼어내고 쓸모 없는 가지를 잘라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신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며 심으신 씨앗과 나무는 잘 자라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나온 줄기와 가지도 참으로 여리고 약합니다. 그리고 이 가지가 열매를 달기까지 몇 백 년의 시간이 걸리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참으로 열받는? 일은 불신앙의 곁가지들이 너무나 많이 생기고 쑥쑥 잘 자라서 어느새 온 세상을 가득 채워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역대기가 또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믿음의 뿌리에서 나온, 세 개의 곁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이것입니다. 잡초와 불신앙의 가지라면, 처음부터 다른 뿌리나, 다른 줄기에서 나오면 좋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앙이 좋은 노아라든지, 아브라함, 이삭 같은 믿음의 거목들로 이름이 소개된 이들에게서 불신앙의 가지가 나오고, 저들이 본 줄기와 가지를 위협하고도 남을 만큼 거대하게 자라나더라는 것이지요.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불신앙의 곁가지는 노아의 아들들에게서 나옵니다. 5-7절 함께 읽어볼까요?
“야벳의 자손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고멜의 자손은 아스그나스와 디밧과 도갈마요 야완의 자손은 엘리사와 다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더라”
노아는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야벳은 셈과 함께 아비의 하체를 가려준 믿음이 좋았던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의 자식들은 신앙의 자녀들이 아니었습니다. 야벳이 낳은 일곱아들, 그리고 그들이 낳은 자손들이 모두 하나님을 떠나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세상에서 번창합니다. 그리고 여러 지역에서 자기들의 이름으로 도시를 만들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이들 중에 더욱 주의하여 보아야할 사람들은 저 함의 자손들입니다. 함의 아들들은 읽어보지요. 8절입니다.
“함의 자손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함의 자손들에 관한 이야기가 자그마치 8절부터 16절까지 기록이 되고 있는 것이지요. 다 기록한 것도 아닙니다. 아주 몇몇 이름을 남긴 이들만 기록을 하고 있는데도, 믿음의 계보와는 벌써 양부터 비교가 되질 않는 것입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오늘 이 함과 그 아들들이 아버지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았으면 잘못되든지 멸망을 당해야 하는데, 그 한 명 한 명이 세상 나라의 이름이 됩니다. 즉 세상 나라들의 조상이 되었던 것이지요. 구스는 에티오피아를 말하고, 미스라임은 이집트입니다. 그리고 붓은 리비아를 말하고 가나안은 장차 이스라엘이 정복하고 싸우게 되는 가나안 족속들이 되는 것이지요. 특별히 저 가나안 족속들은 하나님 앞에 죄악이 가득 차서, 이스라엘, 야곱의 후손들에 의해 진멸 당해야만 하는 이들이 됩니다. 그들의 땅을 빼앗아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것이지요. 다른 어느 족속들보다 음란하고 타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믿음의 가지, 셈은 어떠했을까요? 17절입니다.
“셈의 자손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과 우스와 훌과 게델과 메섹이라”
오, 이게 왠일입니까? 믿음의 집안에서 아들 아홉이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본문이 증언합니다. 그 가운데 믿음을 이어간 자손은 아르박삿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내려와 벨렉인데, 벨렉 이야기는 없고 믿음없는 동생 욕단의 자손들만 또 잔뜩 기록이 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다시 믿음의 계보인데 읽어보겠습니다. 24-27절.
“셈, 아르박삿, 셀라, 에벨, 벨렉, 르우, 스룩, 나홀, 데라, 아브람 곧 아브라함은 조상들이요”
무엇이 보이십니까? 믿음의 뿌리는 겨우 한 세대에 딱 한 명씩, 간신히 간신히 이어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세상의 곁가지는 빨리 자라고 널리 퍼져서 벌써 도시와 나라를 이루고 있는데, 믿음의 뿌리는 참으로 더디 자라고, 자라도 참으로 미약한 것을 보게 됩니다. 셈 이후에 태어난 믿음의 뿌리도 겨우 이름만 하나씩 간신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셈까지 열 세대, 그리고 노아 홍수이후, 셈에게서 아브라함까지 무려 열 세대가 지나갑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겨우 명맥만 이어오고 있는 것 같은 믿음의 계보, 참으로 연약하지만, 바로 거기에 생명이 세상을 향한 구원의 계획이 하나님의 의지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토록 연약하고 작은 우리네 사람을 믿으시면서 말입니다.
자, 두 번째 불신앙의 곁가지는 바로 아브라함에게서 나옵니다. 28-31절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삭과 이스마엘이라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니 그의 맏아들은 느바욧이요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라 이들은 이스마엘의 자손들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나이가 들고 늙을 때까지 아들이 없었지요. 그러다가 애굽여인 몸종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이 이스마엘인데, 이 아들이 12아들을 낳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이 이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겨우 하나, 둘 낳기가 어렵고 낳아도 그 중에 겨우 하나가 계보를 이어가는데, 불신앙의 가지는 낳았다하면 12명이고, 모두 성공을 하고 잘되어 나라를 이루든지, 족속을 이루든지, 도시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식을 많이 낳으실 수 있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이제 불신앙의 세 번째 곁가지가 이삭에게서 나옵니다. 34-35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으니 이삭의 아들은 에서와 이스라엘이더라 에서의 아들은 엘리바스와 르우엘과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요”
이 에서가 훗날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되지요. 43절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린 왕은 이러 하니라 브올의 아들 벨라니 그의 도성 이름은 딘하바이며”
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열심히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 에돔에는 왕이 있었습니다. 왕조가 여러 대에 걸쳐서 이어졌고, 그 중에는 유명한 왕들, 왕비 중에서도 이름이 기록되는 여인이 있었고, 많은 족장들이 있었음이 35-54절이 증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어떠십니까? 이 족보를 읽으면서 안타깝고 속상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믿음의 뿌리는 더디게 자라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담에서 노아까지, 셈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까지, 믿음의 사람들은 겨우 한 세대에 하나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뿌리에서 나온 곁가지는 무서울 정도로 자라고 온 땅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까지, 세상은 이미 나라를 세워 여러 번 왕위가 계승되고 왕조가 튼튼하게 세워지는데,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의 종살이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걸 보니 분명해졌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뛰쳐나가야 되겠습니까? 그럼 잘못 읽으신 것입니다. 저들은 다 버림받고 지옥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곧 찾아볼 수 없는 나라, 찾아볼 수 없는 영화일 뿐입니다. 반대입니다. 이들을 보면서 흔들리지 말고, 믿음의 계보에 서야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 신앙을 전수하고 이어가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것임을 저 역대기가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백성들이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것이 바로 이 곁가지들의 무성한 열매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여전히 믿음의 뿌리에서 나온 가지가 있었다는 것을 역대기는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묻고 있습니다.
“이런 불신앙의 시대에 믿음을 버리고 세상의 가라지가 될래? 아니면 이런 한복판에서도 우리 조상 믿음의 사람들이 걸었던 것과 말뚝 같은 길을 갈래?”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지만 말씀만 붙들고 모든 것을 일으켜 내었던 우리 조상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이곳에 다시 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요. 세상이 가진 외적인 규모와 권세와 힘을 보면서 우리 하나님과 우리의 신앙이 열등한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저 가시덤불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느냐입니다. 우리의 가지가 무엇을 향해 뻗어가고 있느냐입니다. 뿌리를 망각하고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가지는 잘라지고 버려져 아궁이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뿌리에, 줄기에 잘 연결되어 바르게 열매를 맺어가야 주인의 곳간에 들어가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습니까? 믿음의 뿌리를 기억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바르게 세워가고 있습니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에게 믿음의 계보를 잘 이어갈 수 있도록 본이 되는 부모로, 좋은 이웃으로 서 있습니까? 우리에게서 곁가지가 아니라, 참 가지가 뻗어나고 더욱 크고 아름답게 자라나 담장을 넘을 수 있도록, 오늘 더욱 역대기가 말하는 대로, 험악한 시대, 더욱 성전을 수축하고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주의 종들로 우리 모두가 서게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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