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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넷째 아이가 생긴 것은 내 나이 서른 다섯 되던 해.
이미 아들이 셋 있었다.
1970년 당시 이 땅은 가족계획 운동으로
“둘만 낳아 잘 기르자”의 홍보가 성공적으로 확산되던 때이고,
임신중절 수술에 크게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때였다.
한 번의 자연유산과, 한 번의 인공유산의 경험을 가진
姙産婦인 나는 날 것인가, 말 것인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딸일지도 모르잖니? 낳거라.
서른여섯 살에 낳게 되겠구나? 낳거라.
서른여섯에 낳는 자식, 효자니라.
내가 너를 서른여섯에 낳았거든...”
딸이 없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던 친정어머니께서는
당치도 않은 이유를 대시며 네 번째 아이를 낳기를 권하셨고,
“내 년에 태어나면 돼지띠로구나. 암말 말고 낳거라.
아범이 양띠이고, 큰아들이 토끼띠이니 해,묘,미 삼합이 된다.
내가 그렇게 돼지띠 자식을 원했는데,
손주대에서 뜻을 이루려나 보다”
시모께서는 태어날 돼지띠 손자의 양육비, 교육비를
책임지신다고 하며
“딸을 낳을지도 모르잖니?” 친정어머니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
어머님께서는 부적을 차거나 푸닥거리를 하시진 않았지만
신수점 보기를 즐기셨고, 궁합을 아주 중히 여기셨다.
시아버님이 토끼띠이고, 당신께서 양띠이니 천생연분,
여기에 돼지 띠 자손만 있으면 금상첨화이겠는데
7남매를 두셨어도 돼지띠가 없었다.
나는 쥐띠이다.
양띠아들과 쥐띠 며느리는 자미 상충, 원진 살이 끼어 있는
나쁜 궁합이다.
궁합을 보지 않는 친정 부모님께는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억지 춘향으로 쥐띠 며느리를 보신 이 어른은
큰 아들네를 생각하면 매양 불안하셨는데 돼지 한 마리가
턱 찾아온다니 이제야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듯 좋아하셨다.
“낳거라. 해, 묘, 미 삼합. 삼대 적선을 해도 받기 어려운 복이다”
“딸이다. 이번엔 딸이야. 낳거라”
이런 두 어머님의 권유 때문만이 아니라
뱃속의 생명을 지워버릴 수 없어
“혹시 딸일지도 몰라?” 기대를 하며
넷 째를 낳기로 하였다.
(2)
예로부터 측간과 사돈은 멀리 있을수록 좋은 것이라고 했는데
나의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님은 당신들의 자매나 친구보다도
더 가까이 지내셨다.
친정 어머니께서 여섯 살 위신데,
이 어르신들은 자식들의 혼례식을 끝낸 며칠 후
친목계를 만드시고는
어머니가 병환으로 바깥출입을 못하시게 될 때까지
한 달도 거르지 않고 33년을 매월 18일 종로 한일관에서 만나셨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두 분이다.
내 어머니는 학교 문전이라고는 가본 적도 없는 시골 태생이시고
어머님은 전문학교 출신의 신여성이시었다.
어머니는 조선조 유교문화가 만들어 놓은 전형적인 여인으로
솜씨와 맵씨와 말씨가 조신하고 기품이 있으셨고
시어머님께서는 사회 전반에 능하고 활달한 여 장부이셨다.
자식을 나눠 가졌다는 인연 말고, 서로 다른 상이점을
서로가 좋아하셨던 것 같다.
이 두 분이 나누는 대화중에 내 호칭은 “충신동 애”였다.
“오늘 모임에 충신동애를 대동하고 나갑니다. 반갑게 만나세요”
이런 식으로 시어머님은 말씀하시고
“충신동애가 사내 녀석 셋에 휘둘려 어질 혼이 나가 있더이다”
대체로 이렇게 나를 충신동 애라고 부르셨다.
이 충신동 애가 넷째 아이를 낳게 되었으니
시댁인 동숭동과 아현동 친정사이에 전화는 더 빈번해 졌고
“낳거라”를 입에 달으신 두 어머니는 염려가 태산이었다.
“흰 대접에 냉수를 담은 후, 젖을 짜서 떨어뜨려 보거라
녹두알처럼 똑 떨어지면 아들이고, 물에 풀어지면 딸이다”
“배꼽이 단단하면 딸이고, 물렁거리면 아들이다”
“방바닥에 모로 누어서 아이가 눕는 곳으로 기울면 아들이다”
이런저런 조짐을 설명하며 초반에는 성별도 바꿔지니
모든 비방을 써서라도 뱃속의 아이를 딸로 만들자고
두 어른은 신이 나셔했다.
“뭐니뭐니, 에미에겐 딸이 있어얍지요. 마님 닮은 걸출한 딸 하나 나야지요”
어머니가 말씀하시면
“마님 닮아 얌전한 딸을 얻어야지 무슨 말씀입니까?”
시모님도 겸양의 말씀을 하셨다.
“우리 계동에라도 다녀올까요?”
시어머님이 말씀하시는 “계동”.
그 것은 어머님의 단골 역술가를 말하는 것이다.
계동 골목으로 죽 들어가 중앙 중학교 보이는
곳에 우물이 하나가 있는데
우물 앞으로 꺾어지면 한옥 대문이 나오고,
거기 어머님의 오랜 단골이자 상담자인 여자가 살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우리 선배가 되신다고 하는데
명필에 호쾌하고. 수수하고, 재담도 뛰어나서
딱히 점을 보러간다기보다 친구 집에 놀러가는 마음으로
어머님은 즐겨 찾아 다니셨다.
“신미생 아들에 병자생 며느님을 보신다구요?”
서슬 퍼렇게 놀라며 말리던 사람도 이 분이었다.
인연이 닿아 나는 원진 살 낀 며느리가 되었고,
새해 신수점을 보러 가시는 어머님을 따라 들어가면
유심히 나를 바라보며 “나, 간판 내려야 겠다. 아들 또 낳았어?”
농담을 하곤 했다.
팔자 도망은 못하는 것이라고 자기의 철학을 주장하면서
그러나 당면한 운세에 적응하는 자세에 따라
길흉이 엇갈릴 수는 있다고 부언하며
“그러자니 남모르는 고충이 얼마나 심할꼬?”
측은한 눈길로 나를 보았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아주머니 저 인내심 별로 없거든요”
내가 말하면
“옳거니, 卯생 아들이 태어나 아비를 묶고,
辛생 아들이 태어나 에미를 묶고.
이제 亥생 아들이 태어나 꽝꽝 묶어대니 마님,
자미 상충 원진살이 아무리 쎄도
아드님 부부 앞에서는 맥을 못 추네요”
“아들이라뇨? 또 아들인가요?” 어머님이 물으시자
“무슨 걱정이세요?
애기 엄마가 사주에 天文, 天干이 들어 있어서 여우보다 영특해요,
혼인 때 죽자하고 반대 안한 것은
색시감의 이 사주를 보고 꽤 잘해 나갈 것을 알았어요.
보세요. 잘 살잖아요? 궁합은 겉보다 속을 깊이 봐야 돼요”
이렇게 나의 네 번째 임신은
두 어머님들을 심심하지 않게 해드리며
산달을 향해 가고 있었다.
(3)
나는 자라면서 내가 딸이어서 좋구나 라고 생각해 본적이
단연코 없다. 아들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은 없지만,
딸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컸던 것이
내가 살았던 사회 환경, 아니 우리 가정 때문인지 모르다.
우리 집은 嚴父慈母가 아니라 慈父嚴母였다.
특히 다섯 딸들에 대해 어머니는 서릿발처럼 지엄했다.
둘째 딸과 셋째 딸을 연거푸 잃고 나서, 氣가 衰한 어머니는
넷째인 나와 동생에겐 훨씬 느슨한 훈도를 하셨지만,
우리 자매들은 이미 친정에서 “된 시집”을 살았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큰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일해주는 아주머니보다도 먼저 일어나
부엌의 큰 가마솥 아궁이에 겨울이면
조개탄을 활활 불을 살려 놓고 설설 물을 끓여 놓아야 했다.
그러고 나면 어머니도 아주머니도 부엌에 들어섰다.
출근 준비에도 바쁜 큰딸에게....
딸은 태어나면서부터 떠나는 존재로 키워졌다.
어머니에게 딸은 시한부 자식이었다.
어떤 가문의, 어떤 가풍의 시댁을 만날지 모르는데
“오냐, 오냐” 기르면, 종당에는 저 서럽고 부모 욕보인다는 것이
딸에 대한 어머니의 불변의 철학이었다.
나의 정직한 기억으로는 어머니로부터 단 한번의 칭찬을
들은 적이 없다. 아무리 성적을 잘 받아와도,
상을 타와도 늘 차갑고, 냉정 하셨다.
그러나 그 어렵던 일제하의 식량난 때나 육이오 전쟁 때
아들들의 밥에는 잡곡을 섞어도 딸들에게는 고운 밥을 먹이셨다.
어머니의 깊은 마음을 깨달은 것은 출가 후였다.
결혼을 하고 내 살림을 차리고 나니 자유천지요,
나는 해방된 몸이었다.
어머니에 비하면 시어머님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시어머님이 편했고, 그래서 따랐고,
무에 칭찬할 일이 있었겠냐만 그 분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또 한번 정직한 기억을 더듬는다면,
나는 단 한번도 어머니와 친정을 그리워 해본 적이 없다.
그런 존재인 딸.
속으로 속으로 가슴앓이 하면서 정을 감추어야 했던 딸.
동생이 신혼여행 떠나던 날.
그 옛날 두 딸을 잃고 통곡했던 어머니의 울음을 나는 들었다.
그런데 지금 넷째 아이를 가진 딸에게 어머니는
“낳거라. 낳거라. 딸일지도 모르잖니? 에미에겐 딸이 젤이다”
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4)
1971년 8월 16일 아침.
출산 예정일을 일주일 앞두고 産氣가 보였다.
진통이 시작된 후에 입원을 해도 되겠으나,
짐을 싸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세 번의 출산 경험이 있는지라 별 두려움이 없어
동네의 개인 병원을 예약해둔 터였다.
남편은 출장 중이었고, 연락을 받은 두 어머니는
“너무 서두는 것 같구나.
미리 병원에 가면 마음이 조급해 질텐데...?”
한결 같은 말씀으로 “서둘지 말라” 하셨지만
나는 혼자서 수속을 하고 입원을 했다.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조용히 그 아이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 동안 9살, 7살, 4살의 사내 아이 셋에 휘둘려
내 뱃속에 또 하나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았다. 몸이 무거워 지고 태동이 느껴지면 그제서야
“아, 아이가 있었지” 생각이 미쳤고,
부른 배를 보는 사람마다
“딸을 낳으려고 또 가졌군요?” 라든가 “딸이면 좋겠네요” 했을 때,
그럴 때마다 나 자신도 “그러게 말예요...” 대답하였기에
막상 아이가 나오려고 하자, 태어날 아이가 아들이면 얼마나 못할 짓을 했었나,
미안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태교도 한번 제대로 못했구나, 아가야.
이미 남자로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는 너에게 모두들
“딸아기를.....”
노래하며 너를 서운하게 했을지도 모르겠구나, 아가야.
셋 가지고도 힘들어 절절매는데, 하나가 더 늘어? 하면서
때때로 네가 생긴 것을 부담스러워 했는지도 모르겠구나, 아가야.
이를 어쩌니? 미안해, 정말 미안해.
집에서 10분 거리의 병원인지라,
병실 예약만 해 놓고 産痛이 시작될 때, 그 때 병원에 가도 되려만
나는 아이가 세상에 나올 때까지 그 아이를 맞이할
나만의 의식(?)을 치르고 싶어서 짐을 챙겨 나섰던 것이다.
말복을 지난 더위는 막바지 기세를 부려서
세상이 끓는 가마솥 같은데 산모용 입원실은 밖으로 낸
작은 유리창을 빼고는 밀실처럼 막혀 있어서
한증막이 따로 없었다.
짐을 풀면서
솜씨 좋은 어머니가 새로 만드신 분홍빛 아기 옷에 눈이 가자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면 꼭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를,
그래서 학교도 다녀보고, 돈도 벌어보고,
큰 소리도 치면서 살고 싶다 를,
입에 달고 사셨던 어머니.
딸 다섯을 낳을 때마다 섭섭하고 섭섭하여
몽땅 도둑을 맞았다 해도 그렇게 허망하지는 않았으리를
노상 읊어 대셨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당신 딸이 낳을 넷째 아이는 “딸이기를...” 바라는
당신의 절박한 염원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21살에 출가해 온 당신의 며느님.
곱고 얌전하기로 隣洞(인동)에 소문이 자자해서
삼고초려 청혼하여 자부로 맞아드리셨던 그 외며느리.
딸들 마져도 어려워하는 그런 지엄한 분이셨으니
어리고, 곱고, 얌전한 새 며느리는 첫날부터 시어머니만 뵈면
몸이 얼고, 입이 얼었다. 십 년, 이십년, 삼십년을 함께 살아도
“진지 잡수세요” “전화 받으세요”
말밖에 고부간에 오가는 말이 없어서
어머니는 腹脹(복창)을 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13년을 더 사셨는데
아버지 돌아가신 날부터
어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하시는 것이
“저를 어서어서 데려가십시요.
지루하고 지루해서 살기 힘이 듭니다”였다.
어느 날 내가
“어머니, 어머니는 장말 세상 살기가 싫우?” 정색을 하고 물으니
“말똥으로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데 난들 왜 살기 싫겠니?
그런데 네 새형이 하도 말을 하지 않으니까,
기가 콱 질려서 살 힘을 잃는다” 하시며
“늬들 세 자매 없으면 어쩔 번했나 싶구나.
낳을 때 섭섭하더니만 딸 때문에 산다.
그 중에 네 재미로 산다. 어쩐다냐? 너는 딸이 없어서...”
바로 그 것이었다.
내가 낳을 넷째 아이가 딸이기를
이 어른이 그렇게 소망하시는 이유는...
며느리 사이에서 외롭게 늙어갈, 딸을 생각하는 老母의 母情이었다.
딸. 모두들 딸이 더 좋다는 이유가
여자로 태어나는 딸 자신보다, 엄마의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살갑고 따뜻하고,
정겨워서 자식을 낳고 기른 재미를 누릴 수 있기에,
늙으막에 외롭지 않기에, 딸이 더 좋은 것이라면
나는 곧 태어날 나의 네 번째 아이가
굳이 딸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아가야, 미안 해”
나는 産道를 뚫고 나올 아이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리라 다짐하며
비빔밥이며 냉면을 시켜 놓고, 戰爭에 나가는 용사처럼
鬪志를 불살랐다.
살살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5)
오전 10시에 병원에 들어와서 4시간이 지날 때까지
진통이 시작되지를 않았다.
시어머님께서는 “밤중에나 낳게구나” 하시며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삼복 뙤약볕 그 것도 한낮인 오후 2시에
돼지 삼겹살을 삶아 가지고 오셨다.
“미끄러지듯 아기가 쑥 빠져 나오라는 것이니 먹어두거라”
어머니의 한 손에는 노랑참외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작은 오래비 낳을 때 말이다. 아기가 비집고 나오려는데,
우물에 채워둔 참외를 마져 먹지 못한 것이 어찌나 서운하던지...
산후에는 못 먹지 않니? 그 생각이 나서 가져 왔다”
아기를 낳은 후에는 먹을 수가 없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점심에 먹었던 비빔냉면 생각이 났다.
옳거니 아기 낳고 난 후에는 미역국만 먹겠구나,
냉면을 못 먹겠구나,
그 안에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에게
물냉면을 시켜 달라고 했다.
“무슨 물냉면? 소화 안되게.?
애 낳으러 와서 냉면 먹었다는 말은 들어도 못 봤다.”
배달되어온 냉면을 먹기 시작했을 때였다.
별안간 허리가 두 동강이 나듯 끊어지게 아팠다.
시계를 보니 3시 15분.
“엄마, 엄마, 나 죽어!!” 소리를 지르는데
“뚝” 하고 소리가 나며 콸콸 양수가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닌가.
냉면 국수가 입에 담긴 채 분만 실로 옮겨졌고,
진통 시작 15분만인 3시 30분에 나는 네 번 째 아이를 순산했다.
4.4 킬로그램의 사내아이. 아들이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오신 시어머님의 얼굴엔 희색이 만연했다.
혹시 딸일 지도 모르니 꼭 낳아야한다고,
단골 역술가에게 까지 다녀오던 때와는 영 딴 판이셨다.
“아이고, 형들 호령하게 생겼구나. 해묘미 합이 태어났는데,
호적 파서 남의 가문에 보낼 수 있나? 잘 했구나, 잘했고 말고..”
친정 어머니께서는 공연히 화를 아이들에게 내셨다.
큰애가 제 동생 손을 잡고 병실로 들어서자
“이 녀석들아, 이제 느 에미 죽게 생겼다.
말 안 듣고, 장난질만 쳐봐라.
느 에미 힘들어서 병들어 죽는다. 냉큼 돌아가지 못 할거여?
에미 쉬야 돼”
입원실에 아직 불지도 않은 채 있는 냉면을 보며
나는 苦笑를 금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내가 짐승 반열에 들었잖아?
덕구가 아이 낳을 때도 나보다는 빠르지 않았다 그치, 엄마?”
“그러게 내 뭐라든? 서른 여섯에 낳는 자식은 효자라 안하던?
나올 때 에미 힘들게 안한 것처럼
크면서도 에미 어렵게 안 했으면 좋겄다”
어머니는 체념하듯 말씀하셨다.
“삼신 할머니는 뭐하시는 거람.
목 빠지게 아들 기다리는 집 놔두고...”
당신이 서른 여섯에 낳은 넷째 딸네가
유일하게 마음 편히 묵어 갈 수 있는 집이고
말없는 며느리에게 질리고 질리다가,
하루 종일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는 딸이 천하에 효녀 같아서
“서른 여섯에 낳은 자식은 효자”라고
터무니없이 주장하는 어머니 말씀을
입증이라도 하듯, 삼복 염천에
힘들이지 않고 태어난 막내는 힘들이지 않고 자라서
지금 서른 여섯 살. 두 아이의 아버지다.
며칠 후면 넷째 아들의 생일이 돌아온다
그 아이 생일 때마다 삼십 년 간 써 오던 그 말을
나는 아마 또 쓸 것이다.
“생일 축하 해. 엄마가 이 세상에 살아오면서 제일 잘한 일은
아들 셋이 있는 서른 여섯 살에 너를 낳은 것.
엄마의 아들로 태어나와 주어서 고마워.”
딸.
어렸을 때는 기르는 재미.
어른이 되어서는 엄마에게 둘도 없는 친구.
막막할 때도, 답답할 때도 더불어 의논하며 길을 찾는 해결사.
기쁨과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동지.
딸 가진 엄마들이 한결 같이 주장하는 이런 것들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면
분명 딸이 없다는 것은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사는 인생이리라.
나는 때때로 생각한다. 딸이 없는 내 노후의 적막을...
딸이라는 소중한 친구, 전천후 해결사, 평생의 동지를 못 가졌으니
더 늙어 힘없을 때 얼마나 고적할 것인가를....
당연히 나는 자구책을 찾아 나선다.
딸만이 줄 수 있다는 평생의 친구, 동지, 해결사를
딸 이외의 것에서 찾아 나를 풍성하게 하는 방법도 시도하고
그 보다는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을 훈련을 한다.
어떤 친구가 내게 말했다.
“옆에서 보기에 너의 칠 십이 참으로 넉넉해 보이는 구나”
“그래? 만일 그렇게 보인다면 어쩌면 딸이 없는 까닭일 거야”
그 친구는 내 말을 이해했을까?
나는 홀로 있는 시간을 즐긴다.
내가 주로 새벽 한 두 시에 잠을 자는 이유이다.
홀로 있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는 “제 혼자” 있는 것이지만
그 것은 “혼자” 있다는 것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다.
그 시간에 나는 비로소 나를 본다.
나의 본질을 만나고, 나의 어리석음을 만나고, 나의 반성을 만난다.
딸이 없으니 홀로 일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에서 시도된
“홀로 있음의” 훈련이라면 딸이 없다는 것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딸이 없어서 내 인생에 보탬이 되는 것은 또 있다.
나는 며느리가 셋이 있는데, 나로서도 때로 할말이 있다.
아마 내게 딸이 있었으면 딸을 붙잡고
이런 저런 속내를 나눌지 모른다.
벌써 십 년 전 일이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이 며느리와의 사이에 있었을 때
한 아들 (당시 미혼)에게
“엄마가 말야, 속이 좀...” 하소연을 시작하려는데
“아니? 어머니까지도 그 시시한 고부 갈등 대열에?”
한마디로 일축하는 것이 아닌가.
그 이후 나는 아들들과는 고부 문제뿐 아니라
어떤 불평도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객관적으로 시시한 이야기는 될수록 자제하고 있다.
이 또한 딸이 없는 덕이다.
딸.
세상에 더 없이 사랑스러운 존재.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궁색하게 딸이 없어서
좋은 점을 말하고 있지만
누군가 세상에서 제일 갖고 싶은 것 한가지를 말하라면
나는 서슴없이 “딸”이라고 말할 것이다.
첫댓글 남아선호 사조와 전혀 무관한 특별한 어머니와 그 윗세대 분들의 점잖고 순수한 딸바라기를 읽으니....마음이 따스해져 옵니다....정겨운 글...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삼신할머니는...참 편파적이여..
누구네는 아들만 쭈르륵
누구네는 딸만 쭈르륵
그러게요^^ 아들 넷 .. 끔찍하지요!
네.......전 아들 하나만 해도....키우기 힘들어 죽겠는데.......넷은 거의 신의 경지겠네요.......ㅎㅎ
친구같은 딸 키우는 저로서는 너무나 공감가는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머님의 사주에 天文, 天干이 들어 있어서 매우 영특하신 분이군요. 글을 너무 잘 쓰시고요.
혹시 님의 사주에도 天文, 天干이 들어 있지 않나요? ㅎㅎ
아들로 태어나셨지만, 딸 노릇을 톡톡히 하셔야 할듯함다. ㅎㅎ 훌륭하신 인품의 어머님을 두셨습니다.
딸노릇..ㅋㅋ
딸노릇 하기엔 나이가 들어 버려서요..ㅠㅠ
어떻게, 어떻게.....이런 글을.....연륜이 있응께.....조쭈 우에 깜새의 신의 경지 보다, 다른 의미의 신의 경지. ㅋ. 추천 꾸욱!
지금은 다 돌아 가셨지만, 울 아부지 친구 분은 딸만 주르르 8. 기가 막힌다. 거의 신의 경지에서 탈출한게 9번째 막내 머스마 한놈.
삼신할매도 참 무작스럽다. 어떤 집은 고추만 주루룩, 어떤 집은 조개만 주루룩.....고추든 조개든 나 하나만 주라.....ㅋ.
드릴 수만 있다면요 ㅋㅋㅋ
한문단 한문단..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다음 글을 기대하게 하는 매력에 푹 빠집니다.
고맙습니다^^
저희는 딸 둘을 연달아 낳아 살다가 둘째딸 낳고 나서 10년 뒤에 하나를 더 만들었어요.
95년이었는데 이때만 해도 세째아이 낳는 것은 의료보험이 안되는 거라. 산아제한을 위해 그런 것인데,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근시안적인 정책이었죠. 게다가 치사스럽기까지...
그런데 어느날 집사람이 말하기를 카톨릭 계통 병원에서는 세째 아이도 의료보험이 된다는 거라.
어느 병원에서는 의료보험이 되고 어느 병원에서는 의료보험이 안되다니, 무슨 그런 말도 같지 않은 이야기가 있어?
집사람이 직접 카톨릭 강남 성모병원에 전화까지 걸어 확인을 했어요. 세째 아이도 의료보험이 된다는 거라.
그러면, 이젠 의료보험이 다 되오니 4째도 한번 고려해 보시지요. ㅋㅋ. 4째는 명석하게 태어나나 봅니다.
무슨 편법인지 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그걸 우리가 캘 것 있느냐 하면서 다니던 병원을 강남 성모병원으로 바꿨지요. 좀 싸게 낳아 보려고.
출산 예정일이 다가온 어느날 술을 진탕 먹고 집에 왔더니 집사람이 애 낳으려고 금방 병원으로 갔다는 거라.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집사람이 조금 전에 도착했더라고요.
간호사가 애 낳는 곳에 아빠도 들어가 참관하겠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첫째 둘째 아이 낳을 때만 해도 애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간호사가 기겁을 하며 못들어가게 했었는데 그 사이에 달라진 모양.
그래서 가운을 입고 술 냄새를 풍풍 풍기며 세째 아이 낳는 것을 보았어요.
ㅎㅎ, 결국 3째는 술 냄새 풍기는 아빠 모습을 첫 대면한 것이로군요. ㅎㅎ
아이를 낳은 뒤 탯줄을 자르고 태반을 꺼낼 때 보니까 생각보다 탯줄이 가늘더군요. 연필 굵기 정도나 될까나? 어쩌면 태반을 꺼내느라 조금 당겨서 더 가늘게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에 그렇게 해서 늦은 나이에 세째 딸을 싸게 낳았어요.(편법인지 불법인지 모르겠는데 공소시효는 지났을 터이고. 주범은 우리가 아니라 강남성모병원이니까니)
초등학교 다닐 때 아이 엄마가 어쩌다 학교에 가게 되면 특히 외모에 신경을 쓰더라고요.
혹시 같은 반 친구들이 우리 아이에게 "야 니네 할머니 오셨다" 이런 소리 할까봐...
네째 아이 만드는 것은 이미 좀 늦었어요.
한 오륙년 전에 제가 집사람에게 "우리 네째 아이 한번 만들어 볼까나?"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딴 데 가서 알아보라더군요.
데려오면 키워는 주겠다면서...
저희 집도 넷째딸이 제일 스피리춸하고 시집(?)도 제일 잘 갔답니다....
죽순님께서도 넷째딸을 보시면...아! ..하고.....어깨춤이 절로 나실텐데...ㅎㅎ
95년이면 고1쯤 되었겠네요^^ 수지, 설리, 크리스탈, 강지영은 모두 94년생
저도 92년생 늦둥이(3째)가 있습니다. 누나 형 있고, 8년 뒤에 늦둥이 아들을.. ㅎㅎ, 그런데 큰 애들만큼 공부를 안하여 골치아픔, 너무 오야 오야 키웠나 봐요, 제 누나 형은 고 3때까지 엉덩이 빳따 맞고 컸는데, 요 녀석은 한번도 안 때렸더니 ..ㅋㅋ 현재 대입 재수중인데 걱정이 많습니다,
고추든 조개든 나 하나만 주라아. 있는 것들이 더 해! ㅋㅋ.
1. 각시를 만든다
2. 2세를 만든다
3. 광장에 글을 쓴다
딸 ........ 둘입니다.
어머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지는 알겠는데........ 전 아들이 그리워지네요.
애 써보지도 않았지만 ㅎ
님께서 딸노릇을 하셔야 할 듯.
아들만 둔 어미의 적막과 고독을 따스이 안아 드리세요.
혼자의 시간을 잘 보내시니 저런 작품도 쓰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