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인류한가족의 비전을 노래하는 그 날까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문형진 회장
지난 5월 1일,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통일교)이 창립 55주년을 맞았다. 통일교는 문선명 총재가 1954년 5월 1일 서울 북학동(현 동대문운동장 인근)의 한 신도집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이름으로 처음 발을 내디딘 이래 지금까지 반세기를 거치면서 전 세계 194개국에 선교기반을 갖춘 종단으로 성장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성경 욥기서의 말처럼 유래 없는 세계적 성장을 이룬 통일교는, 이제 또 다른 새로운 반세기의 시작을 향해 나아간다.
현대 기독교에 있어서의 선명한 이름, 문선명 총재
1920년 2월 25일 평안북도 정주군의 어느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한 아이가 오늘날 세계 194개국에 선교기반을 갖춘 한 종단의 창시자가 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문선명 총재의 삶은 그 시작부터 시련이었다. 1944년 10월, 청년 문선명은 생애 처음으로 감옥이란 곳에서 고문과 시련을 겪는다.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업학교 유학 시절 한인학생회를 통해 항일지하학생운동을 벌인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46년 문선명 총재는 “삼팔선을 넘으라”는 하늘의 계시를 받고 혈혈단신으로 월북한다. 그러나 그는 남한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월북하였다는 이유로 그해 8월부터 11월까지 수감되었다. 출옥 후에 그는 배짱 좋게도 다시 종교활동을 벌였고, 신도 수는 날로 늘어갔다.
그러다 다시금 북한의 종교말살정책과 개신교측의 고발로 간첩혐의가 뒤집어 씌워져 투옥됐고, 2년이 넘도록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한국전쟁 때 당시 흥남에 상륙한 유엔군에 의해 기적적으로 석방된다. 그는 끔찍한 수용소 안에서도 12명을 전도했다. 그리고 1950년 12월, 하늘의 계시를 받고 북한으로 넘어간 지 6년 만에 다시 남한의 서울로 돌아왔다.
문선명 총재는 바로 이듬해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됐지만, 그곳에서 부두노동과 목공, 미군 초상화 그리는 일 등을 하며 입에 풀칠을 하는 와중에서도 직접 토담집을 짓고 자신의 교리인 ‘원리원본’을 완성했다. 그리고 드디어 1954년 5월 서울로 다시 돌아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설하게 된다.
종단 또한 처음부터 시련이었다. 1955년에 통일교를 믿는 이대, 연대 학생 및 교수들에게 퇴학과 퇴직 명령이 내려졌다. 같은 해 7월에는 전쟁 당시 병역기피를 했다는 혐의로 또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지만, 무죄판결로 100일 만에 풀려났다. 시련은 여기까지였다.
문선명 총재는 1957년 교리서 ‘원리해설(1966년 ‘원리강론’으로 증보되었음)’을 발간, 본격적인 종단의 종교활동을 시작하면서 1958년에는 일본에, 1959년에는 미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리고 1965년, 문선명 총재는 세계 40개국을 순방하며 120개의 성지를 지정하고, 다음 해 종파간의 화합을 내건 초교파운동본부를 설립해 1971년 그 기반을 미국으로 옮기게 된다.
지난 30여년 여섯 번의 감옥살이 동안 싸늘한 감방 안에서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며 “저 물방울이 언젠가는 바위를 뚫듯이, 내 눈에서 떨어지는 이 뜨거운 눈물이 기필코 얼어붙은 하나님의 한 서린 가슴을 녹이고 해방시켜 드릴 것이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그였다.
90세 생일을 맞은 지금도 어김없이 새벽 두시면 일어나 세계와 인류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는 그이다. 지난 반세기를 오직 세계평화를 위해 뜨겁게 살아낸 그이지만, 그는 지금 또 다시 가슴 뜨거운 꿈을 꾸고 있다.
오는 2010년에는 현 통일교의 세계본부교회가 용산구민회관 자리로 옮기게 된 것이다. ‘천복궁’이라 이름 지은 이 곳은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불교, 이슬람교, 가톨릭을 비롯, 전 세계의 모든 종교인들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세계평화통일성전이다. 문선명 총재 그가 언제나 꿈꾸어 왔던 인류 대가족의 이상, 초종교적·초국가적 비전이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의 대성전, 세계평화의 중심지, 바로 그 원대한 계시와 꿈이 드디어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꿈은 다시 이어진다, 문형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세계회장
지난 2008년 4월 18일, 문선명 총재의 막내아들인 문형진씨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세계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취임 1년만인 지금, 300여명이었던 본부통일교회 신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현재 7,500여명에 이른다. 아버지 문선명 총재로부터 배운 신앙대로 그 또한 1999년부터,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조계사와 명동성당에 가 정성스레 기도를 드리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물론 아버지를 따르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그이다.
1979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하버드대학 철학과 하버드신학대학원 비교종교학을 공부하였던, 말 그대로 종교가였다. 문형진 회장은 아버지와 달리 처음부터 기독교적 신앙에 바탕을 두고 통일교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아직 미숙한 한국말이지만 그는 하나 하나 자신의 지난 구도력을 풀어놓았다.
“전 어렸을 때부터 여러 종교에 관심이 많았죠. 비교종교학을 공부하던 대학원 시절,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 모든 종교의 신상들을 다 집에 모셔놓았을 정도였어요.” 그는 통일교 세계회장인 지금 역시도 불교의 교리를 매우 존중한다.
그가 아직 천주교 학교 재학 시절, 갑작스런 형의 죽음은 그 자신의 삶과 죽음 전체를 되돌아보게 할 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 그는 동양사상에 심취해 승복을 입고 머리까지 깎았다. 그 당시 불교에 귀의해 접한 ‘무상’과 ‘무아’의 교리는 진리 이상으로 다가왔다. 참으로 모든 것이 무상했고,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이었다. 형의 죽음도, 또한 나 스스로 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가 모든 종교를 다 아우르려는 이유는 항상 배우려 하는 자세가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저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다른 종교지도자들과의 만남과 대화가 매우 중요해요. 그들의 깊이 있는 충고는 언제나 제게 많은 도움을 주지요. 우리는 아직 젊은 종교이기에 고대종교사상으로부터 보다 더 심오한 것들을 많이 배워야 합니다.”
통일교 세계회장직을 맡은 지 일 년이 넘었다. 문형진 회장은 자신은 처음부터 통일교도가 아니었다, 의심도 많이 하고, 심지어는 초종교대회 같은 건 쇼가 아닐까 라는 의심을 품었다며 당당할 정도로 솔직하게 고백했다.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깎고 대전(大殿) 안에 앉아 있던 어느 날, 아버님이 곁에 와 앉아계셨었죠. 분명 아버님이 절 쫓아내실 거라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식구들에게 절 변호하시는 거였어요. 불교공부는 좋은 것이다. 아들한테 내가 공부하라고 권했다면서요. 너무 놀랐고, 또 너무 감동받았었죠. 한 종단의 창시자의 마음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죠.” 불과 4~5년 전의 이야기란다.
문형진 회장은 통일교의 가르침이 사실은 단순하다고 했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상속 받으라는 이 한 문장 안에 통일교의 모든 게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사랑’은 통일교 신학의 본질이다. 이 사랑을 상속 받을 수 있다면 참된 인간의 삶을 실천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가정은 가장 위대한 훈련장이다.
가정이야말로 이 참사랑을 가장 잘 지켜내고 실천할 수 있는 장이다. 무엇보다 나아가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모태이다.
그리고 이 가정 안에서 또 가장 특별한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부부 사이다. 부부가 서로 위하고 참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참사랑의 가정의 전통을 이어간다. 이 안에서부터 온 인류를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진다.
“우리 종교에서는 부부 사이가 매우 중요해요. 우리는 부부 사이를 훈련이라고 생각하죠. 참사랑의 훈련이요. 이러한 부부 사이에서 우리는 참으로 말할 수 없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느끼죠.” 문형진 부부 내외는 이제 결혼생활 11년째다. 그러나 문 회장은 이제 신혼이라며 소년처럼 수줍게 웃었다. 실제로 두 부부는 소년 소녀 같은 모습을 꼭 빼어 닮았다.
문 회장에게 종교인으로서 느끼는 부부라는 의미에 대해 물었다. “가면 갈수록 서로가 닮고 떨어져 있으면 무언가 불완전한 것만 같아요. 무엇보다 둘이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하나님의 마음과 더욱 하나가 되는 걸 느낍니다.”
종교의 벽을 넘어서서……
젊은 문 회장에게 종교를 넘어선 수행자의 삶은 무엇일까, 인간의 삶에 있어서 종교란 무슨 의미일까를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다. 젊은 시절 구도욕에 불탔던 그였기에, 그리고 모든 종교의 벽을 넘어선 하나를 염원하는 통일교이기에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여태껏 보였던 온화한 미소는 뒤로하고, 천진한 얼굴로 베시시 웃으며, 난데없이 자신은 고등학교 때부터 이소룡에 미쳐있었다며 말문을 여는 것이었다. 그의 밝은 모습 회장으로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의 말인 즉,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지만, 정신만큼은 어렸을 때부터 동양의 지혜와 전통에 맞닿아 있었다는 표현이었다.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불교 공부를 하던 시절, 직접 달라이 라마를 예방하기도 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종교란 무엇일까요? 종교학 강의를 들을 때 교수님께서 처음 물어보는 질문이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지리적, 심리적, 신화적…… 종교란 인간과 어느 것 하나 분리할 수 없는 것이죠. 처음 인류가 탄생했을 때부터 종교는 있었으니까요. 어느 곳, 어느 시대에도 종교가 있었습니다. 바로 인간이란 것 자체가 종교이죠.”
문형진 회장은 지난 2년간 통일교가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교인들이 직접적인 선거를 통해 자기들의 책임자를 뽑고, 모든 부분에 있어서 더욱 투명해지고자 노력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아직 종교적 소수인 통일교에 대한 어두운 시선을 내부에서부터 밝혀나가겠다는 다짐이었다.
“통일교회는 아직 우리 사회에서 마이너리티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축복된 삶을 살고, 우리의 축복된 삶을 이웃을 위해 나누어주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에 대한 편견은 없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형진 회장의 말처럼, 종교분쟁을 넘어 종교전쟁과 타락으로까지 이어지는 이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찾아와 참가정의 이상을 함께 하고 인류한가족의 비전을 노래하는 성지”, 바로 이것이 21세기 통일교회가 꿈꾸는 새로운 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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