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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되고 헛되다 vs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재정리)
■ 모든 것이 헛되다?
다 해봤는데 결국은 헛되다
vs
선한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쳐라
(전도서 2:10)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창조주 신의 인생 관리법엔 항상 양면성이 있다.
꿀을 먹어라 이것이 좋다. 송이꿀을 먹어라.
vs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다.
술을 먹어라.
vs
절제하지 못하겠거든 쳐다보지도 말아라.
불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vs
그러나 잘못하면 화마가 있다.
물은 좋은 것이다.
vs
그러나 홍수가 있다.
시원한 바람은 좋은 것이다.
vs
그러나 태풍이 있다.
생각도 두가지로 온다.
할 것이냐 vs 말 것이냐.
물론 창조주 신의 창조 부분과 역사를 이끌어 가심부분은
완전 주권이시다. 무슨 선악과를 먹어서 죄를 범한 것인지,
그 죄의 크기가 어떤 것인지, 1천년 가까이 어떻게 살 수
있는지, 네피림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정말 3미터짜리 사람이 있었는지,
해 달 별 끝없는 은하계 등은 어떻게 만드셨는지
수많은 궁금증이 있지만 하나님의 주권에 관련해서는
우리는 질문을 할 수가 없다.
인간 주제에 대답할 수가 없다.
굳이 파헤쳐서 알려줄 필요도 없다.
그럴 것이면 창조주 신께서 성경에
써 놓으셨을 것이다.
■ 귀인을 의지말라?
귀인을 의지말라 vs 은혜를 입어라
(시편 146: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vs
(에스더 2:9) "헤개가 이 처녀를 기뻐하여 은혜를
베풀어 몸을 정결하게 할 물품과 일용품을 곧 주며
또 왕궁에서 으레 주는 일곱 궁녀를 주고 에스더와
그 궁녀들을 후궁 아름다운 처소로 옮기더라"
창조주 신의 양면교육을 주의 해야 한다.
한쪽만 주장하면 귀인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고해서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못해 무시하기까지 하게된다.
그가 나를 도와줘도 고마움을 모르게 된다.
귀인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은,
그 사람이 스스로 나를 해하거나 돕거나 할 수 없기
때문에 의지하지 말라시는 것이다.
창조주 신께서 그 사람을 움직여서 나를 돕거나
해하거나 하시는 것이다.
나도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정말 사람은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현재 나를 따르겠다고 장담하는 것도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 살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의심부터
하라는 것은 아니다. 믿어주되 완전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너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면서
귀인들에게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창조주 신께서 그를 통해 나를 해할 수가 있고
그를 통해 나를 도울 수 있는데, 함부로 언행을
일삼을 때는 신께서 그를 통해 나를 해하시고,
귀인에게 공손할 때는 신께서 그를 통해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에스더가 왕비후보자로 있을 때 해게에게 은혜를
입어 향품이나 어떤 물품들을 받고 아름다운 처소로
옮겨지게 된다.
싸가지가 없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
자기 귀여움 자기가 받는다는 말이 있다.
자기 할 나름이다. 심은대로 거둔다.
느혜미야나 다니엘도 충성을 다해 정직하게 포로나라
왕들을 섬겼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고,
총독도 될 수 있었고, 자국에 돌아가 성벽을 쌓을 수도
있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도
병자호란 때 청나라 볼모로 잡혀갔지만 그는 그 곳에서
청 황제를 독살시키고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서양문물을 배운다. 눈이 열린다.
그 나라에 잘 적응하면서 배워가면서 왕의 신임을 얻게 된
소현세자는 청 황제의 사냥과 잔치에 청함을 받는 존재가
된다. 느헤미야나 다니엘처럼 산 것이다.
소현세자도 나중에는 영원히 귀국을 허락 받게 되고
청이 명나라 전쟁 때 탈취한 금은보화까지 받아서 귀국한다.
하지만 자신이 왕이 되었을 때 그동안 배운서양문물을
발휘해야 하는데, 청나라에 대한 미움이 하늘을 찌르는
아버지 인조 앞에서 청나라를 칭찬하면서 서양문물을
적용하려고 했을 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일단 아버지 인조의 은혜를 입을 때까지 기다리던지,
자신이 왕이 될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다.
■외모를 안보신다?
(사무엘상 16:7) "창조주신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창조주신은 중심을 보느니라"
vs
(창세기 39:6)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사무엘상 9:2)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더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 하더라"
(사무엘상 17:42)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에스더 2:7) "저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고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
하더라"
창조주신께서 중심을 보시고 외모는 안보신다고 해서
외모를 거지같이 하고 중심만 바로 잡으면 된다고
착각하면 안된다.
용모가 아리땁고 붉고 뛰어나고 준수하다는 것이
그 나라에서 추구하는 외모이기 때문에 딱히 우리나라
외모하고 어떻게 비교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 나라에서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외모대로 이면 되고,
각 나라마다 그 나라대로 뛰어난 외모라고 생각하면
된다. 백인과 황인과 흑인대로 뛰어난 외모면 외모대로,
옛날의 외모면 그 시절의 외모대로, 현재는 현재의
외모대로 라고 생각하면 된다.
겉만 번지르하고 중심은 거지같은 사람이 있지만
그래도 중심이 바르게 잡힌 사람은 겉 모습도 준수하고
아름답고 신실하고 진실하고 멋있고 따르고 싶고
존경하고 싶고 본 받고 싶은 대상이 된다.
중심을 바로 잡지 않고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지 외모를 가꾸지 말라는 말씀으로
착각하면 안된다.
중심에 꿀이 들어 있는 사람은 꿀이 저절로 밖으로
흐를 것이고, 똥이 들어 있는 사람은 똥이 저절로
밖으로 흐를 것이라는 것이다.
■ 두려워 하지말라?
(누가복음 12:4) "내게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을 보면 사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죽일 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죽음 후에는 어짜피 영의세계를 알아야 알 수 있는
것으로 육으로 살고있는 인생들은 한치앞도 알수 없다.
창조주신께서 죽음후의 세계는 완전 퍼펙트하게
비밀에 부치셨다.
인생들은 일단 육의세계에서 잘 살아야 한다.
이 말씀을 잘 못 해석하면 자기의 종교의 신만 두려워
하면 되고, 그까짓거 사람들이야 아무 것도 아니니까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창조주 신은 직접 실행하시는 계산도 있지만
사람을 통해서 계산하실 때도 많으시다.
그 사람을 통해서 내게 일을 주시고, 돈도 주시고,
병도 고칠 수 있게 하시고, 친구도 되게 하시고,
삶의 즐거움도 줄 수 있게 하신다.
사람을 막 대하지 말라. 사람이 재산이다.
이기적인 종교생활로 가버리면 사람을 우습게 보게
된다. 자기의 종교신에게만 잘 하면 되니까.
이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이고
이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말씀하셔도
안하무인으로 이 땅에서 사람들끼리 잘 묶고 산다.
쟤는 우리 종교랑 달라. 쟤하고 싸웠어.
쟤랑 놀기 싫어. 쟤는 맘에 안들어.
(로마서 13:4) "그는 창조주신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 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창조주신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디모데전서 5: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 하게 하라"
일단 인생들이 죽을 수 있는 것은 늙어서 곱게 죽든지,
전쟁에서 죽든지, 사고로 죽든지, 스스로 생을 마감
하든지, 병으로 죽든지 하는데 얼마큼 심한 상태로
죽느냐가 관건이다.
나만 죽을 것인지, 나는 죽고 후손에게 합의금을 줄 것인지,
내 재산만 털고 갈 것인지, 자손의 재산과 화평과 즐거움까지
싹 털고 갈 것인지 죽음의 값도 아주 다양하다.
게다가 자기 나라법적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을
경우, 사람의 손에 의해 강제적으로 처형당할 수도 있다.
이런 처형의 계산도 나라마다 다르다.
빵을 훔쳤다고 팔이 잘리는 나라도 있고,
빵을 훔치고도 긍휼의 힘으로 더 많은 것을 얻는
나라도 있다.
저렇게 나를 죽일 수 있는 권세자들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이유없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내가 죄를 짓지 않는한.
그 권세자들의 권세는 창조주신의 사자로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권세자들이 이렇게 형벌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이를 보고 "그렇게 살면 이렇게 벌을
받는구나" 하고 두려워하게 하기 위함이다.
■ 정죄하지 말라?
(누가복음 6: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일반 사람들끼리는 비판할 권한도 없고, 정죄할 권한도 없고,
용서할 권한은 있다.
남을 비판하면 내가 비판을 받을만한 사건이 생기고,
남을 정죄하면 나한테 정죄받을 만한 사건이 터지는데
왜 그런 일이 발생하는지는 잘 모른다.
자기가 행한 것이 잘못인지 모르고 그냥 생각없이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쟤는 뚱뚱해서 내맘에 안들어.
쟤는 못생겨서 내 맘에 안들어. 내 스타일이 아니야.
무엇을 해도 안 이뻐" 라는 등 무책임한 여러 말을
수없이 내뱉고 산다.
그런 것이 부메랑으로 나한테 돌아오는데 그런 것으로
인해 이런 일이 생긴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어쩌다 생각으로 찰나같이 스쳐지나가는
생각으로 올 수 있는데 "설마! 그런 일로" 라고
무시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잘 모를 수가 있다.
(신명기 25:1)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그런데 정죄할 권한이 있는 사람이 있다.
'재판장'이다. 무기징역·사형을 언도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것도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다.
(야고보서 2: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그리고 '율법'도 있는데 이것은 '나라법' 이다.
율법을 교회법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데 아니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는데
내가 누구를 대놓고 차별하는 것 아닌 이상
남들은 모를텐데?
(시편 32: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육의세계에서 걸러내지 못하는 것들은
하늘의 신께서 걸러내시고 징계도 내리신다.
■ 게으르지 말라
왕같이 살아본 전도자가 모든 것을 해봤는데 이 세상의 삶은
헛되다 했다고 게으르고, 손 놓고, 생각없이, 비전도 없이,
꿈도 없이, 열심도 없이, 최선을 다하지 않고, 성실하지 않고
마구잡이식으로 함부로 대충 살면 안 된다.
전도자는 수고한 모든 것이 내 몫이라고 할만큼 수고했다.
그리고 누리기도 했는데 다 헛되더라 고백이 나온 것이다.
사도 바울이 나의 세상적인 모든 것이 예수를 알고 나니
"이런 것들은 분토와도 같다고 고백했다"고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으면 안 된다.
사도바울의 이런 고백은
예수가 '창조주 신' 이라는 것을 알 때의 고백이다.
예수가 종교의 신 정도인데 분토라고 한 것이 아니다.
사도바울은 학문이며 모든 것이 열심이 특심일 만큼
최선을 다한 사람이다. 그리고 나서 분토와 같다고
고백하는 것이지, 아무 것도 안하고 게으르고 노력도
안하고 손놓고 있으면서 세상적인 것은 분토와 같다고
한 것이 아니다.
게으른 자는 게으른 자의 죄값만 받을 뿐이다.
■ 종교 싸움 아닌 '선함' 싸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나면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
이 것은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다.
이 면류관은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고 자부하는
기독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종교생활을 열심히 한 자들이 받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달려도 그냥 달리는 것이 아니라 '선한싸움'을 싸워야 한다.
뺏을 것이냐 나눌 것이냐, 사기를 칠 것이냐 말 것이냐,
도둑질 할 것이냐 말 것이냐, 남을 도울 것이냐 방관할 것이냐,
용서해줄 것이냐 말 것이냐, 미워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이간질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험담할 것이냐 말 것이냐,
무시할 것이냐 존중할 것이냐, 사랑할 것이냐 말 것이냐
정직할 것이냐 척할 것이냐 등 바른생활의 싸움이지
이 종교를 믿을 것이냐 저 종교를 믿을 것이냐의 싸움이 아니다.
종교는 새로 생성될 수록, 한 종교가 크게 발전할 수록
이기적으로 다툼과 분쟁과 싸움과 전쟁이 발생한다.
종교가 평화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쟁이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도 종교의 믿음이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사심없이 베푼 사랑 아닌 것은 참 사랑이 아니며
자기네 종교로 와야만 무언가 주는 사랑은 사심있는
'무늬만 사랑'으로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심없는 사랑이 아니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
누구든 잔치를 베풀 때에 가난한 자들과 몸이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고 하신다.
그들은 내가 다시 갚을 수 없기 때문에 내게 복이 된다.
이런 것도 긍휼의 마음이 지속되지 않으면 못한다.
하지만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여
잔치를 하게 되면 그들이 다시 나를 청하여 갚음이
되기 때문에, 나의 선과 악의 값이 계산당할 때
이런 것은 복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이것을 성경은 '두렵건대' 라고 하신다.
또이또이 아니면 마이너스다.
■ 실시간 '면류관'과 '징계'
종교인이나 일반인이나 늘 선과 악의 싸움을
하는데 항상 선이 이겨야 복을 받을 수 있다.
싸움을 선으로 이겼으니 결과는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인 것이다.
면류관을 받는다는 것이 이 땅에서
그냥 저냥 살면서 종교생활 잘 하다가
죽어서 면류관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의 삶의 값으로 '죄의 값'과 '복의 값'이
영의세계에서 형성되는데 서로 상계되는 시간이 있다.
(전도서 12:14) "창조주 신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창조주 신께서 인생의 모든 행위를 계산하시는데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계산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은밀한 속'을 계산하시기 때문에 무슨 일로
이런 계산을 당하는지 알지를 못할 수도 있다.
이 땅에서 나의 삶의 값으로 어떤 계산도 당하지
않고 그냥 저냥 살다가 죽어서 창조주 신의 심판대
앞에서 서서 심판을 받는다고 착각하고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음 직전에 뉘우치고 회개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정말 오산이다.
그동안 나의 삶도 괴롭고 자녀의 삶도 괴롭다.
창조주 신의 그 어떤 심판도 없이 인생이 그냥 저냥
산다고 하면 이렇게 아주 영원하도록 다른 삶이 나오질
않는다 절대로. 로봇 같이 다 똑같아야 한다.
태어나는 것도 '나' 위의 '나'에게서 '이월'된 삶이니
그것도 심판의 값이고, 태어나서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선하게 살고 악하게 살았냐에 따른 결과물이
있는데 이 것도 신의 심판에 의해서다.
이 땅의 삶은 그냥이 없고 공짜가 없다.
창조주 신은 인생의 '모든 행위'를 계산하신다.
실시간으로 항상 하신다. 그래서 인생의 위가 있고
아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돌고 돈다.
이 모든 '행위'라는 것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도 있지만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의 목적, 동기부여, 과정, 생각,
눈길, 손짓 발짓, 무시함, 업신여김, 허황된 큰소리,
심한 질책, 떵떵거림, 험담, 이간질, 떠넘김, 무관심,
오지랍, 모의, 계략, 실수, 조심하지 않음, 장담, ~척,
자랑, 남에게 피해를 주고, 남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는 행위 등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것까지 디테일하게 하신다.
이런 속의 것들이 밖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오지랍은 나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오지랍 값을
내가 고스란히 물어야 한다.
■ 자기의 자리에서 달린다
학교에서도 수업을 받으면서 시험이라는 것을 보는데
이 땅에서는 1등을 향해 달려간다. 1등은 한 명이다.
하지만 창조주 신의 말씀이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면류관을 주신다는 것은
1등이 아니다. 모든 자에게이다.
창조주 신께는 사람으로서의 1등은 없다.
혹여 1등이 있다해도 그 1등도 신의 작품이시다.
꼴등이 있다면 그 꼴등도 신의 작품이시다.
누구는 왕궁에서 달린다. 누구는 신하의 자리에서 달린다.
누구는 산에서 달린다. 누구는 바다에서 달린다.
누구는 논과 밭과 들에서 달린다. 누구는 전쟁터에서 달린다.
누구는 학교에서 달리고, 누구는 집에서 달리고,
누구는 각종 직장에서 달린다. 누구는 종교에서 달리고,
달리는 장소가 같을 지라도 일이 다를 수 있고,
쌍둥이도 똑 같지 않듯이 삶이 다 각자 다르다.
이렇게 다 다른 세대에 다른 때에, 다른 나라에, 다른 지역에,
다른 집안에 다른 일을 하면서, 얼굴도 비슷하지만 똑같지 않고,
지문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아주 다양하게 다르게 산다.
이런 것이 내 잘못인가? 아니다. 창조주 신의 뜻이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날 때는 나의 삶의 값이 있다.
나는 하녀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비전과 꿈을 가지면
인생이 바뀔 것 같아. 꾀를 냈지만 먼 길을 돌아
자기의 자리에 가 있는 것을 본다.
누구는 꿈과 비전을 가지고 달렸지만 꿈과 비전을
이루지 못한 삶도 있고, 누구는 돌맹이 같이 아무 꿈도
없고 비전도 없이 살았지만 그래도 나름 뭔가 된 것도
있는 것을 본다.
■ 남의 삶을 따라하지 말라
졔가 왕궁에서 잘 사는 것을 보니 나도 따라할까?
쟤가 산에서 잘 사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할까?
쟤가 바다에서 잘 사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할까?
쟤가 논과 밭에서 잘 사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할까?
쟤가 영어를 잘하는 것을 보니 나도 따라할까?
쟤가 노래를 잘하는 것을 보니 나도 따라할까?
그런 삶을 따라해서 잘 되면야 누가 뭐라냐만…
삶의 종류는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마음에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면 된다. 해도 해도 안 되는 것에
목매어 살 필요도 없다.
안하고 싶은데 꾸역 꾸역 하게 되는 일도 있다.
하지만 도덕적이고 바르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등은 따라해야 한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듯이 악은 따라하면 안 된다.
인생의 삶은 이렇다 저렇다 구분을 짓지 못한다.
그냥 다 전부 영의세계에서 창조주 신의 심판의 값대로
태어나 살다가 간다.
너와 나와 쟤와 얘의 삶이 다 다르다.
그것을 우리는 운명 숙명 그런다.
창조주 신께서 운명을 바꿔주시면 모를까 사람 스스로가
운명을 개척하고 바꾸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모든 것이 헛되다.
vs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쳐라.
인생이 헛되다 해도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라고 말씀하신다.
■ 다 해봤다 … 헛되다
전도서의 결론은…
사람의 삶은 이렇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
전도자 나도 누구 못지 않게 지혜스럽게 살았고,
왕권을 누리고 잘 살았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런 것도 헛되더라 이다.
근심걱정이 있거나, 먹을 것 입을 것 걱정하고
사는 자들은 인생이 헛되다 소리는 안 나온다.
"힘들다" "죽고 싶다" 소리는 해도.
해볼 것 다 해보고, 먹을 것 다 먹어보고,
입을 것 다 입어보고, 즐길 것 다 즐겨보고
살아봤는데, 그런 것이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나이는 먹을 대로 먹고, 삶이 평온할 때,
안정권에 들어서서 더 이상의 비전이 없을 때 쯤에
이런 삶이 다 헛되다는 생각이 든다.
못 죽어서 사는 것이지만, 이렇게 80 넘어까지
산들 모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체바퀴만 돌지.
그래도 돈이 많다면야 더 살고 싶겠지.
그렇게 먹어보고 입어보고 즐겨보고 하는 것들은
그나마 창조주께 복을 받았을 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일의 결국을 들었느냐? 사람의 본분을 잘해라.
하나님은 사람의 '선' '악'을 심판하신다.
창조주 신께서 사람의 선과 악을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셔도
내 앞에 펼쳐진 '복'은 어떤가 모르겠지만 '징계'에 대한 것은
우연히, 그냥, 재수 있고 없고, 어쩌다가, 저절로로 치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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