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 조선26대 고종황제의 정부인 명성황후
개화기에 조선의 개화를 촉진하던 황후는 1895년
10월 8일 일본낭인들에게 시해를 당하였다.
명성황후는 1851년에 아래생가터에서 태어나서 여덟살(8세)
때 까지 여기서 살았으며 16세에 왕비가 되었으며 그의 아버지
민치록은 영주군수를 지냈으며 그의 6대조 할아버지는 민유중
으로 19대 숙종의 부인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다 따라서 숙종의
장인이므로 민씨 집안에서 왕비가 두사람이 태어난 것이다.
이제 실실구경을 해봐야지.....
입장료와 주차료를 지급하고 안으로 들어 관리사무실옆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앞을 보면 조금만 연못과 정자를 볼수 있는데
아마도 옛날의 정원모습을 재현해 놓은듯 보기에 좋았다.
연못안에서 살아가는 잉어들이 엄청 많았다.
관광객들이 먹이를 주는 관계로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면 이렇게
모여든다. 엄청난 크기와 숫자다.
조그만 정원을 지나면 명성황후 기념관이 바로 앞에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맨처음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초상화를 대하게 된다.
기념관 안에는 명성황후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 있는것을 볼수가 있다.
밖으로 나와 생가 쪽으로 가다보면 명성황후순국숭모비가 새워져 있는
것을 볼수가 있고 숭모비에 대한 안내가 작은 화강석에 새겨져 순국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명성황후 생가의 밖에서 본 모습이다.
들어가는 행랑채에 보면 조그만 안내판이 있는데 여기에는
우리말과 일본어 영어로 명성황후에 대한 안내맨트가 나오도록 방송시설이
되 있어서 누구라도 버튼을 누르고 들으면서 구경을 할수가 있다.
생가 본체
생가본체 거실(마루)에 마련되 명성황후 초상화
생가별체 (별당) 여기에서 명성황후의 어린시절을 보낸곳으로 안내되있었다.
명성황후의 어린시절이란 안내판
행랑채에 만들어진 모형 옛시절 우리의 조상님들이 쓰던 다듬이하는 모습
옛날에 사용하던 농기구들 쟁기와 가래 삼태기등이 전시되 있었다.
사랑채로 알려져 있는 건물
사랑채에 놓여져 있는 상 (어디에 쓰이던 물건일까?)
글공부 할때 사용하던걸까? 아님 겨자상이라고 하는걸까?
명성황후 생가는 6대조 할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막으로 건립되어 명성황후의
부 민치록이 살던집으로 여기서 명성황후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안채에 있는 부엌 아련한 기억이 되살아 난다.
지금 크는 아이들은 전혀 이런걸 모를터이지만 50이상 된 사람들은
다 알수 있는 물건들이 아닐런지 .....
기름틀이며 쌀두지 맷돌 절구 광주리 소구리등등 ....
사랑채의 한모습 좌측 조그마한 문을 넘어가면 별채가 있다.
행랑채 여기에는 집안일을 하는 노비들의 거처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이 집으로 들어오는 대문이다.
하인들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은 모습 배짜는 배틀과 여인의 모습
바로보이는 왼쪽 중문을 들어서야만 안채로 들어갈수가 있다.
별당채에서 작은 문을 나오면 이런작은 정자를 만나는데
여기에는 아래와 같은 비가 세워져 있는데....
"명성황후탄강구리" 라고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는 작은 정자다.
뜻은 : 명성황후의 태어남을 기념하기위하여 고향에 세운 비다.
탄강은 임금이나 성인이 태어남을 뜻하고 구리는 고향을 뜻하는 말이란다.
이건 또 왠비 정각옆에 있는 이 비는 민유중의 묘, 신도비로 안내되 있었다.
민유중은 조선 19대 숙종의 장인으로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다.
그 의 묘가 여기서 약150 m 뒤쪽에 안치되어 있는데 1650년 효종1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벼슬을 거처 호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거친것으로 안내되있었다.
작은 문이 명성황후 생가 뒤쪽작은 산을 오르도록 난 길이다.
시간이 있으면 관리사무실에 문의하여 한바퀴 돌아봄도 좋을듯 하였다.
수년전에 와서 묘소를 돌아보고 내려온 기억이 난다.
생가 옆에는 이렇게 관광객들의 입맛을 돋우기 위하여 설치된 주막도
있으며 기념품 판매점도 있다.
여기 각종 부침개와 막걸리 한사발도 좋은 추억을 만들수 있을터 ~~~.
명성황후생가 관리구역에 있는 감고당.
감고당 ~ 조선왕조의 두 왕비를 배출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로 안내되있었다.
인현왕후가 장희반과의 갈등으로 왕비에서 물러난뒤 복위될때까지 거쳐
하던 곳이며 명성황후 또한 8세에 여주에서 올라와서 왕비로 간택, 책봉
되기 전까지 거쳐하던 곳이기도 하단다.
영조가 효성이 지극한 인현왕후를 기려 "감고당" 이라는 편액을 하사한
것이란다.
본래는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었으나 도봉구 쌍문동으로 이건
되었고 쌍문고등학교 건립으로 철거위기에 처하여 2006년 명성황후 생가
지 성역화사업으로 이 장소로 이건 되었으나 본래의 모습이 조금은 변형
되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감로당 현판을 달고 있는 행랑채 문안으로 들어가면오른쪽에 사랑채가 ..
감로당의 본채
감로당에서 밖으로 나오는 작은 쪽문
소원바위 ~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부부가 여기 소원을 빌어 명성황후를
얻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바위로 안내되 있었다.
옛날의 우리조상님들의 기복신앙을 엿볼수 있기도 하다.
밖으로 나오면 소를 이용한 연자방아를 볼수가 있는 작은
초가도 볼수가 있다. (그냥 재미로 16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