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해 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파리의 여인’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동건이라는 배우가 사랑하는 한 여인에게 ‘내 안에 너 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한 마디로 내 마음에는 늘 네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랑고백입니다. 한 동안 이 대사가 인기를 누렸습니다.
내 안에 있는 사람, 여러분에게는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 내 안에 머무는 사람이 나에게 좋은 감정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면 흐뭇하고 기쁘고 감사하지요.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면 마음이 불편하고 짜증이 나고, 감정이 상하게 됩니다. 밥맛까지 잃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있는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게 해 줍니까? 오늘은 빌레몬 안에 있는 오네시모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자신의 종이었던 사람, 주인과 종이라는 신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사랑과 배려 속에서 한 집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도망을 쳤습니다. 물질적인 손해를 끼쳤습니다.
빌레몬은 도망친 오네시모를 생각할 때마다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괘심한 마음, 불쾌한 마음, 보복하고 싶은 마음 등등 빌레몬의 마음 안에 있는 오네시모는 편안한 대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 오네시모가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지난 주일에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사고뭉치 오네시모가 로마에서 바울을 만나서 회심했습니다. 그는 (1) 무익한 자가 유익한 사람이 되고, (2) 도망자가 귀가자가 되고 (3) 배신자가 심복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초대교회에 귀하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었으며, 문헌에는 순교까지 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모가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빌레몬이 도망자인 오네시모가 돌아왔을 때에 그 당시의 관례나 법대로 도망자 오네시모를 대하지 않았습니다. 용납하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권면을 수용했습니다. [갈3: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말씀이 실천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 안에 혹시 용서하지 못한 오네시모는 없습니까? 생각할 때마다 괘씸하고 불쾌한 오네시모가 없습니까? 바울이 빌레몬에게 용서에 대한 실제적인 권면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과 그 실천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를 일깨워 줍니까?
1. 바울은 빌레몬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일깨워 줍니다.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오네시모가 집을 떠날 때에는 그냥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인 그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쳤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달아났습니다. 그러니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시리고 불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을 도망친 사실에 대해서 원색적인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도망쳤다, 달아났다"라고 말하지 않고, "떠났다"라는 부드러운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도 능동형으로 쓰지 않고, 수동태로 “떠나게 되었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 동사를 사용한 것은 오네시모의 도망침에는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빌레몬에게 설명합니다. 15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떠나므로 ‘영원히’ 머물게 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잠시"가 "영원히"로 바뀌어졌습니다. "떠나게 된 것은"에서 "두게 함이니"로 바뀌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으로 하여금 이 땅에서 오네시모와 맺은 주인과 노예 사이는 잠시 잠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버립니다. 그러나 이제 오네시모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 받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서로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로서 이 땅에서 뿐만 아니고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히 함께 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구체적으로 16절에서 설명합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지금까지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로 인하여 괘씸하고 불편했다면 이제는 노예와 원수같은 놈이 아니라 영원히 사랑받는 형제로 두어야 할 것으로 간곡하게 용서해 줄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사실 빌레몬의 입장에서 노예해방은 자신의 경제적인 손실입니다. 거기에다가 마음에 대한 상처와 분노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감정적인 분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 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간곡히 부탁합니까? 이미 바울은 오네시모의 변화를 보았습니다. 16절 하반부에 이어서 말합니다.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오네시모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을 체험했습니다. 새사람이 된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심장, 꼭 필요한 사람, 심복이 되었다고 했습니다(12). 무익했던 사람이 그 이름의 뜻대로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오네시모가 돌아가면, 영적인 관계에 있는 나에게도 그렇게 신실하고 사랑받는 사람이었으니 이제는 육신적인 관계(주인과 종의 관계)와 주안에서 관계된 빌레몬에게도 그러하리라는 것입니다. 충성스럽고, 잘 섬기는 종이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나의 오네시모가 있습니다. 나에게 물질적인 손해를 끼쳤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내 안의 오네시모를 생각할 때마다 괘씸하고 불편하고,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이때에 내가 보고 당하고 느끼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말고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든지 화를 복으로 바꾸시고,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에게 선이 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깨닫고 붙들게 될 때에 기꺼이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형들이 요셉을 종으로 팔아먹었습니다. 형이 아니라 원수들입니다. 형들 때문에 요셉이 애굽에서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종살이했습니다. 감옥살이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셉을 복 주셔서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형들이 요셉 앞에 섰습니다. 요셉이 자기들에게 복수하지 않을까 형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기꺼이 원수 같은 존재들인 형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용서해 주었습니까? 요셉에게는 섭리적인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형들의 모든 잘못을 기꺼이 용서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창45:5∼8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50:20의 말씀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오네시모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다.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다. 우리 하나님은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화를 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기꺼이 선포해 버리십시다. "내가 오네시모를 용서하노라." 화가 바뀌어서 복이 될 것입니다. 악이 바뀌어서 선이 될 것입니다. 실이 바뀌어서 큰 덕으로 우리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오네시모를 보다 용이하게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 자신도 사랑의 빚을 지고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고."
바울은 빌레몬에게 간청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아, 오네시모를 영접하기를 나 바울을 영접하듯 하라."고 합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바울은 빌레몬을 부르기를 "동무"라고 합니다. 대사도이시며, 복음을 위해서 앞장선 믿음의 사람, 그것도 목숨을 내어놓고 섬기다가 감옥에 있는 사람이 편지하기를 자기를 두고서 ‘동무’라고 부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빌레몬이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사실 빌레몬은 바울에게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나 바울은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내게 빚을 진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도대체 빌레몬이 바울에게 진 빚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다음이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빌레몬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빌레몬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은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진 것입니다. 그런 바울사도가 빌레몬에게 동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빌레몬은 '내가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으니까 오네시모에게 조금이라도 갚아야지!'라는 마음이 절로 일어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저번에 우리 교회에서 영화관람을 광고했는데 아무도 신청하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 가족끼리 [레미제라블]를 관람했습니다. 감동적이었습니다.
장발장이 빵을 훔쳐서 감옥살이 후에 이름을 바꾸어 살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시장과 공장 사장으로 성공합니다. 하지만 형사 자베르는 성공한 장발장을 의심의 시선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레에 깔린 한 노인이 숨을 헐떡이며 죽어갑니다. 장발장은 이 현장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형사 자베르 앞에서 수레에 깔린 노인을 구하게 되면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수 있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장발장은 자신이 처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괴력을 발휘해서 수레에 깔린 노인을 살려냅니다.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할게 될지 위기의 상황이지만 사랑을 실천합니다. 장발장이 그렇게 된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미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받은 사랑 때문에 사랑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는 옛날에는 자신을 비관하며 세상을 저주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누이동생과 조카 7명을 굶주림에서 극복해 내기 위해서 일용 노동자로 살았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점점 생활은 막다른 길로 빠져갔습니다. 그런 가운데 빵을 훔치다가 잡혀서 13년의 감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출옥 후에 어느 누구하나 그를 사랑으로 돌아보는 자가 없었습니다. 세상의 삭막함, 사랑 없음에 몸서리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그가 교회 사제의 배려로 사제관에서 하루밤을 지내게 됩니다. 그런 중에 그는 교회의 은그릇을 훔쳐서 도망칩니다. 그러나 결국 경찰에 붙들려 사제관에 왔을 때에 사제 밀리에르 신부이 말합니다. “은 그릇을 주고 은촛대도 주었는데 왜 촛대를 가져가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은촛대까지 줍니다. 신부가 장발장에게 무한한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 준 것입니다.
장발장은 바로 밀리에르 신부의 사랑과 용서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 계기로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평생을 남을 위해 살기로 작정하고,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주변의 사람을 챙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내가 잘나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착각하며 삽니다. 나는 정말 어떤 사랑도 못 받으며 산다고 비관합니다. 아닙니다.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나의 오네시모를 사랑하고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사랑에는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과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 우러나오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그저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이론적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18절 말씀에 볼 수 있습니다.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라고 합니다. 만일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빚진 것이 있으면 바울은 자기가 대신해서 그것을 변상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물질을 희생하면서까지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를 화평케 하고자 했던 사도 바울의 사랑의 마음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 노예는 사유재산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오네시모는 가진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로마로 도망칠 계획을 세우면서 도주하는 데는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가진 돈이 없으니 그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돈을 훔쳤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로마로 달아났습니다. 도주하는데 많은 경비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가면서도 쓰고 로마에 있으면서도 썼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로마에서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고는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의 권면에 따라 빌레몬에게 돌아갑니다. 문제는 주인에게서 훔친 돈을 갚을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돈을 다 써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바울 사도는 오네시모를 대신해서 갚아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재판을 위해 수감된 사도 바울이 무슨 돈이 있다고 오네시모를 대신해서 변제를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28:30에 보면 사도 바울은 2년 동안 로마에 있는 한 셋집에서 유했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2년 동안의 방세를 지불할 만큼의 경제적인 여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자기가 태어난 길리기아 다소 지방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당대 제일가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부모로부터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았을 것입니다.
또 바울에게는 장막을 만드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때때로 그는 자기 손으로 장막을 만들어서 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빌립보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빌립보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위해 정성어린 헌금을 보내주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손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변제해 주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22절 말씀에 보면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가 로마의 감옥에서 석방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만일 자기가 석방이 되면 빌레몬에게 가서 오네시모가 그에게 진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저 말로만 듣기 좋게 말씀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실제로 그 모든 것을 자기가 변상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종종 그런 말을 했습니다. 고전11:1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성도 여러분, 영적으로 보면 우리 모두가 오네시모입니다. 오네시모가 그 주인 빌레몬에게 불의를 행했고 또 큰 빚을 진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불의를 행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갚지 못할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그 빚을 누가 대신 갚으셨습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버려 피흘려 모든 것을 우리 대신 갚아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오네시모의 죄를 용서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쓰신 글 가운데 한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고 김태수 집사님이 유방암으로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임종 예배 시간에 마지막 부탁이 있다면서 내 손을 잡았습니다.
지난 가뭄 때 논에 물을 대면서 제일 교회 모집사님과 본의 아니지만 험하게 싸웠다면서 화해못한 일이 마음에 걸려서 세상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인 나더러 대신 가서 자기가 모집사님을 용서한다고 전해주고 또 그 모집사님더러 자기를 용서한다는 말을 대신 듣고 화해를 시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마하고 약속하고 그를 위해 기도했더니 평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후일 모집사님을 만나 내가 그 말을 하며 용서의 말을 전하고 그 집사님의 울음 섞인 용서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러면서 그는 말미에 "천국 가는 길"이라는 시 한 수를 덧붙였습니다.
"임종으로 가는 길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초행길이라 누구나 두렵고 떨린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자는, 용서받으며 용서하며 살아온 자는 영원한 소망의 길이다.
죽음의 길이 가장 힘든 사람은 화목하지 못하고 간 사람이려니….
미결 인생이 어찌 그 길을 평안히 갈 수 있으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결 인생으로 남지 마십시다. 이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내 안에 있는 오네시모를 용서하십시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오네시모라면 용서받는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송명희 시인의 노래를 같이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에 내 안에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또 용서 받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안에있는그이름(민남일곡,pf이명희,송명희시인후원연주)-최정심,강 ...
www.youtube.com/watch?v=uP9DBdno6rg
찬송 / 아버지여 이 죄인을(334, 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