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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이 읽어주시는 화엄경(2021.3.9.PM2시)
광명각품(光明覺品)
대비(大悲)로 중생을 제도하는 덕
또 화엄경 한 구절 공부해 보겠다. 화엄경에도 있고, 원효스님도 잘 말씀하시고 했는데 ‘장대교망 녹인천지어(張大敎網 漉人天之魚)’라, 부처님께서 많은 가르침을 펼쳐서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을 ‘큰 가르침의 그물을 펼쳐서 천신과 인간의 고기를 건져 올린다’ 이렇게 비유를 한 것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이 얼마나 양이 많은가? 화엄경만 하더라도 참 양이 많다.
우리들도 이렇게 화엄경을 공부한다 하면서 스님이 자꾸 ‘훌륭한 가르침이다’‘좋은 가르침이다’‘이 세상에서 최고의 가르침,진리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하니까 따라오기는 하지만, 재미가 없고, 심심하기도 하고, 당장에 소득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서 요즘 고기 잡는 배를 보니까 그물의 길이가 어떤 것은 1km씩이나 되는 길고 큰 그물을 펼쳐서 거기서 고기를 건져올리는 것도 있다.
옛날에는 투망이라고 해서 사람이 어깨에다가 딱 메고 펼치면 그것이 크게 넓지도 않은데 그래도 거기에 고기가 건져 올려진다. 거기 보면 물이 빠져나갈 구멍이 많고, 물은 물대로 빠져나가고 고기는 고기대로 걸리고 그렇게 한다. 새를 그물로 잡을 때도 역시 비슷한 방법인데, 그 많고 많은 그물눈이 있다고 거기에 다 고기가 걸리는 것은 아니다. 어쩌다가 한두 개의 눈에 고기가 걸리고 새가 걸린다.
부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많고 많더라도 그 구절구절마다 우리가 다 감동하고, 다 눈을 뜨고 다 깨달음을 얻고 다 거기에 어떤 이해가 가고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어쩌다가 한두 구절에 눈을 뜨게 되고 마음이 열리게 되고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
금강경이 그렇게 긴 경전이 아니다. 5천여 자 밖에 안 되는데 육조스님도 그 짧은 금강경 중에서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主而生其心)이라고 하는 그 구절 하나에 딱 걸렸다.
말하자면 금강경이라고 하는 큰 그물에 많고 많은 그물눈이 있는데 그중에서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主而生其心)’ 글자 여덟 자다. 그것을 다 계산한다 하더라도 그물눈으로 치면 여덟 눈이 된다. 그 구절에 육조스님이 눈을 뜨게 되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천하의 육조대사, 혜능대사가 되어서 오늘날까지도 ‘육조대사 육조대사’라고 하게 된 연원이 그렇게 되어있다.
화엄경이 참 많다. 그러나 우리도 그 가운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그 구절 하나, 일체유심조 다섯자 아닌가.
그 다섯자에 마음이 딱 감동을 받고 거기에서 어떤 마음이 열리고 그렇게 되는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그 길이 달라질 수도 있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큰 그물을 펼쳐서 사람이라고 하는 그리고 천신이라고 하는 고기를 건져 올리는 격이다, 이런 표현을 한다.
그렇다고 그 그물눈 하나만 달랑 이렇게 바다에다 던져놓고 그물이라 할 수는 없듯이, 딱 한 구절을 가지고 부처님의 경전이다 이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많고 많은 경전을 우리가 공부하고, 계속 접하다가 보면 그 가운데 우리 마음이 딱 이렇게 수긍이 가는 바가 있고, 감동되는 바가 있고, 눈이 활짝, 지혜의 눈이 활짝 열리는 바가 있다.
모든 인연들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 수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경전에 눈을 뜨게 되는데, 그 계기들을 보면 전부 그런 기회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느긋하게 ‘이것이 내 삶이고 내 생활이려니’ 생각하고 그저 꾸준히 생활로 생각하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오늘은 광명각품(光明覺品)에 ‘대비(大悲)로 중생을 제도하는 덕’이라. 큰 자비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덕.
9. 대비(大悲)로 중생을 제도하는 덕
1) 광명변조(光明徧照)
광명이 이 세상을 환하게 다 비추고 있다. 부처님 진리의 광명이 이 세상을 환하게 다 비추고 있다.
이시(爾時)에 광명(光明)이 과일억세계(過一億世界)하야 변조동방일억세계(徧照東方十億世界)하고 남서북방(南西北方)과 사유상하(四維上下)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시니 피일일세계중(彼一一世界中)에 개유백억염부제(皆有百億閻浮提)와 내지백억색구경천(乃至百億色究竟天)이라 기중소유(其中所有)가 실개명현(悉皆明現)하니라
그때에 광명이 일억 세계를 지나서 동방의 십억 세계를 두루 비추니 남서 북방과 네 간방(間方)과 상방(上方)과 하방(下方)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 낱낱의 세계 가운데 모두 백억 염부제와 내지 백억의 색구경천(色究竟天)이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것이 모두 다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2) 세존이 자리에 앉다
피일일염부제중(彼一一閻浮提中)에 실견여래(悉見如來)가 좌연화장사자지좌(坐蓮華藏獅子之座)어시든 십불찰미진수보살(十佛刹微塵數菩薩)의 소공위요(所共圍遶)라 실이불신력고(悉以佛神力故)로 시방각유일대보살(十方各有一大菩薩)이 일일각여십불찰미진수제보살(一一各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로 구(俱)하야 내예불소(來詣佛所)하시니 기대보살(其大菩薩)은 위문수사리등(謂文殊師利等)이며 소종래국(所從來國)은 위금색세계등(謂金色世界等)이며 본소사불(本所事佛)은 위부동지여래등(謂不動智如來等)이니라
그 낱낱의 염부제 가운데 다 보니 여래께서 연화장 사자좌에 앉으셨는데 열 불찰 미진수의 보살들이 함께 둘러싸고 있었으며 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고, 그 보살들이 낱낱이 각각 열 불찰 미진수의 모든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니, 그 큰 보살은 문수사리 등이며 좇아온 바의 국토는 금색세계등이며 본래 섬기던 부처님은 이르되 부동지(不動智) 여래 등이었습니다.
3) 일체처 문수보살의 게송
이시(爾時)에 일체처문수사리보살(一切處文殊師利菩薩)이 각어불소(各於佛所)에 동시발성(同時發聲)하사 설차송언(說此頌言)하사대
그때에 일체처 문수사리보살이 각각 부처님 계신 곳에서 동시에 소리를 내어 이 게송을 말하였습니다.
가. 수행의 원만(圓滿)
광대고행개수습(廣大苦行皆修習)하사대 일야정근무염태(日夜精勤無厭怠)하사
이도난도사자후(已度難度獅子吼)로 보화중생시기행(普化衆生是其行)이로다.
광대한 고행(苦行)을 다 닦으시며
밤낮으로 정근(精勤)하여 게으름이 없으사
제도하기 어려움을 이미 제도한 사자후로
중생들을 널리 제도함이 그 행이로다.
광대한 고행(苦行)을 다 닦으시며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실컷 먹고 배를 두드리면서 낮잠이나 자는 그런 생활이 아니다. 난행고행(難行苦行)이라고 흔히 말한다. 많고 많은 고행들을 다 닦으시며
밤낮으로 정근(精勤)하여 게으름이 없으사
원효스님도 말씀하셨듯이 배슬(拜膝)이 여빙(如氷)이라도 무연화심(無戀火心)이라. 부처님께 절하는 무릎이 얼음처럼 차더라도 따뜻한 불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다. 아장(餓腸)이 여절(如切)이라도 무구식념(無求食念)이라. 주린 창자가 끊어질 듯이 배가 고프더라도 밥을 구하는 마음이 없다. 그것이 수행자의 정신이다. 그래서 기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이라. 춥고 배고플 때 도가 잘 닦여진다. 도 닦고 싶은 마음이 더 잘 난다. 그런 표현도 있다. 그것이 밤낮으로 정근하여 게으름이 없으사 그래서
제도하기 어려움을 이미 제도한 사자후로
사람들을 제도하기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제도하기 어려움을 이미 제도한 사자후로써, 부처님의 법문 사자후로써
중생들을 널리 제도함이 그 행이로다
자기 자신에게도 하루 이틀 아니면 일이년 십년 이십년 정도 공부했는데 안된다고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런 것, 시간을 잊어버리고 묵묵히 그저 삶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야 그것이 제대로 수행을 하는 것이다.
나. 삼독(三毒)을 교화하다
중생유전애욕해(衆生流轉愛欲海)하야 무명망부대우박(無明網覆大憂迫)일새
지인용맹실단제(至仁勇猛悉斷除)하시니 서역당연시기행(誓亦當然是其行)이로다
중생들이 애욕의 바다에 흘러 다니며
무명의 그물에 덮여 크게 근심하거늘
지극히 어지신 이가 용맹하게 다 끊으시니
서원도 또한 당연히 그 행(行)이로다
중생들이 애욕의 바다에 흘러 다니며
온갖 애착이다. 애착, 애욕 그런 바다에 흘러 다닌다. 전부 하고자 하는 것 안이비설신의로 전부 하고자 하는, 그저 좋은 것만을 바라는 마음이 애욕이다. 그래 애욕의 바다에 흘러다닌다 라고 한다. 이 물결 저 물결에 흘러다니며
무명의 그물에 덮여 크게 근심하거늘
캄캄한 무명, 번뇌 무명의 그물에 덮여 크게 근심하거늘
지극히 어지신 이가 용맹하게 다 끊으시니
지극히 어지신 이, 부처님께서 용맹하게 그 그물을, 무명의 그물에 덮여있는 그 그물을 다 끊어서 제거해 준다.
서원도 또한 당연히 그 행(行)이로다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하는 서원이 반드시 그러한 행이다.
세간방일착오욕(世間放逸着五欲)하야 부실분별수중고(不實分別受衆苦)일새
봉행불교상섭심(奉行佛敎常攝心)하사 서도어사시기행(誓度於斯是其行)이로다
세간 사람들 방일하고 오욕(五欲)에 집착하여
잘못 분별하여 온갖 고통 받는도다.
불교를 받들어 행한다는 것은
마음을 항상 단속하는 것이라
제도하기를 서원함이 바로 그 행이로다.
세간 사람들 방일하고 오욕(五欲)에 집착하여
그저 눈은 좋은 것을 보려고 하고 귀는 좋은 소리 들으려고 하고 코는 좋은 향기 맡으려고 하고, 혀는 좋은 것 맛보려고 하고, 몸은 그저 부드러운 것, 이런 것을 찾고 하는 것, 그것이 오욕에 집착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것이 꼭 자기한테 덕이 되는냥으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잘못 분별하여 온갖 고통 받는도다
깨어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 중생들 저렇게 안이비설신의 눈 귀 코 혀 이것에 좋아하는 것만을 저렇게 좇아다녀가지고 어쩔거나, 어떻게 되겠는가’ 걱정될 것이다.
그것이 잘못 분별하여 온갖 고통받는도다 그랬다.
그다음에 제가 여러 번 소개한 구절
봉행불교상섭심(奉行佛敎常攝心)
불교를 받들어 행한다는 것은
마음을 항상 단속하는 것이라
봉행불교상섭심(奉行佛敎常攝心) 그 말이 바로 여기 광명각품에 있다. 광명각품 제 아홉 번째 제목 밑에 봉행불교상섭심 봉행불교상섭심 불교를 받들어 행한다고 하는 것은 항상 마음을 단속하는 것이다. 마음관리 잘하는 것이다. 또 이렇게도 해석할 수도 있다.
‘불교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행해서 항상 마음을 잘 단속하라’
세 번째 구절에 “불교를 받들어 행한다는 것은 마음을 항상 단속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명언 중의 명언이다. 자신을 지키는 입장에서의 불교에서 이 말씀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으리라. 불교공부는 무엇 때문에 하는가. 탐진치 삼독과 방일과 오욕락(五欲樂)에 마음이 흘러가지 않도록 잘 살펴서 단속하기 위함이다.
상섭심(常攝心) 항상 마음을 단속하기 위함이다.
이 일만 제대로 한다면 과오가 없는 삶을 산다. 사람들은 흔히 나를 거스르는 경계와 나를 순종하는 경계를 만나면 먼저 마음이 움직이고 그 움직이는 마음이 좀 더 발전하면 자신도 모르게 어디론가 흘러가 버린다.
어떤 경계를 만나든지 눈에 일단 보고, 귀에 들리고, 코에 향기가 좋고, 혀에 맛이 좋고, 몸에 부드럽고 이런 것을 만나면 무조건 그것을 따라간다. 그것을 좀 브레이크 밟아서 관리를 해야 되는데
그래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가고 만다. 그래서 8만 4천 과오를 불러온다. 마음을 단속하는 방법으로는 참선, 염불, 간경, 진언, 예배 등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 순간에 마음을 깨닫는 것이 제일 훌륭한 방법이다.
한순간에 마음을 탁 깨달아 ‘아 이것은 내가 갈 길이 아니다’ 하고 획 돌아서 버리면 그것은 참 그럴 수 없는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어디 그렇게 쉬운가? 그러니까 갈등한다. 갈등하는 과정에서 그저 관세음보살을 부르든지 대방광불화엄경을 찾든지 화엄성중을 찾든지 지장보살을 찾든지 관세음보살을 찾든지 각자 자기 익숙한 대로, 아니면 봉행불교상섭심(奉行佛敎常攝心) 봉행불교상섭심(奉行佛敎常攝心) 내가 불교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마음관리를 잘하는 것이다, 불교를 내가 믿는다고 하는 것은 마음관리 잘하는 것이다, 마음관리 내가 이렇게 경계에 끌려다녀가지고는 무슨 불교를 공부한다고 할 수 있겠나, 무슨 부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겠나, 이렇게 스스로 자책하면서 관리하는 것이다.
원효스님은 “막지 않은 천당에 가는 사람이 적은 것은 삼독과 번뇌로 자신의 집 재산을 삼았기 때문이며, 유혹하지 않는 악도에 많이 가는 것은 육신과 오욕으로 거짓 마음의 보배를 삼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참 좋은 말씀이다. ‘막지 않는 천당’ 천당에 누가 오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거기에 가는 사람이 없다. 극락세계에 오지 말라고 누가 하는가? 그런데 거기 가는 사람이 적은 것은 삼독과 번뇌로 자신의 집 재산을 삼았기 때문이다.
삼독 번뇌로써 자신의 재산을 삼았다.
또 누가 지옥이나 다른 악도에 오라고 유혹하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거기에 사람들이 많이 간다. 너무 많이 간다. 오라고 유혹하지도 않는 악도에 사람들이 많이 가는 것은 육신과 오욕으로 거짓 마음의 보배를 삼았기 때문이다.
우리 육신 생각하고 오욕락 생각하고 그것이 무슨 보배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용이다.
그러니까 마음관리 잘해서 적당한 선에서 멈출 줄 알아야 되고, 브레이크를 좀 밟을 줄 알아야 되는 것이다. 그저 자기 달콤한 것이라고 해서 그만 끝없이 끝없이 좇아가고 그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 좋은 말이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한다는 것, 불교를 믿는다는 것, 부처님 앞에 가서 절을 한다고 하는 것,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렇게 내가 마음이 이끌려 갈 곳에 브레이크를 딱 밟고, 내 마음 내가 딱 추스르는 것이다. 내 마음 내가 단속을 딱 할 줄 알면 그것이 불교를 믿는 것이고 부처님께 불공하는 것이고 그것이 경전 공부하는 것이고 그것이 기도하는 것이다.
참 너무너무 좋은 말이다.
이것을 뭐 백 가지로 풀이를 해도 얼마든지 또 다른 방향에서 풀이가 가능한 명언 중의 명언이다.
제가 아주 자주 소개하는 내용이다.
중생착아입생사(衆生着我入生死)하야 구기변제불가득(求其邊際不可得)일새
보사여래획묘법(普事如來獲妙法)하사 위피선설시기행(爲彼宣說是其行)이로다
중생이 아(我)에 집착하여 생사에 들어가서
그 끝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거늘
널리 여래를 섬겨 미묘한 법을 얻어
그들 위해 설명함이 그의 행이라네.
중생이 아(我)에 집착하여 생사에 들어가서
나라고 하는 데 집착하여 생사에 들어간다. 무아(無我) 무아 우리가 참 자주 이야기하고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반야심경 금강경 전체가 한마디로 표현하면 ‘나는 없다’인데, 없는 나에 집착해서 생사의 고통에 들어가는 것이 보통 중생들의 삶이다.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은 그런 것이 너무나도 간단하고 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생들에게는 그렇게 잘 안되니까 그래서 줄기차게 아침저녁으로 반야심경을 외우게 하고, 어떤 행사, 어떤 간단한 예불이 됐든지 아니면 좀 무슨 기념행사가 됐든지간에 무조건 반야심경 한 번 외우고 나서 행사를 진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가 나를 좀 비우고 시작하자, 불교행사는 무조건 ‘나부터 비워놓고 시작하자’ 이것이다.
무안이비설신의, 안이비설신의 없지 않느냐?
색성향미촉법도 없지 않느냐, 그게 무슨 뜻이냐? 나는 없다라는 도리 좀 알고 시작하자. 그러면 무슨 일인들 안 이루어지겠느냐, 무슨 일인들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 뜻이다.
모든 불교행사에 맨처음에 반야심경을 한 번 외우고 시작하는 것은 아(我)가 없다는 소리다. 나는 없다 나는 없다하는 소리인데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면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그 전체 내용이 다 ‘나는 없다’는 소리다.
그래 내가 반야심경을 번역하니까 넉자로 번역이 되더라. ‘나는 없다’
도올 김용옥 선생 같은 이들은 또 반야심경을 해석을 하면서 아주 쌍스러운 소리를 써가면서 표현한 내용이 있는데, 그 사람도 불과 몇 자 안된다. 열 자 미만의 표현을 했다.
방송이 아니고 딴 데서, 내 혼자 더러 하는 이야기인데 그때 해야지 차마 그 소리를 내가 입에 담지는 못하겠다. 아무튼 아(我)가 없는데 아에 집착하여 생사에 들어간다.
그 끝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거늘
널리 여래를 섬겨 미묘한 법을 얻어
여래를 섬겨, 부처님의 가르침, 화엄경의 가르침을 섬겨서 미묘한 도리를 얻어서
그들 위해 설명함이 그의 행이라네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친다는 것이다.
중생무호병소전(衆生無怙病所纏)으로 상륜악취기삼독(常淪惡趣起三毒)하야
대화맹염항소열(大火猛焰恒燒熱)일새 정심도피시기행(淨心度彼是其行)이로다
중생이 의지가 없고 병에 얽히어
항상 악취(惡趣)에 빠져 삼독을 일으켜서
크고 맹렬한 불에 항상 타오르거늘
깨끗한 마음으로 그를 제도함이 그의 행이로다.
중생이 의지가 없고 병에 얽히어
병에 얽혀서
항상 악취(惡趣)에 빠져 삼독을 일으켜서
악한 갈래에 빠져 탐진치 삼독을 일으켜서
크고 맹렬한 불에 항상 타오르거늘
그래서 삼계화택(三界火宅)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불난 집과 같다. 불이 맹렬하게 타오르는데 그 속에서 허덕이는 중생과 같다. 그렇게 보고 부처님은
깨끗한 마음으로 그를 제도함이 그의 행이로다
깨끗한 마음으로 그를 제도함이 그의 행이다. 성인들에게는 어리석은 중생들이 사는 모습이 불난 집에서 그 불에 허우적대는 모습처럼 보이는 것이다.
우리 화엄행자들, 화엄경 공부하는 학인들, 화엄학인(華嚴學人) 저는 학인이라는 소리를 좋아한다. 늘 배우는 사람, 배우는 입장에서 화엄학인으로서는 좀 그렇게 무지몽매하게 취생몽사할 일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그런 이치에 눈을 뜨고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는 그런 마음이다.
중생미혹실정도(衆生迷惑失正道)하야 상행사경입암택(常行邪徑入闇宅)일새
위피대연정법등(爲彼大然正法燈)하사 영작조명시기행(永作照明是其行)이로다
중생들이 미혹하여 정도(正道)를 잃고
늘 삿된 길 걷고 어두운 집에 들어가니
그를 위해 정법(正法)의 등불을 크게 밝혀
길이 밝게 비춤이 그 행이로다.
참 좋은 게송이다.
중생들이 미혹하여 정도(正道)를 잃고
바른 길을 잃고
늘 삿된 길 걷고 어두운 집에 들어가니
어두운 집에 들어가니
그를 위해 정법(正法)의 등불 크게 밝혀
정법, 바른 이치, 바른 법의 등불을 크게 밝혔다.
화엄경이 하는 일이 그렇고 부처님께서 하는 일이 그렇고 보살들이 하는 일이 그렇고 선지식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다.
중생들이 미혹해서 바른 길을 다 잃어버리고 늘 삿된 길을 걷고 어두운 집에 들어가서 헤매고 있으니,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정법의 등불을 밝힌다. 바른 법의 등불을 밝힌다.
정법, 정법 우리 불교계에서 정법이라는 말을 참 잘 쓴다. 정법의 등불, 좋은 말인데도 정말 냉정하게 그것을 반성하고 돌이켜 살펴보는 일은 흔치가 않다.
길이 밝게 비춤이 그 행이로다
중생표익제유해(衆生漂溺諸有海)하야 우난무애불가처(憂難無涯不可處)일새
위피흥조대법선(爲彼興造大法船)하사 개령득도시기행(皆令得度是其行)이로다
중생들이 온갖 존재의 바다에 빠져서
근심과 어려움이 끝이 없어 머물 곳이 아니니
그를 위해 큰 법의 배를 만들어
모두 제도하게 함이 그의 행이로다.
그를 위해 큰 법의 배를 만들어, 어마어마한 화엄경의 큰 가르침의 그물을 펼쳐서 ‘어느 그물눈에 중생이 걸릴까’ 오늘도 내일도 늘 부처님은 그것을 기다리신다.
오늘 좋은 구절들이 많이 소개된다.
이런 그물들에서 우리가 거기에 한 번 걸려서 제도를 받을 좋은 기회다.
중생들이 온갖 존재의 바다에 빠져서
존재의 바다가 무엇인가? 모든 것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부 있다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다와 같이 넓은 것이다. 거기에 빠져서
근심과 어려움이 끝이 없어 머물 곳이 아니니
그를 위해 큰 법의 배를 만들어
존재의 바다에 빠졌으니까, ‘있다’ 라고 하는 우리 상식의 삶은 너무 넓은 것이다. 그러니까 큰 법의 배를 만들어서
모두 제도하게 함이 그의 행이로다
부처님은 그렇게 중생들을 제도한다. 대법선, 큰 법의 배, 법선스님이라고 하는 이도 있는데 그 가운에 대법선 참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생무지불견본(衆生無知不見本)하야 미혹치광험난중(迷惑癡狂險難中)일새
불애민피건법교(佛哀愍彼建法橋)하사 정념영승시기행(正念令昇是其行)이로다
중생들이 무지하여 근본을 못 보고
미혹하고 어리석어 험한 길로 달아날새
부처님이 불쌍히 여겨 법의 다리를 세워
바른 마음으로 그 다리에 오르게 함이 그의 행이로다.
법의 다리, 물을 건너는 다리다.
법의 배라고 했다가, 법의 다리라고도 했다가, 정법의 등불을 크게 밝힌다 라고 했다가 여러 가지 그물을 펼쳤다.
여러 가지 표현, 이것이 낱낱이 다 그물의 눈이다. 우리가 어느 눈에 걸려도 좋다. 그저 걸려서 제도를 받기만 하면 된다.
중생들이 무지하여 근본을 못 보고
미혹하고 어리석어 험한 길로 달아날새
부처님이 불쌍히 여겨 법의 다리를 세워
법의 다리를 세워, 물을 건너려면, 개울물 같은 데를 건너려면 다리가 있어야 된다. 그런 법의 다리를 세워서
바른 마음으로 그 다리에 오르게 함이 그의 행이로다
부처님의 행은 바로 그러한 일이다, 하는 내용이다.
견제중생재험도(見諸衆生在險道)하야 노병사고상핍박(老病死苦常逼迫)하고
수제방편무한량(修諸方便無限量)하사 서당실도시기행(誓當悉度是其行)이로다
모든 중생들이 험한 길에서
노병사(老病死)의 고통에 항상 쫓김을 보고
온갖 방편 한량없이 닦아서
맹세코 다 제도함이 그의 행이로다.
모든 중생들이 험한 길에서
노병사(老病死)의 고통에 쫓김을 보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에 항상 쫓김을 보고, 험한 길에서 노병사의 고통에 항상 쫓기고 있다.
온갖 방편 한량없이 닦아서
맹세코 다 제도함이 그의 행이로다
부처님의 행이다. 그의 행이다.
다. 자비와 지혜
문법신해무의혹(聞法信解無疑惑)하며 요성공적불경포(了性空寂不驚怖)하고
수형육도변시방(隨形六道徧十方)하사 보교군미시기행(普敎群迷是其行)이로다
법을 듣고 믿어 알아 의혹 없으며
성품이 공적함을 알아 놀라지 않고
형상은 육도에 따르며 시방에 두루 하사
많은 중생 널리 교화함이 그의 행이로다.
법을 듣고 믿어 알아 의혹 없으며
우리 불자들은 법을 자꾸 듣고, 듣다 보면 믿고 이해하게 된다. 문법신해(聞法信解) 법을 듣고 믿고 알아 그래서 의혹이 없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그 내용에 의혹이 없다.
성품이 공적함을 알아 놀라지 않고
성품이 공적함을 알아서 놀라지 않는다. 우리 본래의 성품은 공적하다. 텅 비어서 공적하다.
형상은 육도에 따르며 시방에 두루 하사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 그 좋지 아니한 여섯 가지 길을 그저 따라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방에 두루 돌아다녀서
많은 중생 널리 교화함이 그의 행이로다
그렇게 돌아다니는, 육도에 돌아다니는 그런 중생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런 많은 중생을 널리널리 교화한다.
널리널리 교화하는 것이 바로 불보살의 행이다.
보살의 행이고 부처님의 행이다.
화엄경의 어떤 구절을 내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 강조하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것은 내 감정이고 내 소견이지 또 다른 분들은 엉뚱하게도 다른 곳에서, 내가 소홀히 생각하고 그냥 흘려버리면서 읽는 그런 대목에서 걸릴 수도 있다. 거기에 또 눈을 활짝 뜰 수도 있고, 거기에 깨달음이 척 와서 닿을 수도 있고 그렇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육조스님이 깨달으신 그 구절, 그 구절이 모든 사람이 다 그 구절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그 구절에 다 눈을 뜨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 다 눈을 뜨는 것은 아닌데 육조스님은 또 그 구절에 눈을 뜨는 것이다.
경전의 말씀에 눈을 뜨는 것도 다 그 나름대로 인연이 있다.
인연이 있기 때문에 저는 봉행불교상섭심(奉行佛敎常攝心) 이것을 처음에 듣고 감동해서 ‘아 그렇지, 그렇지 불교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 마음 단속하는 일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뭐 그거 별거 아닌 소리를 가지고 그러느냐’이렇게 생각할 사람들도 또 많다.
그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조스님께서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主而生其心)에 눈을 떴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主而生其心)에 눈뜨란 법도 없다.
그러니까 우리 불자들은 늘 긍지를 가지시고 자부심을 가지시고 어떤 구절이든지 항상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대할 때 그때 그 모든 것이 내 공부가 되고 내 살림이 된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다.
오늘 화엄경 공부 좋은 구절 소개해 드리면서 이렇게 끝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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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오신 분들 한 번 살펴보겠다.
장대교망(張大敎網) 잘 쓰셨다. 녹인천지어(漉人天之魚) 그렇게 하면 된다.
여러분들 고맙다. 이 화엄회상을 이렇게 여러분들이 늘 빛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하다.
저의 공부에도 아주 큰 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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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성불하십시오.
첫댓글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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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_()()()_
https://www.youtube.com/watch?v=nfQzseYn-ow
PLAY
고맙습니다 _()()()_
“불교를 받들어 행한다는 것은 마음을 항상 단속하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잊지않고 항상 마음에 새기며 자켜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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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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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대방광불 화엄경
나무 대방광불 화엄경
나무 대방광불 화엄경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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