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가을, 싱그러운 포도가 익어 수확이 끝나게 되면 곧 이어 포도즙을 포도주로 만드는 발효가 시작된다. 그해 기후조건에 따라, 또 와인 타입에 따라, 그해 말에서 다음해 초까지 이 발효과정이 끝나게 되면 좀 더 좋은 맛과 향을 내기 위해 숙성을 한다. 보르도 고급 레드와인은 대개 오크로 만든 225ℓ 크기의 오크통에서 하고, 이후 약 18개월의 숙성기간이 끝나야 비로소 병입이 되고 시장에 나온다.
일부 예외는 있지만, 전세계 다른 모든 지역은 시장에 출시하게 될 때 와인 값이 정해진다. 하지만 보르도는 알코올 발효 후 각 샤토(포도원)의 오크통에서 숙성되는 중에 가격이 결정된다. 이것이 엉 프리메르(En Primeur)라고 불리는 일종의 선물거래다. 수확연도 그 이듬해 3월 말에서 4월 초에 걸쳐서 공식적인 품평행사가 열린다. 이어서 각 샤토별로 가격이 고시되며 주문이 들어가고 거래가 이뤄진다. 따라서 이 시기가 되어야 비로소 한 해 포도재배와 양조에 대한 성과가 가시화하는 것이다. 또 그 거래는 아무나 원하는 사람이 다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거래실적이 있는 네고시앙이라고 불리는 현지 도매업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로버트 파커와 같은 몇몇 영향력 있는 와인전문가의 평은 가격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들의 평가가 발표되기 전까지는 쉽게 가격을 공표하지도 않고 또 주문에 들어가게 되는 일도 드물다. 역사적인 빈티지 ‘보르도 2000’은 이들 전문가의 극찬과 밀레니엄 후광을 업고 상한가를 쳤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평이 좀 떨어졌던 2001년과 2002년에 이어 유래없는 폭염으로 품질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던 2003년은 그야말로 관심의 초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관심은 작년보다 약 1,000여명이나 많이 몰려든 4,000여명의 테이스팅 참가자들로 증명되었다. 그러나 전세계적인 경기침체와 더불어 프랑스 내 강화한 음주운전 기준과 주류에 대한 광고를 금지하는 법률 등의 영향으로 위축된 시장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따라서 뛰어난 품질에 비해 가격은 많이 오를 것 같지 않다.
2003년도 보르도 와인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은 원론적인 선에서 거의 비슷하다. 즉 메를로 품종을 많이 재배하는 생 테밀리옹과 포므롤로 대표되는 지롱드강 우안보다는 카베르네 계열을 많이 재배하는 좌안의 메독 지방이 훌륭하며, 그중에서도 마고 지역보다는 생 테스테프, 포이악, 생 줄리앙 등 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와인이 더 좋다. 경우에 따라서는 2000년보다 더 좋은 와인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각 샤토별 품질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 ‘엉 프리메르’에서는 각 전문가의 이견이 없는 와인을 잘 선택하는 것이 투자로서는 이상적인 것이다. 허나 즐기기 위해서라면 평소 자신의 입맛과 비슷한 평을 하는 전문가 의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