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자욱한 새벽녘 5시30분 비몽사몽으로 3호선 첫 지하철을 탔다.
머리속은 이틀을 지샌 덕으로 새벽 안개처럼 뿌였게 텅비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약속만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사무실에서 옷만 바꿔입고 작업현장을 빠져 나왔다.
이젠 나이 탓인지 익숙하던 철야의 피곤 함을 쉽게 떨칠 수 없다.
약속된 서초구청 앞에 도착하니 종걸이와 상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훨씬 전 부터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싶다.
조금후에 반가운 얼굴들 명희,보선,은희(춘자)소주가 도착했다.
고속도로에는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차량들이 꽉 차있었다.
기념행사가 11시로 연기되어 정읍까지 도착 시간이 지나칠 정도로 여유가 많았다.
정안 휴게소에 들려 아침식사를 하고 정읍에 도착하니 10시 조금 넘었다.
내장 저수지에서 드라이브 하면서 인증샷도 하고 학교에 도착하니
동한이, 기철이,석호,...보령에서 달려온 종수,친구들이 하나 둘 눈에 띄이기 시작한다.
운동장의 서성이는 선배님들도 낯설지 않게 들어오고 행사장인 강당 입구에서 명찰을 챙겨주는 영주를 만났다.
주중내내 집행부에서 봉사했다고 한다. 보이지 않게 행사를 위해 휴가까지 내고 애쓴 영주친구다.
행사가 시작되고 이연택 총동창회장의 기념사부터 김생기 시장, 유성엽의원의 축사등 순서가 진행되는 동안
지리함과 엉성한 진행등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유세장도 아니고 강연장도 아니고 최소한 동초를 거쳐간 은사들을 초청하고 가족이 동문이 사람들을 이벤트로
초대 할 수있고 이왕이면 자리배치도 원탁에 같은 기수별로 앉아 서로 소개도 하고 하는 기본적인 짜임새도 없는 행사.
그야 말로 억지춘향 같은 남이 보면 쪽팔리는 기념식이었다.
이런 정도의 행사라면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한 행사라고 본다.
내가 기대하고 참석한 행사는 실망 뿐이었다. 더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아 나열하지 않으려한다.
어느 행사도 이번 100년 기념행사보다 더 이상 초라할 수 없다는 마음 이다.
많은 동문들에게 감동도 그 어떤 의미를 주지 못하는 일정은 행사장을 훌훌 떠나가고 다 차지도 못한 의자들은
더욱 쓸쓸함으로 볼쌍 사나웠다.
식후 행사는 참석을 하지않아 모르겠다. 관심도 없고 아마 생각하기엔 명절 귀향한 동네 노래자랑같은 뒤풀이가 되지 않았을까.
그래도 행사 진행중 옛 사진들과 교가를 부르는 동안만큼은 40여년전으로 돌아가는 마음이었다.
교실이 모자라던 그 시절 이 자리는 여전히 강당 이었다.
강당을 급조한 교실들은 천정이 높아 하우링이 심해서 우리들은 수업을 집중할 수 없었다.
이 자리에 3학년때 우리의 교실이 있었고 입구 맨 앞쪽이 3-5반 조신자 선생님 반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전기장치가 없던 시절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는 교실이 어두워 칠판에 판독한 글씨가 보이지 않아 하던 수업을
더 할 수 없어 음악 수업으로 대신하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의 봄날 아침에 눈을뜨면 유독 비가 많이 내렸다.처마가 낮은 집들은 밤새 비오는 날 아침은 새벽처럼 어두워
시간을 제대로 알수 없어 지각이 다반사였다.
어둡고 으침한 교실에서 낮은 빛속에서 풍금 앞에 앉아있는 선생님, 그리고 반주에 맞춰 노래 부르던 친구들의 얼굴이 스쳐간다.
"3월 하늘을 보면 유관순 누나가 생각난다..."
5학년때는 떠나는 졸업생을 위해서 보내는 연습을 하고 졸업반이 되었을 때는 떠나는 연습을 하고 마침내 떠났던 이자리에
다시 43년에 반 백발이 되어 돌아왔다. 어쩌면 이자리에 이만큼 추억을 돌려 준 것 만으로도 큰 기쁨이라고 본다.
그리고 미숙하나마 집행부에 감사한다.
정읍의 친구들과 모처럼 함께한 자리였다.
정읍에서 십여명 남자만이 참석하고 서울에서 여자 5명 순천에서 김종례. 멀리 진해에서 조난희가 참석했다.
서로가 서먹한 분위기는 한장의 사진과 작별로 이어졌다. 지역이 달라서 아님 뭔가 서로의 꼬인 오해로 일그러져 있었다.
내가 알 수없는 그 오해가 서로 한발씩 다가가 연말 안에 풀어 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모두가 뿔뿔이 헤어지고 몇명이서 찻집에 들려 찻잔을 놓고 서로 소개하고 남은 시간에 선운사에 다녀 오기로 했다.
당초에 많은 친구들이 참석하는 걸로 알고 세웠던 원대한 일정은 소수의 참석으로 무산되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이시간 이후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여자친구들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여자친구들이 모두 1박2일을 계획으로 모처럼 남편들에게 자유를 선언하고 귀한 휴가를 얻은 터라
우리도 선뜻 서울로 올라 가자라고 말을 꺼내기도 어려워 함께 이틀을 같이 보내기로 했다.
고맙게도 정읍에서 세탁소를 하는 임석호가 함께 동행 해주었다. 심원 뻘밭앞에 있는 장어집(맹구수산)에서
모두 빙둘러앉아 (사진참조)장어 한입에 술한잔씩 하고서 종걸이는 광주가는 길에 보선.소주,윤숙,난희를 정읍에 떨려주고
상락.석호.그리고 나. 명희,종례,은희 - 이렇게 6명이 함께 선운사에 들려 석양의 참당암 가는 오솔길에서 인증샷.(사진참조)
짙어가는 만추의 어둠이 쉬이 내리고 우리는 아쉬움으로 다시 정읍 내장사를 향해 달렸다.
산자락에 있는 닭집에 들려 (사진참조)토종닭 2마리를 뜯으면서 다음 날 일정을 세웠다.
그사이 남편들에게서 걸려오는 그리고 전화를 거는 여친들의 모습을 보니 문뜩 다시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나이를 먹었다는 것은 어쩔수 없는 현실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담양에 들으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 다음날 담양으로 가기로 하고 시내에 있는 "꿈의 궁전" 모텔에 투숙하였다.
이튼날 아침 내장사를 지나 복흥가는 갈재를 넘어 가는 길에 단풍이 아직 산 정상에 머물러 있는 모습을 보며 중2학년 때
노령산맥 정상을 을 넘어 백양사까지 검은 운동화가 아주 헤어지도록 행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같이 같던 친구들, 그리고 은사님의 모습이 생각난다.
창밖으로 보이는 들녘에 낡은 가옥들.- 그리고 주황색 감들이 죽어가는 들판의 갈색의 시들어가는 들풀 사이사이로
구름한점 없이 티없이 맑은 파아란 쪽빛의 반짝이는 햇빛이 주는 선명한 빛깔로 주렁주렁 한가롭게 매달려있다.
길가에 들국화가 양광속에 만개하여 하염없는 연정을 보낸다.
비로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허용된 이 시간들 - 사실 그동안 만난 적이 없었던 여자친구들과 이렇게 동행하는데 스스럼 없는
이 시간들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백양사를 지나 담양 읍내에 들어서니 비로소 일요일 아침을 느낄 수 있었다.
한가롭고 나른한 공기가 우리의 시간들을 충분히 느리게 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매타세콰이아 가로수 길을 달려
금성산성에 올랐다. 산등성이를 오르는데 몹시 힘들다. 다행이 종례가 이름을 모르는 들풀과 작은 나무 잎사귀에 이름을 불러줘
그들을 깨운다. 그 오랫동안 함께했던 야생화 풀들의 얼굴과 잎사귀들이 잊혀진 기억들로 다시 새롭게 온다.
그런 꽃을 닮은 친구들의 배려하는 마음까지 이쁘다.
산성의 정상까지 가지 않고 중도에서 머문 나를 위해 내려운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이곳 산성전투에서 친구의 배신의 패배한 전봉준과 동학군.
이들은 병법을 모르고 이런 곳에서 전투를 벌여 패배를 좌초한 것 같다. 왜 이 고립무원의 산성이 필요했을까.
그리고 훗날 순창에서 다시한번 동지 김개남의 밀고로 전봉준의 체포와 함께 동학난은 끝이 나는데....
왕조시대를 마감했던 구한말 격동의 시대를 살아갔던 할아버지들의 우정은 어떠 했을까.
하기야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시대에 우리같이 이런 많은 친구들이 있었을리 만무하고
그러면 이렇게 많은 친구들을 두어 우리는 행복한 것 아닌가.
내려오는 길에 죽녹원을 바라보면 (사진참조)서 점심을 생각했다.
그래도 담양에 오면 떡갈비를 먹어야 하지 않는가. 끼니를 거르지 않고 좋은 식사에 술까지.. 별로 생각이 없다. 그런데 여친들의 식탐은 참 대단하다. 그만큼 건강하다는 증거로 귀엽게 봐 줄 수 있다.(사진참조)
(덕인관이라는 유명한 집인데 떠갈비집으로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숯불에 굽는 진짜 떡갈비가 따로 있습니다.)
연일 잘 먹은 음식들로 배고픔을 모르겠다. 상락이와 나는 추어탕으로 대신했다.
식사 후 낡은 양철로 지은 창고아래 길가에 앉아 포만감으로 헤어질 시간을 쳐다보며 야부리를 나눴다.
떠날 두사람을 담양터미날에 데려다 주려고 길을 묻는데 " 똑바로 쭉 빤뜨시 가면 둬야" 촌로의 대답이 참 걸죽하다.
종례와 난희를 내려주고 우리는 전주 시내를 거쳐 여산에서 종걸이와 합류했다.
우리가 시내에서 지체동안 종걸은 이곳 휴게소에서 제법 기다린 모양이다. 상락은 집이 마석이라 우리 땜에 강동지역에 들렸다가 우리를 떨궈주고 다시 돌아 가기에는 먼거리라 우리는 어절수 없는 선택을 하여 둔촌동을 가는 종걸의 차로 옮겨탔다.
상락이 혼자서 먼길을 가야했다. 아마도 우리의 빈자리가 좀 허전하고 섭섭하지 않았나 싶다.
오는 길은 많이 지체서행이 계속 되었으나 지루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먼 여행 길을 빨리 가는 법은 좋은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다.
이틀간의 시간은 손살처럼 흘러가 버렸다.
이제 다시 언젠가 이런 시간이 올까..10년후, 20년후, 아니 다시100년 후가 될까...
이 시간 함께한 친구들의 얼굴 하나 하나를 기억해본다.
종걸, 상락, 종례, 명희, 은희 그리고 끝까지 같이하지 못한 소주, 보선, 윤숙...
그리고 다시 만날 것을
아듀 라미.-
첫댓글 우리들의 아름다운 일정을 이렇게 써줘서 고맙고 내가 다시 가고싶은 맘이 들구만요. 추억은아름다운것. 이다음에 우리 이런애기하며 웃겠지. 그날 아픈다리인데도 끝까지 동행해줘서 고마워...내가 만나면 동행 이라는 노래 불러줄께
고마워. 나는 개여울이 좋은데.ㅋㅋㅋ
사진올리시게나 수고했네
카페엘범에 올렸네.
창회 참 글 잘쓴다.
기억력도 좋고 ^ ^
엄청 많이 다녔네. 그럴줄 알았으면 나도 동행할거인디 - -
좋은 추억 만들고 올 가을은 정말 기억에 남는 한해가 될거 같소이다.
친구들 건강하고 또 만날 기회를 만듭시다.
왜 작대기 휘두르러 가냐고 약속을 두개 하면 안돼. 하나에 충실해야지.
그 작대기 원래 종수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