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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은 무엇보다 선교적인 해석과 적용이 매우 중요하게 요청되는 책이다. 요한계시록을 관통하는 큰 흐름 중에 하나는 선교의 물줄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탐구 가운데 요한계시록을 선교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시도는 매우 적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성경적인 가르침을 근거로 하여 주님이 맡겨주신 선교에 헌신해야 할 이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매우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면서 그동안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요한계시록의 선교적인 관점을 다루는 것이 본 글의 목적이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선교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기독교인의 실제의 삶에 적용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성경의 마지막 책에 대해서 ‘선교해석학’적인 작업을 시도해야 한다. 그렇다면 먼저 해야 하는 작업은 ‘선교해석학’이 무엇인가 그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선교해석학’을 이해할 때 선교의 교훈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어떤 특정한 본문을 해석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교해석학’은 특정한 본문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선교적 교훈을 찾아내는 해석학적 탐구를 뜻한다. ‘선교해석학’은 성경에 선교를 보여주는 본문이 어디 있는가를 찾아내어 거기서 선교의 의미, 혹은 선교의 원리나 방법을 정리하는 작업이 아니다. ‘선교해석학’은 그 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선교라는 큰 관점(mission perspective)에서 성경 전체를 보고, 성경이 보여주는 선교의 교훈을 찾아내며, 그 결과를 우리 시대의 교회 생활과 크리스천의 삶에 적용하는 신학적 작업을 뜻한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선교해석학'은 단지 “성경의 관점에서 선교를 살펴보는 작업"이 아니라, “선교의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살펴보는 작업"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선교의 관점’은 성경 전체를 조망하는 하나의 ‘해석학적 열쇠’(a hermeneutical key)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해석학적 접근을 통해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선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또한 성경의 각 부분이 선교와 어떠한 관련이 있으며, 어떻게 선교를 다루고 있는가를 설명하게 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선교는 성경이 가르쳐주는 여러 교훈 가운데 단지 ‘하나의 교훈’(a lesson)이 아니라 성경 전체로 들어가는 ‘하나의 문’(a gate)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인간을 향한 그의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보여주시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선교’라는 관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창세기에서 계시록에 이르는 성경 전체에 걸쳐 나타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선교적인 목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조명해 보는 눈이 열리게 될 것이다. 크로아토(J. Severino Croatto)는 “성경은 창세기에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루트를 따라 진행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 ‘독특한 루트’가 바로 ‘선교’라고 하였다. 우리가 성경 전체에서 선교의 사상이나 원리를 퍼 올리지 못한다면 교회가 시도하는 선교 운동은 성경적 토대가 매우 빈약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교회의 선교의 영적인 에너지가 고갈되어 허기진 상태에 이르게 되고, 그 수명은 짧아지게 될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성경 전체에서 열방을 향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선교 의지와 그의 백성들을 불러내어 이 거룩한 사역에 동참토록 하는 뜻과 목적을 철저하게 배울 필요가 있다. 사실 요한계시록은 많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해석하기를 꺼려했던 성경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일반 기독교인들도 읽는 것이나 묵상하는 것을 등한시해 온 책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 책을 언뜻 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사상이나 표현과는 너무 다르고 멀리 떨어진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상징적인 언어나 묵시문학적 표현들이 넘쳐나는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묵상하며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어려웠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때로는 오해를 받기도 하고 종종 냉대를 받은 책이었다. 그러나 만일 이 책을 잘 해석하고 이해한다면 악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많은 영적인 유익과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윌리암 헨드릭슨(William Hendricksen)은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목적에 대해 “악의 세력과 대항하여 싸우는 전투적 교회를 위로하는 것이다. 핍박과 고통을 받고 있는 성도를 위한 도움과 위로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였다. 요한계시록은 위로의 책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어렵고 힘든 시대에 두려움이 아니라 시대를 뚫고 가는 용기와 위로, 많은 영적인 도움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읽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 책을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이 책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요한계시록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큰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단지 위로를 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끝나서는 안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책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지, 거칠고 황폐한 이 시대를 살면서 감당해야 될 사명이 무엇인지 새롭게 배워야 할 것이다. | ||||||||||||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방법과 방향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 논문을 통해 추구하는 방향은 무엇보다 선교의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살펴보는 것이다. “선교의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해 보면 우리는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이 글의 방향이다. 요한계시록을 언뜻 보면 이 책은 거의 선교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나타난 선교 사상이나 가르침을 다룰 때 공동 서신이나 요한계시록을 제외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요한계시록에서 우리는 ‘누구를 선교 현장에 파송한다’는 말씀을 찾을 수 없다. 또한 마태복음 결론 부분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선교위임령’이나 사도행전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직접적인 선교 명령, 또 이웃 사람들이나 세상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거의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계시록을 피상적으로 읽고 해석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연구할 때 주로 마지막 때 이루어질 예언에 관한 책으로만 보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선교의 중요성을 갖고 있음을 놓칠 때가 많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이 선교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선교의 마지막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선교의 종결 혹은 선교의 최종 목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가 하나님의 선교의 시작을 보여주는 책이라면 요한계시록은 선교의 마무리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코넬 고오너(H. Cornell Goerner) 는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성경의 마지막 책은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목표의 놀라운 기록에 대한 절정이며 결론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선교의 마무리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곳이 있다면 7장이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7장은 사도 요한이 보았던 종말론적 구원과 선교에 대한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획하셨던 구속의 역사가 종결을 맞이하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 진행되었던 하나님의 선교의 마무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선교의 사명을 받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순종해 온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될 것이다.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를 통해 7장은 요한계시록의 구조상 극적인 삽입(interlude)과 같은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6장부터 시작되고 있는 어린양의 인을 해제하는 과정의 마지막 부분에 7장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보았던 어린 양의 세상을 향한 심판의 마지막 과정인 7번째 인을 떼기 직전에 요한계시록 7장의 말씀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7장이 선교적으로 중요 한 것은 바로 이 7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선교 비전과 궁극적인 목적을 상세하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양이 하나씩 인을 떼실 때마다 이 땅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의 진노가 얼마나 무섭게 임했는지 땅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고 외쳤다. 또한 그들은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부르짖었다. 이 땅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7장은 바로 이렇게 진노가 쏟아지는 한복판에서 사도 요한이 새롭게 보았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장면이었다. 7장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Μετα ταυτα ειδον και ιδου)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1절). 여기 "이 일"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린양이 6개의 인을 하나씩 떼시므로 일어나게 될 진노의 사건을 뜻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서 “사방의 바람을 붙잡았다”고 하였다. 여기 ‘바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네 천사가 진노의 바람을 붙잡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네 천사 외에 등장하게 된 또 다른 천사의 메시지를 통해 분명하게 밝혀진다. 그 천사는 ‘해 돋는 데서 올라온 천사’라고 하였다(2절). 해 돋는 데, 다시 말하면 동쪽에서 천사가 올라왔다는 것은 이 천사가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의 메시지를 가져오게 될 것을 암시한다. 에덴동산도 동쪽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광도 동편에서부터 오고,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을 알고 박사들도 해 돋는 데서부터 찾아왔다. 유대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메시야가 해 돋는 데서 올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 요한은 그 천사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세상의 한복판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인’(σφραγις)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소유권의 표시를 뜻한다. 그러므로 그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유된 백성들을 인을 치고 그들을 멸망의 심판으로부터 보호하시게 될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된다.23) ‘하나님의 인’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표시이다. ‘해 돋는 데서 온 천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 부을 다른 네 천사를 향하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시기까지... 해하지 말라”고 명령하게 된 것이다(3절). 요한계시록 6장에서 사도 요한은 어린양의 인 떼시는 것을 통해 주님의 심판의 엄중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7장에서는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여주시므로 진노가 임하는 세상 한복판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도 요한은 진노 중에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사도 요한은 인치심을 받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도 요한은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라"고 증언했다(7:4). 여기 '십사 만 사천'이라는 숫자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다양한 해석이 있었다. 그 정체성에 대해서는 신학적 논쟁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이 다양한 해석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십사만 사천’을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이스라엘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둘째는 상징적인 의미의 이스라엘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데이비드 온(David Aune)은 144,000의 숫자에 대해 지금까지 신학적으로 논쟁이 되어 온 것을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144,000을 유대인 혹은 유대적인 배경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보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144,000을 유대적 배경을 가진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출신의 기독교인 모두를 포함하는 교회로 보는 견해이다. 셋째는 144,000을 기독교인 가운데 순교했던 사람들의 숫자로 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십사만 사천'을 상징적인 숫자로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진실하게 주님을 믿는 기독교인의 총수를 상징하는 숫자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에 좀 더 집중한다면 사도 요한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십사만 사천'에 대해서는 9절에 나오는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와 의도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44,000의 숫자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라는 수식 문장이 시사해주고 있는 것처럼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이스라엘과 연관시켜 보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고 보인다. 사도 요한은 ‘십사만 사천’ 명의 숫자를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십사만 사천’에 관해서 천사를 통해서 들었다고 하였다(4절). ‘십사만 사천’이 어떻게 구성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사도 요한은 들었다. 그의 증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유다 지파에서 12,000, 르우벤 지파에서 12,000, 갓 지파에서 12,000, 아셀 지파에서 12,000, 납달리 지파에서 12,000, 므낫세 지파에서 12,000, 시므온 지파에서 12,000, 레위 지파에서 12,000, 잇사갈 지파에서 12,000, 스불론 지파에서 12,000, 요셉 지파에서 12,000, 베냐민 지파에서 12,000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인 맞은 자'의 리스트를 보면 특이한 사항이 몇 가지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 이 리스트의 첫 번째 위치는 야곱의 12아들 가운데 장남인 르우벤 지파가 아니라 네 번째 아들 유다 지파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유다 지파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가 출생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배치는 구약에도 이미 나타나 있기에 생소한 것은 아니다.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향할 때 진 편성을 한 일이 있었는데 유다 지파의 이름이 이미 장남인 르우벤 지파보다 앞서 선두에 나와 있었다(민 2:1-34). 따라서 성경 기자들이 유다 지파에게 이런 우선권을 주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인 맞은 자’의 리스트에는 야곱의 아들 가운데 다섯째 아들인 ‘단’ 지파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 49:17에 나오는 야곱의 ‘단’에 대한 예언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야곱의 예언 가운데 단이 '뱀' 혹은 '독사'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단이 하나님을 떠나 사탄 을 추종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단 지파가 리스트에서 삭제된 것은 우상 숭배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사사기에 보면 단 지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게 되자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다. 로버트 월(Robert W. Wall)은 “단 지파는 이교적 신앙의 우두머리이며 이스라엘 종교적인 타락의 상징이라(삿 18:30-31, 왕상 12:25-33)”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교적 우상을 숭배했던 단 지파가 ‘인 맞은 자’의 리스트에 빠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2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신학자 이레니우스(Ireaneus)는 단 지파가 빠진 것이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이었던 단 지파로부터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라는 사상 때문이라고 보았다. 셋째, 단 지파가 빠진 대신 그 자리는 요셉의 아들이었던 므낫세 지파로 대치되었다. 요셉에게는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 있는데, 리스트에는 특이하게도 아버지 요셉 지파와 그의 아들 므낫세 지파가 포함되었다. 그 이유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이들이 모두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 인을 맞은 자들이라“고 했는데(4절), 여기 ’인을 맞는다’(σφραγιζω)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고대 사회에서는 때로 법적인 인증을 위해 인을 찍기도 하였지만 일반적으로 주인이 자신의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바로 그런 뜻으로 ‘인을 맞는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에서 온 144,000 명이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구원에 참여하게 될 백성임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사도 바울도 동일한 구원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에베소서에서 ‘성령의 인치심’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가 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마지막 때 진노가운데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끝까지 보호하 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 세상을 향한 진노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은 진노 중에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고 그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서 나온 ‘인 맞은 자’의 리스트는 바벨론 포로 이후 사라졌던 열두 지파의 종말론적 회복을 보여주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이에 관하여 데이비드 온(David Aune)은 “각 지파로부터 12,000이라는 동등한 숫자를 강조하는 것이 사도 요한이 이스라엘의 12 지파의 종말론적 회복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 ‘십사만 사천’의 리스트는 단지 이스라엘의 12지파의 회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회복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큰 무리에 대한 언급으로 볼 때, 우리가 7:1-4에 나오는 '십사만사천'이라는 숫자에 과도한 관심을 갖는 것은 문제가 있다. 사도 요한이 진노의 한 복판에서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 드라마는 단지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에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십사만사천‘에 관한 음성을 천사로부터 들은 후에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더 크고 놀라운 비전을 보게 되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될 두 무리를 7장에서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이미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7:4-8에 나타나는 ‘144,000’의 그룹이고, 둘째는 7:9에 나타나는 ‘큰 무리’의 그룹이다. 이 두 그룹에 관한 사도 요한의 설명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존재하고 있다. 첫째, ‘들은 것’과 ‘본 것’의 차이가 있다. 7:4-8에 나오는 그룹, ’십사만사천‘에 관해서는 사도 요한이 단지 들었을 뿐이라고 증언하다.40) 그러나 7:9 이하에 나오는 ’큰 무리‘(οχλος πολυς) 그룹에 관한 것은 그가 친히 본 것이라고 하였다. 사도 요한이 ’들었다‘고 한 것과 ’보았다‘고 한 것의 차이는 매우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수적인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 인 맞은 자들의 수는 144,000으로 셀 수 있는 숫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에 사도 요한이 보게 된 사람들의 수는 얼마나 많은지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하였다. 데이비드 온(David E. Aune)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7장에서 ‘144,000’이라는 숫자(4절)와 ‘셀 수 없는 숫자’(9절)를 의도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셀 수 있는 숫자’와 ‘셀 수 없는 숫자’의 차이점은 엄청난 것이다. 비슬리 머레이(G. R. Beasley-Murray)는 "이스라엘의 십사만 사천이 각 나라에서 온 셀 수 없는 큰 무리로 대체되었다"고 하였다. 셋째, 구성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7:4-8에 나오는 ‘144,000’의 그룹은 오직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서 온 사람들로만 구성되었다. 그러나 그가 보았던 '큰 무리'의 그룹(9절)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으로부터 모여 온 무리였다“고 했다. 사도 요한이 9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라는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 자주 나오는 중요한 표현이다. 우선 ‘각’이라는 단어 ‘πας’는 ‘모든’(all)이라는 뜻이며, ‘나라’ ‘족속’ ‘백성’ ‘방언’이라는 네 단어 모두를 수식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보았던 ‘큰 무리’는 ‘모든 나라’ ‘모든 족속’ ‘모든 백성’ ‘모든 방언’에서 온 자들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선교적 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이 7장 초두에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서 온 '십사만 사천'을 다루다가 그 초점을 ‘큰 무리’의 비전으로 향하게 된 것은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적 관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7장 초두에서 다루고 있는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특수주의적 관점’(particularistic viewpoint)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에 나오는 ‘큰 무리’의 비전은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이 고, 선교적인 관심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나타나는 ‘나라’ ‘족속’ ‘백성’ ‘방언’은 유사한 단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차이가 많이 나는 개념들이다. 먼저 나오는 ‘나라’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트노스'(εθνος)라고 하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국토나 어떤 정부 형태를 가진 '국가'의 개념이 아니다. 정확하게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선교는 무엇보다 인종적인 장벽을 넘어가야 하는 사역임을 암시한다. 선교 사역을 통해 유대인이 혐오하는 이방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엄청나게 일어날 것이다. 또한 '족속'이라는 단어는 '훌레'(φυλη)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떤 특정한 전통과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종족’(tribe, clan)이라는 개념이다. 선교는 다양한 전통과 문화의 장벽을 넘어가는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유대인의 문화가 아닌 수많은 이방 문화권에서 하나님의 구원받는 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백성'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라오스’(λαος)라고 한다. 어떤 특정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사람을 총칭하는 단어라고 볼 수 있다. 마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 그는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는데, 여기 나오는 '백성'이라는 단어가 바로 '라오스'이다. 예수님이 구원하실 대상으로서의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구원은 단지 특정한 소수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기회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방언'이라는 단어는 '글로사'(γλωσσα)라고 하는데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뜻한다. 전 세계의 언어의 숫자가 7,100개 정도로 보고 있다. 선교는 이러한 언어의 장벽을 넘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7,100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세계로 들어오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여기 사도 요한이 사용하고 있는 ‘나라’ ‘족속’ ‘백성’ ‘방언’이라는 단어들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보편적이고 우주적이라는 중요한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로버트 마운스(Robert H. Mounce)는 “큰 무리라는 보편성이 ‘나라’ ‘족속’ ‘백성’ ‘방언’의 사중적인 구분으로 강조되고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이 특정한 백성, 특정 한 민족으로 제한되어 있지 않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으로 구성된 민족 교회가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쳐 다양한 인종, 문화, 언어권의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로 구성되는 우주적인 교회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9절에 사도 요한이 보았던 ‘큰 무리’의 비전은 언제 완성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찾아야 하는 사람들을 모두 찾게 될 때 완성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선교는 그 목표를 향하여 역사의 과정을 거쳐 끊임없이 진행될 것이고 언젠가는 그 마지막에 이르게 될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주시면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다. 이 말씀 가운데 ‘모든 족속’(παν τα εθνη)이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선교는 이 세상에 그 어떤 민족도 제외됨이 없이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것이 그 목적이다. 따라서 이 목적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선교는 쉬지 않고 진행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진행 되었던 선교가 이제 마지막 종결점에 이르게 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선교가 완성이 되고 마지막 종결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 구원함을 받은 셀 수 없는 ‘큰 무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1)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게 된 큰 무리들에게 두 가지 특징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첫째는 그들이 어떤 인종이든지 상관이 없이 “흰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9절). 여기 ‘흰 옷’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된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이 된 사람들이 아니라면 보좌 앞에 설 수 없음을 의미한다. “흰 옷을 입는다”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정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 정상화는 종교적인 정결 의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스스로의 어떤 수양이나 노력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했다(14). 예수님의 피의 공로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 14절에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는 표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 정상화는 환난과 고통을 겪은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시도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고난과 인내의 과정을 직면하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보좌 앞에 설 수 있는 근거는 될 수 없다. 예수님의 피가 그들을 보좌 앞에 설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이에 관하여 “사람들이 적절한 예복을 입고 하나님 보좌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죽으심이 그 근거이다”라고 하였다. 둘째 특징은 그들이 모두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 린 양에 서있다”는 것이다(9). ‘손에 종려 가지를 들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는 행위를 뜻한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도 ‘손에 종려 가지를 들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쳤다”고 했다. 그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다. 예수님의 왕 되심을 고백하는 외침이다. 이 세상의 종말이 오고 구원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섰을 때에도 그들은 모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이 만왕의 만주의 주가 되심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9절). 사도 요한이 바라보고 있는 우주적인 교회는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함을 받아 예수님의 왕 되심을 진정으로 고백하는 무리들의 공동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2)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경배와 찬양을 드리게 될 것이다. 선교의 목표는 선교 그 자체가 아니다. 선교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는 것은 선교는 선교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교의 목표는 전 세계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자들을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세우는 것이다. “선교의 가장 큰 열매는 열방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우상 숭배의 노예로 살아가는 이방인들을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이켜 참된 예배자로 세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참 예배가 무너진 곳에 선교가 존재하고, 예배가 회복된 곳에는 더이상 선교가 필요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7장에서 사도 요한은 더이상 선교가 필요 없는 상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구원하심을 받은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소리로 찬양을 드리게 것이다(9절). 이 장면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온전히 회복이 된 하늘에서의 종말론적 예배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날을 기다리면서 이 땅에서 선교에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모여 온 우주적인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드리는 찬양의 내용은 무엇인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는 것이다(10절). 이 무리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님을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찬양을 드린 것이다. 3) 하나님만 영원히 섬기게 될 것이다. 구원을 받은 자의 기쁨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큰 무리의 비전’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무리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게 될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15절) 이것은 하늘나라에서 선교도 중단되고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중 단 되지만 단 한 가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계속될 것임을 보여준다. 여기 ‘섬긴다’는 말은 ‘라트류오’(λατρευο)라고 하는데 마태는 이 단어를 예수님께서 신명기 6:3을 인용하시면서 사탄에게 명령하시는 말씀 속에 사용하였다.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다만 그를 섬기라”는 것은 ‘하나님만 높이고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라’는 의미이다. 사도 요한은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밤낮 섬긴다”고 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이상 우상이나 땅의 어떤 것을 섬길 수 시간이나 기회가 따로 없을 것이다. “밤낮”이라는 시간은 휴식이나 중지가 없는 시간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늘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 외에 다른 일을 시도하거나 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4) 영원토록 어린양의 인도하심을 받게 될 것이다.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현재라는 시간 속에 살면서 언제나 어린양의 인도하심을 받게 된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따르는 자에게 선한 목자가 되심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선한 목자’는 구약에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있어 자주 사용되는 은유이다. 사도 요한은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도 선한 목자가 되신 어린양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의 보호하심을 받게 될 것을 보여주었다. 선한 목자가 되신 어린양은 양들을 보호하고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게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구원함을 받는 성도들을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자” 또한 “어린양에게 속한 자”라고 부른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영적으로 승리하게 되는 이유는 선한 목자가 되신 어린양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현재라는 시간을 떠나 영원이라는 시간 속으로 들어간 후에도 계속해서 선한 목자이신 어린양의 인도를 받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다. 7:17에 보면 사도 요한은 구원함을 받은 큰 무리에 대해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샘으로 인도하시고...”라고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고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 것이다”(16절). 어린양의 인도하심은 영원하고 완전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7장을 중심으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요한계시록은 선교라는 주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이 책은 하나님의 선교의 종결 혹은 선교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범죄 타락하고 동산 나무 그늘에 숨어있던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시므로 선교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하나님의 선교는 한 번도 좌절되지 않고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기록하고 있는 대로 잃어버린 이스라엘 자손, 그리고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찾으시고 그들을 모두 예배하는 자로 세우실 때 하나님이 시작하셨던 선교는 완성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요한계시록은 선교의 마무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가 완성되었을 때 어떤 모습,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요한계시록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요한계시록을 이러한 선교적 시각으로 해석하는 작업은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뛰게 한다. 하나님의 선교적인 비전을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거친 삶의 현장을 뚫고 나가는 영적 에너지를 공급하게 될 것이다. |
방동섭 교수 /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목회학 석사, 미국 칼빈신학교 신학석사 과정, 미국 리폼드신학교 박사, 전 백석대학교 선교학 교수, 글로벌비전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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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카페에 후원을 해주셔야
카페를 계속 운영할 수 가 있습니다
통신료와 공과금을 내야합니다
카페지기는 월세를 살기 때문에 형편이 매우 어렵습니다
코로나19로 모두 힘든 시기입니다 카페지기도 너무 힘들게
지냅니다 먹을것(식품,반찬거리) 사도록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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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것 반찬거리도 사야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어려우시더라도 회원님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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