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빗 샐리저, 김욱동․염경숙 옮김, 현암사, 1994
『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김성곤, 살림, 2005
『벌거벗은 점심』, 윌리엄 S. 버로우즈, 정성호 옮김, 월간 에세이 출판부, 1992
누가 금서를 정하는 권능을 갖고 있는가 ? 그 권능의 일차적 담지체는 국가다. 국가는 포획기계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국가란 사회장에서 물질과 활동이라는 일차적인 흐름들에 가해지는 포획 과정 그 자체다. 국가는 영토를 포획하고, 사람을 포획한다. 국가는 인구, 상품, 화폐의 흐름을 포획하는데, 그 포획의 목표는 이 흐름들에서 잉여를 추출하기 위한 것이다. 포획의 힘, 달리말해 제약과 규제의 힘을 내부화하지 못한 조직은 국가가 될 수가 없다. 제약과 규제의 힘에 의해 작동한다는 점에서 국가란 다소 느슨한 규율이 지배하는 수용소고, 말랑말랑한 감옥이다. 금서란 포획기계로서의 국가가 행하는 사회 통제기획의 일부다. 국가는 다양성, 생성, 탈주, 유동성이 국가 지배를 벗어나는 혁명의 잠재력임을 알고 이를 적절하게 통제하는 법과 기구들을 끊임없이 고안한다.
국가가 금서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 중에서 가장 유용한 것은 ‘폭력과 외설’이다. 폭력과 외설에 대한 억압과 규제는 공공의 가치와 사회의 미풍양속을 보호한다는 명분에 의해 정당화된다. 1950년대의 미국은 냉전시대의 보수주의 가치에 의해 국가주의가 강화되었던 시기다. 노만 메일러는 이 시기를 “순응에 의해 서서히 죽어가는 시대”라고 규정했다. 미국은 풍요로운 소비사회를 구가하는데, 그 경제적 호황의 이면은 매카시즘이라는 광풍에 순응하는 무기력과 정신적 빈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무기력한 ‘순응의 시대’에 대해 반발하고 저항을 한 작가들이 비트 세대의 작가들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샐린저와 『벌거벗은 점심』을 쓴 버로우즈는 알렌 긴스버그나 『노상에서』를 쓴 잭 캐루악과 함께 비트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이다. 이들은 성과 사랑과 마리화나와 재즈를 성화(聖化)하며 기성세대의 위선과 기만에 진절머리를 치면서 격렬하게 기존 제도와 도덕에 저항한 세대들이다. 그들이 무절제하며 무질서한 삶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관습과 기만의 도덕에 억압당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 본능에 충실한 삶이다.
『호밀밭의 파수꾼』
미국 문학사상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와 함께 가장 대중적이며 비평적 관심의 표적이 되었던 작가가 샐린저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1951년에 처음 발표되었다. 당시 미국의 대학생들은 옆구리에 이 소설을 성경처럼 끼고 다녔고, 이 한편의 소설로 샐린저는 일약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샐린저는 1961년 9월15일자 타임지 표지를 장식할 만큼 대중적 관심의 표적이 되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서 일어난 비트 제네레이션Beat genaration의 반체제운동과, 1960년대의 히피문화를 중심으로 일어난 반문화 운동Counter culture의 사상적 동력을 제공하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전후 영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이끈 앵그리 영맨 The Angry Young Man이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앨런 긴스버그의 장시 「울부짖음」과 잭 캐루악의 『노상에서』와 함께 『호밀밭의 파수꾼』은 비트세대의 바이블이 되었다. 현대문명에 대한 환멸과 절망에서 비롯된 비트 세대의 저항은 기존의 모든 가치 규범, 그리고 관습과 제도에 대한 격렬한 부정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2차세계대전 중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일본의 두 도시에 떨어지며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인류공동체가 언제라도 한 순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했다. 현대사를 할퀴고 지나간 세계전쟁과 인종학살, 동서냉전과 쿠데타들, 그리고 파시즘, 나치즘, 공산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에 대해 진절머리를 쳤다. 바로 이때 『호밀밭의 파수꾼』이 나타났다. 『호밀밭의 파수꾼』는 작중화자인 홀든 콜필드를 통해 당대 젊은이들의 방황과 내면의 불행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거침없는 비어와 속어, 추악한 세상에 대한 조롱, 반체제적 내용 등으로 한때나마 유해성 논란에 휩싸이고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고 급기야는 금서 목록에 올라간 적도 있다는 사실을 놀랍지만 사실이다.
홀든은 호밀밭을 걸어오는 아이들이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지키는 파수꾼이 되겠다고 한다. 절벽이란 아이들이 타고난 순진성을 잃고 곧 발을 딛게 될 어른 세계의 기만적 제도와 규범들이 아닐까. 궤도에서 이탈한 행성과 같이 홀로 밤거리를 떠도는 홀든 콜필드의 방황은 곧 정체성을 찾으려는 열망과 관련되어 있으며 타자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안타까운 몸부림이기도 하다. 속물주의와 세상의 타락한 풍속의 한 가운데 섬처럼 떠 있는 홀든 콜필드는 외롭고 고독하다. 작가는 홀든 콜필드의 외로움과 고독을 통해 인간이 잃어버린 순진성의 신화에 애닯아 하고, 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의 두 도시에 원폭이 투하되는 것을 목격한 세대가 겪는 정신적 좌절과 고뇌를 보여준다. 두말 할 것도 없이 홀든 콜필드는 샐린저의 분신이다. 홀든이 믿고 따르는 한 선생님은 홀든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미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대의를 위해 고결하게 죽기 원한다는 것이고,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대의를 위해 겸허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 차 있는 주류 세상을 부정하고, 단순하고 직접적인 것을 추구하며 고뇌와 기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미국의 비트세대 작가들은 영국의 앵그리 영맨 작가들과 동렬에 선다. 비트세대 작가들은 1960년대 히피운동으로 그 명맥을 이어간다. 샐린저는 세상을 앞서 사는 작가다. 나는 샐린저가 그토록 오래 세상과 담쌓고 지내는 까닭을 알 수 있는 듯하다. 세상이 손써볼 여지가 없을 정도로 너무 깊이 병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샐린저의 작품 중에서 단편소설 「에스메를 위하여」와 함께 이 소설을 가장 좋아한다. 샐린저는 가장 적게 쓰고도 쓴 것만으로도 너무 유명해졌다. 나는 채식주의자로 명상과 요가를 하며 은둔 속에서 자신의 삶을 꾸리며 살아가는 샐린저가 좋다. 아울러 사람들이 더 이상 자꾸 그를 찾아내 세상 끌어내려고 하지 말고 그냥 두었으면 좋겠다.
『벌거벗은 점심』
1962년 미국에서 처음 출판된 『벌거벗은 점심』은 미국의 여러 주에서 소송의 대상이 되고 일부에서는 법적으로 판금 결정이 내려졌다. “잔인하고 외설적이며 혐오스러운” 이 작품에 대해 1966년 메사추세츠 주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외설적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미합중국 대법원은 어떤 책자가 외설물로 규제되는 것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성에 대한 음란한 관심을 자극하는 것이 전반적인 주요 테마로 관철되고 있는 작품, 둘째, 동시대 사회의 가치 기준을 공공연히 모욕하는 공격적인 작품, 셋째, 사회적 가치의 회복을 철저히 배제한 작품이 그 조건들이다. 『벌거벗은 점심』은 작가 스스로가 “야수적이고 외설적이며 혐오스럽다”라고 인정하고, 재판부도 이 작품이 전체적으로 공격적이고, 일탈에 대한 외설적 관심과 일탈에 대한 호기심에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외설 혐의를 벗는다. 그 판결의 근거로 사회의 책임 있는 지성계 일각의 관심과 지지가 이 책자가 “일정한 문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의 증거로 인정한 것이다. 재판에서 노만 메일러나 알렌 긴스버그와 같은 유명 문인들이 피고에 대한 우호적 증언을 하고 있다. 따라서 재판부는『벌거벗은 점심』의 출판과 배포 행위에 대해 “외설적 호소를 위해 다른 모든 가치들을 배제해버리는 상업적 추구의 소산”이라는 사실이 명확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남용되면 상실되어버릴 지도 모르는 권리 제한에 대한 헌법 수정 조항 제1조의 조건”에 대해 보다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함을 지적한다.
『벌거벗은 점심』은 어떤 작품인가하는 법정의 질문에 대해 노만 메일러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노만 메일러 : 이 작품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러니까 도무지 비교할 대상이 없는 복잡성을 던져주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작품으로서 진지한 연구와 조사의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 자각의 스타일은 대단히 독특합니다. 지극히 사소한 아름다움까지도 포착하고 있습니다. 아주 평범한 대화, 범죄자나 군인, 운동선수 마약 중독자 등의 대화 속에서 말입니다.
때로는 대단히 빼어나고 통렬하며 극적이기도 한 하층 계급의 언어로 표현된 웅변도 있습니다. 버로우즈는 내가 아는 다른 미국 작가들과는 달리, 그런 웅변을 포착했습니다. (....) 그의 시적 상상력은 무척 강렬합니다. 때로는 혐오스럽기까지 하지요. 하지만 그 속에는 충돌의 감각, 비범한 몽타주 기법의 감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그의 스타일에 대한 나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그의 의도에는 내가 이전에 인지했던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이번에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작품이 좀더 깊이가 있는 작품, 계산된 작품, 치밀하게 계획된 작품이라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한 마약 중독자의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버로우즈 자신이 15년 동안이나 약물에 절여져 있던 지독한 마약 중독자이고, 이 이야기는 거의 전부 자전적인 체험으로 채워져 있다. 버로우즈의 중독은 ‘정크’(즉 아편, 모르핀, 헤로인, 델로디디, 유코달, 팔포폰, 디오코디드, 디오세인, 데머롤, 돌로핀, 팰피엄에 이르기까지의 합성물을 포함하는 파생물)에 중독된 것을 뜻한다. 중독 상태, 중독에서 벗어나는 과정, 그리고 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나 후 등 세 가지 국면을 거치면서 씌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과 잠재의식의 요소들이 뒤범벅으로 나타나며 소설은 복잡한 양상을 띤다. 섬뜩한 냉소적 유머는 이 작품 전체에 차고 흘러넘친다. 이 소설은 “넌더리나고 케케묵은 정크 이야기와 정크 사기꾼” 이야기 이상이다. 마약은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지옥의 형상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매개체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미친 천재들, 불구자, 야바위꾼, 성도착자, 범죄자, 썩어가는 야수들은 어떤 방어적 요소도 없이 그 지옥에 노출되어버린 사람들이다. 중독 현상은 마약 중독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삶을 꾸리는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요소인 것이다. 동성연애도 중독이고, 돈에 대한 과도한 집착, 상품과 재산에 대한 집착도 중독이다. 그리고 권력에 대한 중독 혹은 권력을 쥠으로써 타인의 정신과 마음, 영혼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통제에 대한 중독도 있다. 버로우즈는 마약 중독이라는 현상을 다루면서 이 모든 중독들에 대한 통찰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한 혐오와 공격성, 잔혹함과 외설은 그것들을 다루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측면이다.
버로우즈는 분명 비트세대 작가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고 그들과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 『벌거벗은 점심』이라는 작품 제목도 비트세대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잭 캐루악의 작명이다. 기존의 제도와 관습, 그리고 도덕에 대한 공격은 그리스도, 부처, 마호멧, 공자, 노자와 같은 인류의 성자들을 희화화하고 조롱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섬뜩한 냉소적 유머 속에 마리화나, 재즈, 난교, 동성애 등이 난만하게 펼쳐진다. 이 미증유의 폭력적이며 외설적인 작품에 대해서 미국 법정은 “혐오스러움”을 인정하면서도 이 악마적이기조차 한 작품이 “기초적인 사회적 가치에 근거해 이 책자를 출판하고 배포한 사람들에 의한 사회적 중요성의 회복”이 전혀 내포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고, 그런 이유에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검증되지 않은 문학성을 인정하며 이 작품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