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재림 제 21 장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한다.”
베데스타 연못에서의 치료 후 심판과 부활에 대한 예수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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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1-6)
1 이 일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어로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이 있고 행각 다섯이
있더라.
3 그 안에는 수많은 병든 사람이 누워 있는데, 소경과 절름발이와 혈기 마른 자들이니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더라.
4 이는 천사가 가끔 그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물일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이 있든지 낫게 됨이라.
5 그런데 삼십팔 년 동안 병을 앓던 한 사람이 거기 있더라.
6 예수께서 이 사람이 누워있는 것을 보시니, 그가 오랫동안 병든 줄 아신지라.
그에게 말씀하기기를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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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축제일 동안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왔고, 베데스타의 연못을 방문하였다. 그는 연못이 움직일 때 몸을 담그기 위해 기다리는 병든 사람들 가운데로 들어갔다. 그 물은 어떤 기간 동안 천사들이 했다고 믿는 내부 치유력으로 충만 되었다. 그 연못은 치유하는 전류(전자기)를 발산하고 진동하였으며, 그 시대에 그곳에서 목욕한 많은 사람들이 치유되었다.
물의 치유력에 대한 믿음은 또한 몸에 있는 자연 치유력을 일깨운 정신적 반응이 원인이 된 것도 한 요인이었다. 질병으로 마음이 나약해지고 의지가 무력화될 때는 질병의 장애를 떨쳐낼 수 없다. 믿음은 몸의 질병에 걸린 한 부분에 치유력을 주기 위해 두뇌 속에서 발생하는 생명에너지에 관계된 전능한 치유력과 의지를 소생시킨다.
예수는 자기 힘으로 연못 속으로 갈 수도 없이 38년 동안이나 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고 동정심을 느꼈다. 고통 받는 그에게 예수는 물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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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7-9)
7 그 병든 사람이 대답하기를 “주여,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다 밀어 넣어 줄 사람이
없나이다. 그래서 내가 가는 도중에 다른 사람이 내 앞서 내려가나이다.”하고 하니라.
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나서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하시니
9 그 사람이 즉시 나은지라. 자기 침상을 들고 걸어가니 그 날은 안식일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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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력의 씨앗과 믿음의 토양은 둘 다 필요 하다.
치유의 신성한 법칙은, 환자에게는 믿음의 적합한 토양이 요구되고, 치유자에게는 정신적 치유력의 적합한 씨앗이 요구 된다 : 그럴 때 그 씨앗은 치유되는 사람의 의식 속으로 폭넓고 깊게 도달하여 치유의 식물의 가지와 뿌리로 자라난다. 예수는 신성한 법칙의 즉각성으로 치유되기를 바랐던 아픈 사람이 만드는 믿음의 토양을 준비하였다. 그것은 외부요소에 의존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아픈 사람이 받아들였음을 발견했을 때, “일어나서 당신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했다. 그는 아픈 사람에게 연못의 물에 의해 치유되는 과정을 기다릴 필요가 없음을 보여 주었다. 그보다는 인간의 의지와 마음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무한한 힘으로 즉시 치유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 사람이 즉시 치유된 원리는 이와 같다 :
(1) 예수의 의식의 정신적 투명도를 통하여 신의 무한히 전능한 에너지가 방해받지 않고 흐르게 된 것.
(2) 그 사람 자신의 믿음이 깨어났고 마비된 의지가 소생되었다. 그래서 그것이 예수로부터 오는 진동하는 우주에너지와 그 자신을 조율시키는 안테나로 작용하여서 두뇌 속에 잠재되어 있던 생명에너지와 결합되고 재충전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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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10-13
10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병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 말하기를 “안식일인데 네가 침상을
들고 가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도라.”라고 하자
11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나를 낫게 해 주신 그 분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더이다.”라고 하더라.
12 그들이 그 사람에게 묻기를 “너에게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한 그 사람이
누구냐?”고 하더라.
13 그러나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예수께서
그 곳에 사람들이 많으므로 자리를 뜨셨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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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치유된 사람에게 그의 병든 이유는 현생의 출생 후의 나쁜 행위와 전생들로부터 이어진 출생전의 나쁜 행동의 결과였음을 경고 하였다. 그래서 다시는 악에 굴복하지 말고, 죄 많은 방식으로 살지 않기를 당부했다. 예수는 과거의 잘못된 행동들의 습관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독립된 행동의 해방의 중요성을 지적하였다. 계속 법을 어기면서 과거의 악을 축척하고 새로운 행동으로 악을 증가시킨다면, 그는 그 결과로 나쁜 재앙을 당연하게 받게 될 것이다.
현재의 고통은 과거의 잘못된 행위의 결과이다.
과거의 악의 흔적은 두뇌의 의식 속에 잠복되어 있으며, 새로운 비행(범죄)의 자극으로 깨어나려고 잠재적으로 준비되어있다. 그러한 유해한 성향은 새로이 획득된 지혜의 전기적 힘으로 박멸될 수 있다.
예수는 악의 결과도 선의 보상도 미지의 원인이나 신의 법령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생을 지배하는 인과의 법칙, 즉 인간의 선한 행동이나 잘못된 행동의 결과에서 온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과학적인 분별력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은 불가해하고 변덕스러운 운명을 불행이나 행운의 탓으로 돌린다. 약간 이상한 방식의 이 불합리한 뜻밖의 사태는 그것에 책임이 없다는 잘못된 시각을 주어 위안을 주는 것 같다. 이 잘못된 개념을 용감하게 버리고 지혜로 대체해야 한다. 신음 소리 내는 운명과 비난하는 운명대신에 분별력 있는 좋은 행동을 함으로써 과거 악한 행위의 결과를 경감시키고 중화시킬 것이다.
이 치유의 사건으로 예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고통은 그들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더 나아가 인간의 생은 행위의 법칙에 지배될 뿐만 아니라, 또한 환생의 법칙이 탄생 시 부당해 보이고 불평등해 보이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고질적인 육체적, 도덕적, 정신적 질병의 치료는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로 치유될 수 있다 :
(1) 신의 중재자 중의 한 분의 직접적인 신성한 개입과 그분의 조언에 협력하는 것.
(2) 과거의 잘못된 행동의 결과를 최소화 하거나 파괴시킬 수 있도록 그 반대의 선한 행동을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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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15-18
15 그 사람이 가서 유대인들에게 자기를 고쳐 준 사람은 예수였다고 말하더라.
16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고 또 죽이려고 하였으니, 이는 주께서 이 일을
안식일에 행하셨기 때문이라.
17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나의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하노라.”고 하시더라.
18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를 더욱 죽이려고 하니, 이는 그가 안식일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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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인도한 행동은 자동적으로 영적법칙과 일치한다.
예수를 비평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삶의 윤리와 안식일의 법을 글자그대로 기계적으로 따랐다. 그에 반해 예수는 인간이 만든 형식과 겉치레들은 종종 무시하면서 영적인 법을 따랐다. 유대 안식일의 정신은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용무들을 거절하고 신에게 집중된 의식으로 헌신의 숭고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다. 영적인 교통 없이 물질적인 활동을 중지하는 것은 의식이 신보다는 육체적 나태함에 더 빠질 수 있다. 신의 이름으로 예수는 조금의 물질적 성질 없이 안식일 날에 물질적 행위를 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매일이 지혜와 신의 의식 속에서 사는 안식일 이었다.
그것이 예수가 이렇게 말한 이유이다 : “나의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하노라.”지구에서 예수가 한 일이 무엇이든 그것은 아버지의 의식에 의해 움직였고, 신으로부터 받은 직관적 지도로 인도되었다. 따라서 그의 행위는 악의 얼룩이 포함될 수 없고, 또한 어떤 영적인 정당한 법을 어기지 않았다.
비록 신과 조율된 헌신자가 하는 것이라 해도 그의 행위와 의지, 동기는 그 자신의 자유선택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로 인도되는 것을 느낀다. 그러한 헌신자는 신의 노예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 자신의 의지의 현명한 행위 속에서 인간 영혼의 지혜는 신으로부터 오는 지혜라는 것을 발견한다. 주님은 그의 헌신자들에게 어떤 것을 하도록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의 현존을 느끼는 사람들은 신의 의지의 지혜를 알고, 그리고 자신들의 이기적인 결정보다는 신의 인도를 선호한다.
“그대는 하게 될 것이다.”(Thy will be done)는 인간의 의지가 노예상태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가 증명한 것처럼 인간의 지혜로 인도된 의지는 신의 지혜로 인도된 의지와 아주 동일하다. 모든 지혜가 신의 것인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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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19
19 그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본
것은 할 수 있나니,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이하 첨부파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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