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 회왕은 여러 제후의 장수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진을 멸망시키는 일이다.
맨 먼저 관중에 들어가 그 곳을 평정하는 자를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
사기에 나오는 말이다.
유방은 무관을 통해 항우보다 먼저 관중에 진입한다.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실제 그 곳이 어딜까? 너무 궁금하였다..
중국 대륙은 서고 동저의 지리적 특성때문에
곤륜산에서 발원한 황하가 감숙성 란주에 이르러 더 이상 서진하지 못하고
사막사이를 뚫어가며 내몽고 쪽으로 북류 해 간다.
이어 강물은 내몽고 五原에서 다시 동쪽으로 꺽어 탁극탁(托克托)에 이르른다.
(이는 북쪽에 가로로 길게 누워있는 음산산맥 때문이다.)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꺽어
거의 일직선으로 남하하여 화산에 당도한다.
(일직선으로 남하하는 이유는 오른쪽 옆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려온 여량산맥때문인데
여량산맥은 오른쪽 옆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태행산맥의 한 줄기이다.)

황하 물줄기가 서 ,북,동 삼면을 수천리나 꺽어 돌아간 이 사다리꼴의 지형을
몽골어로 오르도스,한자로는 하투(河套)라고 부른다.
오르도스는 웅대하고도 풍요롭다.
후에 秦은 이 지역의 흉노를 몰아내고 오르도스를 반으로 잘라 장성을 쌓았다.
오르도스 동쪽에서 황하가 남으로 달릴때 양 쪽 언덕들이 높아지는 것이 지도상에 보이는 데
이 계곡을 사람들은 진진 (秦晉)대협곡이라고 부른다.
이 협곡의 중간에 그 유명한 호구 (壺口)폭포가 있다.
이 협곡을 사이에 두고 춘추전국시대 秦과 晉세력이 길항을 거듭하였다.
강 언덕 양쪽에는 지금도 그 당시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 지를 나타내는 수많은 고대 요새들이 남아있다.
여기서 황하는 좀 더 남쪽으로 달리다가 화산에 부딪힌다.
천길높이의 화강암으로 된 화산을 넘지 못 하고 황하는
결국 서쪽에서 달려온 위수와 힘을 합쳐 동으로 방향을 돌린다.
동관(潼關)에서 황하와 합쳐지는 위수는 관중이라는 큰 분지를 가로지르며 관중평원을 만들어 냈다.
관중평원은 동쪽은 황하가 막고있으며 남쪽은 거대한 진령산맥이 막고 있고 위수는 평원을 적신다.
이 험준한 산악지대로 둘러싸인 시안지역을
동쪽의 함곡관,서쪽의 대산관(大散關),남쪽의 무관(武關),북쪽의 소관(蕭關)의 4개의 관문 안에 있는
분지형태의 중심지란 의미로 관중(關中)이라 부른다.
따라서 황하 중상류지역인 관중지역은 험난한 고산지대에 해당한다.
지키기 쉽고 쳐내려가기 좋은 지리적 잇점을 가진 이 지역에서
기원 전 1122년에 무왕이 주나라를 세우고 다음 해에 지금의 시안시
서쪽 지척에 있는 호경에 수도를 정하여 천하를 통일 한 것이 그 효시이다.
이 때부터 중국문화의 중심이 이 관중지방으로 옮겨지게 된다.
호경이 서주시대 341년동안 수도로서 전중국을 호령한 데 이어
춘추(기원전 770~기원전 475년),전국(기원전 475~기원 전 221년)의 분열시대를 거친 다음 ,
기원 전 221년 진시황에 의해 6국이 통일 되고 나서
시안시 북쪽 경수와 위수 사이에 있던 함양이 통일 진제국의 수도가 되어 통일 천하를 다스려 나갔기 때문이다.
또 단명한 통일진제국(기원전 221~기원전 207년)을 뒤이어
200 여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통일제국을 유지하면서 사방으로 영토확장을 도모하여
한족의 위세를 만밤에 떨쳤던 전한(기원전 206년~기원후 8년)역시 함양 동쪽 위수건너
지금의 시안시 북쪽 지척에 장안을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던 것이다.
장안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 다는 말이 전해진다.(得長安得天下)
百二山河( 산하 험난하여 군대 2만이면 적군 백만명을 물리칠 수 있다)라는 말 도 있다.
장안은 동서남북 4군데의 관문을 수비하면 누구도 감히 차지하지 못 할만큼 천혜의 요새였기때문에
수,당대에 이르기까지 장안을 수도로 삼았던 것이었다.
따라서 장안을 중심으로 하는 관중일대는
서주에서 호경(시안 인근)으로 도읍을 정한 기원전 1122년이래로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통일중국을 이끌던 역대왕조의 수도권지역으로
절대군주의 절대권위가 항상 존재하던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