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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발효되는 바이러스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제26회 《시안》신인상 당선작
- 중구난방 외 4편 / 박승자
- 월요일의 안부 외 4편 / 안태현
중구난방 / 박승자
말들을 모으고 모아
말들에게 밥을 먹인다
중구난방 같은 말들을 어떻게 가둬둬야 하나
배부른 말들을 다독이며
두근두근 다가오는 말들은 또
어떻게 하얀 초원에 풀어야 하는지
난감한 생각의 길
앉은뱅이책상 위에 얼굴을 묻으면
가로등 불빛이 물 위에
어룽어룽 달빛처럼 비치는 골목
갈지자걸음으로 골목을 오르고 있던 사내가
점방 같은 낡은 슈퍼에서 나와
기와 내려앉은 지붕의 병든 아내를 위해
귤 몇 알 담긴 봉다리 흔들며 오르는
발걸음이 마치 말의 서방 같기도 하고
아무리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희미한 얼룩 같은 아버지의 초상 같은데
희디흰 벌판 눈보라로 내리치는
처절한 생각의 길
중구난방 같은 말들 중에
히이 힝, 우렁찬 울음소리로 가슴을 흔들
말을 고르기 위해
오늘도 말들을 모으고 모아
말들에게 밥을 먹인다
괘종시계가 두 번 우는 밤 / 박승자
육이오 피난 때 어린 오빠를 잃은 어머니는
동그란 고리가 달린 새장을 늑골에 넣으셨다
새가 울음으로 늑골을 갉을 때마다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셨다
대나무 바늘이 지나간 자리마다 붉은 고리가 엮어졌다
빨간 스웨터를 짰다간 다시 풀어 짜시던 어머니
석유곤로 위에 올려진 양은냄비 뚜껑이 요란하게 날갯짓을 하면
구불구불한 생의 길이 한 줄기로 피어오르는 사이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라도 할 것처럼 털실은 부풀어 오르고
사막에서 불어온 붉은 먼지들이 방 한 구석으로 쏠려다녔다
괘종시계는 어느덧 자정을 넘어 두 번 울고
새장 안에 갇힌 새는 언제 날아가나요
꾸벅꾸벅 질문이 모이를 쪼듯 뜨개질의 속도는 점점 더 느려지고
괘종시계 속 밤의 무게는 눈꺼풀 위로 보풀보풀 쌓이는데
스웨터를 짜다 말고 열두 살 계집애 몸에 가늠해보던 어머니는
작구나, 마치 긴 밤을 자르듯 한 마디를 내뱉으시며
평생 우는 새를 늑골에서 꺼내지 않을 양
밤새 짰던 붉은 고리를 다시 풀고 계셨다
자연사박물관에서 / 박승자
약속 같은 건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는 시간은 고래가 잡아먹은 듯 사라졌지만 그 고래가 토해내는 긴 실로 시간을 잡아당기면서 물레를 잣고 있었다. 아이들이 공룡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종다리 같은 발목으로 뛰어 노는 풀밭을 지나면 몇 억 년을 촘촘히 체로 걸러냈다는 자연사박물관, 익룡의 날카로운 식욕을 피해 암모나이트처럼 둥글게 휘어진 계단을 오르면 투명 아크릴 속에 네가 있었다.
오른쪽으로 다섯 번째
왼쪽으로 셋째 줄, 사선으로
푸른부전나비라는 명찰을 달고.
습기 없이 메마른 수천 년을 딛는 발목을 휘어잡는 너 앞에서, 나는 네가 있는 장소가 왜 기우뚱 흔들리는 무 장다리꽃 위가 아닌지, 아래층에 있는 표범이 왜 킬리만자로의 눈 속에 있지 않는지, 목포 앞바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궁금증으로 약속을 잊어버린 채 바라보았다. 그리고 너의 심장을 관통하고 있는 시간의 은빛 침을 뽑아 바람이 어린애처럼 뛰어 노는 낮은 언덕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새가 울면 축제를 한다는 / 박승자
새가 울면 축제를 한다는 종족이 있지
달력 날짜를 지우는 일 평생 없겠네
좀처럼 손을 내밀지 않는 해를 바라보며
막막한 얼음 속에서 새가 날아오르면
두꺼운 얼음을 깨서 물고기를 잡아
모닥불에 붉은 손바닥을 뒤집는 당신
얼음 알처럼 가지런한 잇바디를 보이며 웃는 당신
새가 우는 소리가 들리면
커다란 물고기를 수레에 끌고 소풍을 가는 당신
수레를 끌고 온 순록과 함께 툰드라의 아내와 딸
웃음소리가 짤랑짤랑 빛나는 초록 벌판 위에
싱싱한 물고기로 점심상을 차리는 당신
얼음처럼 발끝이 차가운 병이 있지
새가 물어다 줄 새싹을 평생 기다리겠네
한가위로의 이주를 꿈꾸다 / 박승자
휙,
나를 나꿔챘다
저 강을 건너면 안 되는데
어느새 발목이 젖어들고 있었다
여덟 살 엄마가 쉰세 살 딸을 데리고
보름달이 환한 한가위로 이주하고 있었다
발자국 딛는 곳에 빠르게 다른 발자국이 찍히고 있었다
강, 강, 술, 래
둥근 달을 밟고 있는 저 빠른 발자국을 따라 잡을 수 있는 것인지
둥근 달을 휘어 치며 도는 저 자진모리 상모의 기나긴 끈을 잡을 수나 있는 것인지
칭얼거리는 나이 든 딸을 데리고 음력 팔월 강을 건너는
어린 엄마는 말했다 물속의 달을 건져 한 입 가득 베어 먹으렴
강, 강, 술, 래
열두 발 상모는 어지럽게 돌고
박승자 시인
전남 보성 출생. 2000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살아 있는 시’ 동인.
월요일의 안부 / 안태현
탱글탱글한 빗방울이 떨어지네요
형편대로 드세요
월요일의 회색 입술에 착 감기지는 않을 테니
오디처럼 익은 주말의 맛은 잊어주세요
어젯밤 비구름이 자라는 사이
당신은 바에서 맥주 몇 병을 마시고 쓰러졌어요
혼자였거든요
약간의 냉소를 안주 삼은 게 문제였죠
걸어서 토성에 다녀오리라는 말소리가
여기까지는 들리지 않았어요
말끝이 흐렸거나 지워졌는지 모르죠
사무실의 반딧불이가 토해내는
지루한 서류의 맛을 볼 시간이군요
옛날 옛적의 혀는 버려주세요
숫자들의 단단한 얼개 밖으로 손을 뻗쳐
빗방울을 받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밤의 하얀 손가락과 잘 어울리는
오후 여섯 시라는 말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게 흠이지만
아주 간결하게 정리하는 것이 어때요
다가갈 수 없다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여든까지 가는 세 살 버릇
지금 바로 휴지통에 버려주세요
연두의 무리 / 안태현
계단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빛을 잃을 때가 있다 산 아래 해발 0미터에 부표를 띄운 햇살의 그물을 찢고 떼 지어 거슬러 오르는 푸른 물고기들
계곡에 숨었다가 능선에서 몸을 비틀어 산정을 향해 몰려가고 있다 배를 뒤집은 채 무리를 벗어난 무리도 있다 겨우내 저 속도로 오르고 싶어 안달이 났는지 지느러미들이 유쾌하게 햇살을 젓고 있다 산허리가 휘어지고 있다
어제 저녁에는 일기(日氣)가 고른 당신과 나 사이에 연두라는 맛이 돌았다 때로 땀과 맛이 동의어로 쓰이는 때가 있다 4월의 계단을 함께 오르는 우리 사이에는
무리, 서열이 없는 그 형식에 대해 이야기하면 즐거워진다 숨 가쁘게 지나가는 풍경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무리에 동떨어져 있나 산벚나무 몇 그루 무리에 섞여 배내옷처럼 환하다
시를 건드리다 / 안태현
가두리를 벗어나려다 정수리를 다쳤지
붉은 그물코였어
상처는 오래 갈 것이나
면봉으로 살짝 건드리면
밤은 무릎 쪽에서부터 빛나기 시작하는 거야
내일부턴 세수도 하지 않을 거야
언제나 깔깔대던 그 여자
초록 모자가 벌러덩 뒤집히겠지
우산을 쓰고 가다 비를 잃어버리면 어때
손가락 끝에 성냥불을 댕겨
인디아나존스 같은 동굴 탐사를 생각하는 거야
숟가락으로 달빛을 퍼 올리는 것은
사막으로 태어나 별을 깨물어 먹는 것은 어때
그래도 좋다면 연고를 발라줘
봉지에서 막 꺼낸 새하얀 면봉으로
부드럽게 콕 찍어 줘
너에게 옮아가는
밤의 나이테 같은 게 있다면 좋겠어
좀 지저분하지만 습진 같은 것이라도 괜찮아
정수리를 감싸 쥐고 제자리를 빙빙 도네
그물코는 붉고
갈기갈기 찢긴 지느러미들은 더 붉고
밤의 퍼즐 / 안태현
모로 누워 있으므로
한쪽 팔을 접고 다가가야 당신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다
몇 초마다 자세를 바꾸는 검은 새의 속성이
나의 밤을 지배한다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지만
검은 새가 물고 오는 악몽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당신이 나를 흔들어 깨울 때마다
내가 돌아오는 길은 너무 낯설고 갑작스런 길이다
먼 길이었으므로
볼에 흐르는 깃털 같은 달빛이 기억에 있을 리 없다
품고 사는 검은 새를 가두기 위해 밤마다 새장을 만들지만
하얀 시트를 걷어내면 부러진 살들이 수북하다
평생 혼자서 즐기는 이 손때 묻은 놀이
풀고 당기는 법을
어느 누가 가르쳐주지 않나
당신과 나의 입술이 포개져도 밤은 여전히 길고
아침이 부드럽게 각을 세우면
나의 그림자는 다시 자라기 시작한다
검은 새가 앉았다 간 풍경들의 걸음이 어제보다 둔하다
귀가 마르다니요 / 안태현
비가 잦아서 귀가 물러졌습니다
나는 달팽이관을 며칠째 청소하는 중입니다
플라스틱 빗자루로 싹싹 쓸어낼 수 없으니
손톱이 긴 손가락으로
이물스런 말들을 꺼내 천변에 버립니다
다리 그늘 아래 돌덩이 몇 개 앉혀놓으면
왜 이곳에서 말이 환생할까
차가운 돌덩이를 깔고 앉아
사라지지 않는 말의 궤적에 대해 생각합니다
달리마 클럽의 사내들이 말줄임표를 찍으며 달려갑니다
바람을 가르는 자전거 두 바퀴가
묵음처럼 스쳐지나갑니다
그 말은 지극하여
다리를 건너 시장을 지나 어린이보호구역에 이르기까지
내 귀를 오래도록 열어두었습니다
사과를 쪼개다 손목이 비틀어져 내지르던 비명처럼
해는 뜨고
그 해가 따뜻하게 셔츠 뒤에 업혀오고
내 귀가 마르다니 참 다행입니다
부처꽃이 소곤소곤 피겠습니다
하루의 긴 그림자에
커다란 검은 보자기를 씌워 놓으면
새 귀들이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겠습니다
안태현 시인
전남 함평 출생. 광주교대, 대진대 교육대학원 졸업. 현재 경희초등학교 교감.
[심사평]
춤의 시와 슬픔의 시
최종심에 오른 여섯 일곱 신인들의 시 사오십 편을 두세 시간 걸쳐 읽다보면 독후감이나 변별성이 뒤섞이는 경우가 많다. 그 가운데 안태현 씨와 박승자 씨 두 분은 한 차례 읽고 나서 금방 판별할 수 있는 개성과 안정성이 돋보였다.
안태현 씨의 「월요일의 안부」는 사오십 편 가운데 단연 뛰어났다. 월요일 저녁 퇴근시간을 기다리는 기분을 혼자 주고받는 대화가 출렁거린다. 대화는 우울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쿨하고도 모던하다. 재즈 같고 블루스 같다. 속삭임 같고 눈짓 같다. 그러면서도 긴 설명문과 짧은 한 마디 던짐이 시의 진행과 맛을 부추기고 있다. 좋은 시의 특성인 입체감, 출렁거림 또는 말의 춤을 느끼게 해준다. 후반부가 긴 설명문으로 이어져서 춤의 탄력이 줄어든 것은 아쉽다, 「시를 건드리다」와 「귀가 마르다니요」는 이런 대화성에서 멀어진 시다. 그래서 좋은 알레고리를 가지고도 출렁거림 없이 평면에 멈추었다. 「월요일의 안부」의 대화적 기법을 앞으로 한 5년, 자기 개성으로 더 집중하시기를 주문하고 싶다.
박승자 씨는 명사어의 변주에 능숙해 보인다. 시인의 의식과 서정, 또는 정신과 감각의 교직이 자연스럽다. 「괘종시계가 두 번 우는 밤」은 그 변주의 능숙함이 선명하다. 새장과 뜨개질과 괘종시계로 명사를 바꾸어가면서 시간의 경과, 삶과 한의 깊이로 나아간다. 시인이 시의 끝에 닿는 명사는 우는 새와 붉은 고리이다. 오빠와 딸은 어머니의 붉은 가슴을 평생 울리는 새 두 마리라는 의식의 끝에서 괘종시계는 두 번 운다. 슬프다. 그러나 이런 깊이 있는 슬픔이 시정신의 기본 아닌가. - 박의상(시인)
신선함과 안정감으로 시인다운 시인을 기대하며
좋은 시는 우선 꾸밈이나 허세가 없어야 한다. 우주 삼라만상의 하찮은 것에서부터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데에 이르기까지 맑고 순수하며 서그러워야 한다. 시류나 사조를 좇느라 왜 시를 써야하는지를 잊어서는 좋은 시인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시에서 신선함이란 새로운 것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았을 때 가능하다. 이번 신인상 심사에 임하는 심사위원으로서의 나의 마음가짐이 이랬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을 보면서 역시 『시안』의 명성에 걸맞다는 안도감과 나의 마음가짐은 일치했다.
안태현의 「월요일의 안부」를 비롯한 작품들과 박승자의 「중구난방」을 비롯한 작품들은 신선함과 안정감의 무게를 함께 나누어 갖는 시적 완성도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먼저 안태현의 경우, “탱글탱글한 빗방울” “오디처럼 익은 주말의 맛”(「월요일의 안부」), “볼에 흐르는 깃털 같은 달빛” “풍경들의 걸음”(「밤의 퍼즐」) 같은 언어의 감칠맛을 아는 걸 보면 우선 시에서 언어 다룸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체득한 듯하다. 특히 「귀가 마르다니요」에서의 “비가 잦아서 귀가 물러졌습니다/ 나는 달팽이관을 며칠째 청소하는 중입니다”로부터 시작하여 “다리 그늘 아래 돌덩이 몇 개 앉혀놓으면/ 왜 이곳에서 말이 환생할까”를 거쳐 “내 귀가 마르다니 참 다행입니다/ 부처꽃이 소곤소곤 피겠습니다”로 마무리되어 가는 이미지의 연결이야말로 시가 갖추어야 할 구조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시적 안정감을 믿을 수 있게 한다.
박승자 또한 「중구난방」에서 “말[言]”과 “말[馬]”의 중첩 이미지를 사용한 기교 못지않게 시인으로서의 언어와의 싸움이 얼마나 “처절한 생각의 길”인가를 신선하게 토해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괘종시계가 두 번 우는 밤」에서 “빨간 스웨터를 짰다간 다시 풀어 짜시던” 그리고 “스웨터를 짜다 말고 열두 살 계집애 몸에 가늠해보던” 어머니와 「한가위로의 이주를 꿈꾸다」에서의 “칭얼거리는 나이 든 딸을 데리고 음력 팔월 강을 건너는” 어머니에 대한 이미지는 단연 상투성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서사적 상상력이 시에 어떻게 투영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자연사박물관에서」의 “익룡의 날카로운 식욕을 피해 암모나이트처럼 둥글게 휘어진 계단을 오르면 투명 아크릴 속에” “심장을 관통하고 있는 시간의 은빛 침”에 의해 박혀 있는 “푸른부전나비” 를 향한 시선의 집중력은 놀라우리만치 섬세해서 앞으로 시인으로서의 지난한 길을 무난히 헤쳐 나아갈 수 있을 것으로 보여 든든하다.
위 두 분 외에도 이정환과 강현숙도 언어를 소중히 다루는 솜씨가 만만치 않아 최종심에서 토론이 있었으나 응모작품이 전체적으로 고른 수준을 갖추지 못해 못내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기다려보기로 했음을 밝힌다. 당선된 안태현과 박승자 두 분은 등단만 하고 사라지는 시인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앞으로 두 분 함께 시인으로서의 겸양지덕과 치열한 시 쓰기에 온힘을 기울이는 시인다운 시인으로 살아가주기를 당부하면서 거듭 축하의 마음을 전한다. - 허형만(시인)
고른 수준과 심사의 어려움
이번 시안신인상 응모작의 편수는 다소 줄어들었지만 수준은 대개 향상된 느낌이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이정환의 「새떼」외 9편, 강현숙의 「야생동물보호구역」 외 9편, 박승자의 「중구난방」 외 9편, 안태현의 「월요일의 안부」 외9편이었다. 이 네 분은 모두 개성적인 시각으로 세상과 사물이 품 안에 감춘 비밀을 읽어내고, 나름의 언어로 요량껏 재구(再構)하는 솜씨가 돋보여 심사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출중한 작품이 눈에 띄지 않아 마지막까지 고민과 갈등을 해야 하는 상황은 심사자 입장에서는 반가울 수가 없다. 누가 붙고 떨어질지언정 이상할 게 없는 판에 굳이 비점(批點)을 매기고 탈락자를 고르는 것은 곤혹스럽다.
이정환의 「새떼」는 풍자를 도구로 당시대의 물정(物情)을 다룬다. 대상과 거리를 적당히 견지하며 업어치고 메치는 힘은 오래 글과 다투어 왔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세 번째 연은 공연히 손찌검을 해서 풍자의 날을 스스로 무디게 하는 걸 넘어, 아예 초점을 흐려 놓은 형국이 되고 말았다. 강현숙도 어깨에 힘을 빼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야생동물보호구역」은 구문도 안정적이고 의미도 알맞은 질감과 양감으로 아껴 갈무리한다. 하지만 언어적 긴장 면에서는 소홀히 하여 무엇보다 시다운 예리한 맛을 느끼기 어려웠다.
박승자의 「중구난방」외 4편, 안태현의 「월요일의 안부」외 4편을 당선작으로 낸다. 박승자는 세목에서 볼 때 언어와 정서 측면에서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 있고 군더더기가 많아 단정하게 다듬는 노력이 필요하다. 안태현은 기교와 재치에 너무 의존해서 진정성이 약화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분에게 눈길이 간 것은 활발한 상상력과 간간히 드러나는 섬세하고 투명한 감수성에 더 무게를 실었기 때문이다.
간발의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었다. 이런 경우 운도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게 심사자 입장에서 드리는 솔직한 고백이다. 탈락한 두 분께는 격려를, 당선자 두 분께는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 오태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