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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9. 12:11 曺夏望(조하망. 1746년 영월부사)의 錦江亭。次韻王粲登樓賦(금강정。차운왕찬등루부)를 추가하다.
2018.08.29. 10:33 柳方善(유방선) 선생의 「登寧越錦江亭 영월 금강정에 올라」를 추가하다.
2018.07.24. 16:52 「寧越道中 영월로 가면서」 蓀谷 李達(손곡 이달)의 五言律(오언율) 시를 추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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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江亭。次韻王粲登樓賦(금강정。차운왕찬등루부)
原人生之度世兮(원인생지도세혜)。
苦尠歡而夥憂(고선환이과우)。
旣知天而知人兮(기지천이지인혜)。
夫何怨而何仇(부하원이하구)。
謝塵坌而遐擧兮(사진분이하거혜)。
問崇阿與長洲(문숭아여장주)。
循湖嶺而適越兮(순호령이적월혜)。
俯飛閣之淸流(부비각지청류)。
忽前瞻而流涕兮(홀전첨이류체혜)。
悲九疑之珠丘(비구의지주구)。
周德遠於三讓兮(주덕원어삼양혜)。
禹跡迷於九疇(우적미어구주)。
念絶國之㟼以邃兮(념절국지오이수혜)。
曾胡爲乎玉趾之此淹留(증호위호옥지지차엄류)。
寄哀怨於無極兮(기애원어무극혜)。
地老天荒遂至今(지로천황수지금)。
顧萬代之彜常兮(고만대지이상혜)。
彼六臣之獨任(피육신지독임)。
想當日之餘子兮(상당일지여자혜)。
尙何心而冠襟(상하심이관금)。
天有意而設此兮(천유의이설차혜)。
環二江與重岑(환이강여중잠)。
閟聖人之珠旒兮(비성인지주류혜)。
宛金粟之窈而深(완금속지요이심)。
星紀積而二百兮(성기적이이백혜)。
胡人情之自不禁(호인정지자불금)。
梨花之亭月白兮(리화지정월백혜)。
最子䂓之哀音(최자규지애음)。
淸泠之瀨水咽兮(청령지뢰수인혜)。
激老龍之幽吟(격노룡지유음)。
曰余行之固倦遊兮(왈여행지고권유혜)。
更攬古而拊心(경람고이부심)。
舟凝滯於錦水兮(주응체어금수혜)。
夢渺綿於宸極(몽묘면어신극)。
彼羣兒之自相貴兮(피군아지자상귀혜)。
夫孰云皓首之陳力(부숙운호수지진력)。
安危係於廟堂兮(안위계어묘당혜)。
謀不在於藿食(모불재어곽식)。
時曖曖其繁陰兮(시애애기번음혜)。
感龍蛇之藏匿(감룡사지장닉)。
干將鈍而遜鉛兮(간장둔이손연혜)。
嫫母姣而授色(모모교이수색)。
服楚戶之蕭艾兮(복초호지소애혜)。
賀虞庭之勵翼(하우정지려익)。
惟世運之平陂兮(유세운지평피혜)。
豈天道之消息(기천도지소식)。
浮雲隔其九閽兮(부운격기구혼혜)。
悄徙倚而悱惻(초사의이비측)。
擥汀洲之宿莾兮(람정주지숙망혜)。
憂思壯而塡臆(우사장이전억)。
聊爾續唱於楚騷兮(료이속창어초소혜)。
願因風而致君側(원인풍이치군측)。
【출처】西州集卷之一 / 賦 (서주집권지일 / 부)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8
지은이 : 조하망(曺夏望)
생년1682년(숙종 8) ~ 몰년1747년(영조 23)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아중(雅仲), 호는 서주(西州). 조문수(曺文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한영(曺漢英)이고, 아버지는 금구현령 조헌주(曺憲周)이며, 어머니는 이일상(李一相)의 딸이다.
1711년(숙종 37) 사마시에 합격, 1722년(경종 2) 장릉참봉(章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그 뒤 동몽교관(童蒙敎官)·공조좌랑·의령현령 등을 역임하였다. 1736년(영조 12) 정시문과에 장원한 뒤 판결사·승지·참찬관(參贊官)을 지내면서 어사를 파견하여 양정(良丁)을 살필 것을 청하였다.
1739년 승지를 지내고, 1741년 대사간, 다음해 강릉부사로 부임하여 경포대를 중수, 상량문을 지어 그 문장으로 격찬을 받았다. 1745년 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지내고, 이듬해 영월부사로 전임하였다가 병으로 사퇴하였다. 저서로 『서주집』이 있다.
【출처】한국역대인물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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登寧越錦江亭。贈邑宰。孟度○二首
(등영월금강정。증읍재。맹도○이수)
登寧越錦江亭。贈邑宰。孟度○二首
(등영월금강정。증읍재。맹도○이수)
㮈城山水自無塵(내성산수자무진)。
地僻官閒俗且淳(지벽관한속차순)。
獨坐錦江亭上望(독좌금강정상망)。
萬家煙火太平春(만가연화태평춘)。
一枝蟾桂隔塵寰(일지섬계격진환)。
三級龍門激濬端(삼급룡문격준단)。
爲報公餘加努力(위보공여가노력)。
登門攀桂也何難(등문반계야하난)。
時邑宰欲赴擧故云(시읍재욕부거고운)
지은이 : 유방선(柳方善) 생년1388년(우왕 14) ~ 몰년1443년(세종 25)
泰齋先生文集卷之二 / 詩○七言絶句 二百四十四首
(태재선생문집권지이 / 시○칠언절구 이백사십사수)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0
登寧越錦江亭(등영월금강정)
勝地曾聞有㮈城(승지증문유내성)。
如今來上錦江亭(여금래상금강정)。
佳人度曲腸堪斷(가인도곡장감단)。
座客傳觴手不停(좌객전상수불정)。
二水縈回明夾鏡(이수영회명협경)。
千峯環拱展新屛(천봉환공전신병)。
一杯敢忘君恩重(일배감망군은중)。
北望三山祝萬齡(북망삼산축만령)。
泰齋先生文集卷之三 / 詩○七言四韻 百九十一首 태재선생문집권지삼 / 시○칠언사운 백구십일수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0
柳方善(유방선) : 생년1388년(우왕 14) ~ 몰년1443년(세종 25)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자계(子繼), 호는 태재(泰齋). 할아버지는 관찰사 유후(柳厚)이고, 아버지는 유기(柳沂)이다. 어머니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종덕(李種德)의 딸이다.
1405년(태종 5) 국자사마시(國子司馬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409년 아버지가 민무구(閔無咎)의 옥사에 관련된 것으로 연좌되어, 청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영천에 이배되었다.
1415년 풀려나 원주에서 지내던 중, 참소로 인하여 다시 영천에 유배되었으나 1427년(세종 9)에 풀려났다. 유배생활 중의 학행이 높이 드러나 유일(遺逸)주 01)로 추천되어 주부(主簿)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2세 무렵부터 변계량(卞季良)·권근(權近) 등에게 수학하여 일찍부터 문명이 높았다. 특히 유배생활 중에는 유배지 영천의 명승지에 ‘태재(泰齋)’라는 서재를 지었다. 그리고 당시에 유배 또는 은둔생활을 하던 이안유(李安柔)·조상치(曺尙治) 등 문사들과 학문적인 교분을 맺고, 주변의 자제들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이보흠(李甫欽) 등의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즉, 정몽주(鄭夢周)·권근·변계량을 잇는 영남성리학의 학통을 후대에 계승, 발전시키는 구실을 담당한 것이다. 원주에서 생활하는 동안 서거정(徐居正)·한명회(韓明澮)·권람(權擥)·강효문(康孝文) 등 문하생을 길러내었으며, 특히 시학(詩學)에 뛰어났다. 경현원(景賢院)과 영천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태재집』이 있다.
【출처】한국역대인물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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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기언 제24권 중편 / 기행(記行)
임인년(1662, 현종3) 정월 기행문
가리파(伽利坡)는 원주(原州) 치악산(雉嶽山) 남쪽 기슭의 큰 재인데 ~ 그 동쪽은 유령(楡嶺)인데 영월(寧越)의 경계이고 유령을 넘으면 용정(龍井)이다. 용정은 샘물이 바위 구멍에서 솟아나와 그 가운데가 못인데 홍수나 가뭄에 기도를 올린다.
영월에서 노릉(魯陵)을 물어보니 군(郡)의 서쪽 큰길가에 있었다. 옛적 군의 아전 엄흥도(嚴興道)라는 자가 노릉을 거둬 묻어 주었다고 한다. 현재 군에는 아전과 백성 중에 엄씨(嚴氏) 성을 가진 자들이 있는데 그 일족이 매우 많다. 오래전 일이라 그 대수는 모르겠지만 필시 후세 자손들이 끊기지 않았나보다. 태수 윤후 순거(尹侯舜擧)와 함께 금강정(錦江亭)에 올라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눈 뒤에 배를 타고 정자 아래 석벽을 둘러보았다. 상동(上東)의 골짜기 어귀부터 석령(石嶺)까지는 40리인데 모두 높은 절벽과 푸른 시내였으며 이따금 흰 자갈돌에 깊은 못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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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 동춘당집 별집 제7권 / 연보(年譜)
우복(愚伏) 정 선생(鄭先生) 연보
정유(1597) 만력 25년 선조대왕 30년 ○ 선생의 나이 35세였다.
○ 9월에 어사가 되어 영서(嶺西) 지방을 순시하였다.
- 주천현루(酒泉縣樓)에 묵으며 지은 절구 1수와 금강정(錦江亭)에 묵으며 지은 율시 1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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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원문 > 매산집 梅山集 卷二 / 詩 . 홍직필(洪直弼) 찬 1866 간행
錦江亭,謹步外舅板上韻
魯陵松柏望悽然,不待春宵聽杜鵑。
嗚咽落花巖下水,滔滔哀恨向人傳。
금강정에서 현판에 있는 외구의 시에 차운하다〔錦江亭謹步外舅板上韻〕
노릉의 소나무와 측백나무 바라봄에 서글퍼지니 / 魯陵松柏望悽然
봄밤 두견새 소리 듣기를 기다리지 않네 / 不待春宵聽杜鵑
낙화암 아래 오열하는 강물 / 嗚咽落花巖下水
도도히 흘러 슬픈 한을 사람들에게 전하네 / 滔滔哀恨向人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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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碧樓敍別,任丈有詩要和,率爾聞命
丹山碧水自幽期,二老淸遊幷一時。
待到越中無此會,錦江亭上倍相思。
한벽루에서 작별할 적에 임장이 시를 짓고 화답을 요구하므로 갑자기 분부를 따라 짓다〔寒碧樓敍別任丈有詩要和率爾聞命〕
붉은 산과 푸른 물의 그윽한 약속 / 丹山碧水自幽期
두 노인의 깨끗한 놀이에 함께 어울렸네 / 二老淸遊幷一時
영월(寧越)에 가면 이러한 모임 없을 것이니 / 待到越中無此會
금강정 위에서 갑절이나 그리워하리라 / 錦江亭上倍相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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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州集卷之一 / 賦
錦江亭。次韻王粲登樓賦。<조하망(曺夏望) 찬>
原人生之度世兮。苦尠歡而夥憂。旣知天而知人兮。夫何怨而何仇。謝塵坌而遐擧兮。問崇阿與長洲。循湖嶺而適越兮。俯飛閣之淸流。忽前瞻而流涕兮。悲九疑之珠丘。周德遠於三讓兮。禹跡迷於九疇。念絶國之㟼以邃兮。曾胡爲乎 玉趾之此淹留。寄哀怨於無極兮。地老天荒遂至今。顧萬代之彜常兮。彼六臣之獨任。想當日之餘子兮。尙何心而冠襟。天有意而設此兮。環二江與重岑。閟 聖人之珠旒兮。宛金粟之窈而深。星紀積而二百兮。胡人情之自不禁。梨花之亭月白兮。最子䂓之哀音。淸泠之瀨水咽兮。激老龍之幽吟。曰余行之固倦遊兮。更攬古而拊心。舟凝滯於錦水兮。夢渺綿於 宸極。彼羣兒之自相貴兮。夫孰云皓首之陳力。安危係於廟堂兮。謀不在於藿食。時曖曖其繁陰兮。感龍蛇之藏匿。干將鈍而遜鉛兮。嫫母姣而授色。服楚戶之蕭艾兮。賀虞庭之勵翼。惟世運之平陂兮。豈天道之消息。浮雲隔其九閽兮。悄徙倚而悱惻。擥汀洲之宿莾兮。憂思壯而塡臆。聊爾續唱於楚騷兮。願因風而致君側。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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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寧越道中 영월로 가면서」
蓀谷 李達(손곡 이달)
懷緖客行遠。회서객행원。시름품은 나그네 먼 길 나서니
千峰道路難。천봉도로난。첩첩산길은 험하기만 하구나.
東風蜀魄苦。동풍촉백고。봄바람에 들려오는 두견 울음 괴롭고
西日魯陵寒。서일노릉한。저물녘 노릉은 스산도 해라.
郡邑連山郭。군읍연산곽。고을은 산성과 이어지고
津亭壓水闌。진정압수란。나루에 정자는 물가를 가로막고 섰네.
他鄕亦春色。타향역춘색。타향에도 또한 봄빛인데
何處整憂端。하처정우단。어느 곳에서 근심걱정 다스려 볼거나.
『蓀谷詩集卷之三 / 五言律』한국고전번역원|한국문집총간|1991.
*郡邑 : 주(州), 부(府), 군(郡), 현(縣)의 총칭(總稱)
*山郭 : 山村 산 마을. 산촌 마을. 두메 어귀. 산은 첩첩. 높이 우뚝 솟아 벽같이 된 산(山)
郡邑連山郭 관아와 고을의 둘레는 산과 연하고
이달(李達) 1539년(중종 34)∼1612년(광해군 4).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서담(西潭)·동리(東里). 원주 손곡(蓀谷)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이수함(李秀咸)의 서자이다. 이달의 제자 허균(許筠)이 이달의 전기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으면서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익지이니, 쌍매당이첨(李詹)의 후손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이달을 이첨의 후손으로 보아 신평이씨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달은 이석근(李碩根)-이수함으로 이어지는 홍주이씨이고 조선 후기 『신평이씨족보』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허균이 자신의 스승인 이달의 가계를 혼동하여 기록했을 개연성이 크다.
활동사항
이달은 당시의 유행에 따라 송시(宋詩)를 배우고 정사룡(鄭士龍)으로부터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그러나 박순(朴淳)은 그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이류로 떨어진 것이다.”라고 깨우쳤다. 그리고 이백(李白)의 악부(樂府)·가(歌)·음(吟)과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보여주었다.
이에 그는 이백·왕유·맹호연의 시를 보고 시의 오묘한 이치가 그들의 작품에 있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 당시를 열심히 익혔다. 『이태백집(李太白集)』과 성당십이가(盛唐十二家)의 글, 유우석(劉禹錫)과 위응물(韋應物)의 시, 양백겸(楊伯謙)의 『당음(唐音)』 등을 모두 외웠다고 전한다. 이렇게 5년 동안 열심히 당시를 배우자, 시풍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비슷한 품격의 시를 쓰던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은사(奉恩寺)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모였다. 임제(林悌)·허봉(許愼)·양대박(梁大樸)·고경명(高敬命) 등과도 자주 어울려 시를 지었다.
이달은 서자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문과에 응시할 생각을 포기했지만 또 다른 서얼들처럼 잡과(雜科)에 응시하여 기술직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도 않았고, 온 나라 안을 떠돌아다니면서 시를 지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격이 자유분방했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소외당하기도 했다. 한때 한리학관(漢吏學官)이 됐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겨서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한편 잠시 동안 중국 사신을 맞는 접빈사의 종사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일흔이 넘도록 자식도 없이 평양의 한 여관에 얹혀살다가 죽었다. 무덤은 전하지 않으며, 충청남도 홍성군청 앞과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손곡초등학교 입구에 그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이달의 시는 신분 제한에서 생기는 울적한 심정과 가슴 속에 간직한 상처를 기본정조로 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의 시어를 맛깔나게 사용했다. 근체시 가운데서도 절구(絶句)에 뛰어났다.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에서 조선시대의 오언절구 가운데에 이달이 지은 「별이예장(別李禮長)」을 대표작으로 꼽았다. 그만큼 그의 오언절구는 유명했다.
한편 허균은 「손곡산인전」에서, “이달의 시는 맑고도 새로웠고, 아담하고도 고왔다(淸新雅麗)주 01). 그 가운데에 높은 경지에 오른 시는 왕유·맹호연·고적(高適)·잠삼(岑參)의 경지에 드나들면서, 유우석·전기(錢起)의 기풍을 잃지 않았다. 신라·고려 때부터 당나라의 시를 배운 이들이 모두 그를 따르지 못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시집으로 제자 허균이 엮은 『손곡집』6권 1책이 있다. 이밖에 최경창의 외당질 유형(柳珩)이 엮은 『서담집(西潭集)』이 있다고 전하나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 1) 이수광(李睟光)이 쓴 『서담집』의 서문(序文)만이 전하고 있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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