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남해출신 경남의 1세대 출신 소설가 문신수(1928-2002) 선생의 따님이 대를 이어 문인으로 등단하여 화제다. 주인공은 지난해 연말 경남문학 신인상 수필부문(경남문학 2024 겨울호 수록)에 당선한 문정숙 씨로 그는 문신수 소설가의 네째 따님이다. 문신수 소설가는 5남매를 두었다. 그런데 이미 첫째 따님 문영하씨가 지난 2015년 월간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바 있어 이번에 따님 중 두번째 문인이 탄생한 셈이다. 문정숙 수필가는 경남대국문과 출신으로 지난해 경남도문화상을 받은바 있는 김정대 경남대명예교수의 직계 제자이다. 문신수 소설가는 1961년 <자유문학>을 통해 작품 '백타원'으로 등단하였다. 작품집으로 창작집 <부부합창> 수상집 <전기수와 2인수상집> 동화집 <아름다운 음악소리> <꿈꾸는 겨울나무> 등이 있다. 경남도문화상, 평화문화상, 경남아동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남해에서 초등교사, 교장을 지냈다. 문정숙 수필가의 신인상 당선수필 '식혜속에 꽃잎이'를 소개한다./오하룡
식혜 속에 꽃잎이
문정숙
달짝지근한 식혜 속에는 사랑과 기다림이 들어 있다. 거기에는 한숨도 있고, 그리움도 두어 숟갈 있다. 사랑이 들어가 달콤한 맛을 내고, 또 기다림으로 밥알을 띄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것들이 잘 어우러져서 진하고 깊이 있는 맛을 낸다.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느림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음식이기도 하다. 아무리 빨리 만들고 싶어도, 힘들어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가야 제대로 된 맛을 낼 수 있다. 시중에는 식혜를 쉽게 만들 수 있도록 엿기름 티백도 많이 나와 있지만 나는 아직까지 시어머니께서 가르쳐주신 레시피 그대로 하고 있다. 그것을 만들 때는 삼십여 년 전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만난다. 그때 쓰던 나무 체로 아직도 엿기름물을 내리고, 노란 찜솥에다 발효된 식혜를 끓이면서 거무튀튀한 거품을 마치 근심인양 걷어내고 있다. 어머니만큼 내 얼굴에도 주름이 많이 늘고, 머리도 희끗희끗해졌지만 시간은 정지된 것처럼 과거에 머물고
다른 것은 쉽고 편한 것을 선택하지만 이것만큼은 양보하고 싶지가 않다. 내 나름대로의 고집을 부리고 있는 셈이다. “우리 엄마가 만든 식혜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 딸들이 어렸을 때 했던 이 말 때문인지 아직까지도 명절 전날이면 달큰한 냄새가 우리 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 어쩔 때는 은근히 치기 어린 자부심을 느낄 때도
꼼꼼하고 솜씨 좋은 어머니와 달리 나는 허술한 점이 참 많았다. 야무지게 잘하는 구석이 없었다. 걸레를 힘있게 짜서 바닥을 반질반질하게 잘 닦지도 못했고, 손빨래만 하던 어머니 몰래 세탁기를 사용하다가 들켜서 야단맞은 적도 있었다. 게다가 음식도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뇌졸중인 아버님을 오랫동안 돌보며 주름진 시간 속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어머니를 도와드리고, 위로하고 싶었지만 언제나 마음뿐이었다. 얼굴을 마주보고 앉으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그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렇게도 조심스럽고 어려운 분이
어느 날, 어머니께서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나가셨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고생만 하는 어머니를 위해 자식들이 생신 선물로 진주반지를 사 드렸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아버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여자들의 사치라고 생각하여 몇날 며칠을 반지 이야기로 어머니를 괴롭혔다. 그 해는 회갑을 맞이하는 해라서 우리에게는 더욱 의미가 컸다. 평생 당신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왔는데 자식들이 회갑 선물로 해드린 반지 때문에 어머니는 어느새 허황되고 사치스런 여자가 돼 있었다. 주인공 없는 생일상만이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아버님이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원망스런 마음이 불쑥불쑥 머리를 치켜든다. 오죽했으면 철없는 며느리에게 몸이 불편한 아버님을 내팽개치듯 떠맡기고 집을 나갔을까. 까마중 열매가 터지면 손가락에 시꺼먼 물이 스며들곤 했는데 어머니의 썩어 문드러진 마음이 그것처럼 톡 터져 버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바람과는 달리 아버님에게는 까마중의 까만 물도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반란은 삼일천하로 끝났지만 그 화려한 외출 끝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무서운 암세포뿐이
추석을 앞두고 몸져 누워있던 어머니는 마지막 차례상을 준비했다. 집안일에 서툴기만 한 며느리, 십 년 넘게 누워있는 남편이 돌덩이처럼 얼마나 가슴을 짓눌렀을까. 아픈 몸으로 나물 무치는 법이나 또 생선을 어떻게 찌는지, 튀김을 바삭하게 튀기는 방법 등 여러 가지 제수 음식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그 중 식혜를 만들 때는 다른 음식보다 유난히 정성을 많이 쏟았다. 문득 어머니의 살아온 인생이, 삶이 그것에 스며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엿기름에 물을 부어 힘 있게 여러 번 치대어 고운 체 위에 부으면 좁디좁은 구멍을 통과하여 뿌옇게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것은 어머니의 가슴을 관통하여 내 마음 속으로도 슬픔으로 흘러내렸다. 두어 시간 지나면 내려앉는 침전물처럼 어머니를 점령하고 있는 나쁜 것들이 모두 가라앉고 그 위의 맑은 물처럼 깨끗해지기를 빌고 또 빌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집에서 아버님을 모시고 살아갈 일이 더 무서웠다. 어머니의 큰 아픔보다는 내 앞에 닥칠 일들이 더 걱정스러웠다. 아마도 며느리의 얕은 마음을 알고도 모른 척 눈감았으
찹쌀로 고두밥을 찌면 탱글탱글하고 윤기가 자르르 흘러내렸다. 그것을 전기밥솥에 넣고 엿기름물과 섞어 몇 시간 기다리다 뚜껑을 열어보면 몸을 비워낸 밥알들이 꽃잎처럼 둥둥 떠 있었다. 사랑과 인내와 눈물로 만들어 낸 꽃이었다. 가족들을 위해 살아온 어머니의 세월이 오롯이 그 속에 담겨 있었다. 엿기름과 고두밥이 만나 발효되면서 꽃을 피우듯, 어머니의 아픔과 눈물이 발효된 사랑을 만들어냈다. 앞으로 당신을 대신해 이 자리를 지켜야 될 어린 며느리를 위해 사그라지는 불빛에 마지막 불쏘시개를 지폈다. 그 불빛을 내리받아 나는 세상의 높은 파고를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
어머니는 다음 해 설날이 오기 전에 몸을 비우셨다. 추석 때의 식혜 수업을 끝으로, 그 다음 해부터는 서투르지만 긴 시간 동안 어머니의 흉내를 내고 있다. 어느 해는 엿기름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 버린 적도 있었고, 더운 날씨 때문에 정성 들여 만든 게 쉬어버려서 먹지 못한 때도 있었다. 조금만 소홀히 해도 전부를 망쳐 버리고, 시간 조절을 잘 못하면 새벽까지 잠을 설칠 때도 있었다. 어머니의 맛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시간이 켜켜이 쌓여갈수록 다행히 내가 만든 식혜도 조금씩 나이가 들어갔다. 어머니가 사용하던 나무 체도 늙어가는 내 몸처럼 형태는 틀어지고 색깔도 누렇게 변했지만 아직도 그 역할을 해내는 데에는 손색이
속이 답답할 때 마시는 시원한 식혜 한잔은, 어머니의 포근한 손길과도 같다. 거기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배려하는 마음도 가질 줄 안다. 식혜를 만들면서 내가 어머니와 만나듯, 사랑하는 딸들도 먼 훗날 나와 이런 행복한 만남을 가졌으면 좋겠다. 보고 싶은 마음이 한여름 밤의 별처럼 쏟아질 때는, 진한 그리움 한잔 마시면 될 일이다.
수필부문 심사평
수필은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재현하는 과정을 통해 삶을 의미화하는 작업이다. 소소한 일상의 경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삶의 보편적 의미와 가치를 확장해 나가는 해석적인 행위인 것
2024년 《경남문학》 신인상 수필부문 응모작이 50여 편이다. 해마다 수필부문 응모작이 늘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그중 문정숙 님의 〈식혜 속에 꽃잎이〉를 당선작으로 선했다. 식혜를 만드는 과정에서 몸을 비워낸 밥알들이 어머니의 아픔과 눈물이 발효된 사랑의 꽃이라는 화자의 감성적인 언어표현이 돋보였다. 명료하면서도 담담하게 글을 전개해 감으로써 공감대를 형성하고 감동을 준다. 앞으로 좋은 글을 쓸 수 있으리라 믿
그 외 강상배 님의 〈공원 생활자〉는 삶의 다면적 본질에 다가가려는 화자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탄탄한 구성과 글의 운용에 신뢰와 공감이 간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한 번 더 도전하여 주기를 바란다.
심사위원│신태순, 이동이
첫댓글 그 아버지에 그 따님이구만유.
축하합니다.
경남문협에서 왕성한 문력을 일구어 만방으로 뻗어나가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