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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리 역사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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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인물 스크랩 무인열전(28) 이순신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58 13.08.21 02: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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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승리로 이끈 민족의 구세주


?우리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의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통솔력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호걸?충신?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간다는 사실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하늘이 이 땅에 내린 구세주였다. 그는 이름 없는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인의와 애국애족 정신으로 일관한 민족의 사표였다.

?전쟁에 임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 전술로 백전백승한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 그는 마지막 해전에서 고귀한 목숨을 바칠 때까지 조국에 대해서는 지극한 충성심으로 헌신했고, 가정에서는 극진한 효성과 자애를 다했으며, 부하들은 너그러운 포용력으로 감싸주고 창의력을 길러주는 등 참다운 삶의 길을 제시해 준 겨레의 큰 스승이었다.

?이순신은 인종 1년(1545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서울 건천동에서 덕수 이씨(德水李氏) 정(貞)과 초계 변씨(草溪卞氏)의 4형제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여해(汝諧). 건천동은 지금의 중구 인현동 1가의 중심부였다. 건천동-마르내골 이웃은 묵사동- 먹적골이라고 불린 오늘의 필동 2가였고, 그 동네에서는 이순신보다 세 살 위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자라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빼어난 두 소년은 곧 친구가 되어 자주 어울려 놀았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이순신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고, 뒷날 그를 장수감으로 추천한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순신은 말수가 적고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얼굴은 수려하면서도 근엄한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가슴속에는 대담한 기운이 있어서 한몸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갔으니, 이는 본래부터 수양해온 결과라고 하겠다.-

?그의 면모를 전해주는 또 다른 자료로는 충남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는 두 자루 장검이 있다. 둘 다 길이 197.5cm, 무게 5.3kg으로 길고 무거우니 장군의 모습이 헌헌장부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1584년 4월 삼도수군통제사 때 한산도 진중에서 태귀연(太貴連)과 이무생(李戊生)을 시켜 만든 이 명검에는 각각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도 떤다(三尺誓天 山河動色)’, ‘한번 휘둘러 소탕하니 산하도 피로 물든다(一揮掃蕩 血染山河)’라는 공의 친필 검명(劍銘)이 새겨져 있다.

?이순신의 조부 백록(百錄)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부친은 이 때문에 벼슬살이를 외면한 채 무명의 평범한 선비로 지냈다. 그러므로 이순신이 태어나고 자랄 무렵의 가세는 매우 궁핍했다. 갈수록 형편이 곤궁해지자 부친은 현재 현충사 자리에 있던 충남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로 처가로 낙향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8세부터 32세로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보냈으니, 백암리야말로 그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외가마을로 이사해 두 형을 따라 서당에 다니며 글공부를 시작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이순신의 꿈은 장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비의 가문에 태어나 유학을 공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열심히 익혔다. 20세 때에 상주 방씨(尙州方氏)를 아내로 맞아 혼인한 뒤에도 무술 닦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방화산에서 말달리던 곳은 현재 치마장(馳馬場)이라고 부르며, 활쏘기 연습을 하던 곳은 활터거리밭이라고 부른다.

?맏아들 회(?)가 태어난 것은 23세 때였으며, 다시 4년 뒤에는 둘째 열(?)이 태어나 식구는 늘어났다. 그의 나이도 27세가 되었다. 그래서 이듬해 8월 서울로 올라가 무과시험을 보았는데 불운하게도 낙마하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다시 일어난 그는 나무껍질을 벗겨 부러진 다리를 감싸고 끝까지 달려 보는 이들을 감동시켰지만 결국은 낙방했다. 그가 무과 병과에 급제한 것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선조 9년(1576년) 2월이었다. 32세 늦은 나이에 무과에 합격한 그는 그해 12월 압록강 상류 국경지대인 함경도 두메산골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임명되었다. 권관은 종9품의 말직으로 지금 소위쯤 되는 계급이었다. 부임하여 국경 경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던 중 고향에서 셋째 아들 면(?)이 태어났다는 소식이 왔다.

?3년 뒤 35세 때 훈련원 봉사로 전근되어 서울로 왔는데, 봉사란 종8품으로 훈련원 내에서 최하위직이었다. 원래 말수가 적은 이순신은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인사 관계 업무에만 전념할뿐 한눈파는 일이 없었다. 그때 상관인 병조정랑 서익(徐益)이 자신의 친지 하나를 특진시키려고 했는데 이순신은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뚜렷한 공로도 없이 서열을 무시한다면 당연히 승진할 사람이 못 올라가고 나라의 법도에도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서익은 정5품의 계급을 내세워 강압적으로 뜻을 관철하려 했으나 끝내 이순신을 꺾을 수 없었다. 소문이 퍼지자 일부는 통쾌하게 여겼지만 일부는 서익의 앙심으로 이순신이 후환을 당할까 걱정했다.

?당시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은 이런 이순신의 사람됨이 마음에 들어 자신의 서녀를 소실로 주고자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권력자에게 붙어 출세하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면서 거절했다. 이렇게 성품이 강직하니 금력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중앙 관계에 오래 붙어 있을 수가 없었다. 훈련원 봉사 8개월 만에 그는 충청도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당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내색도 없이 부임해 맡은 일만 열심히 했고, 간혹 개인 용무로 집에 다녀올 때도 남은 양식을 반납할 정도로 공사(公私)가 분명하고 청렴결백한 생활을 했다.

?이순신은 다시 8개월 뒤인 선조 13년(1580년) 36세 때 전라좌수영 관내의 발포수군만호로 전근되었다. 종4품 발포만호로 수군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임무에만 충실하려고 했지만 강직하고 청렴결백한 성품 탓에 소인배들의 중상과 모략을 끊임없이 당했다. 한번은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成博)이 거문고를 만들겠다며 객사 뜰앞의 오동나무를 베어 보내라고 했을 때 이순신은, “이 나무는 나라의 것이고 여러 해 길러온 것이므로 함부로 벨 수 없다”면서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

?이처럼 옳지 못한 일은 참지 못한 올곧은 성품 때문에 여러 차례 위기를 당하던 이순신은 마침내 38세 때인 선조 18년(1582년) 훈련원 시절의 상관이던 서익의 모함에 걸려 파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순신이 올곧은 인물이라는 사실이 이미 조정 안팎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당시 이조판서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대사간 유성룡을 통해 한번 만나자고 전해왔다. 율곡은 이순신과 동성동본으로 나이는 9세 위였지만 항렬은 19촌 조카뻘이었다. 이순신은 이번에도 “나와 율곡은 집안간이니 못 만날 것도 없지만 그가 판서로 있는 한은 만나는 것이 옳지 못하다.” 하면서 끝내 만나지 않았다.

?그는 파직된 지 4개월 만인 그해 5월, 전에 근무하던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었다. 종4품에서 종8품으로 형편없이 강등당한 셈이지만 그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맡은 일만 성실히 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활쏘기도 열심히 익혔다. 그런데 어느 날 이순신의 전통(箭筒)을 본 우의정 유전(柳琠)이 이를 탐내 달라고 했다. 이순신이 “이것을 드리기는 어렵지 않지만 이 일로 인해 대감과 제가 더러운 소리를 들을까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유전이 듣고 보니 맞는 말인지라 “그대 말이 옳다!”고 탄복하면서 다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 이듬해 이순신은 함경남도병마절도사의 군관을 거쳐 여진족의 침범이 잦은 두만강가 건원보의 권관으로 전임되었다. 이곳에서 오랑캐 두목을 잡는 전공을 세웠으나 함경북도병마절도사 김우서(金禹瑞)의 시기로 아무 상도 받지 못했고 벼슬도 올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달인 11월에는 고향에서 부친이 돌아갔다. 길이 멀어 이듬해 정월에 기별을 받은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산으로 달려가 상복을 입었다.

?3년상을 치르고 난 이순신은 이미 42세였다. 종6품 사복사 주부로 복직했다가 16일 만에 건원보와 가까운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었다. 종4품인 이 자리는 유성룡의 천거에 의한 것이었다. 이듬해엔 조산보에서 좀 떨어진 두만강 가운데 녹둔도 둔전관도 겸하게 되었다. 병력은 부족한데 오랑캐는 수시로 쳐들어오려고 해서 북병사 이일(李鎰)에게 수차 증원군을 요청했으나 번번이 묵살당했다. 겨우 10여 명의 부하를 거느린 이순신은 그해 수확기에 수많은 여진족의 침범을 당해 다리에 화살을 맞으면서까지 악전고투, 적을 물리치고 사로잡혀간 백성 60여 명도 되찾아왔다. 누가 봐도 승리한 싸움이었지만 이일은 이순신을 패장으로 몰아 죽이려고 했다. 이순신이 패전의 책임을 묻는 이일에게 항변했다. “이것이 어찌 패전이라고 하시오? 그리고 수차나 병력을 증원해달라고 요청했는데 한 명도 보내준 적이 없었잖소? 그 공문 사본이 모두 여기 있으니 조정에서 알면 내게 죄가 있다고는 못하리다.” 이일이 할 말이 없자 옥에 가둔 뒤 조정에는 적당히 보고했다. 결국 이순신에게 백의종군이라는 부당한 명령이 떨어졌다.

?벼슬에서 물러나 쉬고 있던 그는 선조 21년(1588년) 45세 때 전라감사 이광(李洸)의 군관과 선전관을 거쳐 종5품 정읍현감으로 임명되었다. 현재 정읍 사람들이 초대 정읍군수로 충무공을 모신 것을 자랑으로 삼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정읍현감 재임시 이순신은 노모를 비롯해 먼저 간 두 형의 자식, 즉 조카들까지 데려다가 부양했다. 이 일로 너무나 많은 식솔을 거느린다는 비난이 일자 그는 “내가 차라리 벼슬이 떨어지더라도 이 의지할 곳 없는 것들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면서 결혼도 자기 자식들보다 먼저 시켜주는 등 따뜻이 보살펴주었다.

??1590년 7월, 정읍현감 8개월 만에 이순신은 유성룡의 천거로 종3품직인 고사리진병마첨절제사로 임명되었으나 사간원의 반대로 발령이 취소되었고, 다시 1개월 뒤에는 만포진수군첨절제사로 임명되었으나 이것도 역시 사간원의 반대로 발령이 취소되었다. 이듬해 2월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가 부임도 하기 전에 가리포진수군첨절제사로 임명되었으며 이것도 부임하기 직전인 2월 13일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줄여서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발발 14개월 전이었고, 벼슬살이 15년 만인 47세에 비로소 정3품 당상관이 된 것이었다. 이번에도 서인들의 온갖 반대를 무릅쓴 좌의정 유성룡의 강력한 천거가 있었다.

?당시 전라좌수영은 여수에 있었으며, 남해안 방어의 중책을 맡은 이순신은 다가올 전쟁을 예견하고 방비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장차 왜란이 틀림없이 있을 것으로 미리 내다본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임금 선조를 비롯하여 무능한 조정 대신과 장수들이 아무 대책도 없이 쓸모없는 당쟁으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관내를 순시하고 전함을 새로 만들거나 수리하고 무기를 손질했다. 그리고 열심히 수군을 훈련시켰다.

?특히 이순신은 유명한 거북선의 연구에 침식을 잊다시피했다. 다행히 그의 부하 중에는 조선(造船)에 천부적 재능을 지닌 나주 출신 나대용(羅大用)이란 군관이 있었다. 나대용은 이순신의 전적인 신임을 받고 오로지 거북선 건조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거의 완공 단계에 있었으나 그 모습과 성능에 대해서는 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 승리한 뒤 장계를 통해 이렇게 보고했다. “신은 일찍이 왜적의 침범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건조하였습니다. 앞에는 용두(龍頭)를 만들어 달고, 그 아가리로 대포를 쏘며, 등에는 쇠못을 박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이라도 능히 뚫고 들어가 대포를 쏘게 되어 있습니다.”

?거북선과 더불어 이순신이 힘을 기울인 것은 해전에서 사용할 각종 화포와 화약의 개발이었다. 특히 당시까지는 해전에서 주병기로 사용하지 않던 천?지?현?황 등 각종 포와 거기에 사용할 대장군전?장군전?화전 및 철환 등과 화약 준비에 큰 힘을 기울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아무 준비 없이 우왕좌왕하던 육군이 고작 활과 창검으로 왜군의 신무기 조총을 당하지 못하고 패전을 거듭할 때, 당대의 명장으로 알려진 이일과 신립(申砬)이 상주와 충주에서 차례로 참패당하고, 못난 임금과 대신들이 개성?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할 때, 오직 이순신만이 해상에서 수백 척의 왜선을 쳐부수며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의 활약, 뛰어난 성능의 화약과 화포가 그의 탁월한 전략 전술에 따라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의 명령에 따라 선조 25년(1592년) 4월 14일에 조선 침략을 개시했다. 마침내 임진왜란이 터졌던 것이다. 조선 침략에 동원된 왜군 병세는 20여 만 명. 7백여 척의 병선과 약 1만 명의 수군은 별도였다. 이순신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대한해협을 건너오는 동안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부산진첨사 정발(鄭撥)과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허약한 방어선을 짓밟고 무인지경을 가듯 북상을 거듭했다. 4월 17일에는 양산을 점령하고, 잇달아 언양?김해?경주?창원 등지를 점령하며 계속 북상했다. 그 사이 구귀가륭(九鬼嘉隆)과 등당고호(藤堂高虎)가 지휘하는 수군은 해상을 경비하는 한편 조선수군의 무력화작전을 펼쳤다.

?4월 17일에야 급보를 받은 조정은 이일을 보내 문경 새재를 지키게 하고 신립을 뒤따라 보내는 한편 유성룡을 총사령관격인 도체찰사로 삼아 장수들을 지휘하게 했지만, 조선군은 군대다운 군대의 모양조차 갖추지 못한 형편인지라 근 100년 동안의 내전을 통해 강병으로 변모한 왜군이 조총이라는 신무기까지 앞세우고 쳐들어오자 당할 도리가 없었다.

?일찍이 이순신을 죽이려고 핍박하다가 백의종군까지 시킨 당대의 명장이라는 이일은 4월 24일 상주에서, 신립은 나흘 뒤 충주에서 각각 대패했고, 임금과 대신들은 서울을 버리고 몰래 임진강을 건너 개성?평양을 거쳐 국경인 의주까지 피란길을 재촉했다. 왜군이 서울을 함락한 것은 6월 2일, 다시 보름이 지난 그 달 13일에는 평양까지 점령했으니 겨우 2개월 만에 거의 전 국토가 왜군의 발길에 무참하게 유린당한 것이었다.

?한편 수군의 형편은 어떠했던가. 처음 적의 대선단을 발견한 가덕도첨사 전응린(田應麟)의 보고를 받은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에게 통보하고 응전 태세를 갖추는 듯했으나 왜군의 세력이 너무나 강대하자 육지로 도망쳐 버리고, 원균 또한 100여 척의 전선과 1만여 명의 부하를 버리고 겨우 몇 척의 배를 끌고 한산도 근처에 와서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원균의 요청을 받은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 통보하고 함께 출전키로 했으나 그가 기일을 지키지 못하자 좌수영 함대만 이끌고 출동했다. 그날이 5월 4일이었다. 그때까지 거북선은 미완성이라 출동하지 못하고 전함인 판옥선(板屋船) 24척과 전투능력은 없고 척후와 추포에만 쓸 수 있는 작은 배 61척 등 85척이 전부였다.

?이튿날 함대를 지휘하여 당포에 이르렀으나 약속한 원균은 그 다음날 한산도 근해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그가 거느린 군세란 겨우 판옥선 4척에 척후선 2척 뿐이었다. 이순신은 거제도 남쪽 옥포에 적선 30여 척이 있다는 첩보를 받고 출전명령을 내렸다. 그는 첫 싸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군사들의 심리란 처음 전투에서 지면 사기가 떨어져 계속 지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출동에 앞서 이렇게 명령했다.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산처럼 무겁고 조용하게 행동하라!(勿令案動 靜重如山).”

?5월 7일 벌어진 이 싸움에서 이순신은 적선 30여 척 중 26척을 격침하여 첫 싸움을 빛나는 승리로 장식했으니 곧 옥포해전(玉浦海戰)의 시작이다. 계속 함대를 지휘하여 합포에서 적선 5척을, 통영군 광도면 적진포에서 다시 11척을 무찔러버렸다. 이 첫 번째 옥포해전에서 적선 42척을 격침시키고 무수한 왜군을 사살했는데 아군의 손실은 부상 1명뿐이었다. 이순신의 백전백승하는 탁월한 지휘능력이 빛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5월 29일부터 시작된 당포해전(唐浦海戰)부터는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도 참전하여 이때부터 본격적인 합동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또한 이 전투부터 거북선이 출동하여 위용을 과시하며 대활약을 시작했다. 이순신과 나대용 등이 적탄에 부상을 당할 정도로 치열했던 이 싸움에서 적선 72척을 격침시켰고, 7월 8일 3차로 출동한 한산해전(閑山海戰)에서는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을 펼쳐 59척의 전함을 무찔렀으며, 9월초에 벌어진 부산해전에서도 100여 척의 왜선을 불태우고 격침시켰다. 이로써 남해안 동쪽 일부를 제외한 80%이상의 제해권을 우리 수군이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또한 서남해를 통해 곡창인 전라도를 장악하고 나아가 황해로 북상하여 중부 이북을 공략하려는 적의 기도를 여지없이 무산시키는 전략적 승리를 뜻하기도 했다.

?이순신의 전략전술은 작전해역의 사정과 적의 동향을 정확히 파악하여 적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유인하여 철저한 공격으로 섬멸하는 데 있었다. 그는 군공을 세우려고 적병의 머리를 베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한 대의 화살이라도 더 날려 한 놈의 왜적이라도 더 죽이라고 지시했으며, 상대적으로 견고한 우리 전함으로 돌격하여 적선을 파괴하는 전법을 썼다. 그리고 전투에는 총사령관인 자신이 늘 앞장서서 위험을 무릅쓰고 지휘하는 대신 후퇴하는 장병들은 추호도 용서하지 않고 엄격한 군율로 다스렸다. 옥포해전 승리로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했던 이순신은 다시 당포와 한산대첩의 공로로 정2품 정헌대부가 되었다.

?육군과 달리 수군은 이순신함대만 만나면 여지없이 대패한다는 보고를 받은 풍신수길은 마침내 ‘조선 수군과 마주치면 싸우지 말고 도망치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전국 각지에 대대적인 전함 건조를 지시했다.

?해가 바뀌어 1593년 2월. 이순신은 800척으로 증강된 왜의 함대를 약 1개월 동안 7차에 걸친 해전 끝에 격멸시키니 적의 수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거제도 서쪽 해상에서는 왜선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그해 7월 15일 이순신은 여수에서 부산포가 가까운 한산도로 본영을 옮겨 전함과 무기를 만드는 한편 군사들의 조련도 열심히 했다. 충청수사 정걸(丁傑)이 전함 수십 척을 이끌고 합류한 것도 이때였다.

?8월 1일 임금 선조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발령은 8월 1일자였으나 명령을 받은 것은 10월 9일이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이로써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이 된 이순신은 지금까지 똑같은 계급이었던 전라?경상?충청도의 수사들을 지휘 감독하며 작전명령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출중한 장수였던 이억기와 정걸 등은 평소 이순신의 고매한 인품과 탁월한 통솔력에 감복하던 바여서 충심으로 승진을 축하해주고 복종을 다짐했으나, 나이도 많았고 군에서도 선배였던 원균은 불만의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원균의 불평불만으로 군심이 뒤숭숭해지자 이순신은 차라리 자신이 물러나겠다는 생각에서 직책을 바꿔줄 것을 조정에 요청했다. 싸움을 앞두고 자중지란이 일어나면 백전백패할 것을 염려한 충정의 발로였다. 조정에서도 여러 차례 이순신과 원균의 문제를 논의한 결과 원균을 전출시키는 것으로 결말을 보았다. 그는 충청병사를 거쳐 전라병사로 갔다가 뒷날 이순신이 모함에 걸려 원통하고 억울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백의종군할 동안 그렇게 원하던 통제사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머문 것은 그해 7월부터 1597년 2월까지 3년 7개월간이었다. 원균의 후임 경상우수사로는 배설(裵楔)이 왔다.

?그 동안 육상의 전황은 어떠했던가. 개전 초 관군이 조총을 앞세운 왜군의 공격에 싸움다운 싸움 한번 변변히 못한 채 여지없이 패퇴를 거듭할 때 경상도에서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데 이어 조헌(趙憲)?영규대사(靈圭大師)?김덕령(金德齡)?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서산대사(西山大師)?사명대사(四溟大師) 등이 의병과 승군을 일으켜 관군과 합동으로, 또는 단독작전을 감행하여 각지에서 왜군들을 괴롭혔다. 또한 조선의 구원요청을 받은 명에서도 원병을 보내 이여송(李如松)이 4만여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조선군과 함께 평양을 수복했다.

?한편 경상좌병사 박진(朴晋)은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오늘날의 박격포와 같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의 위력에 힘입어 경주성을 탈환하고 왜군을 서생포로 쫓았으며,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도 결사적 항전으로 진주성대첩을, 또한 도원수 권율(權慄)은 1만여 군사로 3만여 왜군을 격퇴하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을 기록하기도 했다.

?본래 왜군의 전략은 서울을 함락한 뒤 소서행장(小西行長)은 평안도를, 가등청정(加藤淸正)은 함경도를 점령하고, 수군은 황해를 거슬러올라가 조선 전역을 석권하는 것이었으나, 바다의 이순신과 육지의 의병의 활약으로 진로가 막히고 보급로가 끊겨버려 전황은 지리멸렬,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때 등장한 사기꾼이 심유경(沈惟敬)이었다. 그는 명의 유격장군이라는 벼락감투를 쓰고 조선으로 건너와 명군과 왜군 진영을 오가며 강화협상을 진행시켜 선조 26년(1593년) 일단 왜군들을 남쪽으로 철군시켰으나, 이는 사기가 저하된 왜군에게 다시 힘을 길러주는 기회만 제공한 셈이 되었다. 조선군 장수와 의병장들은 분노했으나 왜군을 격퇴할 힘이 없었고, 무능한 정부가 요청한 명군은 대국군이라는 자만심에서 조선의 대신과 장병들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물론 일부 지역에서는 왜군에 못지않게 잔악한 만행을 저지르는 형편이었다.

?이순신은 비록 부산포해전에서 100여 척의 왜선을 격파했으나 부산과 대마도를 잇는 해상로를 완전히 차단, 침략해온 왜적을 단 한놈도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해 마음이 매우 편치 못했다. 그러나 그는 한산도에서 군량을 마련하고 무기를 제작하고 전함을 건조하며 군사를 조련하는 등 언제 어디서 벌어질지 모를 싸움에 잠시도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첫손꼽히는 명장이면서도 문장이 뛰어난 시인이었고 말이 없으면서도 다정다감한 인격자였다. 그는 한산도에 운주당(運籌堂)을 짓고 여기에서 기거하면서 장수는 물론 하급 병사라도 좋은 계책이 있거나 하소연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찾아오게 하였다. 또한 여기서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비감 어린 시도 많이 읊었다.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수군 최고위직에 있으면서도 병사들과 똑같은 생활을 했다. 또한 군율은 엄히 시행하되 부하가 전사하면 친자식을 잃은 듯 슬퍼하며 친히 장사지내주니 장병과 백성 모두가 친부모를 따르듯 하였다. 이처럼 불철주야로 장병들과 함께 나라를 걱정하며 적을 물리칠 일에만 전념하던 이순신이었건만 마침내 또 다시 악운이 찾아왔다.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선조 30년(1597년) 초, 일본의 첩자 요시라(要時羅)가 경상좌병사 김응서(金應瑞)를 찾아왔다. 그는 가등청정과 사이가 나쁜 소서행장의 계책이라면서 본국에 돌아갔던 가등청정이 아무 날 어디로 오는데 조선 수군으로 하여금 지키고 있다가 치면 죽일 수 있으리라고 했다. 이것은 이순신이 지키고 있는 한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침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왜적의 간계였으나 병법의 병자도 모르는 무능한 장수와 대신들은 이 말을 그대로 믿었다. 김응서는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하고 조정은 이순신에게 나아가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권율이 몸소 한산도에 와서 명령을 하달했다.

?이순신은 적의 간계라는 사실을 간파했으나 조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서 대군을 출동시키는 대신 우선 척후선을 보내 적의 동태를 정찰토록 했다. 적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첫 번째 계략에 실패한 왜군은 다시 요시라를 김응서에게 보내 “이순신이 바다를 막지 않는 사이에 가등청정이 조선에 상륙했다”고 이간책을 썼다. 그런데 가등청정이 바다를 건너온 것은 권율이 이순신에게 명령을 하달하기 이미 1주일 전이었다.

?당시 조정은 왜란으로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이르렀음에도 동서로 갈라진 당쟁은 피란중에도 그칠 줄 몰랐고 임금은 오늘은 동인의 손을 들어줬다가 내일은 서인의 손을 들어줬다 하면서 자신의 왕권안보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런데 이순신이 흉계에 빠질 무렵에는 원균과 가까운 서인들의 발언권이 더욱 강했다. 어전회의 때마다 서인들은 이순신을 모함하는 반면 원균을 천거하기에 갖은 애를 썼다. 그런 중에 마침 결정적인 호재가 생긴 것이었다.

?그해 2월 6일 이순신은 난리가 나면 도망이나 치고 공론이나 일삼는 대신들의 아우성에 따라 해임되고 ‘조정을 속이고 적을 치지 않았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선조가 직접 보낸 선전관에게 잡혀 올라가게 되었다. 그는 후임자인 원균에게 군사?무기?군량 등을 정확히 인계하고 그 달 26일 돼지우리 같은 남거에 실려 수많은 백성과 군사가 비통하게 울부짖는 가운데 서울로 끌려갔다. 그리고 의금부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당했다.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극력 나서서 고문만은 하지 말 것을 하소하고, 이에 앞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도 글을 올려 ‘왜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수군이며 이순신을 바꿔서는 안 되며, 원균을 보내서도 안 된다’고 상소했다. 또한 이덕형(李德馨)도 구명을 호소했고, 이순신의 심복인 정경달(丁景達)은 죽음을 무릅쓰고 ‘장군을 죽이면 나라가 망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이순신이 풀려난 것은 4월 1일. 그러나 무죄로 방면된 것은 아니었다. 두 번째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무등병으로 강등당한 그는 권율의 원수부(元帥府)에 소속되어 금부도사에게 끌려 원수부가 있던 합천군 초계로 내려갔다. 도중에 아산에 들러 선친의 산소에 절을 올리고 다시 길을 떠났는데, 순천에 피란갔던 83세의 노모 변씨가 아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올라오다가 세상을 떴다는 비보가 왔다. 참으로 무심한 하늘이었다. 비통한 심정으로 시신을 집으로 모셨으나 금부도사의 재촉에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합천으로 떠났다.

?그때의 심경을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나라에 충성을 바치려 했건만 이미 죄를 얻었고,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려 했건만 어버이마저 먼저 가버리셨구나. …오호라! 천지간에 나 같은 운명이 또 있으랴. 차라리 일찍 죽는 것만도 못하구나.’ 당시 그의 나이 53세였다. 6월 8일 초계에 당도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에게 신고했다.

?한편 수군통제사로 부임한 원균은 이순신이 아끼던 역전의 장수들을 대부분 갈아치우고 자신의 뜻에 맹종하는 자들을 그 자리에 앉히는가 하면, 군비는 허술히 하는 대신 운주당에 들어앉아 주색에만 빠졌다. 부하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이구동성으로 “적을 만나면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고 탄식했다. 이순신이 잡혀가자 왜장들도 “이순신이 없어졌으니 이젠 아무 걱정이 없다!”고 좋아하면서 잔치까지 벌였다.

?6월 하순, 그래도 조선 수군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던 왜군은 또다시 이중간첩 요시라를 김응서에게 보내 후속부대가 곧 바다를 건너오니 조선 수군이 지키고 있다가 공격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밀서를 전했다. 첩보를 보고 받은 도체찰사 이원익은 도원수 권율과 상의하여 수군의 출동을 명령했다. 왜군의 똑같은 간계에 세 차례나 넘어간 셈이었다. 명령을 받은 원균은 먼저 육군이 안골포와 가덕도의 왜군을 무찌른 뒤 수륙연합작전을 펴서 부산을 쳐야 한다면서 좀처럼 함대를 출동시키지 않았다. 여러 차례 독촉을 받고서야 마지못해 함대를 끌고나갔다가 6월 18일에 작은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패보를 받은 권율이 분노하여 원균을 사천까지 호출하여 곤장을 치면서 재출동을 명했다. 한산도로 돌아온 원균은 할 수 없이 전함 200여 척을 이끌고 출동했다.

?7월 4일 한산도를 출발한 함대는 5일 칠천량을 지나 6일은 옥포에서 묵고 7일에 다대포를 거쳐 부산포로 향했다. 그런데 절영도에 이르니 1천여 척의 적의 대선단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 함대를 보자 후퇴를 거듭했다. 유인작전이었다. 적이 후퇴하자 원균은 승기를 잡았다는 생각에서 돌격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풍랑이 거칠어지자 한산도에서부터 4일간이나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배를 저어온 군사들인지라 싸움이 될 턱이 없었다. 일부는 울산 서생포까지 밀려가 적군에게 격파당하고 원균은 남은 전선을 수습하여 가덕도로 후퇴했지만 벌써 왜군들이 배후를 지키고 있다가 사정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원균은 다시 칠천량으로 후퇴했다.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형편없다고 생각한 왜군은 7월 14일 거제도까지 쫓아와 이튿날 밤 칠천량에서 총공격을 퍼부었다. 이 싸움에서 역전의 용장 이억기를 비롯하여 충청수사 최호 등이 전사했다. 다만 배설만이 전선 12척을 이끌고 탈출에 성공, 한산도에 이르자 모두 도망치게 한 뒤 군량과 무기들을 불태우고 전라도로 도망쳤다. 이로써 이순신이 피땀으로 육성해온 막강한 수군은 하루아침에 전멸당해 버렸다. 수군이 전멸하자 바다는 왜군의 독무대가 되었고 전라도도 더 이상 안전할 수 없었다. 사천?하동?구례에 이어 남원?전주까지 함락당하고 말았다. 위기를 의식한 명나라도 급히 구원군을 증파하고 조선군도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으나 전쟁의 주도권은 다시 왜군에게 넘어가는 듯했다.

?칠천량해전을 계기로 조선 수군이 거의 전멸당하고 또다시 위기를 맞자 도원수 권율은 이순신을 찾아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탄식을 연발했다. 이순신은 자신이 직접 남해안을 돌아본 뒤 방책을 강구하기로 하고 군관 9명과 함께 길을 떠났다. 초계를 출발해 합천?산청?진주를 거쳐 남해 노량에서 살아남은 옛 부하들을 만나 패전시의 상황을 듣고 7월 23일에는 권율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그때 이순신은 수군의 전멸에 대한 충격과 노독이 겹쳐 병세가 위중한 지경에 이르렀다.

?한편 그 전날 원균의 패전과 수군의 전멸, 왜군의 북상을 보고받은 선조는 급히 어전회의를 열었는데 당쟁과 탁상공론으로 나날을 보내고 위급하면 도망치는 재주밖에 없는 위인들인지라 뾰족한 대책이 나올 턱이 만무했다. 이튿날 선조는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과 형조판서 김명원(金命元)의 진언을 받아들여 한때는 죽이려했고 지금은 백의종군하고 있는 이순신, 상중의 이순신을 다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이순신이 이 교서를 받은 것은 8월 3일인데, 거기에는 임명장이라기보다는 사과라고 할 수 있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지난번 경의 직책을 갈고 죄를 씌운 것은 사람의 지혜가 모자란 탓이었거니와 그리하여 오늘과 같은 패전의 욕을 당한 것이니 무슨 할 말이 있으랴. 무슨 할 말이 있으랴!’

?벼슬은 예전대로 돌아왔으나 피땀 흘려 육성한 강병과 함대는 간 곳 없었다. 오로지 그에게는 9명의 장교와 그보다 적은 6명의 병사가 있을뿐이었으니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는 불가능한 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순신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변화시킨 민족의 구세주였다. 약 15일간의 위험한 강행군 끝에 12척의 부서지고 남은 전선과 120명의 군사를 모은 이순신은 수군이 너무나 미약하니 육군으로 종군하라는 조정의 엉뚱한 명령을 받았다. 이에 대해 이순신은 “적이 임진년부터 5, 6년간 감히 전라?충청도를 침범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수군이 길목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신에게 12척의 배가 있으니 죽을 각오로 싸울 따름입니다.”라는 장계를 올렸다.

?12척의 군함같지도 않은 군함에 1척의 전선을 더 구해 가까스로 수군의 모양을 갖춘 이순신은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이동, 진도와 해남간의 물목인 명량해협(鳴梁海峽)-울돌목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고 작전을 구상했다. 그런데 전부터 겁이 많던 경상우수사 배설이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어서 적 함대가 나타났다는 정찰보고가 들어왔다. 전에는 왜선을 찾아다니며 격멸하던 조선수군이었으나 이제는 기다렸다가 싸워야하는 형편이었다. 군사들도 전같은 강병이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는 약졸이 많았다. 이래저래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적군이 틀림없이 몰려올 것을 예측, 울돌목의 물길을 조사하고 전투에 대비하여 왜선을 뒤집어엎기 위해 해저에 철망을 깔기도 하는 등 방비책을 강구했다. 9월 14일, 적선 200여 척이 나타났다는 급보가 왔다. 다음날 본진을 해남 우수영으로 이동한 뒤 이순신은 부하 장령들을 모아 이렇게 유시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산다고 하였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 명도 당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지금 우리의 형세가 이와 같다. 제장이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면 군율대로 시행할 것이니 작은 잘못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필사적인 결의였다.

?그해 음력 9월 16일 명량해협에서는 동서고금을 통해 전무후무한 대혈전이 벌어졌다. 왜적이 133척의 대함대인 반면 조선수군은 겨우 13척, 게다가 전멸하다시피 대패한 뒤라 장수나 군사들이나 겁을 먹고 제대로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겹겹이 포위한 적선 사이를 뚫고 손수 활을 쏘고 기를 흔들며 독전했다. “안위야! 네가 군율에 죽겠느냐? 도망치면 살 줄 아느냐?” “김응함아! 너는 중군으로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네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싸워서 우선 공을 세워야 하리라!” 이같은 악전고투 끝에 마침내 대장선을 비롯한 왜선 31척을 격파하고 나머지는 먼 바다로 격퇴시킬 수 있었다. 이것이 세계 해전사상 유례없는 승리인 명량대첩이다. 이 기적적인 승리로 정유재란은 또다시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싸움이 끝난 뒤, 일시 고군산군도로 진을 옮긴 이순신은 격전의 피로가 쌓여 여러 날을 앓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아산 본가에서 21세의 막내아들 면이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고 본가가 잿더미가 되었다는 비보가 왔다. 이순신은 병상에서도 일기에 이렇게 썼다. ‘하늘이 어찌 이리도 박정한가! 간장이 찢어지는구나!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하거늘. 슬프다. 내 아들아! 너는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나는 누구를 의지해 살아야 한단 말이냐? 네 형과 아우와 어미가 살아 있기에 아직은 연명할 수밖에 없다만 마음은 죽고 형체만 남은 듯 하구나!’세 아들 중 가장 믿음직했던 막내를 잃은 그의 가슴은 비통이 극에 달했지만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는 그래도 계속 싸워야만 했다.

?10월에 목포 근처 고하도로 본영을 옮겼다가 이듬해인 1598년 2월에는 다시 완도 고금도로 이동했다. 이때는 군사도 8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전선도 여러 척 마련해 다시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명나라에서 구원군으로 온 수군제독 진린(陳璘)이 새로운 골칫거리였다. 그는 대국 장수라는 자만심에다 욕심도 많고 포악하여 조선사람은 짐승처럼 취급하여 비위에 거슬리면 목을 매어 질질 끌고 다니기를 재미삼아 했다. 이순신은 이런 진린을 무마하여 전공이 있으면 그에게 돌리고 결국은 그를 감복시켜 명나라 수군의 지휘권도 장악했다. 이순신의 고매한 인품과 탁월한 지휘력과 넓은 학식이 이 무지막지한 중국 장수까지 감복시켜 나중에는 강간과 약탈을 일삼는 자기 부하의 처벌권까지 넘겨주니 명나라 수군도 이순신을 무서워하기에 이르렀다.

?그 해 8월 18일 전쟁을 일으킨 원흉 풍신수길이 죽자 왜군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소서행장에게 뇌물을 받은 진린은 그렇지 않아도 싸우기 싫은데 잘됐다면서 길을 터주자고 했으나 이순신이 허락할 리 없었다. 철천지원수 왜적을 단 한놈도 살려서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굳은 결의였다. 뇌물을 받은 진린은 대국 장수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칼까지 빼들고 길길이 날뛰었으나 이순신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진린이 몰래 터준 틈을 타 적선 한 척이 빠져나가 구원을 요청하여 왜선 300여 척이 남해 노량 앞바다에 몰려들었다. 첩보를 입수한 이순신이 출동하니 진린도 마지못해 따라왔다. 11월 19일 새벽, 노량바다에서 최후의 대결전이 벌어졌다. “이 적들을 물리치면 죽어도 여한이 없으니 도와주소서!” 이순신은 전투에 앞서 하늘에 기도를 올리고 함대의 앞장에 서서 적선 200여 척을 격침하고 관음포로 도주하는 남은 적선을 추격했다.

?도망칠 물길이 막히자 왜군은 최후의 발악을 했다. 이순신과 진린이 번갈아가며 구원하는 일방 적선을 한척 한척 격침시키는 순간 홀연히 날아온 유탄 한 발이 이순신의 왼쪽 가슴, 심장 부근에 박혔다. 치명상을 당한 그는 좌우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전투를 걱정했다. 그는 맏아들 회와 조카 완에게 일렀다. "방패로 내 앞을 가려라.“ ”싸움이 급하다. 내가 죽더라도 알리지 말라.“ 그리고 곧 숨을 거두었다.

?전투가 대승으로 끝난 뒤 장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온 배와 군사들에게 전해지자 바다는 온통 통곡성으로 울렁거렸다. 조선군은 물론 진린을 비롯한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도 울었다. 선조 31년(1598년) 양력 12월 16일, 장군의 나이 그때 54세였다. 그의 영구는 우선 남해 노량 현재의 충렬사 자리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곧 본진이 있던 고금도로 옮겨졌다. 그리고 다시 고향인 아산으로 운구되었다. 이듬해 2월 11일 아산에 당도한 영구는 금성산 밑에 장사지냈다가 16년 뒤 현재의 자리인 어라산 기슭으로 천장했다. 1604년(선조 37년) 이순신에게는 선무 1등공신에 좌의정 겸 덕풍부원군이 추증되었고, 1643년(인조 21년)에는 충무라고 시호되었으며, 다시 1793년(정조 17년)에는 영의정으로 가증되었다.

?현충사는 공이 순국한지 108년 뒤인 1706년(숙종 32년)에 건립되어 그 이듬해 숙종의 친필 현판이 사액되었다. 그 뒤 200여 년간 추모의 향화가 끊이지 않다가 일제강점기에는 헐릴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이에 1932년 충무공유적보존위원회가 앞장서 사당을 재건하고 영정을 봉안했으며, 1945년 광복 이후 해마다 4월 28일 공의 탄신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1956년 아산군 음봉면 삼거리 공의 묘소가 사적 제112호로 지정된데 이어, 1967년에는 현충사도 정화?단장하고 성역화되어 사적 제155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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