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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고을교회 주일설교(황의찬목사)
내가 먹은 선악과
창2:16~17/창3:22~24
에덴동산에 왜 선악과를 만들어놓았을까? 애초에 만들지 않았더라면 따 먹는 일도 없었을 터인데…
세상 사람들이 많이 하는 얘기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왜 동산 중앙에 자라게 하셨나? 대답은 ‘사랑’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사랑이란 그
사람이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보장된 터에서 싹을 틔우기 때문이다. 순종과 사랑을
바칠 대상이 하나님 이외에는 전혀 없는 토양에서 ‘하나님 사랑’은 강요된 외길수순이지 사랑이 아니다.
마치 반대는 불가능하고 오로지 찬성만이 가능한 투표와 같다. 거기서 만장일치는 허울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는 것은 그런 사랑이다. 선악과 열매를 따 먹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길이 있음에
도 그 열매를 바라보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기 때문
에 동산 중앙에 선악과나무가 자라는 것을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그 열매를 따먹었을 때의 위험 때문에 먹지 말라고 명령은 하신다. 그러나 강제는 하지 않으신
다. 그 열매를 따 먹었을 때의 결과가 무엇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는가? 죽음이라고 천명하신다.
시인 이어령은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시에서 ‘생명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의 기저귀를 차
고 나온다’고 읊었다. 선악과 열매를 따 먹는 불순종만 없었다면 우리는 당연히 생명의 기저귀를 차고 나
왔을 것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또 무엇이 달라지는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했다.(창3:22)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인간이 선악을 분별하고 판단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님께 순종
하면 되었다. 그런데 열매를 목구멍으로 넘기는 순간, 그 자는 선악을 자기가 결정하기 시작한다는 뜻이
다.
옳고 그름을 이제 각자가 판단한다. 그러니 중구난방이 되고, 백가쟁명이 되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
은 남편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나름의 잣대를 가지고 들이댄다. 충돌과 혼란은 당연하
게 되었다.
나는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시험을 쳐서 낙방했다. 그래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
를 짓게 되었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나의 우상이고, 완벽하신 분으로서 내가 최고로 존경하는 위인이었
다. 그런데 그 시기에 부모님의 갈등을 목도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평생에 아버지 앞에서 말대꾸를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하루 종일 곁에서 일을 돕다보니, 어머
니는 아버지의 일방통행에 대해서 힘들어하신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때로 투덜거리기도
하고, 한숨을 쉬면서 아버지를 힐난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취한 일이 무엇일까? ‘선악과 열매’를 먹
는 일이었다.
부모님에 대한 선악간의 판단을 하게 되었다. 강압적인 아버지는 ‘악’으로 정죄하고, 어머니는 ‘선’으로
우러러보며 아버지에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의 반목이 시작되었다. 아버지 앞에서 나의 행동은
단지 남의 눈을 의식하여 겉치레 행동으로 흐르고,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깨달았다.
세상의 모든 부부에게는 문제가 있다. 또 부부의 문제는 어느 한 쪽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지 않고 쌍방
간에 모두 문제가 있다. 나의 부모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
로 장점과 단점이 있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선악의 잣대를 교만하게 휘둘렀다. 그 버릇이 사회생활
과 직장생활에까지 이어져서 대인관계가 깨지고 그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바로 이런 상태를 두고 하나
님은 ‘죽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부모의 권위를 부인하기 쉽고, 부모의 권위를 거부하는 자는 모든
생활에서 남을 섬기지 못한다. 그런데 내가 목사가 되었다. 죽은 자가 어찌 목사가 되었는가?
하나님의 섭리가 나에게 시작되었다. 나이 오십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게 하셨다. 늦깎이로 고생하며
공부하는데, 2학년 때, 어머님을 먼저 하나님은 불러 가셨다. 그때까지 부모님 두 분이서 사셨는데, 치매
증상이 시작된 아버님 홀로 된 것이다. 형제들 중에서 누군가는 모셔야 했다. 당연히 형제간에 갈등이 일
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늦은 만큼 나의 신학 공부는 뜨거웠고, 신앙도 불같은 때여서 홀로 된 아버님을 두고 문제를 해결해 달라
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응답을 주시는데, 뜻밖에도 ‘너나 잘 하세요!’라는 당시의 유행어로 응답하신다.
나는 위로 형님이 두 분 계셨기 때문에, 내심, 형들이 있으니 너는 걱정하지 말라, 너는 할 만큼 했지 않
냐? 하는 응답이 올 것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응답에 놀라는 한편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는 다른
형제들이 어떻게 하느냐가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순종하여 군말 없이 아버님을 모셨다.
치매 초기의 홀로 되신 아버님을 모시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아버
님의 노후 태도였다. 지난날에 대한 회한에 파묻혀서 한숨을 올려 쉬고, 내려 쉬고 하면서 한탄 속에서
시간을 보내시는 것이었다. 노년의 삶은 ‘자기 긍정’이 필수인데 아버지는 그렇지 못하셨다. 내가 나설
계제였다. 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의 삶을 긍정적으로 돌리는 일을 했다.
“아버님은 평생을 잘 사셨습니다. 고향에서 아버님처럼 교육열에 불타서 밥은 굶어도 자식 을 학교에 보
낸 분이 누가 있습니까? 아버님은 훌륭한 인생을 사셨습니다.”를 되풀이 하는 것이다. 서너 달이 지났을
무렵부터 아버니는 나를 보시면 빙그레 웃으면서, ‘나만큼 산 사람도 드물지?’ 하신다. 그때마다 얼른
“그럼요, 아버님은 진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셨어요”
30여 년 전 ‘아버지는 악입니다.’라고 정죄했던 내가, 정반대의 말로 아버님의 노후를 치유하고 있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관계가 되살아났다. 영혼이 되살아난 것이다. 아버님이 새삼 존경스러워지고, 밖에 나
오면 아버지의 안부가 걱정이 되어 얼른 귀가하고 싶어지는 것이 아닌가? 할렐루야!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1년여 만에 하나님은 아버지를 불러가셨다. 나는 아쉬웠는데, 하나님은
이만하면 됐다고 판단하신 걸까?
하나님은 내 영혼을 살리셨다. 그리고 내 아버지를 아버지의 자리에 복귀시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