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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물준비
거룩한 성찬례의 제정 또는 기원에서, 예수께서 예물을 취하신 것은 아직도 매우 단순하였으며 무슨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음식은 준비되었고 식사 전에 제자들이 준비했다 (마태 26,19; 마르 14,16; 루가 22,13). 물론 파스카 음식에서 기념과 연관된 특별한 조건은 있었다. 즉, 상징을 설명할 때 (하가다 예식), 가장은 빵을 들고 손으로 잔을 잡고 찬양과 해석하는 말을 하고 그것들을 식탁 위로 들어올린다. 이 예식은 거의 예절의 본성에 필요한 것이고 중심 대상에 참여자들의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방법이다. 빵과 포도주 잔을 제외한 나머지 음식은 단순히 식탁 위에 두었다. 예물을 들어올리며 “잡는 것” (taking)은 특별한 파스카 예식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도 역시 주례자가 예식 거행 중에 예물을 잡는 동작은 매우 단순했다. 빵과 포도주의 준비는 제자들이 참여한 주요 방법으로 남았다. 왜냐하면 이 음식은 단순히 다른 이와의 형제애를 나누는 표징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공동체의 가난한 구성원이 먹고 만족하는 사랑의 음식이었다. 어떤 이에게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했다. 그리고 어떤 기부자가 자신이 매일 노동하여 얻은 열매를 공동체의 가난한 이들에게 자주 제공하는 이러한 자비로운 행위는 자신에게 명백히 “희생”으로 체험되었다. 인간 역사에서 모든 희생제사는 제일차적인 종교 현상에 기초한다. 즉, 희생하는 사람은 삶에 필요한 어떤 것을 주는 행위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다른 이에게 내어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먹이고 공동체적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즉, 아가페, 애찬) 성찬례와 분리되었을 때, 필요한 사람에게 “삶의 수단”을 모으는 것은 계속되었고 오직 이 예물의 한 부분만이 성찬례 거행 자체를 위해 따로 떼어져 보관되었다. 그래서 성찬례에 쓰일 예물의 준비는 매우 빨리 영적 자기 수여 (spiritual self-donation)로 해석되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희생제 안에 자신의 삶을 바치는 외적인 상징으로 바뀌었다.날로 성장하고 있던 공동체들에서 바침 (giving)은, 바쳐진 축성된 예물의 다른 행렬을 향해 대칭적으로 마주 움직이는 행렬로 봉헌하는 것으로 빠르게 변했다. 공동체가 신학적으로 봉헌을 ‘함께 희생하는 행위’ (co-sacrificing action)로 숙고했던 것과 같이, 예물 준비 또한 예식적으로 확장되었다. 더욱이 3세기의 히뽈리뚜스와 더불어, 우리는 예물을 가져오는 이들만이 교회의 영성체 (communion)에서 변화된 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을 발견한다 (사도전승 20, 10; 참조 엘비라 공의회 28조). 사도전승 20: “세례받을 사람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말고 다만 각자 성체를 모셔갈 것만 가지고 올 것이다. 합당하게 된 사람은 같은 시간에 예물을 바치는 것이 타당하다.”다른 한편, 치쁘리아노는 “구호품 없이 오는 이들은 가난한 사람이 가져온 희생 중 한 부분을 받는다” (De opere et eleemosyna 15)고 말한다. 우리는 교부 시대의 이러한 인용을 다양하게 만난다. 예물을 들고 제대까지 행렬을 하면서 찬가 또는 성가가 동반되었다. 이 노래는 육체적인 움직임에 영적인 해석을 해 주는 것이었다. 이는 아마도 매우 초기에 생겼을 것이다. 노랫말 중에서 시편은 훌륭한 동반자였으며, 후렴은 성가대나 성가대원과 함께 번갈아 가면서 회중이 불렀다.그러나 예물을 들고 행렬하는 것은 적어도 감사 희생제에 관한 잘못된 이해로 쉽게 이끌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회두한 고대 사람들은 이미 이교 신들에게 바치도록 꾸며진 제단에 “희생제의적 행렬” (sacrificial processions)과 친숙했었다. 놓여진 희생 제물인 짐승과 물건은 행렬로 운반되었고 그 자체로 벌써 “희생제사”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희생제사 행렬”에 관하여 명확한 신학적이고 영적인 내용을 주는 것은 언제나 매우 중요했다. 오늘날 미사 전례서의 개혁된 예물 준비 예식은 명확하다. 즉, 성찬 전례 가운데 첫째 부분으로서 오랫동안 사용해온 “Offertory”(봉헌)란 명칭을 피한다. 왜냐하면 잘못된 사고를 다시금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라틴어 동사 offerre(봉헌하다, 바치다)와 연관된 명사 oblatio(봉헌, 제물)는 첫째 의미로 단순히 “앞으로 가져오다”, “유용하게 하다”, “수여하다”이다. 그런데 종교 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는 이 단어를 오해했다. 그가 보기에, 많은 요소로 이루어진 여러 미사들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제사와 동등한 완전히 새로운 제사들이었으며, 마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바치신 희생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처럼 가톨릭 교회가 새로운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유일한 제사에 상처를 입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 예물을 준비하는 것과 그것의 실행은 제사로서의 성찬례의 시작인 것이 사실이다. 예물 준비를 동반하는 기도가: “저희가 이 빵 (잔)을 주님께 바치오니”하고 말할 때, 예물의 봉헌을 언급하는 성찬기도에서 이 단락의 다리는 벌써 시작된다. 라틴어 본문이 동사 offerimus를 사용하는 것이 양쪽 모두이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영적으로 볼 때, 예물 준비는 이미 교회의 성찬 (감사) 제사의 진정한 시작이다.
성찬식 빵과 포도주
성찬식 빵은 라틴 지역에서는 8세기이래 누룩 없는 빵을 사용했다. 최후만찬 때 예수께서도 이와 같은 빵을 사용하셨을 것이다. 이른바 matzoh라고 부르는 빵은 파스카 기념에서 “눈물의 빵”, 다시 말해서 정처 없이 방랑 생활하는 백성의 빵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교회 역사에서 초기 천년 동안은 서방이나 동방 교회에서는 성찬례를 위한 빵은 보통의 “일용할 빵”을 사용했다. 다시 말해서 누룩을 넣은 빵이었으며, 동방 교회에서는 오늘날도 이것을 사용한다. 대부분 동방교회에서 누룩넣지 않은 빵 (azymes)을 사용하는 것을 강하게 금지한다. 반대로 라틴 교회는 이 문제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피렌체에서 열린 일치 공의회 (1439)에서 동방과 서방의 서로 다른 사용은 단순히 인식되었고 인준되었다 (DZ 1303). 가톨릭과 일치한 몇몇 동방 교회들은 아직도 누룩넣은 빵을 사용한다. 이는 다른 한편, 밀로 만든 빵은 오늘날 보편적으로 모든 예식에서 사용된다. 지중해 연안의 문화에서 밀로 만든 이 빵은 “좋은” 빵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보리빵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참조 요한 6,9.13). 라틴식 사용을 계속하는 것은 좋은 것이며 빵에 대한 질문에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세우는 것은 아니다. 초기에 빵은 확실히 단순한 빵의 모양이었다. 주님께서 하나인 빵을 쪼개셨다. Fractio panis (빵 쪼갬)는 고대 교회에서 아주 오랫동안 실천되었다. 그리고 7세기 이후 서방교회에서는 Agnus Dei를 해석하는 찬가로서 빵을 쪼개는 동안 불렀다. 카롤링거 시대에 매우 이른 시기에 실천적인 의미에서 동전 크기 정도로 된 작은 빵 조각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빵에 대한 상징적인 힘(1고린 10,16-17)은 의심할 것 없이 약해졌다. 오늘날 큰 빵 한 덩어리를 사용하거나 큰 제병 하나를 사용하는 것으로 점차 되돌아오고 있다. 디다케(9,4)와 같은 초기 문헌에서 빵은 하나인 교회의 상징이다: “이 빵조각이 산들 위에 흩어졌다가 모여 하나가 된 것처럼, 당신 교회도 땅 끝들에서부터 당신 나라로 모여들게 하소서.”포도주는 “포도 열매” (마태 26,29; 마르 14,25; 루가 22,18)로 만든 순수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사제는 포도주의 순수성을 보살펴야 한다.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포도주는 축제의 상징뿐만 아니라 또한 땅의 상속을 의미했다.고대에서 일반적으로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 포도주에 물을 섞었다. 음식을 들기 전이나 중에 용기에 포도주와 물을 혼합하여 마셨다. 유스티노 이후 전례 사용은 미사에서도 역시 이러한 관습을 사용하였다. 아마도 예수의 최후 만찬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혼합하는 것에서 나온 상징주의 해석이 생기게 되었다. 카르타고의 치쁘리아노 (Ad Caecilianum 13) 이래 이러한 해석은 널리 퍼졌다: “잔에 포도주를 물과 함께 혼합할 때,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결합된다. 만일 어떤 이가 포도주만 바칠 때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 없이 남게 된다, 만일 어떤 이가 오직 물만 바칠 때, 사람들은 그리스도 없이 존재한다.” 이 해석은 거의 모든 전례들에 의해 동일하거나 비슷한 형태로 취해졌는데, 병사의 창에 찔려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 (요한 19,34)에 관한 내용을 종종 첨가하였다. 이것과는 예외적으로 단성론 교회는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 위에 신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피렌체 공의회는 말하기를, “교회는 사제에게 성작에 물을 포도주에 혼합하도록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 아마도 그렇게 하셨으며, 그리고 그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함께 나왔기 때문이다 (요한 19,34)고 하였다. 이 신비가 혼합에서 새롭게 된다. 그리고 요한 묵시록에서 민족들이 ‘물’로 불려지고 (묵시 17,1.15), 포도주와 물의 결합이 또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결합을 드러낸다” (참조 DZ 1320). 공의회의 이러한 선언은 물론 신앙에 관한 교의적 가르침이 아니다. 그러나 이 선언은 동방과 서방의 서로 다른 교회들, 특히 여기에서는 아르메니아 교회와 로마 교회에서 상징주의의 합의를 가리킨다. 다른 한편, 루터는 주님의 만찬의 거행에서 혼합 안한 포도주를 사람의 도움 없이 그리스도 홀로 이루신 우리의 구원에 대한 모상으로 본다. 또한 그는 이러한 실천을 인간적인 첨가 없이 깨끗한 가르침의 대표로 보았다. 포도주와 물을 혼합할 때 외우는 미사전례서의 기도문은 고대의 전례 전승에서 유래한다: 포도주와 물의 합치는 우리 인간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우리가 참여하는 상징이다.
자비송의 역사:바키리에 엘레이손 환호는 청원기도 (litania)의 자취이다. 청원기도는 표현이 기도의 지향을 언급하면서 백성의 다중 표현의 응답으로 행해진다는 방법으로 구성된다. 이 같은 형태는 매우 단순하고 실천적인데, 집회에 요구되는 것이 적기 때문이다. (동방 교회에서 ektenia라고 부르는) 이러한 청원기도 형태는 비잔틴 전례에서 매우 자주 나온다. 그리스 또는 슬라브 전례에 참여했던 이는 다성 음악으로 된 '키리에 엘레이손'이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청원기도의 기원은 고대 후기부터 황제에게 하는 환호로 세속적인 전례였다: 한 성가대원이 노래한 통치자의 칭송은 백성들 편에서의 경애와 간청의 환성으로 동의가 뒤따랐고, 종종 히드라울리스 또는 물 오르간 연주가 뒷받침했다. 이러한 정치적 또는 왕궁적 형태가 그리스도, Kyrios 또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으로 바뀐 것은 고대 후기부터 신자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형태 자체는 모두 단순하고 장엄하다. 키리에 청원기도는 동방 교회에서 유래했다. 로마 전례 안으로는 시칠리아 출신 그리스 사람인 젤라시오 교황 (492-296)에 의해 들어왔다. 말씀의 전례 끝에 하는 옛 간청 기도 (예를 들어, 성금요일)를 대체하기 위해서이다. 본질상, 청원기도는 다섯이나 아홉이나 스물 개까지 바라고자 하는 많은 지향을 언급할 수 있다. 비록 청원기도가 미사 전례에서 한 요소로 정착되었을 때, 매우 빨리 발전된 지향들과 간청들의 구조가 세워졌을지라도 말이다. 젤라시오 키리에 청원기도는 후에 그레고리오 대 교황 (590-604)의 노력으로 짧아진 전례에서 바꿔졌다. 교황은 각 지향 또는 간청을 말하는 것을 제거하였고 3x3 (모두 9번)의 구도로 환호를 제한하였으며 키리에 엘레이손과 크리스테 엘레이손으로 번갈아 가며 외는 것을 고정하였다. 이는 환호의 삼위일체적 해석에 기초하였다: 세 번은 성부께, 세 번은 성자께, 세 번은 성령께 드린다. 지향이 없는 환호인 키리에 엘레이손의 연속은 6세기 아르스의 아우렐레아노 (Aureliano di Arles) 수도승들의 규칙 (Regula ad monachos, c.9: PL 68, 393B-395A. 모든 시간경에 3번 키리에 엘레이손을 하고 평일 아침기도에는 12번 키리에 엘레이손을 하라 (Capitellum et Kyrie eleison duodecim vicibus)고 규정한다.Kyrios 환호가 원래적으로 그리고 근원적으로 삼위일체 중 어느 위격께 드리는 것인지는 결정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성부 또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스말 구약성서인 70인역에서 Kyrios는 항상 “야훼 (YHWH), 하느님”의 번역이다. 그래서 “키리에 엘레이손” (Κυριε ελεησον) 문장은 70인역 시편 6,3; 40,5; 참조 9,14; 이사 33,2에서 나온다 (참조 마태 9,27).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 기도를 지향하는 옛 전례 규칙이 이 해석에 또한 적용될 것이다. 그리고 비잔틴 전례에서 오늘까지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특히 바울로 저서에서 그리스도는 Kyrios 예수, “주님 그리스도”라고 규칙적으로 언급된다. 이러한 키리오스 제목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것에 더하여 아리우스 이단 (아리우스는 예수를 하느님과 동등하지 못한 하느님과 비슷한 존재로만 서술하였다)에서 특히 서방의 반 아리우스 저자들은 명백한 의지로 예수를 향한 기도에 강조를 둔다. 미사에서 친숙한 환호들은 자주 그리스도께 향한다는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 향한 양식인 감사기도에서도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 하고 말한 후에 백성의 응답은 그리스도께 환호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최소한 기도 양식 안에서 붕괴이다. 키리에 환호의 대상은 그리스도이시다.키리에 환호는 순수하게 백성에게 속한 부분이다. 사제가 전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천에서 볼 때 이 사실은 감춰있다. 옛 시대에서부터 사제와 봉사자들 (백성들의 대표)은 환호를 서로 주고받았고 세 번 하는 환호들은 두 편으로 갈라진 백성에게 종종 어려움을 줬다. 과거에, 봉사자들 또는 제대 복사들로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보다는 두 번째 변화에서 올바른 시점에서 크리스테 엘레이손을 시작하는 것에 더 자주 우리가 연관되었다. Kyrie는 이중적 가치를 지니는데, 찬미와 참회을 위한 간청이다. 첫째로, Kyrie (주님)라는 호격은 신약성서에서 특히, 필립비서에서 그리스도께 바치는 황제적이고 개선적 호격이다: “입을 모아 주님 (Κυριος)은 예수 그리스도시라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도다” (2,11; 참조 묵시 2,36). 둘째로 용서와 자비와 불쌍함의 간청이다. 이 환호를 통하여 참회 행위의 발전으로 또한 이해될 수 있다. 새로운 미사 구조에서 보면 이것은 그것의 근본적인 성격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셋째 형식을 할 경우에는 키리에는 반복하지 않는다. 우리는 키리에가 자비 지극하신 위대한 주님께 대한 간청이며 환호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오늘날 규정은 사제와 백성 사이에서 주고받는 환호를 세 쌍으로 한다 (더욱 좋은 것은 성가대원 하나와 백성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성가대원 하나 또는 사제, 성가대, 그리고 집회가 세 번씩 세 쌍으로 해도 된다. 환호의 숫자가 더 이상 규정으로 고정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것은 청원기도 (litania)의 옛 전통에 부합한다. 동일한 전통에 따라, 우리는 청원기도에 본문 (이른바 tropes)을 다시 삽입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일반 죄 고백의 셋째 형식인 키리에 청원기도가 이것의 한 예이다.
본기도는 미사의 시작 예식을 끝맺는다. 거의 모든 전례 거행에서 한 단계가 기도 (oratio)로 끝맺는다는 것은 전례의 구조적 원칙 가운데 하나이다. 이렇게 기도를 통하여 마무리된다는 사실은 미사의 각 부분에서도 그렇고 또한 시간 전례나 독립된 말씀의 전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날의 본기도는 예물 기도와 영성체 후 기도와 더불어 주례자의 기도에 속한다. 이 주례 사제의 공적 기도는 반드시 주례자 혼자 말하거나 노래해야 한다. 이것에서, 주례 사제는 다른 사람들 (독서자, 공동집전 사제들 등)에 의해 대표될 수 없다. 주례사제가 바치는 본기도는 그 날 지내는 축일이나 신비 (전례주제)와 연계된 공동체 전체의 서원과 심정을 하느님께 드리면서 모든 위한 통역자의 역할을 한다. 짧은 문고로 그날 축일이나 그 날 독서 안에 들어 있는 중심 내용을 요약하여 신도들로 하여금 그 날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이 기도문들은 참으로 소중한 보물이다.전례 역사에서 본기도는 두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즉 Oratio와 Collecta이다. 로마 전례에서 보면, 젤라시오 성사집, 그레고리오 성사집은 본기도 본문을 제목 없이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성사집은 일부 기도문에 Oratio라는 이름을 붙인다. 또한 로마 예식집 (Ordines Romani)에서도 항상 Oratio라고 부른다. 그리고 MR 1570까지도 Oratio라고 불렀다. Oratio라는 말은 동사 orare에서 나왔는데, “기도하다”와 마찬가지로 “말하다”, “연설하다”, “선포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oratio의 번역은 “말로 표현된 기도”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와 연관하여, 고대 교회에서는 강론을 통하여 말씀에 봉사하는 것과 공식 기도문 (public prayer)을 바치는 것은 사제 직무에서 가장 중요한 은사였다. 또한 일반사회에서 사용된 고전적 낱말 oratio는 orator와 연결되어 이름지어졌으며 대중 연설, 특히 판사 앞에서 자신의 고객의 변호를 하는 변호사의 공적 연설이었다. 그래서 Oratio는 중개의 뜻도 가지고 있다. Collecta라는 이름은 총지침과 MR 1970/75에 미사에서 주례자가 바치는 첫 번째 기도에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반면 과거에 사용되었던 Oratio라는 이름은 일반적인 기도를 가리키게 되었다. Collecta는 “모으다”는 의미로 동사 colligere에서 나왔다. 또한 로마에서는 지역 (장소)을 나타내는 의미를 취했다. ‘collecta 교회’ (모인 교회)는 교종 순회 미사 날에 로마시에 사는 신자들이 전례가 거행되는 statio 교회로 행렬하여 모여들었다는 장소적 의미로 쓰였다. 또한 Collecta는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기도는 하느님의 옥좌에 바치는 한 묶음과 같이, 참석자들 각자가 마음 속으로 드리는 모든 지향들을 종합하여 주례자가 한 기도문 형식으로 모은다. 따라서 본기도는 집회의 모음을 표현한다. 지난 학기에서 본 바와 같이, 주례자를 위해 임시로 만들어진 기도문들이 애용되고 반복됨으로써, 또 기도문들의 수집과 필사가 이루어짐으로써 성찬례 거행에 필요한 기도문들을 양피지로 적어 모아놓은 소기도서들 (libelli sacramentorum) 직역하면 “성사들의 책들”이다.이 생겨났고, 곧 이어 여러 성사집들이 만들어졌다. 후대에 가서 이러한 기도문들은 단어에 단어로 반복되었거나 새로운 기도문을 형성하는데 제시되곤 하였다. 오직 오랜 기간을 거친 다음에야 주례자의 공식 기도는 고정된 양식이 되었다. Oratio는 7-8세기 이후 문자화되었으나, 4-5세기 이전부터 구전 형식으로 전수되었다. 본기도는 미사 전례서에서 가장 로마다운 본문이다. 이 기도문들은 그것의 놀라운 부요함과 간결하고 짜임새 있으며, 고전적인 형식 때문에 우리는 놀라게 된다. 본기도는 고정된 구조로 전개되는데, 즉 기도를 하자는 권고, 침묵, 삼위일체 형식으로 맺는 기도, 집회가 외치는 “아멘”이다. 기도하자는 권고는 가장 짧다. 주례자는 손을 모으고 (manibus iunctis) 복수형으로 “(우리) 기도합시다” (Oremus) 하고 초대한다. 손을 모은 것은 개인 기도의 표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집회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주례자는 ‘그리스도의 인격’ (persona Christi),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각 신자들의 지향을 모으기 때문이다.침묵의 목적은 총지침 32항에 나와있다: “모두 사제와 함께 잠시 침묵 중에 하느님 대전 (conspectus Dei)에 서 있음을 인식하고, 마음에 그들의 간청들을 상기하도록 한다.” 다시 말해서 침묵의 이 공간에 신자들은 초대에 응답을 하고 주님의 현존에 자신들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개인 기도를 그들의 마음에 형성시킨다. 조용한 침묵은 전례의 한 부분이며 구조적 요소이다. 이는 전례헌장 (30항)에서 강조되었다: “능동적 참여를 촉진하기 위하여, 회중의 환호, 응답, 시편 교송, 대경, 성가와 함께 행동과 동작과 몸가짐 등을 올바르게 하도록 유의하여야 한다. 또한 합당한 때에는 거룩한 침묵을 지켜야 한다.” 이는 총지침 23항에 다시금 언급되었다. 여기에서 또한 침묵의 목적을 구별한다: 참회 예식과 기도하자는 초대 후에서는 마음을 추스르고, 독서 또는 강론 후에는 묵상하는 것이며, 영성체 후에는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찬양드리는 것이다. 개인기도에서 나오고 기반될 때 공동기도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것 (요한 4,23)이 된다. 1967년에 나온 성음악 지침 (Musicam sacram) 17항에서 말한다: “(침묵으로 기도하는) 신자는 전례 행위 때 바깥 사람으로 그리고 침묵하는 관망자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느님 말씀을 들음에서, 노래에서, 기도들을 경청함에서, 그리고 사제에게만 속한 부분을 선포하는 사제와의 영적인 통교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준비를 통하여 신자들은 거행되는 신비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침묵은 성령의 활동과 깊이 연관되 있다. 침묵 중에 성령께서는 신자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 아빠, 아버지하고 대신 간구해 주신다.
침묵 기도의 때는 더 이상 선택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요구된다. 따라서 침묵은 결코 생략해서는 안된다. 침묵의 길이는 적당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침묵의 길이는 신자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모으는데 짧거나, 거행의 흐름을 끊지 않도록 길지 말아야 한다.
그 날에 해당하는 본기도는 주례자가 말하거나 노래한다. 이는 모든 참석자의 기도를 요약한다. “거행의 주제가 표현된다” (총지침 32): 주일, 축일과 고정된 시기, 성인의 기념, 죽은 이의 기념 등. 초기에는 이것은 관습 (그리고 때로는 의무)이었는데, 보기를 들어, 혼배와 같은 다른 예식이 동반되는 미사에서 교회력과 성인 축일은 함께 기념되었으며 어떤 의무적인 기도들 (orationes), 심지어는 7개까지 첨가되었다. 그러나 이는 과거에 그랬다. 오늘날에는 본기도 하나가 거행의 성격을 지시한다. 사제는 모든 참석자들이 주의를 기울이면서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본문을 크고 뚜렷한 목소리로 말하거나 노래한다 (총지침 12). 암송에 아무 것도 동반하지 말아야 하는데, 다른 기도들도, 노래도, 오르간이나 다른 악기들도 (총지침 12), 또 해설도 있어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집회의 응답이다. 마지막 “아멘”은 사제가 말한 기도를 집회가 한다는 뜻이며, 그 기도를 확증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총지침 32). 아멘은 거행의 주체로서의 집회의 일치를 명백히 한다. 그러나 역할의 차이점 또한 드러낸다.
본기도 본문은 비교적 고정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나클레시스 (anaclesis: 하느님의 속성을 언급) 직역하면 “위로 부른다”, “위를 향하여 올린다”는 뜻이다.
1. 하느님 이름: Deus (하느님), Pater (아버지) 등과 같은 유사한 것들.
2. 속성: 전능하신 (Omnipotens), 영원하신 (aeterne), 자비로우신 (misericors), 가장 인자하신 (clementissime)와 유사한 형용사들.
3. 찬사: fidelium splendor animarum (신자들의 영혼의 광채)과 유사한 것들.
아남네시스 (anamnesis: 기념)
기념은 구원 사건에 대한 암시이다. 특히 성자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드러난 아버지의 업적을 기억한다. 이것은 하느님 아버지께 간청드리기 전에 그분이 전에 하셨던 놀라운 구원 사건을 기억하여 그 구원 사건이 오늘날에도 현존케 한다.
에피클레시스 (epiclesis: 성령청원기도)
1. 기도하는 이들의 자격: (qualificazione): ut nobis indigins famulis tuis (당신의 부당한 종들인 저희들이...).
2. 간청의 목적: 거행의 목적을 하느님께 밝힌다. 즉 다양하게 구현되는 신자들의 성화를 목적으로 한다.
영광송 (끝맺는 양식)
세 가지 경우가 있다. 성부께 지향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성부께 지향하나 성자에 대한 언급으로 기도가 끝맺을 때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성자께 지향 (주님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이 그것이다. 그런데 본기도와는 달리 예물기도와 영성체 후 기도는 항상 짧다: 성부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성부께 지향되나 성자에 대한 언급으로 끝날 때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성자께 지향될 때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그래서 이 구조에 따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의 본기도를 분석해 보면,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나클레시스), 구세주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으니 (아남네시스), 저희도 주님의 인내를 본받아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에피클레시스).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영광송)초기 본기도 항상 성부께 지향되었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대로, 예수께 지향된 기도들은 후대에 나타났고 종종 반 아리우스 신학의 영향 아래에서 그랬다. 미사 전례서는 고대의 환경을 다시 살려서 확장할 가능성을 제정하였다. 따라서 총지침 32항은 말하기를: “사제의 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지향된다 (dirigitur).” 성령께 지향되는 Orationes는 물론 신학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이전에서도 아주 예외적이었다 (동정녀 축성 미사의 본기도처럼 오직 소수였다). 현행 미사 전례서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종교 역사 관점에서 보면, 손을 하늘로 향해 들어올리는 것은 초 세기 세계관에 부합하고 “위에 있는 신들”에게 기도하는 외적 동작이다. 다른 한편, 손을 펴서 올리는 것은 무기를 안들었다는 평화와 신뢰와 간청의 자세이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께 (출애 9,29.33; 시편 28,2; 63,5; 88,10 등등), 또는 성전을 향해 (1열왕 8,38 등) 손을 드는 것은 관습이었다. 다시 말해서 구약에서는 전형적인 기도의 자세였다.이러한 유대인의 기도 동작은 공동 기도와 마찬가지로 개인 기도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드러나게 받아들었다. 떼르뚤리아노는 그것에 대해 말하기를 (De oratione 14):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죄 의식 때문에 그들의 손을 그리스도께 마땅히 들어올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손을 들어올릴 뿐만 아니라, 주님의 수난을 본받고자 손을 편다. 또한 기도에서 그리스도를 우리가 고백한다.” 팔을 펴는 자세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표지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들에게 교부들은 또한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신 아드님의 모습을 본다. 원래 기도 (orans) 동작의 이러한 해석은 이차적으며 은유적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것은 흥미있고 받아들일 만하다.요약하면 팔을 펴고 하는 사제의 동작은 삼중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늘로 향한 자세는 항상 하느님의 옥좌에 대한 상징이다 (참조 1열왕에서 솔로몬이 하늘을 향해 손을 편 채 기도했다).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기도를 상기시킨다. 참석한 모든 신자들의 기도를 주례자는 신자들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단 하나의 기도 형식으로 모아 바친다. 권고할 때 주례자가 손바닥을 서로 마주 붙이는 것은 미사 중에 사제 개인 기도이지만, 다른 환경에서는 영성체 때처럼 아마도 의탁과 신뢰의 동작이다. 사제 서품에서 이 동작은 주교에게 신의를 맹세하는 예식의 부분에서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 전통에서 서서 기도하는 것은 구세주의 부활을 상기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이유로 부활 50일 동안 장궤나 엎드리면서 기도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신앙고백의 역사:오늘날 말씀의 전례 안에 자리한 Credo는 백성들이 “(성경) 독서와 강론을 통해서” (총지침 43) 들은 것에 대한 인식의 성격을 지닌다. 신앙의 본질적인 진리는 미사의 성체성사적 부분이 시작되기 전에 마음에 상기된다. Credo는 원래 미사가 아니라 세례성사의 요소였다. 형태에서 보면 신앙고백은 예루살렘 세례 신경의 확장된 형태이다: 세례를 청하는 사람은 마음으로 신경을 배워야 하고, 시험의 형식으로 주교에게 그것을 되풀이해야 한다 (이른바 redditio symboli: ‘신경 수여’라고 한다). 그래서 개인적인 인식으로서, 신경은 단수 일인칭으로 왼다. 신경은 그 기원에서 보면 그 자체로 전례 중에 공동으로 암송하는 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신경은 많은 여러 가지 형태로 사용된다: 기본적인 형태가 이른바 “사도 신경”이다 (이는 사도 시대로 되돌아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니체아 신경 (니체아 공의회 325년), 또는 “위대한 신앙 고백”으로 알려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81년)으로 확장되었다. 아타나시오 신경, 트리텐티노 신경 들을 포함하여 다른 신경들은 신앙의 명료하고 정확한 신학적 진술이나, 이 신경들은 전례에서 사용하지 않는다.라틴어 미사는 이른바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노래하거나 암송한다. 현행 미사 전례서는 또한 사도신경의 사용을 허락한다.라틴 미사에 신경이 들어온 것은 스페인이었다. 제3차 톨레도 (589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 이단이었던 비시 고트 사람들은 레카르도 왕 통치 아래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했다. 니체아 신경은 성자와 성부 사이의 본성의 일치를 명확히 강조하기 때문에, 이전에 아리우스 이단이었던 교회 전례에 이 신경이 합치될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에 앞서 이 신경을 즉시 노래했다: 신경 (symbolum)과 주님의 기도 (Pater noster) 이 두 기도문은 세례를 받기 전 모든 예비자들이 암송해야만 하는 “신앙의 짧은 정형”이었다. 이것보다 이른 시대에 유스티아누스 2세 (563-578) 아래에서 신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 미사 안에 포함되었다. 7-8세기에 신경은 갈리아-프랑크 미사에 도입되었고, 이후 810년에 레오 3세 교종이 승인하였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동방과 서방 교회 사이에 분쟁의 원인이 된 아픈 것으로 남아 있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께서 쫓아나신다는 것을 가르치는 이른바 filioque (필리오꿰) 없이 사용하였다. 하지만 프랑크 사람들 사이에 이러한 길고 친숙한 신경은 남았다. 로마는 1014년 로마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성 헨리코 2세 황제의 협조 아래 프랑크-독일식 신경을 먼저 받아들였다.동방과 모자라빅 전례에서 모든 미사에서 신경을 노래했던 반면, 라틴 전례는 오직 특별한 미사, 특히 신경에서 드러나는 날에 신비가 거행될 때 신경을 사용하였다. 즉, 성탄, 부활, 주님 잉태 전갈 대축일, 사도들의 축일과 확실한 성인들 (보기를 들어, 교회 박사들), 그리고 모든 주일에 신경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신경 사용의 감소는 현행 미사 전례서에서 명백하다. 신경은 오직 주일과 대축일에만 노래하거나 암송한다. 그러나 또한 경우에 따라 축제에도 포함될 수 있다 (홍주; 총지침 44와 98 참조). 다시 말해서, 특별한 거행을 위해 어떤 이유가 있을 때나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을 때이다. 규정은 어떤 융통성을 주고 있다.신경은 본성적으로 볼 때 백성들에게 속한 부분 가운데 하나이다. 비록 라틴말에서 신경이 일인칭 단수형으로 되어있지만, 모든 집회가 신앙에 응답하는 것이다. 사제가 신경을 신자들과 함께 암송할 때 이는 공동체를 단순히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례자가 신경을 시작해야만 한다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보다는 주례자는 “우리 모두 니체아 (또는 사도) 신경을 암송합시다”라고 말하면서 신경을 도입하는 것뿐이다. 이전에는 주례자는 신경을 선창하는 것이 규정이었다.육화에 대한 확증에서 장궤는 오늘날 오로지 성탄절과 주님 잉태 전갈 대축일 (3월 25일)에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깊은 절만 한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흔히 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고집해야 한다.
'하느님의 중재자' (Mediator Dei)교종 비오 12세가 1947년 11월 20일에 반포한 회칙 '하느님의 중재자' (Mediator Dei)에서 그릇된 전례에 대한 개념을 반박하고 있다. "하느님 예배의 오직 외적이고 감각적인 부분 또는 장식된 예절 (caerimonia)이 거룩한 전례에 대한 옳은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틀리다. 그리고 거룩한 전례를 교계가 거룩한 의식들 (ritus)의 완수와 행함을 명령하기 위한 법들과 규정들의 순수한 총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게 과오를 범하고 있다" (DZ 3843). 이 회칙은 전례에 대해 학술적 정의를 내리지 않았으나, 결국 거룩한 전례란 "교회의 머리이신 우리 구세주께서 성부께 드리는 공적 예배 (cultus publicus)와 같이, 믿는 이들의 공동체 (societas)가 자신의 창립자께,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영원한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이다. 더 짧게 말하면, 전례란 그리스도의 신비체, 곧 그 머리와 그 지체가 드리는 통합적 예배이다"고 정의했다 (DZ 3841). 전례에 관한 회칙 '하느님의 중재자'의 정의는 그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 (Sacrosanctum Concilium) 7항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 수행 (exercitatio muneris sacerdotalis Iesu Christi)"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 곧 머리와 지체에 의하여 수행되는 완전한 공적 예배 (cultus publicus)"이고, "사제이신 그리스도와 그분 몸인 교회의 일 (opus Christi sacerdotis eiusque Corporis, quod est Ecclesia)"이다.SC 7항에서 전례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정의 가운데 하나는 미사 성제와 성사들과 하느님의 말씀과 성무 (聖務)에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근본적 개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미사를 거행하는 가운데 그리스도 친히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을 제헌하신 같은 분이, 지금도 사제들의 봉사 (직무: ministerium)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다". 아우구스티노를 인용하면서, 공의회 헌장은 "누가 세례를 줄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례를 주시는 것이다"고 밝힌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 안에 현존하신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때 말씀하시는 이는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분은 "교회가 기도하거나 노래할 때" 현존하신다. 이 모든 확언은, 그리스도께서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아픈 이를 고치고, 마귀들린 이를 해방시킴으로 전개되었으며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과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그 절정에 다다른 사제직무 수행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노릇을 강조한다. 이 정의에 대한 또 다른 요소는 교회의 역할이다. 그리스도께서 직무 (ministerim)의 능력 안에서 당신 자신에 교회를 결합시키셨다. "사제들의 직무를 통하여", "누가 세례를 줄 때",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때", "교회가 기도하거나 노래할 때"라 하는 이 문장은 전례에서 교회가 직무로 하는 노릇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전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행위이고 "가장 거룩한 행위이며, 그 효과에서 교회의 다른 어떠한 행위도 이와 같은 이름과 같은 높이를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례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는 성경이다. SC 24항은 말하기를, "읽으며 강론에서 설명하는 독서들과 노래로 부르는 시편은 성경에서 취한다. 또한 전례 가운데 이루어지는 간구와 기도와 찬미가도 성경에서 받는 감동과 충동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행위와 상징들 (Symbolum)의 뜻도 성경에서 나온다". 그래서 미사나 성사나 준성사나 시간전례의 전례거행은 하느님 말씀의 선포를 포함한다.SC 7항에 따르면, 전례의 궁극적 목표는 하느님의 영광과 거행하는 이들의 성화이다. 이것은 "감각할 수 있는 표징을 통하여" 드러나고 실현된다. 표징들과 상징들은 전례에 성사적 차원을 언급한다. 다시 말해서 이것들은 그리스도와 거행하는 교회의 현존을 포함하고 밝힌다. 전례 안에서 표징들과 상징들은 성사적 형태처럼 말로, 안수처럼 몸짓으로, 물과 빵과 포도주와 기름처럼 물질적 요소로 되어있다. SC 10항에서, '하느님의 중재자'에게서 영감을 받아 전례는 정점과 원천 (culmen et fons)임을 정의한다: "전례는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다른 한편, SC 14항은 공의회에서 바라는 개혁의 필요성과 전례 교육의 촉진처럼 완전하고 깊은 이해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고려한다. 능동적 참여는 "세례의 힘으로" 믿는 이들에게 권리(jus)이고 책임 (officium)이다. 이것은 SC 26항에서 "전례 행위들은 사적 행위가 아니라 교회의 거행들 (celebrationes Ecclesiae)이다"고 확언한다. "개개의 지체는 계급과 직책 및 실제 참여에 따라 각각 다른 모양으로 관여하지만" 전례 행위들은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밖으로 드러낸다. 다른 두 개의 근본 원리는 전례에 대한 공의회의 정의를 보완한다. SC 38항은 "경직된 획일성"(SC 37)에 반대하여 전례의 "본질적 통일성" (unitas substantialis)에 대하여 말한다. 전례는 예배를 거행하는 한 공동체의 구체적인 환경에서 거행된다. 따라서 그러한 공동체의 문화와 전통들을 고려한다. 이것은 전례를 문화에 적응 또는 도입해야 될 필요성을 설명한다. SC 63b항에서 표준판 전례서에 기초한 개별적인 예식서들을 준비할 것을 요구한다: "언어까지도 포함한, 각 지방의 필요성에 상응하는 개별적 예식서를 가급적 속히 작성한다". 이러한 SC 23항은 "건전한 전통을 보전하면서도 올바른 진보의 길을 열기 위해" 전례의 개별 부분들을 재검토하는 것은 신학적, 역사적 그리고 사목적으로 올바른 연구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축복의 잔'이 아니라 '찬양의 잔' (Calix benedictionis):이 노래 가사는 우리가 주일마다 거행하는 성찬례(미사) 가운데 성찬전례, 그 중에서도 '감사기도'와 연관되어 있답니다.유대인들은 파스카 회식 때 포도주 잔을 들고 기도문을 외웠답니다. 이 기도문의 내용은 야훼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해 주신 구원에 대해 감사드리고 찬양드리는 것이랍니다.파스카 회식은 크게 보면 전식, 본식, 후식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전식을 시작하면서 포도주 잔을 들고 찬양기도를 외우고 (기쁨의 상징), 두번째 잔을 채운 다음에 파스카 축제의 고유한 기념인 '하가다'를 합니다. 여기에서 하가다 (Haggada)는 가장과 어린이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그 내용은 에집트를 탈출한 선조들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나면 누룩없는 빵 예식을 하고서는 빵과 어린양과 쓴 나물을 먹는 본식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후식이 이어지는데, 세번째 잔을 들고서 가장이 찬양기도문을 외웁니다. 바로 이 세번째 포도주 잔이 '찬양의 잔'입니다. 우리말 성가에는 '축복의 잔'이라고 되어있는데, 사실 라틴말 Benedictio를 잘못 이해한 결과입니다. 이 단어는 사람을 향할 때는 축복 또는 강복이라고 번역되지만, 사람이 하느님을 향할 때는 '찬양'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올바른 번역은 '축복의 잔'이 아니라 '찬양의 잔' (Calix benedictionis)이 맞습니다.최후만찬 중 예수께서 바로 이 세번째 잔을 두고 찬양 기도를 하시면서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너희를 위해 흘릴 내 피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바로 이 잔의 포도주가 성찬례를 통하여 주님의 피가 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피는 주님 친히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이고, 교회는 이 성혈을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의 제물로 바칩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이 그리스도의 피를 영성체 예식 때 나누어 마십니다. 이 피를 마신다는 것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미사 파견 예식 때 사제가 "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하면서 우리 모두를 이 세상 안으로 파견하는데, 이 파견을 통해서 일상 삶에서 주님과 신앙을 증거하는데 겪게 되는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감사하게 받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죽음이여'라는 말의 뜻일 수 있습니다. 초세기 로마 박해와 우리나라 박해 때 많은 신자들은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실제로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최후만찬 때 세번째 잔, 즉 '찬양의 잔'을 손에 드시고 당신 피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영성체 때 영하게 되고, 이로써 우리 역시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잔이 찬양의 잔이 되는 것은, 수난과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 새로운 생명으로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혈을 마실 때마다 십자가에서 처형되셨으나 다시 살아나신 주님처럼 일상 삶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예물:입시철이 가까울수록 부모님들은 더 바빠집니다. 시험을 치르는 아이들보다 더 애태우는 분들이 부모님들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죄인이 된 양, 집안에서는 아이들의 눈치를 보고, 밖에서는 자기 아이의 시험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해보고 싶어집니다. 점을 치러 간다, 효험이 있다는 부적을 산다, 또는 이 방면에(?) 영험을 갖고 있다는 소위 도사님들을 찾아다닙니다.이 점에 있어서는 가톨릭 신자들도 그다지 예외는 아닌 듯 싶습니다. 수험생을 둔 어느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성당에 열심히 다니던 그 어머니가 어느 날 본당신부님께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보통의 미사예물보다 월등히 많은 액수의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이의 합격을 위해서"라는 지향과 함께! 그러나 불행히도 아이는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그 어머니가 분개한 얼굴로 신부님을 찾아와서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신부님의 하느님은 능력이 없었으니까 내가 준 돈 도로 돌려 주세요!"많은 신자들이 미사예물의 뜻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해도 많고, 또 다른 이들에게 나쁜 표양을 주는 것 같습니다.초기 교회 신도들은 봉헌 때 자기가 받은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빵, 포도주, 우유, 꿀 그밖에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면 주례자(사제)는 이중에서 얼마를 떼어 미사 때 사용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보관하였습니다. 자신의 생활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사제의 생활과 교회의 운영 및 사제의 사목활동(특히 자선사업)을 돕는다는 뜻으로 신도들은 물건을 가져왔고, 이것이 9세기 이후에 돈으로 대치하여 가져왔던 것입니다.이같이 자기가 갖고 있는 물질의 일부를 바치는 것은 자기가 받은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면서 동시에 교회의 활동을 경제적으로 돕는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론 죽은 이를 위해, 혹은 어떤 일의 성사를 위한다는 특별 지향을 갖고 사제에게 미사를 청하면서 예물을 바치기도 합니다만 그렇더라도 그 본래의 뜻은 교회의 사목활동을 경제적으로 돕는다는 것입니다. 단지 사제는 이같은 특별 지향을 위해서 혼자 기도할 뿐입니다.미사예물의 정신이 이렇다면, 효험이 있다는 사제를 찾아다니거나, 미사예물의 액수에 따라 그 효과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그릇된 일입니까? 더더구나 미사는 "공동체"의 예배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미사 지향을 둔 그 미사는 마치 자기 것인 양 착각한다면 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미사 지향판에 자기 이름이 적혀 있고, 미사중에 신부 입에서, "이 미사는 누구 누구를 위한 미사입니다"라는 말을 들어야만 만족해하는 신자는 혹시나 하느님의 은혜를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단자는 아닌지요.미사예물의 본뜻을 따르고자 한다면, 가난한 사제와 교회에 그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함이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 생활이 넉넉한 도시의 교회에서 가난한 시골 교회에 미사예물을 모아서 보내주는 것도 좋은 방안입니다.몇 달 동안 예비자 교리에 참석하여 교리를 배운 후 올 성모 승천 대축일에 영세를 받은 사람의 대부를 선 사람입니다. 영세를 받기 전 제 대자가 제게 와서, 교리를 담당하셨던 수녀님이 예비자들에게 신부님께 영세 미사 때 감사예물을 바치라고 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조금 야릇하더라는 겁니다. 성당에서 세례라는 선물을 주었으니, 너희도 그에 마땅한 돈을 내야 되지 않느냐 하는 식의 상업적 느낌이 들어 꺼림칙하다는 제 대자의 말이었습니다. 이에 감사예물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를 납득시키려고 하기는 하였지만 왠지 저 자신도 마음이 개운하지는 않았습니다. 세례를 받기 전 꼭 감사예물을 내야 하는 것인지요.언젠가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으로 놀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해수욕장 일대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습니다. 강릉에서 경포대 해수욕장으로 가는 시내 버스를 탔습니다. 도립공원 입구의 매표소에 도착하니 버스가 서고 이어 도립공원 관리인인 듯한 사람 하나가 버스에 올라타서는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주민이 아닌 사람은 다 내리세요!" 너무나 당당한 그의 목소리에 기가 죽어 저를 비롯한 경포대 주민이 아닌 사람은 모두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리자마자 버스는 도립공원 안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버스 종점은 매표소에서 약 200미터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입장표를 사면서 저는 너무나 화가 나 그곳 관리인들에게 말했습니다."우리는 버스 요금을 냈기 때문에 종점까지 갈 권리가 있으므로 당신들이 버스 안에서 표를 팔든지 아니면 우리가 표를 산 다음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도록 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조금 전 버스에서 내리라고 한 관리인이 변명 비슷하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종점이 여기에서 별로 안 먼데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화가 더 난 저는 "요금 징수를 당신들 편의대로 하자고 우리 관광객들은 불편을 감수해도 된다는 겁니까?" 하고 한번 더 목소리를 높여 불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들 잘못을 아는지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관광 도시임을 내세우는 강릉에서 이런 행위가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 강릉에 대한 인상이 아주 나쁘게 바뀌는 것은 비단 저뿐만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관광객에게 가능한 한 친절과 편의를 도모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들 편의를 위해 관광객에게 불편을 강요하는 곳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관광 도시라 할 수 있을까요.수도권에 속하는 한 본당에 사는 신자 한 분이 분개한 목소리로 제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남편만 신자이고 아내는 개신교 신자로서 오랜 세월 혼인성사를 받지 못한 채 살아온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개신교 신자인 그 아내가 천주교에 다니겠다고 하면서 아이들까지 전부 성당 교리반에 들여보내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도 영세반에 들어갔습니다. 오랜 천주교 전통을 가진 집안에서 자라났음에도 불구하고 혼인성사를 받지 않아 신앙 생활을 하지 못했던 남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요. 착실한 준비 끝에 드디어 아이들도 아내도 영세를 받았습니다. 이어 혼인성사까지 받았는데, 성당에서 일하는 사람이 이들 부부에게 신부님께 감사예물을 바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면서 상당히 많은 돈을 제시하자 이 부부는 무척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세와 혼인 성사 준비로 바쁜 나머지 주머니에 넣어둔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해서 나중에 드리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적지 않은 돈을 마련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지라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다 보니, 본당 사무장이 집에 전화를 걸어 감사예물을 빨리 가져오라고 독촉했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독촉 전화를 한 것은 물론이요 어른들이 없어서 아이들이 받으면 아이들에게까지도 성당에 돈을 빨리 가져오라고 부모님께 말씀드리라고 시켰답니다. 이 말을 전하던 그 신자는 다음과 같이 제게 항변하였습니다. "신부님, 감사예물은 말 그대로 은총을 받은 이가 하느님과 사제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내는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액수는 물론이요 그것을 내든 안 내든 역시 본인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성사에 따라 내야 될 액수를 정해 놓고 그것을 성사받는 이 모두가 내야 하는 것으로 정한다면, 이게 무슨 감사예물입니까? 세금이나 마찬가지지요."교회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각 신자들이 능력껏 돈을 내는 것은 굳이 성서 말씀을 인용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신자가 납득하고 있다고 봅니다. 또 교회 안에서 신자들을 위해 일하는 사제를 신자들이 경제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문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문에 교회가 각 신자들에게 구약의 십일조에 해당되는 교무금을 배당하고, 미사 때 헌금을 거두며, 사제에게 성사나 준성사를 집전하여 주기를 청할 때 감사예물을 바치는 관행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사제에게 미사를 청하거나 성사 또는 준성사를 청할 때 신자들이 사제에게 감사예물을 드리는 것은 교회의 오랜 전통이 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자원해서 바치는 감사예물을 강제적으로 거두는 것은, 마치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봉사해야 할 공원 관리인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관광객의 불편을 강요하는 것과 같은, 주객이 전도된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또 감사예물을 강제적으로 거두는 것은 마치 교회가 성사의 은혜를 돈 받고 파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어서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한편 교회가 강제적 성격의 감사예물을 남발할 때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성당에 다니지 못하는 일도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세금과 같은 느낌을 주는 강제적인 감사예물의 부과는 가능한 한 피하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감사예물은 말 그대로 신자 각자가 알아서 낼 때 그 본래 의미가 더 잘 살아나지 않을까요.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강제적 성격의 감사예물을 거부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지만,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거부할 권리가 있으며, 돈 때문에 성사 집행을 거부할 사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에, 돈이 없어서 또는 감사예물을 내지 않았다고 해서 성사 또는 준성사를 받지 못할까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얼마 전 제가 아는 한 신자가 찾아왔습니다. 시골에 있는 집을 처분하고 어렵사리 서울에 새 집을 하나 장만한 이 신자분, 신자된 도리로서 새 집을 강복받고 싶긴 한데 신부님께 얼마 정도의 예물을 드려야 하는지 난감하더랍니다. 자기 생각에도 시골 본당과는 차이가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고민하던 끝에 본당 사무실에 찾아가 사무장께 "집을 강복받는 데 신부님께 얼마를 드려야 할까요?" 하고 조언을 구하였답니다. 그러자 사무장은 확실한 대답을 피한 채, "에이, 알아서 하세요" 하더랍니다. 알아서 하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는 이 신자, 제발 알려달라고 거의 애원조로 부탁했더니, "이 정도는 하셔야죠" 하며 얼른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폈다가 겸연쩍게 손을 감추더랍니다. "손가락 다섯 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저를 찾아온 이 신자가 알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본당 생활 경험이 없는 수도회 사제라 이러한 본당의 관행에 대해 알 수는 없었기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세요" 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쎄요, 손가락 다섯 개가 오만 원으로 생각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오십만 원을 뜻하는 것도 같은데요. … 오만 원은 적은 듯 하고 오십만 원은 너무 많은 것 같아서요." 그 신자와 헤어진 저는 착잡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착한 신자를 그런 고민(?) 속으로 몰아넣는 교회의 현실이 부끄럽게도 여겨졌습니다.사제도 보수를 받을 권한은 있다;아무리 종교가 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한 종교를 구성하고 있는 이들이 이 사회에 발을 디디고 사는 사람들인지라 돈과 아무런 관련도 맺지 않고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제나 수도자 역시 입고 먹고 사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 일로 인해 먹고 살 권리가 있다고 아주 길게 강조하고 있습니다(1고린 9,3-18 참조). 따라서 교회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 특히 사제들이 교회 안에서 활동할 때,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 회사 일을 함으로써 보수를 받듯이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받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종교인과 돈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인 양 생각하려는 것이 무리라고 해야겠지요.가전 제품을 하나 샀습니다. 산 지 얼마 안되어 고장이 나서 애프터 서비스를 청하자 회사에서 직원이 왔습니다. 작은 고장이고, 계약서대로 하면 원래 무료로 해주는 것이지만 쉽게 고쳐 주는 그가 고마워 마실 것과 간단한 다과를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그 직원이 갑자기 돈을 청구했습니다. 출장비에 부속품 값이라나요. 저는 계약서를 내밀면서 이것은 당연히 무료가 아니냐고 항의할 수밖에요. 그 직원이 그래도 고집을 부리며 돈을 요구하여 회사에다 전화해서 알아보고 돈을 주겠다고 하자 그냥 가버리더군요. 한 회사의 직원이 회사를 위해 일한 대가로서 그 회사가 주는 돈을 받는 것을 우리는 정당한 보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회사의 지위를 이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착복이라고 말합니다.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우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 특히 새 차를 사거나 새 집에 들어갈 때 사제에게 차와 집을 축성해 주기를 청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소유한 것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의미와, 자신의 일상 생활을 하느님과 연관시켜 살겠다는 믿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때 강복을 베풀기 위해 온 사제에게 우리는 사례금조로 예물을 드리는데, 이 예물이 강복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예물은 사제에게 드리는 마음의 표시요, 강복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하느님께로부터 은총을 거저 받기 때문에, 그 은총을 신자들에게 거저 베풀 뿐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돈으로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문제는 사제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예물에 있다 하겠습니다. 즉, 예물의 액수가 많을수록 강복도 많아지리라는 오해가 일부 신자들 사이에 있는 것이 문제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대로 강복은 하느님이 베푸시는 것이라 돈과는 상관없고, 강복을 청하는 신자들 마음 자세에 강복의 크기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물론 예물이 강복의 많고 적음과는 관계없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체면 때문에 또는 사제에 대한 존경 때문에 많은 액수의 돈을 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제가 먼저 강복의 대가로 큰 액수의 돈을 요구한다면, 이는 신자들에게 강복을 돈으로 산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또 하느님을 욕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강복 예물은 정성껏 바치는 것이 원칙;강복을 청할 때 사제에게 어느 정도의 예물을 바칠지는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이 있을 것이기에 여기서 얼마라고 딱 짚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본당이나 사제가 일상적 기준을 넘어선 터무니없는 돈을 요구한다면 신자는 당연히 이를 거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물이 정성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이는 예물이 아니요 착취와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을 사장으로 모시는 회사에 근무하는 애프터 서비스 직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할 일은 하느님 회사의 상품인 은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제는 신자들에게 봉사하는 차원에서 축성해 주는 것이지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제에게 드리는 예물 액수는 상식이 통하는 선에서 해야 되겠지요. 악마들이 회의를 하였답니다. 대왕마귀가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교회를 이 세상에서 없앨 수 있을까? 박해를 해도, 이간질시켜 여러 교파로 갈라서게 만들어도 교회는 날로 번창하니 말이다." 모두들 한숨만 쉬며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는데 구석에 앉아 있던 꼬마악마가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어르신네들, 아무 걱정 마세요. 교회가 잘되도록 도와주세요. 박해도 없고, 신도수도 늘게 해주고, 큰 교회도 지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교회에 많은 돈을 주세요. 돈만 주면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저절로 망할거예요." 악마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답니다.
어느 날 늙은 부인 한 분이 성당에 찾아와 신부님께 죽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미사를 드려달라고 돈을 내놓았습니다. 열 번 미사를 드려달라고 청하면서. 열흘 후 부인은 꿈에 남편의 모습이 나타나자 뒤숭숭해서 다시 본당신부님께 갔습니다. 아무래도 남편이 아직 연옥에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상의하자, 신부님은 인자한 미소를 띠며 말했습니다. "미사 열 대를 드린 덕분에 이제 남편의 몸 대부분은 연옥에서 빠져나왔는데, 아직 발 부분이 연옥에 있으므로 미사 다섯 대 더 드리면 됩니다."
중세 때 흔히 있었던 이야기지만, 현재 우리 신자들의 의식 수준은 어떻습니까? 돈은 그 자체로 보아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돈에 대해 절제하지 못할 때 돈은 악마의 도구로 바뀝니다. 교회에서 이러한 돈의 해독은 흔히 미사예물의 형태를 띠고 다가옵니다.
교회는 미사예물로 하느님의 은총을 살 수 없다고 언제나 말해 왔지만, 일반 신자들 사이에 퍼져 있는 미신적인 생각을 제거하는 데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중세 때, 미사예물로 인한 악습은 너무 커서 결국 종교개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미사예물의 남용을 막기 위하여 미사 한 대당 단 하나의 미사예물만 받을 수 있다고 선언하자 일부 신부들은 더 많은 예물을 받기 위하여 하루에도 여러 차례 미사를 드렸고, 교회가 다시 이를 금지하자 "가짜미사"(감사기도문을 빼고 하는 미사), "반복미사"(감사기도문만 한 번 하고 미사의 나머지 부분은 원하는 횟수만큼 반복하는 것), "개인미사"(신부 홀로 드리는 미사)라는 이상한 미사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미사예물을 받기 위한 편법일 뿐이었습니다.죽은 이를 위한 미사 때 바친 돈의 액수에 따라 천국행이냐 아니냐가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천만 원을 미사예물로 내놓았다 해서 공부도 안한 아들이 일류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행운을 파는 장사꾼이 결코 아닙니다. 미사예물은, 그 지향이 어떻든 본래 뜻은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리고, 사제의 생활비와 사목활동을 경제적으로 돕는 것입니다.
미사예물의 정신이 이러할진대, 만일 누군가가 미사예물로 은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꼬마악마의 하수인일 것입니다. 그는 사제를 무당과 동일시하고, 하느님을 우상과 같은 격에 두는 사람입니다.여러분은 미사예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전례 안에서의 침묵의 뜻에 대해 일반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모든 전례의 중심이자 우리 신앙 생활의 정점인 미사에서의 침묵에 대해 살펴보기로 합시다.첫째, 우리 마음을 준비하는 침묵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 있음을 생각하고, 하느님께 대한 열심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잠시 침묵을 지키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미사의 첫 부분인 참회 예절 때 우리의 양심을 성찰하고 죄를 뉘우치며 반성하기 위해서 잠시 침묵을 지킵니다. 그리고 사제가 "기도합시다"라고 신도들을 초대하는 본기도와 영성체 후 기도 때 침묵으로써 사제의 기도에 동참할 준비를 갖추면서 동시에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 바칩니다. 보편 지향 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침묵을 지킴으로써 기도 지향에 동의함을 드러냅니다.둘째, 사제가 드리는 기도를 경청하고 이해하며 동시에 그 기도를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한 침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감사기도 때 우리는 겉으로 지키는 침묵만이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고요함을 유지하면서 사제의 기도 내용에 귀를 기울이며 사제와 함께 기도드립니다.셋째, 묵상을 위한 침묵이 있습니다. 말씀 선포, 성서 봉독 이후 우리는 잠시 동안 침묵 가운데 하느님 말씀을 되새기며, 그것을 자신의 삶 안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이는 하느님 말씀을 이해하고 거기에 동의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난 후의 침묵은 자신의 양심을 말씀에 비추어보고 침묵 가운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사제의 강론 후에도 잠시 침묵시간을 가져 방금 들은 말씀을 나의 것으로 만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기도하기 위한 침묵이 있습니다. 성체를 모시기 전, 영성체 후, 우리는 침묵 가운데 감사기도를 바치기 위해 묵상시간을 가집니다. 특히 성체를 모시고 난 이후 그날 미사 때 들은 하느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침묵 가운데 바치는 것은, 신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은총의 순간이라 할 것입니다. 성체조배 때도 우리는 침묵 가운데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생각하면서 우리 신앙 생활을 되돌아봅니다. 우리의 죄와는 상관없이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바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처럼 미사중에 갖는 침묵의 순간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보화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명심할 것은, 침묵은 전체 전례를 도와주는 것이어야지 전례를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면 나쁩니다. 전례, 그중에서도 미사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이지 묵상회를 하는 시간이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적당한 시간만큼만 침묵시간을 가짐으로써 전례가 아름답게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침묵시간을 가지려 할 때, 혹시 우리 마음은 세상 일로 가득 차게 되지는 않습니까? 전례의 능동적 참여를 촉진하기 위하여 회중의 환호, 응답, 시편 교송, 대경, 성가와 함께 행동과 동작과 몸가짐 등을 올바르게 하도록 유의하여야 한다. 또한 합당한 때에는 거룩한 침묵을 지켜야 한다"(전례헌장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