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시편 30편 1-12절
설교제목 :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봄을 기다리는 땅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사순절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전쟁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파트 같은 건물이 폭격을 당하여 불타는 장면은 전쟁의 잔혹함을 실감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이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날아오는 미사일로 모든 것이 무너져버리는 공포는 말로 담기 힘들 것입니다. 전쟁으로 인한 여파로 세계적으로 원자재 가격 상승하고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습니다. 전쟁의 불씨가 사그러들고, 평화의 시간이 도래하길 기도합니다.
지난 주에 저는 어떤 교회 옥탑방에 새로운 전도사가 와야 하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머무를 곳이 없는데 괜찮느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은퇴를 했기 때문에 흔쾌히 수락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런 저런 것으로 세상사와는 별반 상관없는 꿈인 듯 했습니다. 은퇴한 꿈의 자아는 교회라는 종교적 영역, 하나님의 집에서 있을 곳을 내어주어야 하고, 새로운 전도사는 그곳에서 거처를 두고 일을 시작해야 함을 보여주는 꿈이었습니다. 저에게 잠시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태도는 새롭게 일을 시작하는 젊은 전도사의 모습일 것입니다. 기도도, 예배도, 말씀도 젊고 활력있고 순수한 태도로 다시 시작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곱씹게 되었습니다. 위에서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내적 외적 조건에 신성한 힘을 일으키는 동인이 됨을 진정으로 신뢰하며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시편 30편은 생명을 위협하는 병에서 벗어난 자의 개인의 감사시, 혹은 죽음의 문턱까지 내려갔다가 구원받은 자의 감사시입니다. 그런데 오늘 표제에 보면 “성전 봉헌가(성전 낙성가), 다윗의 시”로 되어 있습니다. ‘성전 봉헌가’란 표제가 적힌 이유는 이 시편이 원래 개인적 감사시였으나, 나중에 안티오크수 4세에게 유린당하고 더럽혀진 성전을 주전 165년에 되찾고 다시 봉헌한 사건을 해마다 기념하는 행사에서 낭송하였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빼앗기고 다시 찾은 것을 마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과 같은 기쁨과 감사를 담아 부른 것입니다. 시인은 3절에서 노래합니다.
“주님, 스올에서 이 몸을 끌어올리셨고, 무덤으로 내려간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3)”
스올, 죽음의 구렁텅이까지 내려갔다고 다시 올라오고 회복된 상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을 때, 빼앗겼던 것을 도로 회복했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음에서 다시 생명을 되찾은 자의 감격이 묻어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폐암 4기 판정을 받은 친구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친구가 검사할 때마다 좋지 않는 소식이 가중되었고, 친구보다도 친구의 아내가 심한 우울과 공황증세까지 보이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표적치료도 불가능하니 우선 생명유지를 위한 항암제를 투여하자고 하여 친구의 아내는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항암주사를 맞기 시작하면서 신기하게도 암 크기가 줄어들고 치료적인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마음이 조금은 위로를 받고 다시 기도할 힘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프면서 밥 한그릇먹고, 잠을 자고 말을 하고 두 다리로 길을 걷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님을 너무 절실히 느낀다고 고백했습니다. 빼앗겨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고백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소한 일상을 잃고 3년의 시간을 보내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상을 빼앗기고 사소한 그 일상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편히 지낼 때
시인에게는 또 다른 깨달음이 있습니다.
“내가 편히 지낼 때에는 ‘이제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겠지’ 하였지만, 아 태산보다 더 든든하게 은총으로 나를 지켜주시던 주님께서 나를 외면하시자마자 나는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6-7)”
모든 것이 잘 굴러가고, 편히 지낼 때는 우리는 자만하기 일쑤입니다. 나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착각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굳건히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은연중에 장담합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편안해지면 내가 가진 토대가 영원할 것처럼 착각에 빠지는데 있습니다. 자아의 힘을 과신하고 제 잘난 맛에 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우리 삶을 지탱하고 있는 진정한 토대와의 관계는 상실될 수 밖에 없습니다. 더 깊이 묵상해보면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것이 어디 있을까요? 바람부는 것이 인생이요,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인생의 엄연한 현실입니다.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삶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스위스에서 공부할 때 스즈끼 순류의 초심Beginner’s Mind에 대하여 잠시 언급했던 내용이 떠오릅니다. 초심의 근본은 열린 마음, 즉 개방성openness입니다. 나를 열어놓지 않는 자는 시작하는 자처럼 살 수 없습니다. 초심은 다른 의미에서 순수하고 편견없는 마음입니다. 이런 태도는 우리를 새로운 시작 앞에 서 있게 합니다. 초심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겠지라는 자만과 착각에 빠지지 않게 할 것입니다.
또한 아 태산보다 더 든든하게 은총으로 나를 지켜주시던 주님께서 나에게서 얼굴을 가리시자 두려움과 근심에 빠졌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고 얼굴을 가리시는 것은 하나님이 더 이상 나와 관계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어떤 상황인지 명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두려움과 근심에 빠지는 상태는 내가 든든하게 서 있지 못한 때입니다. 태산처럼 내 뒤에서 나를 지지해주던 것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얼굴을 가릴 때는 내가 다른 것을 기대고 서 있거나 더 이상 하나님의 은총에 기대어 있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그 두려움과 고통을 오롯이 잠시 견디어야만 하는 순간입니다. 사실 주님이 외면했기 때문에 두려움과 근심에 휩싸였다기보다는 내가 주님을 외면하거나 주님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외면하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불안과 근심이 있는 인생이지만, 주님은 태산같이 든든하게 굳세게 우리를 세우시고, 지켜주심을 마음에 품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침이 오면
그래서 시인은 알아버린 듯 합니다. “주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하니,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5)”
다른 성경번역에 보면,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하지만, 새벽에는 기쁨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어둡고 고통스러운 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눈물과 한숨, 탄식으로 지새야하는 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밤이 깊일수록 곧 새벽이 가까옵니다. 새벽에 기쁨이 오는 것은 새로운 해, 새로운 희망이 우리에게 또다시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긴 한숨이 기쁨으로 바뀌는 것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께서는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갈아입히셨기에(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를 띠우셨나이다(개역개정)”
슬픔이 변하여 춤으로 바뀌었습니다. 베옷은 상복을 의미합니다. 띠를 띠우셨다는 것은 잔칫날 가슴에 두른 허리띠를 두르는 것을 뜻합니다. 상복을 벗기고 기쁨으로 잔치옷을 입게 하십니다. 밤의 시간을 오롯이 견딘 자는 반드시 아침을 맞이합니다. 그러니 눈물나는 어둔 밤도 더 기쁨과 감사로 춤추게 하고, 잔치 옷을 입을 수 있게 하는 선물(?) 같은 시간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심정적으로 밤의 고통 속에 있다면 말장난에 불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밤을 통과한 자만이 새벽의 기쁨을 맞이할 수 있음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시인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꽃봉오리는 아직 피지 않는 방물만 맺혀 있는 꽃입니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
더 열심히 파고들고 /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 꽃봉오리인 것을!
모든 순간은 꽃이 피기 직전의 상태, 꽃봉오리입니다. 그러니 어둠과 고통의 순간, 실패와 오류를 만난 때, 일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순간도 꽃봉오리입니다. 지금 꽃봉오리의 순간을 살고 있음을 기억하고 모든 순간을 열심히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