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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무장투쟁의 군사적 자산으로 계승
맨주먹으로 떨쳐 일어난
의병들의 굳건한 의지 민주화운동 정신과 맞닿아
글 | 홍순권(동아대학교 명예교수)
1909년 가을 호남지역에서 일본군이 벌인 ‘남한대토벌’로 의병세력은 큰 타격을 받았고, 이후 의병세력의 항일무장투쟁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의병들의 항전 의지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구한국군대의 합류와 항전을 통한 전술적 발전 등은 불굴의 항일정신과 더불어 이후 해외 무장투쟁의 중요한 군사적 자산으로 계승되었다. 1910년 8월 한일강제병합을 전후로 많은 의병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하거나 이주했다. 이들은 간도, 연해주를 새로운 항전기지로 삼고 부단히 전력을 확충하면서 일제와의 또 다른 싸움을 준비하였다. 의병들의 항전은 일본군의 국내 ‘토벌’과 한일강제병합으로 중단된 것이 아니라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전쟁으로 연속된 것이다. 즉 구한말의 항일의병은 만주, 연해주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다.
한말 국제정세와 의병항쟁의 유산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감행하고 국토를 유린하였다. 그것은 곧 종전에 개항장을 중심으로 한 국부적인 군대 파견과는 달리 한반도에 대한 상시적이고 전면적인 군사적 지배로 이어졌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는 한편, 한반도에 이른바 ‘한국주차군’을 설치하고 주차사단과 여단 규모의 임시 파견 병력을 중심으로 전국 요지에 수비대를 주둔시켜 의병 진압에 동원하였다. 특히 헤이그 밀사 파견 사건을 구실로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일제는 1907년 7월 하순 본국으로부터 일본 육군 1개 여단 병력 규모의 수비대 병력을 증파하여 군대해산 이후의 사태 변화에 대비했다. 이어서 해산군인과 의병세력이 합세하여 강력한 항쟁(의병전쟁)을 전개하자 일본은 한반도 전역에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벌이며 의병세력을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의병들은 군대해산 이후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많은 희생을 치렀다. 현대식 병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월등한 화력과 치밀한 정보전에 더하여 철도 등을 이용한 빠른 기동력으로 의병에 대한 대량학살을 감행했던 것이다. 일본군의 공세에 대항하여 해산군인들과 의병세력은 유기적 결합으로 전력을 강화하고 대규모 군사적 충돌을 피하는 대신 유격전으로 맞서면서 끝까지 저항하였다. 그러나 1909년 가을 호남지역에서 일본군이 벌인 ‘남한대토벌’로 의병세력은 큰 타격을 받았고 이후 의병세력의 항일무장투쟁은 점차 약화되어가기 시작했다.
1910년대 들어서 황해도 등지에서 의병들의 의미 있는 항쟁이 일시 계속되었으나, 이후 많은 의병세력이 해외로 망명함으로써 국내에서의 의병항쟁은 점차 해외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으로 계승 전환되어갔다. 일본군 또한 ‘주차한국군’을 ‘조선군’으로 명칭을 바꾸고 만주 등지의 해외 독립군의 활동에 눈을 돌려 이들을 진압하는 방향으로 역할을 확대해 나갔다.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운 일본군의 진압작전으로 의병들이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렇다고 의병들의 항전 의지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또 구한국군대의 합류와 항전을 통한 전술적 발전 등은 불굴의 항일정신과 더불어 이후 해외 무장투쟁의 중요한 군사적 자산으로 계승되었다. 국내에서의 의병투쟁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지자 의병전쟁에서 생존한 의병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군 투쟁의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의병의 독립군 전환과 독립전쟁
1910년 8월 한일강제병합을 전후로 많은 의병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하거나 이주하였다. 이들은 간도, 연해주를 새로운 항전기지로 삼고 부단히 전력을 확충하면서 일제와의 또 다른 싸움을 준비하였다. 의병들의 항전은 일본군의 국내 ‘토벌’과 한일강제병합으로 중단된 것이 아니라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전쟁으로 연속된 것이다. 즉 구한말의 항일의병은 만주, 연해주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다. 이처럼 해외로 이주한 의병들의 항전 조직 가운데 을미의병운동 당시 제천의병을 이끌었던 유인석이 연해주에서 국내외 의병세력의 통합을 표방하며 결성한 13도의군은 그 선구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뒤이어 경성(鏡城)의병, 홍범도를 비롯한 관북의 산포수의병 등과 그 외에 무수한 의병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독립군으로 전환하거나 독립군 단체에 가담하였다. 특히 1919년 3·1운동 직후에 서북간도 각지에 편성된 크고 작은 독립군 조직의 성원 가운데 상당수는 국내에서 망명한 의병들이었다. 대한독립군의 홍범도와 대한의군부의 이범윤, 대한독립단의 박장호 등은 그중에서도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이들뿐 아니라 독립군의 간부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의 핵심 인물 다수가 의병 출신이었다. 1920년 청산리대첩 직후 독립군 장정시 단일군단으로 편성된 대한독립군단의 총사령이었던 구한국군 시위대부교 출신 김규식은 일찍이 철원, 연천 등 경기 북부지역에서 해산군인들을 규합하여 항일의병 투쟁을 벌였었다.
한일강제병합 직후인 1910년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는 중국의 신해혁명,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러시아 혁명 등 국제정세의 변화에 조응하여 항일독립운동세력 사이에 독립전쟁론이 점차 고양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독립전쟁론은 한말 계몽운동과 의병항쟁의 이념과 노선이 통합하면서 발전한 항일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독립군의 항전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3·1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 각 지방에 흩어져 있던 항일단체와 독립군 조직은 각기 조직을 정비하면서 일제에 대한 항전을 개시하였다. 전열을 정비한 독립군은 그해 여름부터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20년에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에 크게 승리하여 한국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전적을 기록하였다.
독립군 단체들의 구성원들은 구한국군 출신을 비롯하여 한말에 교육 문화 활동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힘을 쏟았던 계몽운동 세력도 있었고, 한일강제병합 후 망명해온 청년 학생과 애국지사, 그리고 해외 이주민들 가운데에서 모집한 성원 등 다양한 세력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는 의병이 주축이 된 독립군 무장조직이 많았다.
대표적인 독립군 단체들 가운데는 북간도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봉오동 승첩과 청산리 대첩으로 유명세를 떨친 대한독립군과 북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국민회, 국무도독부, 대한광복단, 대한의용군, 대한의민단 등이 있었다. 서간도 지방에는 서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독립단, 대한청년단연합회 의용대·광복군총영·광한단 등이 있었다.
의민단은 3·1운동 직후 의병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군단으로 국민회의 국민군과도 연합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부대는 홍범도 부대와 합류,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였다. 물론 홍범도의 연합부대에는 신민단과 같이 3·1운동 직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군 부대도 있었다. 또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일시 통합하여 봉오동전투에 참여했던 대한국민군의 사령관 안무(安武)는 대한제국 군대 진위대 장교 출신으로 군대 해산 이후 경성(鏡城) 함일학교, 무산의 보성학교에서 근무하다가 강제병합 후 간도로 망명해 교육운동에 종사했던 인물이다.
만주지역의 독립군들은 1920년 겨울 일본군의 보복 공세로 경신참변을 겪은 이후 노령으로 넘어갔다가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을 거친 후 다시 만주로 되돌아왔다. 이후에도 독립군들은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고 일제와의 항전을 계속했다. 이들의 투쟁은 1938년 조선혁명군이 해체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들의 독립정신과 항전 경험은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1935년 전후 만주지역의 동북항일연군, 중국 관내의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의 활동으로도 이어졌다.
의병정신과 독립전쟁, 역사적 교훈
이처럼 일제의 침략으로 시작된 우리 민족의 항전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부터 시작되어 의병항쟁, 독립군의 독립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지속되었다. 특히 한말 해산군대와 의병의 결합을 바탕으로 한 대일항전은 만주 연해주의 독립군에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의 항전으로까지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 침략의 양상에 따라, 또 그때그때의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응해가면서 침략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투쟁은 일제의 패망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그 밑바탕에는 한말 의병들의 강인한 항일독립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이 전개된 이래 의병-독립군-광복군으로 이어진 항일 독립정신의 핵심은 다시는 어떤 침략자에게도 유린되지 않는 강력한 무장력을 바탕으로 한 자주적인 민족국가의 건설이라 하겠다. 특히 풍전등화의 민족적 위기 속에서 정규군이 아닌 민군으로서 ‘패배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맨주먹으로 떨쳐 일어난 의병들의 항일애국정신과 굳건한 의지는 해방 이후 한국사회가 성취해낸 민주화운동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그 하나는 의병의 자주성에 깃들인 공동체 정신이며, 또 다른 하나는 불의에 맞서 정의를 수호하려는 의거정신이다.
흔히 1960년 4월 혁명을 4·19의거라고도 하듯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의지는 저 멀리 불의한 침략세력에 저항하여 온 몸을 던진 한말 의병세력의 저항의지에서 비롯된 정신적 유산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이른바 일본제국주의 파시즘 침략세력이 부르짖던 ‘국가주의’와는 결이 다른 것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오늘날의 시대정신과도 서로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필자 홍순권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부산경남사학회 회장,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회장,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동아대학교 명예교수이자, 국가보훈처 산하 독립유공자공적심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1994), 『근대도시와 지방권력』(2010), 『전쟁과 국가폭력』(2012, 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