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가 투자자를 찾는다
자본주의는 근대 과학 발흥뿐 아니라 유럽 제국주의의 등장에도 결정적인 역할를 했다.
애초에 자본주의의 신용시스템을 만들어낸 것도 유럽 제국주의였다.
물론 신용은 근대 유럽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다.
신용은 거의 모든 농경사회에서도 존재했고,
또한 근대 초기 유럽 자본주의의 등장은 아시아의 경제 발전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18세기 후반 이전까지 세계 최대의 경제적 실세는 아시아였다는 점도 기억하자,
이것은 곧 유럽인들이 보유한 자본이 중국인, 무슬림, 인도인 보다 훨씬 더 적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중국 , 인도 무슬림 세계의 사회정치 체제에서 신용이 수행한 역할은 부차적이었다.
이스탄불, 이스파한, 델리와 베이징의 상인들 은행가들은 자본주의자처럼 생각했을지 몰라도,
궁전과 성채애 있는 왕과 장군들은 상인과 상업적 사고방식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근대 초기의 비유럽 제국들을 세운 것은
누르하치, 나디르 샤 같은 우대한 한 정복자들,
혹은 청과 오토만 제국의 경우처럼 관료 엘리트와 군사 엘리트였다.
이들은 세금이나 약탈(둘 사이에 엄밀한 구분은 없었다)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지,
신용체계의 도움을 받지는 않았다.
은행가나 투자자의 이자에 대해서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반면에 유럽에서는 왕과 장군들이 점차 상인의 사고방식을 따르기 시작했고,
결국 상인과 은행가가 지배 엘리트가 되었다.
유럽의 세계 정복 자금은 세금보다는 신용대부로 조달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났다.
자본가들이 일을 지휘하는 경우도 점점 많아졌다.
이들의 주된 야망는 투자를 통해 최대의 수익을 올리는 것이었다.
프록코트와 실크 헤트를 입은 은행가와 상인이 세운 제국은
금실로 된 옷과 반짝이는 갑옷을 두른 왕과 귀족이 세운 제국을 무찔렀다.
상인들의 제국은 정복에 필요한 자금을 훨씬 더 영리하게 조달했다.
세금을 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투자를 하라고 하면 모두가 기거이 한다.
1484년 크리스터퍼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왕을 찾아가,
동아시아를 향한 새 무역로를 개척할 테니 선단을 구성할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제안한다.
그런 탐사는 위험이 크고 비용이 많이 드는 사업이었다.
배를 건조하고 보급품을 사고 선원과 군인 들의 급여를 주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투자가 수익을 낸다는 보장도 없었다. 포르투갈 왕은 거절했다.
하지만 오늘날 사업의 첫걸음을 내딛는 사람들처럼, 콜럼버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다른 잠재적 투자자들에게 설명했다.
그의 설명회는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을 거쳐 포르투갈로 되돌아왔다.
그는 번번히 거절당했다.
이번에 그는 새로 통일된 스페인의 통치자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에게 운을 시험해보았다.
그는 숙달딘 로비스트들을 고용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이사벨라 여왕을 설득하는 데 송공했다
그리고 모든 어린이가 학교에서 베은 것처럼 이사벨라는 대박을 터뜨렀다.
콜럼버스의 발견으로 스페인 인들은 아메리카를 정복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금광과 은광을 개발했으며 사탕수수와 담배를 재배할 대형 농장을 건설하여
스페인의 왕, 은행가, 상인을 상상도 하지 못한 만큼 부자가 되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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