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 15:10-20)
아침 부터 조금은 지저분한 이야기를 하게 되어서 유감입니다만 방귀에 대해서 이야기를 잠시 해 보고자 합니다. 방귀에 대해서 생각하면 누구나 그것은 지저분 하다거나 그 생각을 하면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인상이 밝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따져보면 누구나 방귀를 뀝니다. 그렇게 인상 쓰는 그 사람도 방귀를 끼지요. 남자이건 여자이건, 어른이건 아이이건, 양반, 상놈, 대통령, 미스코리아, 자기애인등등 누구 할 것 없이 방귀를 뀐다고 합니다. 하루에 박카스 세병(2백75cc)정도의 방귀를 은밀히 또는 드러내놓고 뀐다고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중등부실 안에 누군가가 방귀를 끼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무슨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설이 너지? 아니면 부장선생님?
식생활이 건전치 못한 사람이나 환자들의 경우 배출량이 급격히 증가해서 심지어 박카스 30병 (2천7백50cc)이상 방출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치사량, 다시말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정도의 양은 아니라 해도 주변 사람을 일시에 실어증(말을 하지 못하는 증상)이나 무력증, 호흡곤란에 빠뜨릴 수 있다고 합니다.
기압골의 변화와 관계있는 대표적인 것은 바람이지요. 이것은 영어로 wind입니다. 바람은 세기에 따라 미풍에서 태풍까지 12개 등급으로 나뉜다. 그런데 방귀가 영어로 wind라는 사실과 방귀뀌다라는 표현은 ‘바람을 가른다’는 의미의 ‘break wind’라는 것입니다. 그 영향이 작지만 그러나 이것 또한 엄연한 기압골, 쌍바위골의 영향인 것입니다.
방귀에 대한 어떤 실험이 있었습니다. 미항공우주국(NASA)에서 연구한 결과가 있는데 우주선 안에서 방귀를 잘못끼면 우주선이 폭발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제시대, 우리 젊은이들이 전쟁터에 끌려갔었지요. 그들은 일과후에 고독과 향수를 달래기 위해 장난을 하다가 누군가가 방귀가 탄다는 사실을 발견을 하고는 많은 사람들이 그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기회를 잘 포착을 해서 뒷문 주위에 성냥 불을 갖다대면 그것이 타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워낙 강했기 때문에 뒷문 주위에 화상을 입기도 했는데 이런것이 일본놈에게 이용이 되어서 당시 연료개발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일본이 징용자들에게 고구마를 먹이고 생체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방구 함부로 뀌지 마세요. 또 뀐다. 누가?
본문말씀은 15장의 한부분입니다. 15장 앞부분의 내용을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그렇게 따집니다. 당신들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유전이라는 말은 전통, 이것은 지켜야 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되고 하는 그런것이라고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오경으로 주신 율법이외에 구전으로 입으로 전해져 오는 생활규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떡 먹을때에 손을 씻지 아니했나봅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왜 손을 씻지 아니하느냐고? 따집니다. 이게 지금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우습지요. 이런것 가지고 논쟁할 것까지 있나? 그러나 사실 당시의 기존 습관으로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왜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너희는 사람을 가르칠때 누구든지 아버지 어머니에게 해드릴 것을 ‘하나님에게 바쳤다’고 말만하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섬기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다. 그것은 바른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해서 바리새인들을 꾸짖습니다. ‘이 외식하는 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라고 꾸짖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본문의 앞에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선상에서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시작하는 말씀이 다음과 같이 되어있습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Listen and understand'(듣고 이해하라)라고 되어있습니다. 말씀을 그냥 듣지 마시고 그것을 들으면서 깨닫기 바랍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때 보면 맛있는 것, 깨끗한 것 그리고 몸에 좋은것만 골라서 먹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즈음 보면 좀 다른 것 같아요. 몸에 좋다고 하면 특히 남자 같은 경우에는 정력제니 뭐니 해서 무엇이든지 다 잡아먹지요. 개, 곰발바닥, 개구리, 구더기, 달팽이. 뱀.
만약에 파리, 모기가 정력제라고 하면 그것도 아마 잡아 먹을 겁니다. 하여간에 많이 잡아 먹습니다.
어쨌든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했는데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는 욕이 있지요. 야, 이 xxㄴㅕ ㄴ아. 야, 이 개 자제분아. 등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트림이 있습니다. 어른들 그러지요. 밥다 드시고는 야, 참 잘먹었다. 꺼어억.
또 침이 있지요.
그리고 금방 맜있게 먹은 것을 괜히 앞으로 쏫아 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vomit. 자취생에게는 이런 오버이트를 할때 그런 철칙 내지는 삶의 Know-how가 있습니다. 자취생이 오바이트를 할때는 꼭 스타킹 하나를 준비해서 입에 바쳐서 해야 합니다. 다 끝내고 나서는 물은 꼭 짜서 빠지게 하고 건더기는 다시... 등등이 있을 것입니다.
더럽지요. 이만큼 더럽습니다.
이 말씀 즉,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을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렇게 말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 말씀을 듣고 마음이 편치를 못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분이 나빠졌다는 이야기 이지요. 그것을 들은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십니다. 심은것 중에 하나님이 심으시지 않으면 뽑힐 것이니 신경쓰지 말고 그냥 내비 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소경으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이었습니다.
이말이 끝나자 베드로는 그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합니다. 이 중에 이 비유를 이해 하지 못하는 사람 있습니까?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이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씁니까? 베드로 보다 났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 하십니다.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말을 들었을때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기야 같은 물을 마셔도 뱀이 마시면 그것이 독이 되고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는 것입니다.
흔히 그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은 다 보는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속어로 그렇게 말합니다. 눈에 뭐 덮어씌었나? 바리새인은 눈에 무엇인가가 덮어씌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의가 그들의 눈을 덮어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지 말아야 되고 저것은 해야 되고 그런것들에 얽매어서 자유함을 얻지 못하는 그런 모습이 율법주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정작 보아야 할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의 렌즈를 통해서 보니까 예수님이 하신 행동이나 말씀이 모두 이상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들과 맞지가 않다는 것이지요.
지금의 시대에 바리새인과 같이 율법주의에 얽매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느냐? 오, 안타깝도다.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느냐? 영어성경으로 보면 더욱 표현이 구체적입니다. Are you still so dull? 너희들 아직까지 그렇게 머리가 둔하냐? 그런뜻입니다. 그러면서 설명을 해주십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가만히 보면 마음에서 나오는데 이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입니다.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 증거, 훼방.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악한생각 - 우리가 악한 마음을 품지 않습니까?
살인 -- 저걸 죽여 말어, 우와 속이 끓는다.
간음 -- 길거리 지나 가다가 멋있는 여자를 보면 속된 말로 ‘우와 죽인다.’
도적질 -
거짓증거 -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거짓 증거를 말하는 것입니다.
훼방 - 중상모략, 비방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을 비방하는 것이지요. 그 사람 앞에가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뒤에서 다른 사람한테 가서 그 사람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제일 치사한 것이지요. 여러분 표현을 빌리자면 ‘치사빤습’니다. ‘얘, 있잖아? 개, 정말 밥맛이다.’ 조잘조잘. 쫑알쫑알 대는 모든 모습들이 그런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것들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지 씻지 않은 손으로 먹었다고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외적 형식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적, 내실을 쌓는것, 이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옷차림으로 또는 그사람의 외모로 행동으로 사람을 판단해 버릴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허름한 옷입은 사람을 보면 왠지 모르게 무시를 하고 그러나 잘차려입은 사람을 보면 예의를 갖추고 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랬다가 제 스스로 많이 반성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동화작가 중에 권 정생 선생님이 계십니다. 개인적으로 좀 알고 지내는 분이십니다. 이분이 ‘몽실언니’를 쓰신 분이십니다. 몇년전에 주말 연속극으로 방송이 되기도 했던 작품입니다. 이 분을 제가 처음 만난 것이 고3때였습니다. 안동 바로 옆에 일직이라고 하는 동네가 있습니다. 그분이 거기서 살고 계셔서 저희 써클에서 초청을 했었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이제 초청 강연회를 준비하는데 한 나이 드신 어른이 들어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검정 고무신을 신으시고 잠바 차림에 보자기로 무엇인가를 싸서는 옆구리에 끼고 들어오는 분이 있었습니다. 영락없이 시골 아저씨 같이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바로 그 작가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그렇게 순수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저가 받은 충격은 미세하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저의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의 삶의 한 구석을 채우고 있는 삶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내적인 것이 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내적인 것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책읽기 바랍니다. 마음의 양식을 쌓기 바랍니다. 외적인 것 오래 가지 못합니다.
저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중등부가 내적으로 성숙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물론 외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지요. 이것은 기본입니다. 자기가 봉사하고 있는 그 어떤 모임이든지 잘되고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요. 그모임이 성장하지 못하면 남모르게 고민하고 그러지요.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외적 성장의 모습이 내적인 것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을때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성장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그런데 지금에 한국교회는 그 성장이 정체되어가고 있다고 안타깝게 모두들 얘기를 합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외적인 성장에만 신경을 쓰다보니까 그 한계에 부딪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나라 또한 외적 성장, 경제개발에 전력하다 보니까 지금에 와서 많은 것들이 터지지 않습니까? 다리도 무너지고 가스도 폭발하고 정치도 엉망이고. 그 원인이 무엇이냐고 하면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찾지 않고 외적으로 더 성장하기를 바랬기 때문이지요.
부모님들 그러지요. 애들 보고 ‘공부하라 공부하라. 너는 나중에 커서 뭐댈려고 그러느냐? ’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고는 자기들은 무슨 개모임이다 또 무어다 해서 막 다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이들이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어서 물으면 그렇게 말씀들 하시지요. ‘얘 우리때는 그런것 배우지도 않았다.’ 부모님들이 스스로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들도 따라서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내적으로 충실한 사람을 보면 무엇인가 달라보입니다. 외적으로 막 나타나는 사람은 그것이 그 사람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를 해보면 아, 이 사람의 내면의 깊이가 너무 얕다는 것을 느끼지요. 그러나 내적으로 충실한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의 마음의 깊이가 너무 깊다는 것을 보고 놀라지요. 그래서 그의 앞에서는 숙연해지게 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외적인 형식적인 것에 사로잡혀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시면서 그 마음의 바름과 순수한 마음을 가지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듣고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아부 애기들을 통해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순수한 마음을 그들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애기들을 보고 있으면 부담이 되지 않지요. 저렇게 맑았으면 나도 저렇게 순수한 마음을 가졌으면, 나이가 든다는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이 무엇일까? 점점 마음이 삭막해져 가고 그 순수한 마음 또한 잃어가는 이 모습. 이건 도대체 무엇일까? 애기들의 초롱한 눈망울 바라보면 별로 다른것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이제 12월입니다. 한 해를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한 해를 반성하며 참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달아서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안타까움의 음성을 듣지 않도록 합시다. 보다 더 중요한 것 그것은 내적인 것입니다. 마음인 것이지요. (연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