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⑧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⑨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⑩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성경에‘용모가 빼어나다’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사람이 있다. 요셉, 다윗, 압살롬이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외모에 반했다. 요셉에게는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보디발의 아내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애를 쓴다. ‘눈가림’이다. 주인의 눈이 없는 곳에서까지 굳이 최선을 다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노예의 삶이다. 요셉은 다르다. 굳이 보디발이나 그의 아내의 눈에 들기 위해 애를 쓰지 않는다. 그들이 보건 안 보건, 요셉의 삶은 다르지 않다. 항상 동일하다. 최선을 다한다.
보디발은 요셉을 충성된 일꾼으로 보았다. 보디발의 아내는 매력적인 남성으로 보였다.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찾아왔던 것처럼, 보디발의 아내를 통하여 유혹이 요셉에게 찾아왔다.
요셉이 노예로 팔리고,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7절은‘그 후’라는 말로 시작한다. 새로운 국면이 시작됐다는 말이다. 보디발의 아내가 언제부터인가 요셉을 남자로 보고 있었다.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보디발의 아내가 계속해서 요셉에게‘눈짓’을 보낸다. 자신의 침실로 부른다.
역사가들은 당시 애굽 여인들은 결혼 유무를 떠나 외간 남성과 자유로운 연애를 할 정도로 매우 개방적이고 음탕했다고 한다. 잘생긴 노예와 즐기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요셉을 성노리갯감으로 본 것이다. ‘눈짓’은 ‘간절함’이라는 의미가 있다. 끊임없이 노골적으로 요셉을 유혹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다. 그녀가 매력적이지 않아서? 그렇지는 않다. 그런 것은 고려대상이 되지 못했다. “⑧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⑨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8~9절)
첫 번째 이유는 보디발이 자신을 신뢰한다는 것이다.자신은 노예에 불과하다. 자신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안다. 하지만 보디발은 자신에게 집안의 모든 권세를 맡겼다. 노예에 불과한 자신을 이렇게까지 믿어준다는 것이 고맙다. 적어도 자신을 믿어준 보디발을 배반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보디발이 제한한 것이 있나 보다. 자신의 아내 이야기이다. 아마도 보디발 자신이 아내의 행실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굳이 요셉에게 언급한 것 같다. 자신의 아내만큼은 범하지 말아달라고.
두 번째 이유, 그렇지만 가장 우선되는 이유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일이기 때문이다.다른 사람은 다 알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다. 다른 사람은 다 보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보고 계시다. 내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께서도 함께 계시다. 감히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벌거벗고 죄를 지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피타고라스의 제자 한 사람이 어느 날 가게에서 신발을 한 켤레 사고 난 후 주인에게 “돈은 내일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런데 다음 날 이 사람이 돈을 들고 찾아갔는데, 주인이 이미 죽어 있었다. 그는 신발을 공짜로 갖게 되었다고 속으로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기쁨은 잠깐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속에 고통이 찾아왔다. 그렇게 좋아보이던 신발이 흉측한 마음의 가시로 느껴졌다. 그래서 결국 그는 돈을 들고, 다른 사람이 주인이 된 그 가게를 찾아가서 말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가 죽었지만, 저에겐 그분이 살아 있었습니다.”
제물포 고등학교 교장이었던 길영희 교장 선생님은 1956년에 무감독 시험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학년 말에 성적이 나왔는데, 10명의 낙제생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전교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10명의 낙제생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우리 학교의 양심이다. 부정 커닝의 유혹 대신에 낙제를 택한 너희들이 우리 학교의 양심이다.” 이 때 그 운동장이 모두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교장 선생님은 그 낙제생들에게 1년 장학금을 주었고, 학생들은 선한 양심의 중요성에 대하여 깨닫고 배우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창 8:21) 사람은 본래 악하다. 창세 때로부터 악했었다. 당연히 지금도 악하다. “㉒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㉓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롬 7:22~23) 예수쟁이의 마음속에는 항상 전쟁이 벌어진다. 하나님의 법과 사람의 법이 서로 싸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할 것이냐, 마귀의 뜻을 행할 것이냐? 하나님의 법을 행할 것이냐, 내 마음의 법을 행할 것이냐?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히 13:18)
아브라함 링컨은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가 청년 시절에 장사를 하였는데, 어느 날 거스름돈을 손님에게 주었다. 그런데 손님이 가고 난 후, 1센트를 덜 준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걸어서 3마일을 가서, 1센트를 돌려주고 다시 돌아왔다.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사람들에게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 “1센트에 내 정직을 팔 수 없다.”
양심은 곧 ‘나’다.1센트, 겨우 10원에 내 양심을 팔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나의 가치는 ‘1센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나의 가치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다. 그만한 값어치를 가지고 오면 나와 바꿀 수 있다. 돈으로 환산해볼까? 1억? 아니면 100억? 아니면 1조? 돈 얼마를 주면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과 바꿀 수 있을까?
요셉은 자신을 1센트에 팔 수 없었다. 요셉은 자신을 보디발의 아내의 관심에 팔 수 없었다. 비록 육신은 은 20에 팔렸지만, 그것이 자신의 가치는 아니다. 백만 원 월급을 받는 사람과 1억 원 월급을 받는 사람 중 누가 더 귀할까? 이런 식으로 계산하자면, 대통령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회사 사장님만 되면 대통령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이 된다. 요셉은 돈에도, 세상 그 무엇에도 자신을 팔지 않았다. 자신은 오직 하나님께만 매인 자이다. 굳이 세상 표현대로 하자면, 나는 하나님 짜리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방법,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사는 방법.세상에서는 당연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말라고 말한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방법이다. 맞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는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사는 삶이다. 피곤하다. 늘 의무감에만 사로잡혀 산다는 것이 말이다. 그렇지만 해야만 하는 일을 아무도 하고 싶지 않는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해야만 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인 인생을 ‘성화된 사람’이라 부른다.누가 전도하고 싶겠는가? 전도하는 사람이 성화된 사람이다. 누가 용서하고 싶겠는가? 용서하는 사람이 성화된 사람이다. 누가 사랑하고 싶겠는가? 누가 이해하고 싶겠는가? 사랑하고, 이해하는 사람, 그가 바로 성화된 사람이다.
9절말씀을 다시 읽어보자.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대하여 붙인 이름이 있다. ‘큰 악’이다.
물론 세상에 큰 죄, 작은 죄가 어디 있겠는가. 다 같이 큰 죄이다.처음에는 작은 죄라 여겼지만, 별 것 아니라고 여겼지만, 누구나 다 하고 사는 모습이라고 여겼지만, 한 번 뿐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큰 죄가 된다. 벗어날 수 없는 올무가 된다. 그것이 죄의 특성이다. 아예 요셉은 죄의 곁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죄는 모두가 동일하다. ‘큰 악’이다.
질문을 해보자. 왜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아들이면 안 될까? 윤리적인 면에서 따져보자. 남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배우자와 관계를 갖는 일은 가슴에 불을 품는 것과 똑같다. 옷이 타고, 내 몸뚱이가 탈 것이다. 그래서 안 된다.
어느 여자가 심각하게 이야기한다. 법을 바꿨으면 좋겠다고. 어떻게 한 사람이 한 사람하고만 평생을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 사람만 평생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하냐고. 내 생각에도 그건 불가능할 것 같다. 어떻게 한 사람이 한 사람만 사랑하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사람의 힘으로는 한 사람이 한 사람만 사랑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요셉이 윤리적인 관점에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요셉에게는 윤리적인 관점보다도 더 중요하고도 우선 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눈”,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참 어리석다. 어떻게 에덴동산을 잃어버리는 실수를 범할 수 있을까? 마귀는 끊임없이 하와를 유혹했다. 끊임없이 유혹을 당할 사람이 세상 어디 있겠는가? 하와가 무너졌고, 결국 아담이 무너졌다. 두 사람이 무너질 때, 에덴동산도 함께 잃어버렸다. 인간관계가 무너지면, 에덴동산도 무너진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 아담은 너무 두려운 나머지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떠나신 적이 있을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으면 안 보일까?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신 적이 있을까? 내가 어두운 곳에 있으면,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날까? 요나처럼, 배 밑창에 들어가 숨으면,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날까?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나라로 도망하면,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날까?
요셉이 죄를 이긴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죄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잘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두 번째,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10절)이다. ‘함께 있지’ 않는 것, 죄를 이기는 방법이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죄를 이기겠는가? 결국 하와도 아담도 무너졌다. 오죽하면 예수님까지 유혹하겠는가? 요셉은 그 자리를 피했다. 요셉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1센트 짜리 인생으로 살지 않는 방법? 오직 하나님 짜리로 사는 방법? 그 자리를 피하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신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