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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화액 전에 불리어 가도다
이사야 57:1~2,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진실한 이들이 거두어 감을 당할지라도 깨닫는 자가 없도다 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도다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 백성들의 불신앙적인 삶을 바라보면서 탄식하면서 하시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하나님 백성다운 영적 지각이 둔하여져서 하나님 백성 공동체가 점점 세속화되어 감으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점점 쌓이고 있는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선인 올바른 길로 걸어가는 자들을 그 악한 시대 속에서 구별하여 다루시고 나머지 악한 자들을 심판하신다고 오늘 본문 말씀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짧은 이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몇 가지 다음 영적 교훈을 마음에 새기도록 합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 자비한 자, 바른 길로 행하는 자를 화액 전에 취하시고 악인들 앞서서 불러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절을 다시 한번 함께 읽겠습니다.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진실한 이들이 거두어 감을 당할지라도 깨닫는 자가 없도다 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들, 진실한 이들을 악한 자들 앞에서 데려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의인 대신에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지켜주셔야 하는데 도리어 악인은 내버려두시고 의인을 데려가십니다. 악인을 죽이셔야 하는데, 의인을 죽음에 이끄십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의롭게 살고 선하게 살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리석게 여기고 그러한 수고가 헛된 수고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까닭은 그 의인을 사랑하시고 아끼셔서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퍼부을 무서운 심판과 재앙들로부터 그들을 건지시고 더 이상 악인들로부터 고생하는 일을 막으시기 위하여 미리 데려가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성경은 그러한 예들이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시대 북 이스라엘 왕국을 일으킨 여로보암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우상 숭배의 범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나라를 둘로 나누시고자 할 때에 북쪽 왕국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걸출한 인물입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대로 열두 지파 중에서 열 지파나 데리고 북쪽 왕국을 다스리는 왕이 됩니다. 그렇게 선지자 아히야로부터 열 지파를 넘겨주실 때에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만약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며 우상을 물리치고 충성스럽게 살면 다윗을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워준 것처럼 그의 가문도 귀하게 세워줄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왕이 되자 그는 곧장 변질되어 절기 때가 되어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 출입을 하게 되면 마음이 바뀌어 다윗 왕조에 충성되고 자기를 버릴 줄로 알고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절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명하였습니다. 레위인들도 다 폐하고 아무도 보리 서말만 주면 제사장이 되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한 배신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그 집을 심판하시고자 했는데, 다만 그 집안에 여로보암의 큰 아들만이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었습니다. 그 아들이 갑자기 죽을 병에 걸려 고생하니, 여로보암이 자기 아내를 변장시켜 자기를 왕위에 오르도록 예언한 실로의 아히야 선지자에게 보내어 아이를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는가 물으려 보냈습니다. 그러자 아히야에게 하나님께서 미리 여로보암의 아내가 변장하고 찾아온다고 알려주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하게 하였습니다.
여로보암의 집은 다 죽고 개에게 먹히며 거름무더기처럼 쓸어버릴 것인데, 오직 그 아이만 평안히 묘실에 들어갈 것인데 이는 그 집안에서 그 아이만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내가 그 예언을 듣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문지방을 넘자 곧 그 아이가 죽었고 그 아이만이 백성들의 통곡 속에서 후히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그러나 그 후 여로보암의 집안은 아들 대에 완전히 다 도륙을 당하여 한 사람도 남김없이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서운 재앙 전에 그 경건한 아들만을 미리 취하여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런 예로 요시야 왕을 들 수 있습니다. 유다 왕국이 죄악 때문에 완전히 파멸될 것이 결정된 마당이었지만 다윗 가문에 요시야라 이름한 왕이 얼마나 경건한 지 우상을 척결하고 성전을 수리하며 하나님만을 사랑하였습니다. 그가 성전을 수리하다가 헌금궤에 있던 구약 성경 중 한 두루마리 책을 발견하니, 신하가 그 성경 두루마리를 읽어주니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찢어져서 울면서 자기 옷을 찢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온 백성들과 함께 그 말씀 앞에서 서약을 하고 나라의 모든 우상을 다 불태우고 이미 망해버린 북 이스라엘 땅까지 우상 잡신을 섬기는 제단들을 다 없애버립니다. 그의 거룩한 열심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되 그 이미 멸망하기로 작정된 나라는 바벨론에 팔아넘겨 심판하지만 그는 그러한 무서운 전쟁의 화마가 그 나라를 뒤덮기 전에 그를 미리 데려가십니다. 그가 므깃도 평원에 나가 애굽 왕 느고를 방어하려다가 화살을 맞아 급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을 인하여 온 백성이 다 통곡하며 전쟁을 즉시 멈추고 돌아와 그를 온 백성이 큰 슬픔 중에 장례를 치루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라가 무서운 전쟁의 화마를 겪기 전에 그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시고 평안히 하늘나라로 올라가 쉬게 하시려 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죽자마자 그 아들들 때부터 늘 전쟁이 시달리더니 그가 죽은 지 23년만에 나라가 바벨론에 완전히 망하여 예루살렘이 불타고 백성들이 처참하게 죽임당하고 끌려가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의인 요시야는 미리 부르심을 받아 평안 중에 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주 옛날 일이지만 노아의 홍수 때에도 그 조상 중에 경건한 신앙의 사람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는 최장수의 삶 969세를 살다 세상을 떠났는데, 연대 계산에 의하면 므두셀라의 손자 노노아가 육백 세가 되었을 때에 온 세상이 홍수로 멸망하였는데, 므두셀라는 그 홍수 직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계산이됩니다. 그가 의인이고 의인의 족보에 나온 신앙의 사람이기에 진노의 홍수 심판 직전에 하나님께 취하여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대로 의인이 세상을 일찍 떠나거나 할지라도 이것은 후대의 패역함을 눈으로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거나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을 그가 악인들과 함께 겪지 않도록 미리 데려가심이라는 점을 기억합시다. 그러므로 의인으로 살고 선인으로 살고 올바른 길로 살다가 일찍 죽은 것은 결코 재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여 그렇게 더 일찍 데려가신 것입니다.
둘째로, 사회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의인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현상들에 대하여 무심하며, 위기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는 매우 위험한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지적하는 바가 무엇이냐면, “의인이 죽었는데, 그 사실을 인하여 마음에 두고 걱정하는 자가 없는 것이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진실한 이’, 원문상 보면 ‘사랑의 사람, 긍휼이 많은 사람’인데, 이 사랑을 많이 행한 선한 사람이 죽었는데도 그것을 인하여 마음 아파하면서 큰 일이라는 영적 깨달음이 없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사회의 큰 손실이요 공동체의 큰 위기를 보여주는 징후들인데, 이것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진정한 의로운 원로들이 죽어가고 선한 일을 힘쓰는 자들이 숨고 의로운 자들이 숨는 것을 보면서 악인들과 세상이 잘 되었다, 이제 우리 세상이다라고 하면서 나라와 사회 전체가 점점 악의 각축장이 되고 부끄러움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은 큰 위기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심을 따라 정치를 하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세상을 떠나고 파당적 정치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이들과 국민을 재물로 삼는 악한 자들이 정치 전면에 나서서 불신과 분열을 부추기는 상황이 지금 민주주의 본고장이라고 자처하는 세계의 선진국들에서 일어나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일어나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그것은 곧 나라가 망하는 징조이기도 합니다. 한 때 페르시아라는 세계 제국과도 맞짱을 떠서 이겨내고 또 나아가 세계 제국 페르시아를 점령하기도 한 옛 민주주의의 본령이던 아테네와 같은 공화정이 쇠패하고 무너진 이유도 다름아니라 양심이 부패한 정치인들에 의하여 민주주의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정치인들은 사라지고 도덕과 인의를 지키던 자들 대신에 소피스트들과 같은 타락한 정치인들이 옛 고대 그리스 정치판에 등장해서 그렇게 고대 그리스의 강성함이 몰락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아무리 한 때 물질적인 풍요를 누렸지만 그 도시에 의인 열 명이 없어서 하나님의 불시의 유황불의 심판을 받아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습니다. 의인 롯이 그곳에 살면서 아무리 경고한다 해도 듣지 않더니 그렇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나타나 유다 왕국의 죄악들을 그렇게 지적하였으나 깨닫는 자들이 없습니다. 악인들이 더 번성하고 의인들은 다 숨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심지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한 바 있습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이르기를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결국 예레미야 시대에 예루살렘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인 한 사람이 없었기에 그 성읍이 다 무너지고 불타고 그 거민들이 다 죽고 끌려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 아무리 성령의 감동으로 그들의 죄를 지적하였으나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를 죽이려 들었더니 결국 그렇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의인이 사라지고 악인들이 활개치는 현상은 그 나라와 사회에 곧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덮쳐올 징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존경받은 원로들이 사회 각처에서 종교계에서나 정치계에서나 경제계에서나 사회 각 분야에서 사라지는데,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지혜롭고 신실하고 의롭고 선한 새로운 세대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무서운 징조입니다. 사회 각 분야에 악인들이 득세하는 것은 그만큼 의인들이 숨고 사라지는 현상입니다. 잠언 28:12 말씀에,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국제 사회나 국내 각분야에서 일어나는 도덕적, 영적 퇴락 현상을 보면서 그 분별력이 없어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롭고 선하고 지혜롭고 경건한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위기감을 느끼고 나라를 위하여 기도 많이 합시다.
에스겔서 22:30,31 말씀에 이르기를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인하여 진노로 심판하시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 간절히 중보 기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자를 하나님은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으로 무장하고 깨어 기도하면서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간청하는 거룩한 중보자들이 됩시다.
셋째로, 악인들은 살고 의인들은 죽고, 의인들은 고난 중에 떨어지고 악인들은 번성하고 평안한 부조리한 상황 속에 누가 진정한 평안과 참된 안전함을 얻은 자인가를 잘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두고 어떤 학자들은 의인들과 진실한 이들과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을 두고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남은 자들을 두고 일컫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악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스스로 평안과 안전함을 도모하여 애굽으로 피신한 자들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끌려간 그들은 고난과 수치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붙들며 끝까지 인내한 자들로서 그들이 비록 고난과 낮아짐을 겪지만 그들이 오히려 진정한 평안과 쉼을 누리는 자들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반면에 육신적으로 애굽으로 도망쳐서 살아가는 자들은 바벨론의 압제는 피하였지만 실상은 믿음을 잃어버리고 세속화되어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로 해석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속화된 세상 속에서 안일한 중에 지내면서 신앙이 밑바닥에 있으면서도 평안하게 생각하는 자들은 사실은 안전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도리어 고난이 많지만 그럴수록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리는 자들이 도리어 고난과 역경 중에 있지만 영적으로는 그들이 부요한 자요 안전한 자인 것입니다.
지금 북한에 남아서 믿음을 지키는 믿음의 형제들 남은 자들은 육신적으로는 얼마나 고달픕니까? 하지만 도리어 그렇게 척박한 중에도 믿음을 지켜나가려고 몸부림치는 그들의 영혼이야말로 부요하며 자유롭고 평안한 자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자들입니다. 반면에 모든 것이 부요한 중에 세상과 어울려서 안일하게 신앙 생활하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도리어 가난하고 위태롭고 세상에 종노릇하는 자요 평안이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으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잘 분별하여 내가 지금 평안의 길로 가는가 아니면 도리어 패망의 길로 가는가를 잘 분별할 줄 아는 영적 지각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는 오늘날 가치 전도의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을 제대로 잘 믿는 길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시험이 모든 신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처럼 의인이 일찍 죽고 의인이 도리어 고난도 많고, 악인들은 번성하고 악인들은 형통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인이 일찍 죽고 진실하고 선한 사람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것은 도리어 그런 이들이 세상이 더 이상 받을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찍 데려가시는 경우입니다. 그 의인의 영혼이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을 악인들과 함께 당하지 않게 하시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세상의 흥망성쇠만 보고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중에도 주님을 더욱 굳건히 붙들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하나님을 더 간절히 붙드는 것이 평안 중에 주님을 잊고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것이 더 안전하고 그것이 우리 영혼이 평안한 일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고난이 더 유익하기도 합니다. 의인으로서 많은 고난이 있는 것이 불신앙과 악한 삶을 살면서 평안하고 형통한 것보다 훨씬 안전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정녕 의인들이 점점 사라지고 악인들이 더 활개치는 현상들을 보면서 위기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의인 한 사람이 없어서 멸망한 예루살렘의 화가 임하지 않도록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우리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세상의 부도덕하고 불신앙적이고 악이 부끄러움 없이 행해지면서도 아무런 위기감이 없는 이 시대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두려움을 가지고 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울면서 기도합시다.
골고다로 올라가시던 예수님께서 자기 뒤에서 울던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보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경고하셨던 주님의 경고가 실제로 30년 후에 예루살렘에 그대로 임하였지 않았습니까가? 그래서 깨어 기도하였던 진실한 기독교 신자와 그 자손들만이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을 기억하며 기도하던 중에 로마군의 포위 직전에 성령의 계시를 받아 “예루살렘을 펠라 성으로 가라”는 인도를 받아 화를 면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악이 창궐하고 깨달음이 무뎌지는 혼탁한 시대 속에 살고 있으니, 우리들은 이런 영적 현실을 잘 분별하여 깨닫는 자가 됩시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악함으로 인하여 망하지 않도록 늘 깨어 하나님이 구하시는 그 한 사람의 의인이 되기를 힘씁시다. 아브라함 때의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인 열 명 중 한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진정으로 평안과 안전함과 침상 중에 편히 쉼을 얻는 자는 세상적인 평안 중에 안일한 자가 아니라 도리어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진실로 간절히 붙들며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처할지라도 믿음으로 주님과 날마다 연합하여 그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참된 의인, 선인들이 다 되어서 이 시대를 살리고 지키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