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K교수는 아내와 2시간 후에 할인점 입구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K교수는 이층에 있는 책방에 들렀다. 신간 코너에 가서 이 책 저 책 들여다 보기도 하고, 여행에 관한 책과 베스트 셀러 진열대를 둘러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수필 코너에 가 보니 다른 서점과는 달리 출판사 별로 책이 꽂혀 있었다. 쭉 살펴보다가 어느 지점에서 보니 앗, <진하게 블랙으로>라는 책이 눈에 띄지 않는가? 단 한 권 남은 책을 꺼내어 보니 출판년도가 1991년으로 찍혀져 있었다. 아마도 절판되기 전 마지막 한권이 몇 년 동안 K교수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표지를 넘기니 미스K의 젊었을 때 사진이 전면에 나타났다. 눈이 아주 총명해 보이고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하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참고: 맨 아래 댓글에 사진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K교수는 흥분된 가슴을 진정시키고 책을 샀다. 나온 지 7년이나 되어서 책의 정가는 3800원이었다.
소설은 6개 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장 제목이 특이했다.
제1장 조금 슬프게
제2장 조금 부드럽게
제3장 조금 화려하게
제4장 더 세게
제5장 조금 가볍게
제6장 다시 처음부터
장 제목에서 K교수는 선정적인 내용을 연상하였다. 집에 돌아온 K교수는 밤새워 책을 통독해 버렸다. 쪽수가 많지도 않은 책이기도 했지만 내용이 매우 재미있었다. 남녀관계가 얽혀 있는 흔한 주제의 통속적인 냄새가 나는 책이었지만, 상당히 구성이 탄탄한 재미있는 장편 소설이었다. 책 이름인 “진하게 블랙으로”는 커피를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추측했었는데, 역시 맞았다. 본문 중에 진하게 블랙으로 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왔다. 소설에 흔히 나오는 남녀관계의 장면 묘사도 노골적이었다. 전체적으로 지루하지 않고 매우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그런데 소설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은 누구일까? 저자 본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 같기도 한데,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천우신조로 K교수가 소설책을 구했던 일요일이 지나고, 화요일에 K교수는 야간수업이 끝나고 미녀식당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마침 식당 안에는 손님이 없었다. K교수는 녹차를 시켜서 같이 마시자고 제안했고 미스K는 스스럼없이 마주 앉게 되었다. K교수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었다. K교수는 사장님이라는 호칭 대신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오늘은 제가 은경씨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 가져 왔습니다.”
“뭔데요?”
“아주 좋아하실 거예요.”
K교수는 책을 내밀었다. 미스K는 책을 받더니 갑자기 눈빛이 달라지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 이걸 어디서 구했어요?”
“책방을 뒤져 샀지요.”
“아니, 이게 절판되었는데. 모두 남 주고 막상 저도 가지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구하셨어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미스K는 표지를 넘겼다. 거기에는 그녀(그 당시 44세)의 7년 전의 사진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감회어린 듯 한참이나 자기 사진을 쳐다 보았다. 그 다음 나타난 간지에는 K교수가 싸인펜으로 굵게 쓴 두 줄 글씨가 있었다. 저자에게/독자드림. 맞는 말이다. 이 책은 독자가 사서 저자에게 선물한 책인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정말 고마운 선물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surprise에요. K교수님! 정말 고마워요!”
“뭘요. 은경씨가 그렇게 기뻐하니 저도 기쁩니다.”
자연스럽게 책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미스K는 한 때 잡지사의 인터뷰 리포터로 일 년 정도 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소설은 미스K가 <마리안느>라는 여성잡지에 연재하던 것을 모아서 책으로 펴낸 것이라고 한다. 소설 속의 여주인공은 자기가 아니고 자기가 꽃꽂이를 배우러 다닐 때에 만난 어떤 여자의 이야기에 살을 붙여서 창작한 것이라고 한다. 상당히 야한 표현이 보이더라고 슬쩍 공격하니, “그 정도로 뭘 그래요”라고 자연스럽게 받아 넘긴다.
수필은 안 쓰느냐고 물어보니 “수필을 쓰기에는 가슴이 너무 뜨겁다”고 의미심장한 대답을 한다. 그리고 자기는 2번째 소설을 내고 싶다고도 말했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은 수필 대신 소설을 써야 제격인가 보다. 구하기 어려운 책을 선물하여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 틈을 타서 K교수는 목요일 날 학교 축제에 구경 한 번 가자고 제안을 했다. 미스K는 “좋아요!”라고 선뜻 승낙을 했다.
(이 연재소설을 쓰기 위하여 저자는 17년 전에 읽었던 그 소설책을 다시 읽어 보려고 지난 4월에 국립중앙도서관을 찾아갔습니다. 서초 경찰서 옆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 그 책이 1권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열람증을 만들어서 그 책을 빌렸는데, 외부로 대출은 안 되고 도서관 안에서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책 표지의 사진을 증거로 올립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67AA13E555218BF10)
첫댓글 와우! 이 뭐꼬님, 대단하십니다. 취재와 창작에 근거 자료까지 매 회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실제와 가상이 뒤섞여 훨 재미있는 듯 합니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은 소설을 쓴다> 이뭐꼬님 처럼 뜨거운 분이 계실라구요. 다음이 기다려지네요.
실제 책까지 등장하니 흥미진진합니다. 짙고 쌉사름한 사랑의 기술을 담은 책까지 낸 미스K가
홍대근처나 청담동에 살면 모를까 실버타운에 산다는 내막도 재미와 궁금증이 더 합니다.
그나저나 60대 노인인지 중닭인지 라비돌에 계신 문제남이 걱정이네요.
지적이고 젊은데다 감성까지 매력적인 대학교수에게 미스K가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라비돌 문제남’이라구요? 누군가요?
누굴 꼭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자에게 통하는 법칙이랍니다.
1번과 2번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고, 3번은 부부싸움 제대로 한 사람만 아는 법칙!
1. 화내면 지는 거다.
2. 삐지면 지는 거다.
3. 집나오면 지는 거다.
부부싸움을 많이 해 봐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집나오는 경우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자발적으로 나오는 경우, 이 경우에는 다시 들어가기가 쉽습니다.
둘째는 부인에게 쫒겨나서 나오는 경우. 이 경우에는 다시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60 넘어서 부인에게 쫓겨나면 신세가 처량하지요.
원래 나이차가 많을 수록 남자의 질투는 불같은 것이고 자칫 병적의심증과 애착이 무섭습니다.
갑자기 애증에 눈먼 노년, 혹은 중닭의 복병이 나타나는 건 아닙니까.
과연 미스K의 사랑의 작대기는 K 교수님에게 향하는 걸까요~ 절로 흥미가 더 합니다.
유리겔라라는 마술사를 다 아시죠? 코 앞에 있던 미녀가 눈 한번 깜빡하니 멀리 한강다리 위에 짜잔~ 나타나
손을 흔들고 있었지요. 마치 리모콘으로 옯겨놓은 듯,,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꿈속에서 미녀와 연재를 읽고 미스K의 배우자로 추정되는 문제남이
'중닭' 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을 한 것을 놓고 요단강 보다도 먼 강건너 어용카페에서
밑도 끝도 없이 난리가 났습니다.
" 어따데고 중닭?!!" 하며 부들부들 치를 떱니다.
이 현상은 뭐죠?? 유리겔라 마술보다 더 신기합니다.
"중닭"이라는 단어가 불경하거나 참을 수없는 치욕이라는 듯 부들부들 떤다고요?
무슨일이지요?
중닭은 표준어가 아니라 국어를 사랑하는 "국사모" 의 반발인가요?
중닭은 국어사전에도 나온 단어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여기서 "중닭 ! " 그랬는데 왜 요단강 보다 먼 강건너 어용카페에서 화가 날까요??
이해가 안되는 현상..허허 궁금합니다.
절판된 책을 그렇게 우연히 구하다니!
글자 그대로 천우신조(天佑神助)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저자인 미스K도 소장하고 있지 못한 책을 K교수로부터 받게 되어 놀라고,
"저자에게 / 독자 드림"이라는 문구를 보고 또 한번 감동받는 광경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릅니다.
K교수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얘기했지만, 뜻이 있는 모든 남자에게 그 길이 열려 있는 것은 아니지요.
아무튼 K교수는 첫 관문을 무사통과도 아닌 환대를 받으며 통과합니다.
게다가 미스K와 학교축제에 함께 가게 되는데 ..... 이 길의 어느 끝까지 가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허구로 꾸민 작품이기는 하나 진짜 사실처럼 다가올 때, 소설의 묘미는 더해집니다.
이 소설에서 미스K는 <진하게 블랙으로>라는 소설을 출판했다고 나오는데, 사진을 보니 같은 제목의 소설책이 실재하는군요.
사진 속의 저 책 표지를 넘기면 소설에서처럼 미스K의 30대 사진이 나올까하여 내 전화기 터치 화면을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넘겨보았습니다.
@단풍나무 단풍나무님의 기대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소설책의 2번째 면에 나오는 미스K의 사진(책 출판 당시 37세)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보관하던 사진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