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말미에 '조국과 그 일가족을 몰아세운 사회'라는 문장이 등장하는데 나는 이같은 필자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박영식 교수를 단죄하는 기독교계의 야만을 지적하는 필자의 논지에 동의하여 이 글을 옮긴다. 글제목은 내가 붙였다.
--------------------------------------------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에 <삼체>라는 게 있단다. 나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그 시리즈 첫장면은 알고 있다. 중국 문화혁명 시기, 과학자 예저타이가 인민재판에 불려 나왔다. 사람들이 묻는다. “예저타이 너 상대성 이론을 가르쳤지?” 묶인 채 무릎 꿇린 예저타이가 대답한다. “상대성 이론은 과학을 가르치는 기본이다.” 그러자 재판을 주도하는 젊은 홍위군이 말한다. “상대성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주장이고 그는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가서 원자폭탄을 만들었다.“ 그리고 묻는다. ”예저타이, 빅뱅이론을 가르쳤지?“ 예저타이가 대답한다. “빅뱅이론이 우주 기원설 중 가장 그럴듯한 이론이야.“ 그러자 홍위군과 함께 온 예저타이의 아내가 대답한다. “웃기지마, 시간의 시작을 가르치는 이론이잖아.“ 홍위군이 재차 묻는다. ”시간의 시작? 시간 이전에는 뭐였는데?“ 그러자 예저타이가 아닌 그의 아내가 선동하듯 대신 대답한다. ”신의 영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홍위군이 흥분한 듯 되묻는다. “그 말은 신이 존재한다는 건가?“ 예저타이는 절규하듯 외친다. ”과학은 무엇으로도 신의 존재 여부를 증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그를 단죄하라는 군중의 외침에 묻히고 그는 허리띠를 빼든 홍위군들에게 그 자리에서 맞아 죽는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사회든 회색지대에 서서 양극단 사이 설명과 대화의 가교 역할을 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그 회색지대가 불안하고 안전하지 못하며 쉬이 예단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포용’이라는 과제를 숙명처럼 여기며 그 자리에 서서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 그들은 반대편 진영으로부터 파견되어 이쪽 진영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개조하려는 목적으로 선 것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이쪽 자기 진영의 단단한 기반에 연결시키고 안개 가득한 회색지대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흐릿한 대화와 불분명한 소통에 참여하며 자기 쪽 진영의 논리를 지키고 분명하게 하며 상대와 그것을 나눌 가능성을 찾는다. 그러다저러다 거기 회색지대서 혼미한 가운데 방황하는 이들을 한사람씩 이편 맑은 곳으로 인도하여 내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그러나 회색지대의 이런 작업은 위험하다. 그곳에 서 있는다는 것은 회색지대의 불분명한 회색 분진을 그대로 뒤집어 쓰는 것을 의미한다. 피아가 구분되지 않을 수 있는 현실이 회색지대 작업자들이 안아야 하는 위험이다.
중요한 것은 회색지대에 들어가 위험한 작업을 벌이는 이들을 이편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다. 사회는 어느 순간 흑백논리를 앞세우는 공작자들의 논리에 쉽게 물들어 버린다. 이편 백색이 아니라면 저편 흑색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시대의 그늘이 발생하는 어느 순간 우리가 사는 사회의 면면을 사로잡는다. 흑백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부지불식 간에 우리 삶의 자리로 들어와 우리에게 어느 한 편에 서라 떼쓰듯 강요한다. 그렇게 우리 앞에 핏대를 세우고 자기 백색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이들이 쏟아내는 침섞인 강변을 듣고 참아낼 때, 그때 우리는 회색지대 사람들이 우리 옆자리로 끌려나와 허무하게 숙청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우리가 흑색인지 백색인지 색깔을 분명하게 하라는 외침을 들으며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어느 순간 우리 옆에서 그 극단적인 주장을 벌이는 이들의 정치 놀음에 희생되고 만다. 일은 순식간에, 아니 우리가 흑백의 논리에 내몰리는 사이 순식간에 벌어지고 치러진다. 우리가 회색지대 작업자들을 눈에 불을 켜고 지켜주어야 하는 이유이다.
요즘 서울신학대학교 박영식 교수가 뒤집어 쓴 회색빛 분진을 두고 그의 정체를 밝히라고 외치는 홍위군들의 외침이 거세다. 박영식 교수가 개신교 복음주의에 앵커를 단단하게 박아두고 스스로 그 회색지대로 들어가 많은 젊은 영혼을 구원의 자리로 인도했음을 교단과 교계에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그러나 지금 박영식 교수를 ‘흑색‘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은 박영식 교수를 인민재판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들은 흑 아니면 백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는 당위를 그들이 선점했다는 듯 당당하다. 그들 앞에서 흑 아니면 백을 말해야 하는 박영식 교수와 같은 사람들은 인민재판정 사방에서 불특정으로 쏟아지는 비판에 대해 하나같은 자세로 성실하게 답변해야 한다. 그들이 침튀기며 몰아세우는 그 단순논리 앞에서 자기가 백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다. 목회자인 나 자신만 해도 그들이 회색지대 논리라고 우기는 창세기 1장의 역사주의적 성경해석을 교회 성경공부 시간에 늘어놓은 적이 있으니 왜 그 해석을 교회 성경공부에서 늘어놓았는지 옹색한 답변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들은 나 같은 한미한 이들이야 찾지 않을 것이지만 말이다. 이미 인민재판정에 선듯한 박영식 교수가 불쌍하다. 어떻게든 그를 그 묶인 자리로부터 구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흘러가다보면 그는 특정의 누군가가 아니라 광장의 인민에게 죽을 수도 있다.
국민일보에 올라온 기사를 보자니 기가 막힌다. 불특정의 극단주의자들은 박영식 한 사람 재판해 죽이고자 부지런하게 여기저기서 움직인다. 그리고 또 하나 박영식 교수에게 판단의 말이 될 화살을 날렸다. 이런 식의 ’말‘들은 박영식 교수가 어떻게 해서든 대답해야 하는 또다른 홍위군의 주장이다. 박영식 교수는 이렇게 문화혁명 홍위군들의 인민재판 질문과 같은 던지기식 비판 앞에 그대로 노출되어 흑과 백 사이 어디선가 본인의 입장을 대답해야 한다.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조국과 그 일가족을 몰아세운 사회인데 박영식 교수도 그렇게 신학자로서 죽음의 자리에 몰리는 것 아닌가 마음이 어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