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8,18-25; 루카 13,18-21
+ 찬미 예수님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요, 첫째, ‘작은’ 씨앗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것이고, 둘째,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 특징이 더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지상의 왕국을 나무에 비유하는 구약성경의 말씀들(에제 17,23; 31,6), 그중에서도 특별히 에제키엘서 17장의 말씀과 연관이 되는데요,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에제 17,22-23)
에제키엘서에는 이어서,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인다”(에제 17,24)는 말씀이 나오는데, 성모님의 노래 중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루카 1,52)라는 구절과 연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여성의 삶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알 수 있습니다. 역시 두 가지 특징을 보이는데, 하나는 작은 누룩이 밀가루를 부풀게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그래서 여러 사람이 먹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밀가루 서 말이면 30킬로그램 정도 되는데요, 이걸로 빵을 만들면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비유하면서 자주 말씀하신 큰 잔치를 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13장에서 등이 굽은 여인을 치유해 주신 후,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다고 분개하는 회당장을 향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 13,1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 말씀이 이어지는데요, 하느님 나라는 이처럼 무시되고 천대받던 여인의 치유에서 드러나듯 그 시작은 겨자씨나 누룩처럼 작지만, 새들이 나무에 깃들이듯 모든 민족이 그 안에 깃들이게 될 만큼 자라나고, 커다란 잔치처럼 기쁨의 나눔이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 나라가 웅장하게 한꺼번에 오리라고 기대하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고,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작게 시작되었지만, 점차 자라나서 거대한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희망으로 구원되었다고 말씀하시며,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로 낙담할 때, 절망할 때 이 말씀이 큰 위로가 됩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겨자씨와 누룩은 작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합니다. 겨자 나무가 커지고 밀가루가 부풀어 오르는 것은 자신의 완성을 뽐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사람들에게 먹히기 위함입니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위대한 일은 충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작은 일들이 함께 모여 이루어진다.(Great things are not done by impulse, but by a series of small things brought together.)”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일, 희망, 자신을 내어줌의 길이 있고, 눈에 보이는 일, 욕심, 자기 과시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길과 바리사이의 길의 차이입니다.
첫댓글 결국,하느님나라는 겨자씨 뿌리는'농부'와 밀가루속에 누룩을 넣는 '주부'가 있어야 겠지요?
나는 그 농부와 그 주부가 될 수 있을까?
고개를 저어봅니다!!
농부와 주부는 예수님이 아니실까요? 우리는 자라기만 하면 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