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136:1-9 여호와께 감사하라
시인은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이 주를 열심히 찬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을 그분으로부터 빼앗는 죄가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각각의 은혜를 언급함에 있어서 시인은 하나님의 자비를 특별히 주목하므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것을 받은 것 뿐이며, 이러한 사실이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필요적절한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1. 본문 1-3절은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입니다.
짧고 급변하는 문장들 속에 계속 나오는 매 구절의 삽입이 헛된 반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합창을 목적으로 이런 구절들은 세속 시인들도 용납되고 찬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와 같은 반복을 반대할 이유가 추호도 없습니다.
그것은 본문 등에서 반복의 이유가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그들의 모든 복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넘치는 자비심은 성경 말씀에 가장 크게 강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충분하고 진지하게 인식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말하면서(롬3:23)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일반적인 용어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행사에 대해 찬양을 받으셔야 하지만 우리가 영광 돌려야만 하는 것은 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 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레위인들이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인도하기 위해 만든 규칙에 따라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노래 부르는 것은 당시에 관습적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 말씀에 나타난 역사를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 관습은 성전 낙성식에서 솔로몬에 의하여 행해졌고(대하7:3-6), 또 같은 역대하 20장 21절에 언급된 엄숙한 승리의 노래 속에서도 여호사밧에 의하여 행해졌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업적을 서술하기 전에 하나님의 최고의 신성과 그의 지배를 선언하는데, 그 비교하는 말이(2,3절) 하나님 외에 그에게 비교되는 어떠한 신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들에게는 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어떠한 부분을 볼 때마다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신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본질을 불경건하게 부분으로 나눕니다.
시편 136 편
심지어 인간들에게는 돌과 나무로 신들의 형상을 만들려는 어리석은 습관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는 신들의 다수성을 즐거워하는 타락된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시인은 명백히 אלדהים (엘로힘) 뿐 아니라 אדונים (아도님)이라는 복수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는 ‘주들의 주들을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시인으로서는 모든 주권의 가장 완전함은 유일하신 한 하나님 속에서만 발견된다는 사실을 강조해서 말하려는 의도입니다.
2. 본문 4-6절은 “(4)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 이로다
(5)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우리의 감탄을 일깨우기 위해 가장 미세한 것에서부터 가장 큰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행사를 이 말 속에 포괄합니다.
하나님의 행사들이 나타내는 상상 못할 큰 하나님의 지혜와 신적인 능력의 현저한 표시가 있음에도 우리는 흔히 사려 없이 그들을 과소평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을 가장 적게 드리게 되면 반드시 무서운 신성모독이 되며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 속에 하나님과 정당하게 비교될 수 있는 신성의 증거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찬양할 가치가 있는 것은 어느 것이나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행해지고 만들어진 것으로 선언합니다.
다음으로 시인은 “하늘을 지으신” 솜씨에 특별히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면서 하늘이 장식된 것을 확실히 식별할 수 있는 놀라운 증거를 주고 있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우리가 물 위의 텅 비고 마른 표면에 땅을 펴신 하나님의 위대하고 기억할 만한 일에 대해 타당한 평가를 하도록 땅에 대해 말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구면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기에 물들은 만일 그들의 한계를 지키지 않는다면 자연적으로 지구를 덮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의 거주지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 알맞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은 자신이 그들의 원리와 금언의 하나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지구의 널리 확장된 표면과 물로 덮이지 않은 텅 빈 공간이 하나님의 큰 기사의 하나로 여겨져 온 것은 정당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덕택입니다.
하나님이 물들을 적당한 자리에 배치한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무한한 선하심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136 편
3. 본문 7-9절은 “(7)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입니다
모세는 해와 달을 두 큰 빛이라고 불렀습니다.
시인이 이 구절에서 같은 표현을 빌어온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곧이어 “별들”이라고 부언한 것은 말하자면 남의 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별들이 달보다 더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의 보이는 결과에 따라 달은 두 번째로 진술되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천문학을 가르치려 한 것은 아닙니다.
가장 단순하고 무식한 사람들에게 흔한 사실을 가르침에 있어서 시인은 모세와 다른 예언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던 쉬운 언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아무도 모호하다는 구실 속에 자기 자신을 감추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가끔 사람들이 심오하고 난해한 어떤 것이 그들 앞에 나타났을 때 쉽게 포기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체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달보다도 훨씬 큰 토성이라 할지라도 지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에 우리의 눈에는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께서는 비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려워서 알 수 없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린애같이 쉽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해와 달을 제각기 지정하사 하나는 낮을 지배하고 다른 하나는 밤을 주관하도록 했다고 부언한 곳에서도 우리는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씀에 의해 우리는 그들이 무슨 통치를 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세상을 관리하시는 힘이 이런 배치 속에 대단히 명백해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낮을 통해 땅에 빛을 비춰주는 태양과 밤을 주관하는 달과 별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경외를 가져온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시편 136 편
시136:10-16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여 주신데 대한 감사입니다.
1. 본문 10-12절은 “(10)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1)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2)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입니다.
혹자는 ‘장자와 함께 애굽인을 치신 이’ 로 읽지만, 애굽의 장자만 치셨다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우리가 이 구절로 설교하려는게 아니고, 또 다른 곳에서 취급되어 온 것 외에는 아무것도 언급돼 있지 않기에 여기서 신자들로 많은 말로 얽매이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애굽인들이 그들의 장자가 죽음을 당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무섭게 했던 혹독한 재난 속에서도 완강한 고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그들이 마지막 재난에 굴복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시할 필요 있습니다.
시인은 애굽에서 순서적으로 행해졌던 모든 이적들을 다시 셀 의도가 없었기에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애굽으로부터 인도해 주셨다는 한 마디 말로 그 전체를 종합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면에서 억압을 당하고 있었기에 그들이 도망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펴신 팔” 이라는 말은 타당합니다.
우리는 어떤 큰 노력이 요구될 때 팔을 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구원함에 특별한 능력을 내뻗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본문 13-16절은 “(13)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4)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5)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 로다 (16)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입니다.
우리는 이미 סוף (쑤프)라는 단어에 대해 말했고(시106:7) 주저없이 그것이 홍해를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시인은 복수를 사용해 ‘갈라짐들’(divisions) 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136 편
그래서 이 구절이 몇몇 유대 저술가들로 하여금 바다가 한군데 갈라졌다기보다 여러 통행로가 생겼다는 것을 추측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경박한 행동의 일예입니다.
또한 그들이 전혀 헛된 상상으로 성경 말씀을 타락시키는 방법의 일례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어리석은 것들을 비웃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 동시에 우리는 그들을 몹시 혐오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랍비 학자들이 마귀에 의해 성경말씀을 불신임하는 교활한 방법에 인도되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명백히 물들이 양편 위로 쌓였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사이의 공간은 하나였고 나뉘어져 있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이 아니라 무리를 지어 나갔기에 그 길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자유롭게 그들의 가족들이 가축들과 함께 지나갈 수 있도록 넓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동안 계속 갈라져 있어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갈라짐들’(divisions) 으로 언급한 것은 매우 타당합니다.
그들은 넓고 마른 수로를 보았고 나란히 무리를 지어 전진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하나님의 큰 인자하심을 나타내 줍니다.
하나님의 큰 자비가 나타나는 또 다른 상황은 바로가 얼마 후에 홍해에 빠져 죽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러한 매우 다른 결과는 어떤 이들은 아주 무사히 지나가는데 반해 어떤 이는 망해 버리고 만 것이 단순하게 자연적인 어떠한 감추어진 원인에 의해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이와 같은 뚜렷한 차별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비를 명백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라는 표현 속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생존을 위한 모든 수단이 결여되어 있는 혹독한 사십년의 광야생활 속에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계속되는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기사 이적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여기에 서술된 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해주셨던 대로 모세에 의해 언급된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의 여러 가지 증거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로 먹이셨고 바위로부터 물이 솟아나오도록 하셨으며, 태양의 열기를 구름으로 막아 그들을 보호하셨으며,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로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으며 그들의 의복을 전적으로 책임지셨고 천막에 사는 그들의 유랑생활 동안 그들과 자녀들을 보호하셨습니다.
이외에도 신자들에게 생각나는 다른 수없는 하나님의 자비의 예증들이 있을 것입니다.
시편 136 편
시136:17-26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인도하신 사실과 그밖에 하나님의 모든 섭리로 인한 감사입니다.
1. 본문 17-22절은 “(17)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8)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9)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0)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1)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2)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 다” 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여 가나안에 인도하신 사실로 인한 감사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인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특수 은총을 진술합니다.
이 은혜는 죄악 세상에서 누구나 받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택한 백성만이 받습니다. 이 택자들에게 베푸신 것이야말로 특별하게 구별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에 참여한 자들은 뜨거운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복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여 주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구속(救贖) 하신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구속의 사랑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인간은 참된 사랑을 맛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일4:8-11).
그러므로 하나님의 속성에서 발원된 이 사랑은 하나님과 같이 영원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보편하신 사랑은 모든 인류에게도 나타나 있습니다(25,26, 마5:45).
그 사랑은 물론 일반 은총에 속한 것이니, 곧 ‘의식주’ 를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혜로서 ‘의식주’ 를 만들어서 사는 줄 압니다.
2. 본문 23-26절은 “(23) 우리를 비천한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4)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 편
(25)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6)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 앞에 나오는 여섯 구절을 아무 주해 없이 넘어 갔습니다.
그리고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다른 구절도 매우 짧게 취급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시편 기자가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에게 보여주어 왔던 각 시대에 나타난 같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계속된 구원의 행위로 그의 백성을 돕는데 실패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나라가 편안한 상태에서 나라의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게 국가를 보존하는 것보다도 그 나라가 재난으로 거의 망하게 될 때에 곧 개입하셔서 그 나라를 살리시는 것이 더욱 더 주목할 만한 하나님의 자비의 증거입니다.
항상 위급한 때 백성들에게 주의를 일깨우고 주목을 끌게 하는 어떤 것이 있었습니다.
더우기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여 부르신 백성에게 허락한 모든 구원에 있어서 늘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가 수반되었습니다.
마지막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아버지와 같은 돌보심은 모든 인류뿐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생물에게까지 확장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 가축들과 들판의 나귀들, 까마귀들, 그리고 참새들까지도 돌보시는데 하물며 그의 백성에게 친절함과 돌보시는 아버지로 나타나시는 것은 우리가 놀랄 아무 이유도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인간들은 야생적인 동물보다는 훨씬 나은 존재입니다.
인간들 가운데에서도 어떤 인간들과 다른 인간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공로에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특권을 고려해 볼 때 그러합니다.
하여튼 시인은 작은 것에서부터 점점 큰 것까지 추리해 나가며 논합니다.
또 시인은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보여준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자비를 높입니다.
시137:1-4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전체 교회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욕되게 하는 원수들의 온갖 조롱을 한탄하며 이와 함께 사로잡힌 바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소망으로 용기를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1. 1절은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입니다.
이미 다른 구절에 관한 설명에서 여기서처럼 하나님의 백성에게 장차 그들에게 닥쳐올 포로생활에 관해 예언자적인 어조로 말하는 사람이 다윗일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미래의 사건을 이야기할 때는 사뭇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법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역사적으로 있었던 경험적인 사건입니다.
시편 기자가 의도하는 바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합시다.
유대인들이 그러한 슬픈 상태 속에 버림을 받았을 때 그들의 믿음과 종교를 모두 잃어버릴 위험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만일 사악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섞여서 살 때, 아주 쉽게 미신과 악한 풍습에 빠진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유대인들이 바벨론 사람들 속에서 점점 불경건하고 세속화되어 간다는 것은 두려워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아마도 그들의 포로상태, 그들이 복종해야 했던 잔악한 속박, 그리고 그들이 참고 견뎌야만 했던 모욕들 때문에 낙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이 글을 쓴 시편 기자는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애가의 형식을 빌어 한숨과 기도 속에서 그들의 고통을 표현함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자포자기했던 구원에 대한 희망을 보존시키려 했습니다.
시편 기자가 염두에 둔 또 다른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신앙적인 나라에서 점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게 되는 것과 이방인들과의 접촉으로 불경건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경고하려는 것입니다.
시편 137 편
따라서 시편 기자는 에돔의 자손들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선언하며 바벨론에 대해서는 이 나라가 일시적인 번역을 누리도록 예정되어 있었기에 당시 다른 국가들을 잠식해 들어갔으나 결국 동정의 대상이요, 멸망이 임박했다고 선포합니다.
포로생활이 지속된 긴 시간은 그들에게 나약한 마음을 격려해 주고 힘을 북돋워주는 것이 얼마나 유용하고 필요한 것이었던지를 잘 말해 줍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의 기간을 통하여 놀라운 심적인 용기와 인내를 부여받지 못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이방인의 타락된 관습을 쉽게 따라 갔을 것입니다.
그들이 “앉아서” 라고 언급될 때 이것은 그들이 고향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매장되고 파묻혀 있는 것과 같은 계속되는 포로기간을 나타냅니다.
히브리어 שם (샴 ; 거기) 이라는 장소를 지시하는 부사는 강조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신자 앞에 주어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 물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즐거움이 그들의 낙심한 마음을 조금은 위로해 준다 할지라도 우리는 주의 백성이 거기에 거주하는 한 계속적으로 눈물을 흘리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גם (감)이라는 불변화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바벨론의 사치생활을 통하여 그들의 고향 땅을 잊어버리도록 유혹 당했을 리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기 위하여 강조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이를테면 그들이 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징벌을 인식하지 못할 만큼 완전히 재난에 압도되지 않았다는 점과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완고하게 싸울 정도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합니다.
눈물이란 슬픔의 표현일 뿐 아니라 회개와 겸손의 표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기억했던 것이 시온이었다는 사실로부터 더욱더 명백히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들이 못 잊어 했던 것이 고향에서 즐기던 어떤 세상적인 종류의 이득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예배였다는 점을 입증합니다.
하나님은 시온산 위에 지성소를 마치 깃발처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볼 때마다, 그들로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는 지역이 아무리 좋고 비옥하며 허약한 마음을 부패시킬 수 있는 매력으로 가득하다 하더라도 그 지역에 오랫동안 억류되어 있었기에 눈물이 잠시동안은 마르기도 했으나 결코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참여했던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드릴 수 없었고 자기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된 땅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감정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시편 137 편
2. 본문 2절은 “그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전에서 즐겨 들으셨던 찬송들이 끊어진 것을 개탄합니다.
레위인들이 찬송하는 일을 맡았으며, 이 예배 행위에서 백성들을 지도했었습니다.
그들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수금을 어떻게 가져왔는지 물을 수 있는데, 우리는 시인이 말한 하나의 증거에서 그들의 믿음과 열렬한 경건심을 볼 수 있습니다.
레위인들은 그들의 모든 재산을 빼앗겼을 때에 적어도 그들의 수금들을 귀한 세간의 일부로서 보존하였으며, 기회가 허락 되는대로 이전처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예배용 유품들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으며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그것들을 보전하는데 큰 관심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버드나무는 시원하게 하려고 버드나무를 심었던 강변의 쾌적함을 뜻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늘이 아무리 유쾌해도 그들의 슬픔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그런 평범한 위로나 신선함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 슬픔을 몰아낼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나무 그늘이 많은 강변에 앉아 있을 때, 여기서 수금을 뜯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며 노래로서 그들의 슬픔을 달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그들의 마음이 여호와의 진노에 대한 생각으로 너무 심하게 상하여 그러한 위로의 한가한 출처로 자신을 기만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시인은 더 나아가서 선하고 거룩한 종류의 희락이 당시 중단되었으리라고 추측합니다.
그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것이 옳거나 바른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공적으로 찬양하는 것이 그들이 올 때까지 연기되었다 해서 우리가 결단코 크게 놀랄 필요가 없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징벌에 의해 애통과 애곡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3절은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 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 다” 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인들이 그들을 종속시킨 이 야만적 폭정 아래서 잔인하게 혹사당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가장 심한 곤욕은 그들의 정복자들이 그들을 크게 모욕하였고 조롱하기까지 한 것인데, 사실 그들의 계획은 이 불행한 유랑민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보다 그들의 하나님을 참람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편 137 편
바벨론인들은 그들의 거룩한 노래를 듣고자 하지 않았으며 그들로 하여금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하게 했을 뿐더러 레위인들에게 빈정거리며 말하고 은근히 모욕하기 전에 거룩한 노래를 불렀던 것이 그들의 습관이었는데 지금 침묵하고 있는 것은 웬일이냐는 투였습니다.
마치 그들은 ‘너희가 이전에 찬양했던 너희 하나님은 죽었는가? 혹은 그가 너희 노래를 기뻐한다면, 왜 너희는 찬양하지 않느냐’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하반절은 주석가들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습니다.
혹자는 תוללינו (톨랄레누)를 동사 ילל (얄랄 ; 짖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읽습니다.
그들은 울부짖는 중에 기쁨을 요구하였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기쁨의 중단’ 으로 번역합니다.
혹자는 그것을 동사 הלל (할랄; 광포하다)의 현재 분사로 보고 ‘우리를 향해 광포하며’로 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명사의 어근인 תלינו (탈리누)는 앞 절에서 ‘걸다(중단하다)’는 뜻으로 쓰였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채택한 읽는 법이 가장 간편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4. 본문 4절은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들의 무례한 모욕에 대하여 고상하고 관대한 대답을 여호와의 백성의 입에 두었습니다.
즉 유대 백성들은 그들이 지금 있는 땅이 더럽혀졌으므로 그들의 법적 희생을 삼간 것같이 노래를 삼가 했다는 것입니다.
갈대아인들은 유대인들이 영속적으로 이 유랑의 장소에 매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땅을 “이방” 이라고 불렀을 때 시편 기자는 그것이 잠시동안 그들이 머무를 장소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주된 생각은 갈대아가 하나님의 들을만한 명예로운 가치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의 자녀는 어디서 거하든지 항상 세상에서 나그네요 이방인이지만 가나안 땅은 그들에게 제공된 거룩한 안식의 장소였고, 따라서 시편기자가 그들이 다른 지방에 있을 때 이방인이요 거류민이라고 기술한 것은 적절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항상 돌아갈 채비를 하도록 하려는 것이며, 암암리에 예레미야가 그들이 조국을 잊지 못하도록 하려고 유랑이 계속될 기간을 분명히 말했던 바 그 예언을 실행하려는 것입니다(렘25:11, 29:10).
시편 137 편
그러는 한편 시편 기자는 그들이 변하지 않도록 고무하며 그들이 두려움으로 인해서 바벨론인들과 연합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 했습니다.
교황권 아래 놓여 있는 오늘 우리 시대에 신자들이 그들 주위의 경우에 타협하지 않음으로 당하는 위험이 크지만 성령께서 이 같은 장벽을 사용하사 그들을 죄악된 굴종에서 분리시키신 프랑스인이든 영국인이든 이탈리아인이든 참된 종교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폭정아래 사는 한 그들의 조국도 하나의 이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옛 백성사이에는 구별이 있는데 그 까닭은 당시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한 장소에 국한되었으나 지금은 두세 사람이 만일 모든 우상숭배에서 떨어져 나와 순수하게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마다 그의 성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가 사용하는 언어로 결코 그들 편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송축하는 모든 시도를 삭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편기자는 그들을 격려하여 환난 중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공적인 하나님 예배의 자유를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권고하며 그 문제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는 성전과 제사를 빼앗겼으며 더럽혀진 땅에서 유랑하며 남은 것이라고는 우리의 추방당한 상태를 기억하고 약속된 구원을 기다리며 한탄하고 탄식하는 일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시138:1-5 내가 전심으로
본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셨던 특별한 도움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같은 자비가 베풀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위험이 닥쳐온다 해도 다윗은 흔들림없이 복된 결과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합니다.
다윗의 시
1. 본문 1절은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 주어진 영광을 받았기 때문에 범상한 감사 이상을 하고자 다짐합니다. 범상한 감사란 위선자들이 행하는 경우로서 그것은 단지 빈말로만 하는 비열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입술로만이 아니라 신실한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겠노라고 말합니다. 진실한 마음이란 다른 구절에서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진실되고 한결같은 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명사 אלהים (엘로힘)은 때때로 천사나 제왕들을 뜻하는데, 이 두 가지 뜻이 다 이 구절에 어울립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이 말하고 있는 찬양이란 어떤 공적인 성격의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사들이 좌우에 둘러섬으로서 영화가 충만된 하늘의 무대는 장엄한 집회입니다. 그룹들이 언약궤를 그들의 날개로 덮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소에서 예배를 드리면 천사들이 임재한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말을 장로들의 자리에서 여호와를 찬양할지라(시107:32)는 말처럼 매우 적절하게 왕들에게 적용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지위가 아주 높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왕들은 고귀하고 저명한 사람들이 모인 집회에서도 최고의 존재들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취하는 해석은 전자의 것으로,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소에서 예배를 드리면 천사들이 임재한다는 해석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신자들은 세상을 떠나 천사들과 친교를 즐길 수 있는 하늘나라로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시편 138 편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예배시에 천사들에게 존경을 표하라(고전11:10)고 요구함으로서 어떤 예절과 질서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보이는 방법으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실 때 그룹들을 동원하심으로 이와 같은 모습을 나타내신 바 있습니다.
2. 본문 2절은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 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은 사사로운 감사 이상의 것을 보이고자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율법의 규례에 순응하여 성소에 들어감으로서 타인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였으나 눈을 들어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을 고양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제정된 외부적 상징들에 주목했습니다.
다윗은 그의 찬양 대상으로서 하나님의 자비와 진실을 들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함도 그와 똑같이 찬양을 받을만한 대상이지만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비하심 만큼 우리로 하여금 감사를 돌리도록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선하심을 알게 하여 우리의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합니다.
말씀 없이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가 우리의 영혼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생생하게 인지하거나 맛볼 수 없기 때문에 기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진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살펴본 바와 같이 자비와 진실이 하나라는 사실은 특별히 주목되어야 합니다.
첫 번 순서로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아무리 효력을 발휘한다 해도 우리가 무감각하기 때문에 선하심이 마음을 사로잡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하심이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실하신 분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근거는 그가 자신이 세우신 자유로운 그의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의 자비가 나타나는 것도 그러한 사실에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비로서 멀리 떨어진 자들도 지키시며 친절하게 그들을 향해 말씀하시므로 그들을 자기에게로 가까이 초대하십니다. 혹자는 이 구절의 후반부에서 접속사를 첨가시켜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주께서 주의 이름과 주의 말씀을 모든 만물위에 높였나이다.’ 그런데 학식을 자랑하는 어떤 주석가들은 이 해석을 잘못된 번역이라고 무시해 버리나 그들은 우리가 보기에는 억지 해석인 ‘주께서 주의 이름을 만유 위에 높이셨나이다’를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로서 만족스러운 것은 다윗은 하나님께서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름을 높이시고 신실하게 자신의 약속을 수행하심으로 하난미의 이름이 만유 위에 높임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에 무감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은총을 깨닫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고 자신께서 약속하신 것을 지키심으로 자신의 선하심을 명확하게 하고 증명하신 데 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시편 138 편
3. 본문 3절은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종종 우리의 기도를 앞질러 우리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영향력을 행사하시어 기도를 하도록 촉구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기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발견할수록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신 것이 확실하므로 자신이 위험으로부터 탈출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진 그의 선하심을 보다 똑똑히 발견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후자는 3절의 후반절에 접속사를 넣어 ‘나를 장대케 하시며 나의 영혼을 강하게 하셨나이다’라고 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한 번역이나 이 문장을 ‘당신은 나의 영혼의 힘을 장대케 하셨다, 증대시켰다’라는 번역은 그 의미가 분명하기 때문에 구태여 위의 번역을 취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하튼 연약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다윗의 영혼은 새 힘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혹자는 ‘주님께서는 나를 강대케 하셨나이다. 즉 나를 축복하사 나의 영혼에 힘을 주셨나이다’라는 해석을 취할 수도 있겠습니다.
4. 본문 4-5절은 “여호와여 땅의 열왕이 주께 감사할 것은 저희가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5 저희가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입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경험한 선함이 넓게 알려질 것이요, 이에 대한 기록이 전 세계를 덮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에서 다윗은 왕들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슴을 들었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다윗은 그들이 교회의 일원이 될 준비를 할 정도로 참 종교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던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의도는 자신이 기이한 방식으로 보호를 받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계명에 의해 그를 왕으로 세웠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도처에 알려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비록 열왕들은 하나님의 말슴에 의지함으로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이것이 널리 알려짐으로서 그리고 특출하게도 왕위에 옹위됨으로서 밝히 드러났습니다. 사울이 잔혹하게 혹독하게 박해를 가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근거를 하나님의 이름에 들었음을 선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지나 계약에 그가 왕위에 올랐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사실의 증거로서 이방의 제왕들마저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38 편
시138:6-8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도
박윤선은 이 시편의 시제를 “열왕 중에서 높아지신 주와 주의 은혜를 인하여 감사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은 각 구절을 따라 세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겸손한 자를 특별히 돌아보시고 은혜를 주시는 구주님에 대한 감사입니다(6절)
약4:6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환난 중에 있는 자도 구원하시는 구주님에 대한 감사입니다(7절). 롬5:3, 4에 말하기를 “다만 이 뿐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고후1:4-9). 그 다음은 우리를 필경 완전케 하시는 구주님에 대한 감사입니다(8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어버리시기 위해 지으신 것이 아니므로 필경 우리를 완전케 하십니다. 끝으로 이 시편은 분명히 메시야 예언시로서 메시야의 구원성격을 자세히 말하여 줍니다. 일설(一說)에 시인은 다윗이 자기 자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 약속은 물론 삼하 7:13에 있습니다.
1. 본문 6절은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하감하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입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통치에 찬사를 돌리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안녕은 외면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 사실을 말로는 제법 인정해도 약간의 어려움이 닥치면 공포에 질려 배반해 버리는 불신앙을 드러내며 만약 우리가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다는 견고한 확신을 지니고 있다 해도 그와 같은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 즉 ‘그가 하늘의 보좌에 앉아 세상을 통치하시며’라고 이 구절을 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반대를 이유 있다고 인정합니다. 즉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그가 가난한 자와 지상의 비천한 자들에게 품는 관심을 결코 방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후반절의 내용은 이 점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즉 그는 높이 들리셨지만 멀리서부터도 인지되십니다.
시편 138 편
혹자는 גבה (가바흐)를 대격으로 읽는데, 이것은 이 문맥에 잘 부응하는 낱말들에게 의미를 부여합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가난한 자들과 비천한 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마치 그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들을 보살피시는 반면 하나님은 권세있고 교만한 자들을 가까이서 살피심으로, 즉 그들을 경멸하심으로 그들에게 수치를 안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동사 ידע (야다)를 ‘짓부수다’로 번역하는데 이로서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낮은 자들은 사랑하시는 반면 자신들의 소유에서 영광을 얻고 있는 권세자들은 짓밟으신다는 의미를 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세련된 의미가 다윗의 의도와 일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윗은 전에 그가 언급했던 사실, 즉 하나님은 높임을 받으심에도 그의 보살핌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주목하고 계신다는 동일한 의미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여호와께서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간의 일을 살피신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시113:5). 이 의미는 비록 하나님의 영광이 하늘보다도 높지만 이 거리 때문에 자신의 섭리로 세상을 통치하지 못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높이 들린 영광 중에 계시지만 멀리까지 살펴보시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보살펴야 할 경우에 장소를 변경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악한 조건이 하나님이 우리를 보살피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찬탄을 금치 못하며 하늘보다 높으신 그의 영광의 광대하심을 보는 반면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성적 사랑 안에 우리를 품으시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불신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에서 두가지 사실이 매우 적절하게 다윗에 의해 결합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장엄하심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망각할 정도로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그의 자비의 겸손하심을 생각할 때 그의 위엄에 대한 경외심을 상실해서도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2. 본문 7절은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필요한 경우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살려주심으로 자신의 보호자로 역사하고 계심을 확인하게 될 경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교묘하게 고난을 회피하여 고난의 화살에 맞지 않는 안전한 삶을 희구하며 죽음의 두려움을 참지 못해 아예 그것과 접촉하기조차 피하기 때문에 이 구절은 주목할 만합니다. 위험이 언뜻 나타나기만 해도 이 위급한 상황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희망이 배제되기라도 한 것처럼 즉각적인 두려움을 느낍니다. 참으로 죽음의 한가운데서 생을 주시하며 또한 하나님의 자비를 악으로부터 우리를 면제시켜 주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생의 매순간 죽음 가운데 있는 우리를 살려 주시는 것으로 신뢰하는 것은 믿음의 참된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자녀들로 하여금 시련을 당하게 하사 그들에 대한 자신의 보호가 더욱 두드러지게 하시며 그들의 보호자뿐만 아니라 구원자이심을 보이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신자들은 끊임없이 원수들과 맞부딪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자신은 원수들의 모든 모략으로부터 안전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생에 대한 자신의 희망은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을 그리고 모든 원수들을 박멸하시는 자신의 손을 돕기 위해 펼치셨다는데 두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끊임없는 갈등으로 그의 자녀들을 훈련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의 한 말을 무덤에 두게 함으로서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그들이 편안히 거할 수 있는 자신의 날개 속으로 숨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혹자는 אף (아프)라는 분사를 ‘분도’ 대신에 ‘또한’이라고 번역하며 ‘주께서는 또한 나의 원수들 위로 손을 펼치시며’로 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미를 취했습니다. 우리가 취한 해석은 완전하고도 자연스럽습니다.
시편 138 편
3. 본문 8절은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입니다.
גמר (가마르)라는 동사의 의미가 지니고 있는 애매성은 이 구절의 전 문장을 불명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때때로 이 단어는 ‘보상한다’는 의미를 나타내며 일반적으로는 ‘준다’는 뜻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이 단어가 흔히 자발적인 은혜에 대하여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맥은 또다른 의미를 요구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말이 ‘여호와의 자비는 영원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지으신 것은 버리지 않는다’라는 것에 대한 이유로서 덧붙여질 때 더 나은 의미는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시리라’, 즉 그는 나의 안전을 염려하신다는 사실을 계속 보이실 것이요 그가 시작하신 일을 완전하게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역사에 의하여 한번 구우너을 받은 경험이 있기에 다윗은 수행된 것은 기필코 완성되리라고 결론 짓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불변이시며 자신의 선하심을 변조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험에 직면하여 선한 희망을 견지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의 구원이 근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우리의 눈을 고정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하나님은 어떠한 의무도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하심 때문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관심을 보이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그는 스스로 의무에 속박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영원하기 때문에 다윗은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그에게 허락된 구원은 무제한적이고 항구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천명합니다. 다윗은 여러 이야기를 통하여 거듭 확신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처럼 태만이나 싫증 때문에 불완전하고 미완성된 상태에서 자신의 일을 그만두는 일이 결코 없다고 합니다. 다윗은 바울의 다음 말과 같은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 사람들은 자신이 애당초 어리석게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하나의 일을 포기할 수 있으며 자신들의 일관성없는 태도 때문에 그 일을 변경시키기도 하며 혹은 자신들의 힘에 부치는 일을 하는 경우 무능력 때문에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우 이러한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희망이 완성을 향한 과정 중에 좌절될 것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 편에서 야기되는 죄와 배은망덕만이 하나님의 선하심의 지속적이고 변함없는 취지를 방해할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확신하는 바를 빼앗으시거나 혹은 우리의 손에서 벗어나도록 허락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의 구원을 완성하신다고 선언함으로서 게으름을 촉진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믿음을 강화하고 기도의 실행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함입니다. 신자들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며 자신들의 약함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함을 의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동시에 그들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빌1:6)이라고 기록한 것처럼 확신하며 굳건한 확신을 지니고 하나님의 은총을 신뢰합니다. 이 교의의 이용은 우리가 실망할 때나 우리의 마음이 흔들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구원을 시작하셨으므로 그가 끝까지 이 일을 수행하실 것이라고 상기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례함 때문에 끊임없이 샘솟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계속적인 흐름에 도달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기도해야 마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