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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34
판단은 금물 / 김진철 목사
요즘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스타워즈 에피소드 Ⅰ'이라고 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꽤 오래 전에 만들어져 전세계적으로 대인기를 끌었던 '스타워즈 시리즈'를 잇는 또 하나의 대작입니다. 그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이 영화가 개봉되던 날에 많은 직장인들이 출근까지 포기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각 회사들마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출근할 수 있게 할까를 위해 고심했다고 하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니 '새벽기도회' 시간에 왜 갑자기 영화이야기를 하나 하고 의아해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영화이야기가 아닙니다. 저의 관심은 '에피소드'(episode)에 있습니다. '에피소드'가 무엇입니까? 원래 이 말은 '사이에 끼우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이나 극 등의 중간에 들어가는 삽화를 '에피소드'라고 말합니다. 이 단어가 우리의 생활에서도 종종 쓰입니다. 어떻게 쓰입니까? 그 뜻을 살려서 마치 소설의 삽화처럼 우리의 삶에 매우 인상적이거나 재미있었던 일들, 해프닝 같은 것들을 꼽을 때에 '에피소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의 말씀이 마치 '에피소드'와 같은 사건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크게 세 단락으로 구분됩니다. 이제부터 그 단락별 내용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단락은 본문 1절부터 9절의 말씀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시고 본문 1절부터 3절의 말씀을 먼저 봉독합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일에 내 말을 너희가 청종하여 오늘날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우리는 여기서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 동안 종종 이 사람들을 말씀에서 만나보았습니다. 이 세 지파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들이 요단강 동편, 그러니까 요단강을 육지처럼 건너기 전에 이스라엘이 머물렀던 지역인 모압 평지가 있는 곳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은 지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요단강 서쪽에 땅을 차지한 지파들보다 먼저 모세시대에 이미 자신들의 기업을 분배받은 지파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자신들의 땅을 기업으로 얻었지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나머지 지파들의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 그 동안 요단강 서쪽 땅에 와서 저들과 함께 전쟁에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어제로써 가나안 땅 정복의 대역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는 각 지파별로 감당해야 할 일만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이제 그 동안 자신들과 함께 요단 서편에 들어와 수고하고 땀흘린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들이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의 수고를 치하하며 저들에게 이제는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갈 것을 지시합니다. 또한 여호수아는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들이 앞으로도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섬기며 그 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를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의 말씀이 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
여호수아는 그 동안 수고한 저들에게 마음껏 축복했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저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삶에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고, 날마다 도우시는 은혜를 주셔서 저들의 땅에서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받아 누리며 살기를 축복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참으로 아름답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한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의 모습도 아름답고요, 그들을 위해 마음껏 축복하는 여호수아의 모습 역시 마찬가집니다. 우리들도 한 번 해볼까요? 좌우에 계신 분들을 이 시간 마음껏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이름을 모르시면 지금이라도 통성명을 하시고 그 분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더해주시기를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보세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여기서 첫 번째 기도제목을 드립니다. "주여, 우리에게 서로를 축복해 줄 수 있는 넉넉한 믿음과 넘치는 사랑의 은사를 주시옵소서." 이 기도에 주님께서 반드시 응답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본문 10절로 20절 말씀으로 우리의 관심을 옮깁니다. 이것이 두 번째 단락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던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가 갑자기 무엇인가 일을 벌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단을 쌓았는데 볼 만한 큰 단이었더라"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들이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는 길에 새롭게 벌인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나안 땅의 동서를 구분 짓는 천연적 경계인 요단 강의 언덕 가에 큰 단을 쌓는 일입니다. 이 상황을 놓고 성서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와 맺은 약속을 무사히 완수하고 이제 그리운 기업의 땅으로 돌아가던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는 가나안 땅의 동서를 구분 짓는 이 곳에 이르자 깊은 감회에 젖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자를 뒤로 한 채 이스라엘 군대의 선봉에 서서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정복 전쟁을 치른 지 근 칠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마침내 그 동안 동고 동락했던 동족과 이별하는 순간에 이른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자연히 그 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기념코자 하는 생각이 떠올랐을 것으로 봅니다.
그 결과 큰 단을 요단 강가에 쌓아 올리게 된 것이라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생각입니다. 우리의 생각도 이러한 주장에 동의할 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 소식은 곧 요단 서편에 살고 있는 다른 지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본문 12절 말씀을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큰 일이 났습니다. 동족들 간에 전쟁이 일어나게 생겼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 사건에 관한 이 후의 기록을 더 이상 보지 못했다면 매우 의아해 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도대체 단을 쌓은 것이 무엇이기에 동족들 간에 전쟁까지 일으키려 하는가 라는 의문입니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 우리는 본문 16절부터 18절의 말씀을 봉독해야 합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여호와의 온 회중이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날 여호와를 좇는 데서 떠나서 자기를 위하여 단을 쌓아 여호와를 거역하고자 하느냐 브올의 죄악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재앙이 내렸으나 오늘날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얻지 못하였거늘 그 죄악이 우리에게 부족하여서 오늘날 너희가 돌이켜 여호와를 좇지 않고자 하느냐 너희가 오늘날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그리고 왜 지금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를 향해 전쟁을 하려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17절 말씀에 기록된 '브올의 죄악'이라는 말씀을 유념해서 보세요. 지난 여호수아 19장 강해에서 제가 민수기 25장에 기록된 '바알 브올의 사건'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의 간교한 술수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에게 절하고 그 앞에서 범죄한 일 말입니다.
이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염병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일이 쓰라린 아픔처럼 기억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어떤 우상을 섬긴다고 하는 것이 저들에게는 얼마나 큰 두려움이었는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은 이 일을 기억하고 지금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가 당시의 범죄를 재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범죄의 싹을 뽑아버리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려는 모습을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문제를 삶의 주변문제가 아닌 자신들의 삶의 중심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두 번째 단락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도 기도의 제목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단호한 믿음을 주시고, 우리 역시 신앙의 문제를 주변의 문제가 아닌 삶의 중심의 문제로 인정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이러한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오늘 이 새벽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세 번째 단락입니다. 본문 21절부터 34절 말씀입니다. 이 단락에서 우리는 자신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전쟁에 임박한 상황에 당황했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전쟁이라는 것이 두려움을 주는 일이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같은 동족간에 일어나는 전쟁은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2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자신들의 입장을 보다 분명하게 밝히는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본문 24절부터 27절 말씀입니다. 길지만 함께 봉독합니다.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분의가 없느니라 하 여 너희 자손이 우리 자손으로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한 단 쌓기를 예비하자 하였노니 이는 번제를 위함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함도 아니라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우리 번제와 우리 다른 제사와 우리 화목제로 섬기는 것을 우리와 너희 사이와 우리의 후대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할 뿐으로서 너희 자손으로 후일에 우리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분의가 없다 못하게 하려 함이로라"
보세요.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자신들이 요단강 언덕 가에 쌓은 단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단은 하나님 아닌 다른 우상을 섬기기 위한 단이 결코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이 단의 목적은 오로지 한 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아홉 지파 반과 두 지파 반이 동서로 나뉘어 살아가게 될 상황을 염려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당대에는 이러한 상황이 하나도 염려할 일이 아닙니다. 함께 근 칠 년동안 가나안 정복 전쟁에 동참했던 사람들 간에는 어느 샌가 끈끈한 정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들 간에 그와 같은 관계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는 이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단강 언덕 가에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큰 단을 쌓아놓고 이것을 동서간의 하나됨의 징표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30절의 말씀을 보면 이러한 두 지파 반의 생각은 상대방에게 좋은 의미로 전달되었습니다. 따라서 일촉즉발의 상황이 진정되었습니다. 동서간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본문 34절 말씀은 이 모든 상황이 종료한 이후의 기록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단을 엣이라 칭하였으니 우리 사이에 이 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
이로써 그 동안 있었던 해프닝이 끝났습니다. 전쟁이 일어날 직전까지 같던 위기의 상황이 마감되자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들은 자신들이 쌓은 단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엣'입니다. 히브리어로 '엣'이란 뜻은 '증인' 또는 '증거'라는 의미입니다. 저들은 이 단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요단강 서편에 있는 지파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증거 하는 단이라는 의미에서 이 이름을 짓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편의 에피소드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말씀제목입니다. '판단은 금물', '판단은 금물'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때로 실패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함부로 상대방을 판단하는 일말입니다. 함부로 어떤 일에 대한 판단을 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사숙고하거나 배려를 하기 전에 이미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생각으로 내려버린 결론을 마치 진리인양 붙들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세요. 우리는 그와 같은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보았습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큰 전쟁이 일어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기억하세요. 판단은 금물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것을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5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보세요. 사도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함부로 판단하는 일을 보류하라고 말씀합니다. 언제까지요? '주님께서 오시기까지 그리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주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판단은 금물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판단하게 되는 사람이나 일이 있거든 기도하세요. 그것이 저와 여러분이 함부로 판단하는 일에 빠지지 않는 길입니다.
여기에 세 번째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주여, 우리로 함부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도리어 우리의 의지로 판단하는 사람이나 일을 위해 더욱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 기도제목이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상이 본문 여호수아 22장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 가지 기도제목을 말씀드렸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서로를 축복해 줄 수 있는 넉넉한 믿음과 넘치는 사랑의 은사를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에게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단호한 믿음을 주시고, 우리 역시 신앙의 문제를 주변의 문제가 아닌 삶의 중심의 문제로 인정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로 함부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도리어 우리의 의지로 판단하는 사람이나 일을 위해 더욱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러한 우리의 기도가 주님께 상달되는 이 새벽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